[서부전선 이상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진지전(陣地戰)으로 피아간에 끝없이 무의미한 살육전을 펼쳤지만, 독일의 전시보고는 언제나 '서부전선 이상 없다!' 독일은 비극의 비극을, 아직 패전하지 않았다는 뜻에서 보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며 스스로 양심의 가시를 꺾으면서 국민의 사기를 꺾지 않는답시고 '서부전선 이상 없다!'고 씩씩하게 선전해서 피 끓는 젊은이들을 무한정 서부전선의 총받이로 내몰았다. 레마르크가 이 기막힌 역설을 소설로 고발하자, 전세계에서 엄청난 반향이 일었다. 발간 즉시 25개국으로 번역되어 300여만 부가 팔렸다.
‘한미동맹 이상 없다!’ 김대중 정부 중반, 김정일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클린턴 대신 거짓과 위선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걸핏하면 한미 양국 정부는 특히 한국 정부는 언론에 보도 지침을 내려 보낸다. --‘한미동맹 이상 없다!’
‘한미동맹 이상 없다!’는 말은 ‘비상사태’란 말이다. 이상이 없으면,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친아들을 보고 시시때때로 ‘너는 내 친아들이다’고 다짐하는 부모가 없듯이 한미동맹이 굳건하면 이 말을 쓸 까닭이 없다. 실지로 한미밀월기간에는 이 말을 쓴 적이 없다.
[우리가 남이가]
한국인은 독특하다. 누가 봐도 뻔히 드러난 거짓도 기기묘묘한 논리를 동원하여 한사코 부인한다. 물증이 산더미같이 쌓여도 뚝 잡아뗀다. 외국인은 이를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한국인도 상식이 있고 경위가 바른 사람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의 김씨 왕조가 하는 말은 하나에서 열까지 거짓이지만, 이 거짓을 기가 막히게 잘 해석하여 무한히 이해해 주고 감싸 주며 느닷없이 이를 뽀드득 갈며 국내의 정적이나 언론으로 또는 바다 건너 미국이나 일본으로 그 화살을 돌리는 정권이 연속해서 들어섰다.
알고 보면 너무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 때문이다. 북한이(김정일 정권이) ‘내 편’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김대중 정권부터. 실은 노태우 정권 때부터 미국을 따돌리고 한민족끼리 평화통일한다며 휴전선을 오갈 때부터 그 싹이 텄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눈을 뻔히 뜨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올가미에 갇혀서 혼자 따돌림당했었다. 아주 노골적으로 ‘우리가 남이가’란 정서가 남북관계의 핵심이 된 것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한국인은 일단 ‘내 편’으로 받아들이면, ‘한 가족’이라 생각하면, 아무리 잘못한 일도 무조건 감싸고돈다. 그래서 생긴 말이,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나!’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김씨 왕조의 독재와 북한주민의 생존권 위협, 인권 말살을 보고 김일성 김정일과 그 하수인들을 생각하면 누구나 치를 떤다. 잠을 못 이룬다. 그러다가 북핵과 북한인권을 둘러싼 북한의 거짓이 하나하나 밝혀질 때마다 친북좌파들이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라고 좋아하지만, 천만에! 제네바협정을 깬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라며 김정일 정권을 적극 두둔한다(정세현). 북핵은 단지 협상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 준다(한겨레, KBS, MBC).
미국은 아무리 우리를 도와 주었네 어쨌네 해 봐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라고 세계제일의 반공국가였던 한국이 이제 어떤 나라 못지않은 반미국가가 되었다. 전세계의 정보가 실시간에 손바닥처럼 공개되는 지구촌 시대에, 스탈린보다 더 무시무시한 김정일의 공포 정치와 모택동 치하보다 더 끔찍한 북한 주민의 기아가 만천하에 드러난 21세기 벽두에, 휴대폰과 인터넷이 가장 발달한 한국이 눈에 뭔가 단단히 씌운 듯이 이제 어떤 나라 못지않은 반미국가가 되었다. 권력이 무섭고 방송이 무섭고 인터넷이 무섭다. 다른 나라면 절대 생기지 않을 이런 기막힌 일이 한국에선 버젓이 일어났다.
왜 그럴까. 그것은 친여 방송과 친북 인터넷 글의 끈질긴 ‘우리가 남이가’라는 호소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남이가’라는 논리 아닌 정서를 받아들이면, 북핵도 얼마든지 이해되고 북한인권유린도 얼마든지 이해되는 민족이 한국인이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는 공포와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주민 2000만을 양산의 도롱뇽 한 마리보다 하찮게 여긴다. --남북은 특수한 관계라나. 물증이 부족하다나. 내부 의견 조정 중이라나.
그러나 ‘네놈과 나는 남남이다’라는 대립각을 마음에 세우면, 사촌 아니 형제도 심지어 부모와도 의절하고 영원히 용서 못할 원수가 되는 민족이 한국인이다.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김영삼마저 김정일보다 훨씬 못한 인간으로 생각한다. 한 하늘을 이지 못할 원수로 생각한다. 김일성 김정일이 잘못한 것이 99개이고 김대중 이전의 역대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이 다 합해서 1개일지라도, 김일성 부자가 잘못한 99개는 1개도 안 보이고 김대중 이전의 한국 역대 대통령이 잘못한 1개는 99개처럼, 아니 999개처럼 보인다. 그 1개마저 소수점으로 무수히 나누어 두고두고 걸고넘어진다.
하물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부시에 이르러서야! ‘양놈들은 어차피 남이다!’
[못 먹어도 고!]
한국인은 파멸을 눈앞에 두고도 눈을 질끈 감고 외친다. ‘못 먹어도 고!’ 그러다가 쫄딱 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국인은 너도나도 억만장자 워렌 부펫을 꿈꾸며 주식에 뛰어들지만 성공하는 개인은 1년, 2년 단위가 아니라 10년, 20년 단위로 보면 1만 명에 1명이 될까 말까 한다. 선무당 주제에 뜬소문을 자기만 아는 고급정보로 확신하고 소신과 똥고집을 구별 못하고 돌진하는 국민성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선 어리석은 자가 지도자가 되면, 그 집단 또는 나라 전체가 망할 때까지 간다. 완장이라도 하나 차면 기세가 얼마나 당당한지, 자기보다 강한 자가 ‘목조르기(head lock)'에 들어가 진짜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여야 항복할 뿐, 아랫것들은 아무리 바른 말 고운 말을 써도 절대 듣지 않는다. 권위에 감히 도전한다고 그런 자는 꼬투리를 잡아 아예 생매장시켜 버린다.
의자왕은 성충(成忠)을 그렇게 감옥에 가두었다가 망국을 자초했다. 암군인 선조와 2세 암군 인조도 그랬다. 충신에겐 한 사발 사약을 내리고 간신에겐 한 수레 가득 금은보화를 하사했다. 그래서 당한 게 임진왜란이요, 병자호란이다.
보나마나, 한국 시간으로 내일 새벽 딱 30분간(통역 빼면 15분--부시가 크게 선심을 써서 약간 길어지겠지만)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이 회담한 후 또 낡은 녹음기를 틀 것이다.
“한미동맹 이상 없다!”
“북핵은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건 남북의 두 정권은 다 헤진 이불 속에서 얼싸안고 고래고래 외칠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못 먹어도 고!”
(2005.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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