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부가 겪은 敵 치하 서울 생활

한 주부가 겪은 敵 치하 서울 생활

평양 의대생 출신 인민군
탈영병을 떠나보내고…
그 19세 학생은 살아서 父母를 만났을까. 살았다면 初老의 나이인데…

金 鍾 淑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피난길에서 마주친 앳된 인민군

해마다 9월이 되면 생각나는 어느 醫大生(의대생)이 있다.
1950년 6월25일, 6개월 된 장남을 업고 서울 명륜동 집을 나와 큰길에 나갔더니 마이크 소리가 크게 들렸다. 『군인은 원대로 복귀하라』고 외쳐 대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트럭이 군인 5~6명을 태우고 급하게 북쪽 戰線(전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게 분명했다. 왠지 마음이 불안하여 친정에 가려던 발길을 돌려 집으로 되돌아 왔다.

대문을 굳게 잠그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들려오는 어수선한 소리가 신경을 쓰게 하였다. 요즈음같이 TV나 라디오가 있던 때도 아니었다. 결국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38선 일대에 괴뢰군이 남침을 감행하여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우리 뒤에는 막강한 미국이 있었고 또 국군이 있어서 우리가 승리하려니 하며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포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그 도가 점점 짙어 가는 듯하였다.

6월27일 새벽에는 포 소리에다 총성까지 들려 왔다. 수상히 여긴 나는 사거리를 나가보았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의정부 쪽에서 길이 메이도록 꽉 찬 피난민들이 밀물같이 밀려들고 있었다. 등에 업고, 지고,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기겁을 하여 급히 집으로 뛰어가 식구들에게 목격한 상황을 알리고, 우리도 피난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남편은 뒤주에서 쌀을 퍼 담아 자전거에 싣고, 시어머님과 시누이, 세 살짜리 딸은 걸리고 나는 등에 젖먹이 아들을 업고 길을 재촉해 창경원 앞으로 나갔다. 떠밀리는 대열에 밀려 종로 쪽으로 가는데, 『펑, 펑』 하는 대포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급기야 바로 옆으로 굉음을 내며 가까워 오는 소리에 뒤돌아 보니 아주 앳돼 보이는 인민군이 탄 괴뢰군 탱크가 우리 곁을 돌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미군이나 국군은 어디로 가고 괴뢰군이 이곳까지 쳐들어 왔단 말인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우리 피난민 일행은 청계천까지 나가 보았다. 이제는 도저히 더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절망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평양 의대생과 함께 온 남편

집에 되돌아와서는 완전히 유폐된 생활을 해야 했다. 두려워서 함부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두려움과 답답한 나날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붉은 군인들이 동리의 빨갱이들을 앞장세우고 우리 집을 습격하였다. 우리 아버님이 6·25 전쟁 발발 3개월 전에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동리 통장을 지내셨다고 우리가 「악질분자」라며 내 남편을 연행해 간 것이다. 시어머님은 자신의 반려자를 여의시고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은 때인 데다 또 둘째 아들을 해군으로 보낸 뒤 전쟁이 터진 터에 큰 아들마저 연행해 간다는 것은 실로 참을 수 없는 엄청난 슬픔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식량 확보 문제였다. 도대체 식량을 살래야 살 수가 없었다.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멀리 시골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들고 가서 물물교환을 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다 들고 가서 식량으로 바꿔다가 연명을 했고 심지어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애지중지하시던 虎皮(호랑이 가죽) 한 장을 겉보리 한 말과 바꾸어 오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겁을 먹고 나갔더니 인민군복을 입은 남편이 어느 젊은 군인 한 사람과 따발총을 메고 붉은 완장을 찬 군인에 둘러싸여 서있지 않겠는가! 반가움과 두려움에 어머님이 우시니까 조용히 하라며 자기들은 이제부터 숨어 살아야 한다고 조용히 말을 하는 것이었다.

같이 온 젊은 군인은 19세 된 평양 의과대학생이었는데 시골 부모들도 모르게 인민군으로 끌려 나와서 낙동강 근처에서 둘이 만나 서로 알게 되고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자기는 이 전쟁이 싫다면서 어디로 피해갔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남편이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해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절대로 이웃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피신처는 마루 밑이었다, 가마니를 깔고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 식사 때가 되면 기어 나와서 밥만 먹고 또 들어가야 했다. 이 일도 견디기 어려워서 다락에도 올라가 기거해야 했다. 피신해 있는 사람도 사람이거니와 집안 식구도 제대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행여나 동리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봐 말도 못하고 지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인민군 후퇴시에 北으로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9월28일이리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해서 인민군이 후퇴를 한다는 뉴스였다. 참으로 지옥에서 들려오는 복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조금만 참으면 살겠구나 하는 희망도 생겼다. 그러는 동안에 2~3일이 지나고, 다시 『펑, 펑』 하는 대포 소리가 들리며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다시 사거리로 뛰쳐나가 보니 인민군이 군데군데 무리지어 후퇴하고 있었다. 당초 서울로 입성할 때와 같은 당당한 위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쫓기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게다가 하늘에는 아군 비행기가 쉴 새 없이 低空(저공)으로 날고 있었다. 적군을 서울 밖으로 몰아 내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 상황을 목격한 나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피신하여 있는 이들에게 알리고 밥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가슴속은 마구 뛰고 있었다. 저 숨겨둔 군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근심스러워서였다. 혹 숨겨 두었다고 하여 후환이라도 있을까 하여서였다.
결국 나는 저녁을 갖다 준 자리에서 『저! 군인학생, 인민군이 지금 마지막으로 후퇴를 하고 있어요. 종로 사거리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암만 생각해도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고향에 돌아갈 기회를 잃을 것이고, 우리도 당신을 숨겨 주었다는 게 알려지면 그냥 넘어가지 못할 테니, 우리 서로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어쩌다가 우리가 이리 되었는지 참 미안해요』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밥 수저를 놓고 잠깐 생각하더니 벌떡 일어나며 『돌아가야겠습니다』하며 빨아 두었던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남편이 따발총을 꺼내오고 배낭에다 자기가 입던 한복 바지저고리를 넣고, 쌀도 넣고, 돈도 주며 악수를 하며 무척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님이 길을 가르쳐 주시느라 골목길을 나가신다.

군인이 깊숙이 절을 하며 『아주머니, 또 만나 뵈러 오겠습니다』 하며 총총 대문을 나갔다. 그리고 저만치 가다가는 다시 뒤돌아보곤 하였다. 19세의 앳된 의과대학생이 이 전쟁이 싫다고 한 그 순진해 보이는 그 학생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살아서 고향 부모님을 만날 수가 있었을까?

여하간 50년이 흘렀다. 그 군인학생은 당시 나이가 19세였는데 살았으면 지금쯤은 64세의 初老가 되었겠지…. 내 나이 스물 여덟인 젊은 시절이었는데 지난날 가슴 쓰리고 아팠던 기억들이 아직도 내 마음을 저미고 있으니….

그런데 아직도 이 전쟁은 끝이 안 나고 있으니 언제 우리는 통일, 평화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 의과대학생을 다시 만나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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