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日 고발장 試案

호 119 조 회 679
이 름 張源埈 날 짜 2000년 8월 24일 목요일

金正日 고발장 試案
김정일 고발장 試案-월간조선 1999년4월호 張源埈 기자

「구제수단이 있음에도 영구집권과 통치의 편의를 위해 북한주민 300만 명을 굶겨죽인 反人類 범죄자」

고 발 장
죄목 : 殺人, 살인 敎唆, 監禁, 特殊 감금, 略取-誘引, 범죄단체 首魁(수괴)
군사비를 줄이거나 집단농장을 해체하거나 金日成 우상화작업을 중단하거나 하면 북한주민
들을 굶어죽는 문제로부터 구출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위해서 고의로 주민들
을 굶겨죽이고 있는 학살자 金正日을 사법처리할 수는 없을까. 金正日 보다 훨씬 약한 범죄
를 저지른 피노체트도 외국에서 체포되는데 이 金正日을 인류의 이름으로 고발하여 언젠가
는 법정에 세우는 일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金正日을 비난과 비판의 대상에서 사법처리
의 대상으로 옭아놓는 논리구성을 고발장 형식으로 시도해 보았다

제1부 왜 고발하는가?

<계기1. 姜哲煥의 토로>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姜哲煥(강철환)」이라는 이름은 그리 눈에 설지 않을 것이다.
아홉 살 때 북한의 政治囚(정치수) 수용소에 끌려가 10년 동안 「목숨을 위해 人間(인간)을
버려야 했던」 그는 1992년 북한을 탈출, 우리나라로 온 脫北者(탈북자)이다. 참담한 북한
수용소 실태의 생생한 증언자인 그는 최근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 외국을 돌며 국제 사회
에 북한 人權(인권)의 慘狀(참상)을 고발해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깔끔한 외모 덕분
인지 지난 2월에는 MBC 「사랑의 스튜디오」 프로그램의 탈북자 총각 특집편에 출연, 유
일하게 「화살표(여성 출연자의 지목)」를 두 개 받으며 그날의 최고 人氣男(인기남)이 되
기도 했다.
기자는 1996년 탈북자 취재 과정에서 姜씨를 처음 만났다. 이후 이런저런 일로 여러 차례
만나면서 혼자 살고 있는 그의 방에 마주 앉아 밤 늦게까지 「酒談(주담)」을 나누는 사이
가 됐고, 나이가 하나 아래인 그와 기자는 요사이 『철환아』, 『원준아』라고 서로를 부른
다.
미국, 프랑스 등에 다녀온 후인 지난 1월, 오랜만에 함께 한 자리에서 그는 정말 진지한 표
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원준아,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이곳(남한) 사람들은 도대체 무
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지? 어떻게 같은 동포라면서 미국, 프랑스, 일본 사람들보다 더 북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 있어? 이곳 운동권 사람들이 한국의 인권, 인권 하는데 북한
생각하면 웃기는 소리야. 거긴 아예 개념도 없어. 수용소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인민들도
그게 사는 거니? 거기는 사람 사는 데가 아니야. 거죽만 사람이지 노예야. 동물이야. 요새는
아예 굶어죽고 있잖아.
식량 돕는 건 좋아. 그건 그거고 가릴 건 가리고 따질 건 따져야지. 그런데 내가 정색을 하
고 「북한에는 人權이 없고 무지막지한 독재만 있다. 이걸 고쳐야 북한 사람들을 구한다」
하는 얘기를 꺼내면 이곳 사람들은 왜 그렇게 지겹다는 표정들을 짓는 거지?』
어떤 이유에서든 북한의 慘狀(참상)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罪惡(죄악)이며, 도대체 통일이
된 후 한국 사람들은 무슨 낯으로 북한 동포들의 항의를 대할 것이냐는 게 그의 이야기였
다.
『그럼 철환이 너는 그런 일들에 대해 누구 누구에게 「책임지라」고 따지고 싶냐』고 묻자
그는 『당연히 김정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黨(당)이나 軍(군), 政(정)의 고위 인사 등 책임
을 분담할 다른 사람도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지난 20여년간 天災地變(천재지변) 정도
를 제외하고는 북한에서 김정일의 意志(의지)나 許可(허가) 없이 결정되고 발생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지 않았느냐는 요지로 반문했다. 그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이곳 사
람」의 일원인 기자는 그의 憤慨(분개)와 質問(질문)에 대해 별로 해줄 말이 없었다.

<계기2. 피노체트의 체포>

지난해 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前(전) 칠레 대통령의 처벌 가능성 여부가 국제적인 화제와
논란이 된 바 있다. 영국 대법원인 上院(상원)이 지난해 11월25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前
(전) 칠레 대통령의 체포가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독재기간 중의 反(반)인륜 범죄로 인해 피노체트가 제3국에서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길에
접어든 것은, 그가 이미 스페인 검찰에 의해 被訴(피소)돼 있는 상태에서 병 치료를 위해 면
책특권이 주어지는 외교관 여권만을 믿고 안심하고 영국을 방문하자, 영국과 1989년부터 범
죄인 인도 조약을 맺고 있던 스페인이 영국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기 때문.
쉽게 말해 피노체트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해 놓은 상태였던 스페인이 1989년부터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고 있는 사이인 영국에게 「貴國(귀국)에 우리가 처벌해야 할 피노체트가 마
침 들어와 있으니 체포해서 우리에게 넘겨달라」는 취지로 요청했고, 영국 상원은 국제법상
면책특권에 대한 논란 끝에 3대 2로 「피노체트가 혐의를 받고 있는 정도의 중대한 反인류
범죄라면 면책특권이 인정될 수 없고 체포가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피노체트의
신병에 얽힌 복잡한 재판 절차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정작 칠레에서 행해진 非(비)인도적 행위를 스페인 등 외국 정부들이 단죄하겠다고 나선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1976년 7월 칠레에서 근무하던 스페인 국적 유엔직원 카르메로 소리
아의 시체가 벼랑에서 추락한 자동차 안에서 발견됐다. 교통사고로 위장된 살인이었다. 교통
경찰을 가장한 보안군이 차를 몰고 가던 그를 세워 모처로 연행, 반정부 단체에 대한 자금
과 정보 제공을 이유로 모진 고문을 가한 후 살해한 것이다.
역시 스페인 출신인 미체예 마르게리테 페나라는 여성도 칠레에서 공학을 연구하며 반체제
지하서클을 돕다가 1975년 6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행방불명됐다. 임신 8개월. 실종 당일 아
파트를 찾은 동료가 발견한 것은 찢어진 옷가지와 매트리스 등 엉망이 된 집안뿐이었다. 보
안군 감방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이후 소식이 끊겼다. 1968년 칠레를 찾은
안토니오 멘괄 신부는 1973년 民選(민선)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전
복된 후 반정부 활동에 가담했다가 이듬해 산티아고 한 감옥에서 실종됐다.
피노체트가 1990년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철권통치 17년간 이처럼 살해, 실종된 국내외인
은 4천명을 웃돌았다. 지난해 말 美(미) 월스트리트저널지는 확인된 피살자만 3천1백97명,
행방불명자는 1천1백2명에 달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고문 등으로 인해 불구 또는 정신이상
이 된 인원은 줄잡아 1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1월 말 영국 최고법원인 상원 재판부에 스페인 검찰이 제출한 32개항 기소 내용에 따
르면, 피노체트는 납치, 살해, 고문, 테러, 성폭행을 총괄한 마누엘 콘트레라스 대령으로부터
일일이 보고를 받았고, 때때로 직접 고문 행위를 지휘하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포의 보
안기구로 악명을 떨친 「디나」는 오직 이들의 명령만 받아 直報(직보) 체제로 운영된 것으
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공개된 美 연방수사국(FBI) 1976년 보고서는 칠레 비밀경찰이 이른바 「콘도르」라는
작전명 아래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정보기관과 공모, 해외 좌파 叛軍(반군)과 지지자들까지
납치·암살했다고 밝히고 있다.
피해자 중엔 칠레와 스페인, 미국뿐 아니라 영국, 독일, 스웨덴, 프랑스, 스위스,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수십개국 국민들이 포함돼 있다. 스페
인이 피노체트측의 국가원수 면책특권 주장을 일축하고, 반드시 단죄하겠다고 벼르는 것은
이같은 배경 때문이다.
프랑스 법조계도 피노체트를 自國(자국) 법정에 세워야 한다며 신병인도 절차를 밟고 있고,
스웨덴의 안나 린드 외무장관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그를 계속 구금해야 한다』며 영국
정부의 관대한 태도를 비난한 바 있다.
영국 상원이 마침 피노체트의 83회 생일이었던 지난해 11월25일 내린 체포 적법 판결은
『前職(전직) 국가 지도자도 재임중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로 제3국에서도 처벌받을 수 있
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계기3. 黃長燁의 증언>

黃長燁(황장엽) 前(전)북한노동당 비서는 영화감독 申相玉(신상옥)씨와 한 月刊朝鮮(월간조
선) 3월호 특별 대담을 통해 대단히 의미 있는 증언을 했다.
申감독이 『지금 생각하면 金正日이 자기가 가진 돈 중에서 1억 달러만 써도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는 것은 막을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의문입니다』라고 말하자 黃 前비
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記者 注:이하 기사에서 「…」로 표시된 부분은 中略을 의미함)
『그것이 金日成과 金正日의 차이입니다. 金日成은 무슨 큰 일이 터지면 놀라고 사고가 나
면 복구 현장에 가족도 데리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金正日은 그렇지 않아요. 金正日은
남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종의 加虐的(가학적)인 성격이 아
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1천만명이 죽어도 좋다. 그러면 관리하기가 더 좋다」는 얘
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 「이렇게 가다간 파멸될 것이 틀림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고
우리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軍費(군비)를 축소해도 되고 아버지 무덤에 드는 천문학적인
돈을 조금만 풀어도 되는데 (金正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인권에서 가장 중요
한 것은 식량 문제입니다. … 북에서는 국가가 생산수단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굶겨 죽인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권문제입니다.… 金正日은 … 모든 권한을
다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부러, 고의로 굶겨죽인다고 봐야 합니다. 수령의 屍身
(시신)이 중요합니까, 인민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자기 아버지 시신 궁전 꾸미는 데 8억9천
만 달러를 썼습니다. 그 돈이면 3년 동안 북한 사람들에게 강냉이를 사서 먹일 수 있습니
다』
결국 북한 당국과 金正日의 실체적 진실에 관한 한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이, 북한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초대형의 餓死(아사)에 대해, 「북한의 체
제 구조상 굶기지 않아야 할 책임과 굶기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金正日이 이를
테면 未必的 故意(미필적 고의)에 의해 그 많은 사람들을 굶어죽이고 있다」는 취지의 해석
과 증언을 한 것이다.
(申감독도 이 대담을 통해 金正日이 『인구가 2천만명이 넘으면 관리하기가 힘들어진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金正日의 형사적 책임>

지금까지 기자는 姜哲煥, 피노체트, 黃長燁 등 독립된 세 사람의 이야기를 「계기」라는 소
제목으로 늘어놓았다. 세 가지 계기를 통해 기자는 이런 느낌을 받았다.
「북한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또 북한에 의해 자행됐던, 그리고 자행되고 있
는 많은 慘狀(참상)과 不條理(부조리)를, 작심하고 刑事犯罪(형사범죄)라는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도 있겠구나. 지금까지는 이걸 단순히 悲劇(비극)이나 非難(비난)의 관점으로만 생각해
왔었는데…. 특히 餓死 사태 같은 것은 관점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는걸. 犯罪라면 당연
히 처벌받을 犯人(범인)이 있을 테고, 지금까지 나와 있는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으로 미루
어 생존 인물 중 그 대상이 金正日 현 국방위원장이라는 건 명백하지…」
이런 맥락에서 「金正日을 고발한다」는 문제제기가 시작됐다. 가릴 건 가려야 한다는 姜哲
煥씨의 토로와 실제로 형사처벌 가능성이 논의되는 피노체트의 사례, 그리고 黃長燁씨의 의
미 있는 증언 등이 합쳐진 결과이다. 惡行(악행)의 정도로 치면야 피노체트를 훨씬 능가하는
金正日을 法의 잣대로 심판해 보자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상 金正日은 너무나 명백한 범죄자이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이 부분은 제외하겠
다. 「국가보안법상…」이라는 韻(운)은 姜哲煥씨가 답답해하던 「이곳 사람들」의 「지겨워
하는 얼굴」을 기자의 뇌리에 떠오르게 했고, 이것이 애당초의 모티브를 희석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된다는 것이 한 이유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이 기사가 법적인 접근방식으로 따지고, 문제 삼고, 환기시키고자 하는 金正日의 형사적 책임은 국가보안법상 한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반국가단체 首魁(수괴)로서의 그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일반적 법감정과 正義感(정의감), 그리고 人類(인류) 공통의 가치관에 입각해 볼 때 용납될 수 없는 反人類(반인류)적 행위를 자행해오고 수백만 북한 주민들의 생존과 생명을 박탈해 온 「일반 刑法的(형법적)」 범죄자로서의 그것에 더 비중이 놓이기 때문이다.
법적 문제제기라는 긴장감을 일정 수준 유지하기 위해 이 기사 일부에는 법리적 접근과 公
訴狀(공소장)의 문체 등을 援用(원용)했다. 하지만 記事(기사)라는 이 글의 특성상 공소장
전체를 한 문장으로 구성한다든지 하는 등의 여러 관례는 무시했고, 약간의 修辭的(수사적)
比喩(비유)도 일부러 가미했다. 이외에도 법리 구성이나 용어 사용 등에서 어색하거나 미흡
한 부분이 많겠지만 이 기사가 法 전문가가 아닌 일개 시민의 입장에서 金正日에 대해 「고
발」이라는 접근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고, 형식적 장치들은 그 접근을 더욱 현실
적이게 만들기 위한 기법으로 동원됐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이 기사는 북한 지역이 대한민국의 영토이고, 북한 주민 역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우리 헌
법 규정을 상정하면서, 일단 金正日의 지배와 영향력 밑에 있는 북한 당국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있어서의 「범죄 단체」로, 金正日을 그 首魁로 간주한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다.
우선 우리의 헌법 체계에서 볼 때 북한 당국을 범죄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그
리고 일단 북한 당국이 범죄단체로 간주되면 개별 범죄행위에 있어서 金正日이 직접 지시했
다는 등의 구체적 연결 고리가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도 首魁로서의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
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지금까지 확보된 여러 자료에서 金正日의 지시 부분 등이 드러난 것은 되도
록 다 기사에 포함시켰다. 요컨대 연결고리가 드러난 것은 당연히 그것을 근거로 金正日의
형사 책임이 있는 것이고, 연결고리가 잘 확인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범죄단체 首魁로서
의 책임을 거는 식이다.
앞으로 나열되는 각 항목별로 「고발장 본문」이라는 제목 하에 고발하는 범죄의 내용을
적었고, 「立證(입증) 및 덧붙이는 말」에서 그 고발 내용의 증거,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는
내용과 상황 설명 등을 담았다.

제2부 고발장

<인적 사항>

피고발인 金正日은,
1942년 2월16일 소련 하바로프스크 동북 80㎞ 지역 아무르 강변의 브야스크 兵營(병영)에서
태어나 (이 부분에 대해 북한 당국은 피고발인이 백두산의 빨치산 통나무집, 조선인민혁명
군 사령부 막사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소련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지
고 있음) 1964년 김일성 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이래,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처 참사실 근무, 1965년 내각수상 참사실 근무, 1966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중앙지도과 담당 책임지도원, 1968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 지도과장, 1969년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거쳐 1973년 9월 당 조직비서 겸 사상비서
등으로 지명되고, 다시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당 정치위원으로 확
정되고, 「공화국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은 후,
같은해 10월 당중앙위원회 5기 9차 전원회의에서 『당 군 정권의 모든 문제를 나에게 집중
시키고 나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 처리, 집행하고 보고하는 일사불란한 지도체계와 무조건
복종하는 조직 규율을 세워야 한다』는 지시를 통해 유일지도체제를 수립하기 시작, 1975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金日成(김일성) 수령의 유일한 계승자」, 「영명한 지도자」,
「친애하는 지도자」의 공식칭호를 결정받는 등 1975년을 전후해 실질적으로 북한 당국의
전권을 장악했으며,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오르고, 1992년 4월
원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장에 오르고, 1994년 7월
당시 북한의 주석이자 당 총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장이었던 金日成이 사망한 이후 1997년
10월 당 총비서로 추대되고, 1998년 9월5일 법 개정으로 권력이 한층 강화돼 북한 당국의
실질적 1인자 자리가 된 국방위원장에 재취임해 현재에 이른 자이다.

<1. 餓死를 통한 殺人>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런 비유적 상황을 상정해보자.
밀폐된, 거대한 체육관이 있고, 이 안에 한 1만명쯤 있다. 이 공간은 「지도자」에 의해 총
체적으로 통제된다. 「지도자」는 자신이 조작하는 공기공급 장치를 통해 숨 쉴 공기가 풍
부하게 공급되니 안심하고 시키는 대로 일만 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 체육관을 빠져 나
갈 수도 없다.
그런데 이 「지도자」의 잘못으로 인해 공기공급 장치가 고장나고 체육관에서는 독가스가
뿜어나오기 시작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부에서 몰아닥친 폭풍우로 환기장치마저 이상
이 생겨 독가스의 농도는 진해지고 사람들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이 체육관에서는 「지도자」만이 외부에서 이들을 살릴 만한 신선한 공기를 사 올 財力(재
력)이 있다. 하지만 「지도자」는 자신의 방을 꾸미는 데에만 신경을 쓸 뿐 공기를 사오지
않는다. 「지도자」는 『한 2~3천명 정도 죽는 게 통제하기 좋다』는 極言(극언)까지 했다.
체육관 외부에서 급한 대로 신선한 공기를 좀 원조해주지만 「지도자」는 친한 부하들에게
만 줄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생긴 초반에 사람들에게 『독가스가 나오니 스스로들 방독면을 준비하라』
는 경고도 안했다. 체육관을 빠져 나가겠다고 사람들이 아우성치지만 「지도자」는 문을 열
어주지도 않는다. 굳게 닫힌 문틈으로 나가려는 사람은 사살하거나 무거운 처벌을 받게 한
다. 결국 갈수록 독가스는 극심해지고 이를 들이마시고 사망하는 사람 숫자가 급기야 1천명
을 넘는다.
자, 이 대규모의 사망은 어떻게 규정돼야 하나? 공기공급 장치의 고장과 폭풍우로 인한 災
難(재난)인가, 「지도자」에 의한 虐殺(학살)인가? 이 항목을 읽으면서 곰곰 이 비유를 반추
해보았으면 한다.

▶고발장 본문

피고발인은 1970년대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특히 피고발인의 父(부) 金日成이 사망한
1994년 7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더욱 현저하게 북한 지역에서의 전반적 정책 결정은
물론 식량 배급을 포함한 일체의 자원 배분과 거주 지역 제한 등 북한 주민의 생활에 대한
총체적 권한을 장악해 왔다.
피고발인은 폐쇄적 대외-경제정책과 중화학공업 우선책, 핵·生化學 무기 개발 등 과도한
군사비 지출, 생산성이 낮은 집단농장 유지, 에너지 자원의 부족, 농업 기술 낙후, 비료·농
약·장비의 공급 부족 등 피고발인이 지휘하고 있는 정책의 원천적 歪曲(왜곡)과 실패를 통
해 북한 지역이 이미 1992년 이래 매년 약 2백만 이상의 만성적인 식량부족 현상을 겪게 했
고, 이에 1995년~1996년에 걸친 두 차례의 홍수와 1997년의 가뭄이 겹치면서 식량부족 현상
이 극도로 악화돼 이미 1994년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광범위한 북한 지역이 엄청
난 수의 북한 주민들에게 飢餓(기아), 혹은 이에 의한 질병 등을 통해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되는, 혹은 이미 대규모로 죽어가고 있는 「餓死의 공간」이 됐다는 사정을 알고 있었다.
또 피고발인은 자신의 私的(사적) 통제 하에 있는 엄청난 규모의 외화 등을 사용해 식량을
외국에서 매입해 이를 주민들에게 배분하거나, 외국에서 지원되는 원조 식량이 광범위하게
분배되도록 한다든지, 혹은 북한 지역 주민들에게 이런 餓死의 위험을 조속히 알려 自力(자
력)으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최소한 죽음 직전에 몰린 주민들이 중국, 러시
아 등으로 긴급 대피하는 것을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등 북한 지역에서 피고발인만이 취할
수 있는, 또 피고발인이라면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을 시행하면 「餓死의 공간」 중
많은 부분을 제거하거나 혹은 북한 지역 주민들을 그로부터 탈출시킬 수 있다는 사정을 알
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발인은 金日成의 시신 궁전을 장식하는 데 수억 달러에 달하는 거금
을 사용하거나, 금수산 기념궁전 앞을 광장과 공원으로 꾸미기 위해 숱한 자재와 勞力(노력)
을 동원하고, 외국에서 지원되는 원조 식량 등도 군과 黨政(당정) 간부들에게만 배급되게 하
는 등 피고발인의 지배 체제 유지를 위해서만 자원을 투입, 배분한 반면, 「1천만명이 죽어
도 좋다. 그러면 관리하기가 더 좋다」는 생각, 또는 피고발인이 북한 지역을 통제하는 기본
수단인 기존의 식량 배급 정치나 國外 이주를 포함한 거주 이전의 엄격한 제한, 黨-軍-政
핵심 계층에 대한 집중적 식량 배급 체계 등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대량 餓死를
막기 위한 일련의 조치 중 어느 것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함경도 양강도 자강도 지역 등을
중심으로, 또 어린이나 노약자 계층 등을 중심으로 1994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2백만~3
백만명의 북한 주민들을 결과적으로 이 「餓死의 공간」에 감금해 살해했다는 것이 고발하
는 범죄 사실이다.

▶立證 및 덧붙이는 말

不作爲와 미필적 故意

요컨대 이 항목은 최근 몇년간 일어난 북한 주민들의 대규모 餓死 사태를 金正日에 의한
「虐殺(학살) 행위」로 판단한다는 취지이다. 법률적으로는 不作爲(부작위), 혹은 나아가 未
必的 故意(미필적 고의)에 의한 殺人 정도의 개념이 되겠다.
「不作爲에 의한 범죄」란 형법상 대체로 「위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
위로 위험 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사람이 그 위험 발생을 방지하지 않았을 경우」를 말하며,
이 경우 그 발생된 결과에 근거해 그 사람은 처벌된다.
이를테면 자신의 過失(과실)로 사무실 내의 숯불이 책상에 인화돼 타고 있는 것을 A가 잠
에서 깨어 발견한 후 뻔히 그 사무실이 불에 다 탈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 장소에서 도망
갔을 경우 A는 단순히 「過失에 의한 失火(실화)」가 아니라 「不作爲에 의한 放火(방화)」
의 책임을 지게 돼 무거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未必的 故意에 의한 범죄」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성립된다. B씨가 인화물질
이 많은 방에 촛불을 켜 놓고 나가면서 「잘못하면 불이 날 수도 있겠네? 에이~ 불이 날 테
면 나든지… 불이 나도 좋아」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불이 났을 경우이다. 물론 「반드시
불을 지르자」고 마음먹고 기름을 뿌린 후 성냥을 그어대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이 경우도
B씨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放火」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돼, 역시 「過失에 의한 失火(실
화)」보다 훨씬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된다.
金正日이 부작위, 혹은 미필적 고의에 의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주장이 어떤 논리와 근거로
제기될 수 있는지는 뒤에서 살피기로 하고 먼저 북한의 참담한 餓死 실태에 대해서 살펴본
다.
통일연구원이 발간한 1999년판 「북한인권백서」 등 각종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몇년째 계속
되고 있는 극심한 식량난에 따라 북한 주민이 기본적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정도는 대단
히 심각하다. 현재 공식 배급체계는 특수공급지역인 평양, 그리고 당료, 고급공무원, 군인 등
특수계층의 생계보장에 그치고 있는 형편이다. 배급체계가 와해되면서 일반 도시 가정의 경
우 전체 식량소비량의 약 70% 정도, 혹은 그 이상을 농민 시장이나 암시장들을 통해 자체
적으로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불법적인 상행위에 몰두하고 있다. 식량난
은 농촌지역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나 도시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특히
곡물이 부족하고 교통수단이 열악한 산간지대인 함경도, 양강도, 자강도 지역의 식량난이 심
각하다.

참담한 餓死 실태

1998년 세계식량계획(WFP), 유엔아동기금(유엔ICEF), 유럽연합(EU)의 연구원들이 7세 미만
의 어린이 1천8백명을 추출, 영양상태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의하면 이중
62%가 장기적인 영양부족으로 인한 발육부진 상태에 있으며, 16%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
로 나타났다.
1997년 9월30일부터 1998년 9월15일에 걸쳐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 중국 길림성 내 장백 및 연변 지역 탈북자 1천6백94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한 「불교운동본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들의 가족 9천2백49명 중 28.7%에 해당하는 2천6백53명이 지난 2~3년 사이에 식량난 및 경제난에 기인한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노동당원 교육을 통해 『지난 고난의 행군 동안 餓死
者가 2백만~2백50만명 정도였고, 탈출자가 20만명 정도였다』고 교육했다고 한다.
통일부는 지난 2~3년 동안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자수가 매년 50만~80만명인 것으로 추정하
고 있으며, 黃長燁씨는 1996년 11월 중순 식량상태와 아사자 통계를 장기적으로 金正日에게
보고하는 중앙당 조직부 책임자를 통해 1995년 당원 5만명을 포함, 약 50만명이 굶어죽었으
며 1996년 11월 아사자가 1백만명에 이른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黃씨는 1997~98년에 식량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매년 1백만명 이상이 굶어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탈북주민 김동수(1998년 2월 입국, 前 유엔 식량농업기구 북한대표부 서기관)씨는 평양에 다
녀온 김홍림 대사로부터 북한 내 아사자가 2백만~3백만명에 이른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
고 있으며,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는 1994년 이후 아사자를 3백50만명으로, 대
한민국 국군포로로 잡혀있다가 1998년 9월 남한으로 온 장무환은 1997년 1년간의 아사자를
1백만명으로, 뉴욕에 본부를 둔 대외관계위원회의 35인 특별조사반은 1996~1997년의 아사자
를 1백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식량난에 의한 영양실조에 수질오염, 의료체계 마비 등이 가중되면서 水因性(수인성) 전
염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에 의해서도 북한 주민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파라티푸스, 콜레라가 만연하고 있으며 북한 당국이 1975년까지 완전 퇴치했다고 선전했던
결핵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전직의사였던 귀순자 최훈철(1998년 5월 입국)에 의하면
북한의 결핵 환자가 3백만~4백만이며, 감염자는 7백만~8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식량난이 악화되면서 인간 관계가 파괴되고 가족이 해체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귀순자
장성숙과 김경일에 의하면 식량이 부족하면 가재도구부터 팔고 옷가지, 이불을 팔고 난 다
음 결국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벌어먹자」고 가족이 각각 흩어지게 되고, 일단 식량
을 구하러 이렇게 집을 떠나면 병들어 죽거나 행방불명되기 일쑤라고 한다. 또한 귀순자 김
동수의 증언에 의하면 혼자라도 살아보겠다는 생각에 이혼율이 상승하고 결혼을 기피하는
풍조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金正日이 북한을 「빌어먹는 땅」으로 만들었다』

한편 이와 관련, 黃長燁 前비서는 탈북 이후 1998년 6월 펴낸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
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96년 가을에 우리 중앙당 비서들이 모여서 전국적인 알곡 생산량을 토의하였을 때 …
평북도에 직접 다녀온 군수공업 담당 비서는 1백만~1백10만t 생산하던 평북도에서 37만t밖
에 생산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 자연재해가 없는 나라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재해
때문에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굶어죽게 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만일 농업이
자연재해 때문에 잘 안되었다면 공업은 왜 전면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가? 이것
도 다 자연재해 때문이란 말인가?…
북한 통치자들은 늘 영도자의 지시에 따라 전국이 하나와 같이 움직인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공업과 농업이 잘못되어도 북한 주민들을 하나와 같이
움직이도록 지휘하는 수령님의 책임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 오늘 북한이 겪고 있는
경제적 위기는 외국의 봉쇄정책도 아니고 자연재해도 아니며, 전적으로 김정일의 중세기적
인 개인독재가 빚어낸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위대한 수령님」의 영도 밑에 건설하여 놓았던 자립적 민족 경제를 누가 다 망쳐먹고 북
한을 기아와 빈궁이 지배하는 「빌어먹는 땅」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위대한 영도자 김
정일 장군님」 밖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유일한 영도체계를 철저히 세우고 모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쥔 「위대한 영도자」는 당도
자기 개인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의 당으로, 군대도 자기 개인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
는 개인의 군대로, 경제도 자기 개인의 의사에 따라 관리되는 개인의 경제로 만들었다. …
직속인 「39호실」을 통하여 「충성의 외화벌이 운동」이라는 구호 밑에 도, 시, 군당에 외
화벌이 과제를 주고 송이버섯과 같은 토산물에 이르기까지 수출 원천을 탐구하고 독점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외화벌이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기관들에서도 외부로부터 받
은 기부금을 비롯한 외화 수입이 있게 되면 그것을 국고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영
도자님」께 바치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이리하여 나라의 외화는 「영도자」에게 집중되고
경제사령관이라고 하는 정무원 총리는 불과 몇십만 달러의 외화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는 형
편이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는 … 상태에서 금수산 기념궁전 앞을 평양에서 제일 큰 광장으
로, 제일 큰 공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숱한 자재와 노력을 동원하는 데는 인민을 무시해도
너무 하지 않는가… 이 굉장한 (김일성)시신 궁전 꾸리는 데 8억9천만 달러가 들었다고 하
는데… 8억9천만달러면 강냉이를 적어도 6백만t 이상 살 수 있다. 북한에 식량이 매년 2백
만t 씩 모자라는 것으로 보아도 6백만t이면 3년 동안은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구제수단이 있음에도…

또 앞에서 보았듯이 黃長燁씨는 김정일에 대해 남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일종의 加虐的(가학적)인 성격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이며 그가 「1천만명이
죽어도 좋다. 그러면 관리하기가 더 좋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北의
모든 권한을 다 갖고 있는 김정일이 일부러, 고의로 굶겨죽인다고 봐야 한다」는 게 黃씨의
판단이다.
북한과학원에서 농업연구원으로 일하다 탈북한 이민복씨는 자신의 수기에서 자신이 6년간의
체험적 농업 연구 끝에 집단 농장에 비해 개인화된 밭에서 알곡 생산량이 2~3배나 높다는
것을 발견, 집단 농장의 개인농化가 북한 식량난 해결의 근본대책이라는 내용의 제의서를
김일성과 김정일 앞으로 보냈다가 감옥에 가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밝히고 있다.
자, 이제 지금까지 거론한 黃長燁씨의 증언 등 여러 자료들을 염두에 두고 요약한다.
金正日에 대해 「餓死를 통한 북한 주민의 대량 虐殺者(학살자)」라는 혐의를 굳이 두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에 근거함이다.
맨 처음 비유에서의 「독가스 체육관」처럼 북한 지역에서 정책이나 주민들에 대한 전면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金正日이다. 그런데 단기적으로 金正日이 지휘하는 정책의 치명
적 오류 탓으로 급격한 식량 부족 현상이 생겼고, 자연 재해까지 겹쳐 飢餓에 따른 사망자
가 급증했다. 독가스가 밀폐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황이 된 것이다.
불가피한 天災地變(천재지변)을 제외한다면 이런 치명적 위험을 야기시킨 책임의 대부분은
金正日에게 있으므로 그에게는 이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심각해진
상황에서 이를 방지할(이를테면 외국에서 곡물을 사온다든지 하는) 능력은 북한에서 金正日
에게밖에 없고, 또 金正日은 이런 능력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그는 金日成의 시신 궁전 장식 등에만 대규모의 자원을 투입했을 뿐 이런 대규모의
餓死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不作爲에 의한 살해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 그는 가뭄과 홍수까지 겹친 북한의 식량 생산, 공급 체계는 턱없는 부족 현상으로 인해
餓死者까지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 또 실제로 발생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등을 통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1천만명쯤 죽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극
심한 飢餓를 확대시키는 식량 시스템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마치 인화물질이 많아 불이 날 것이 뻔한데도, 또 일부에서 불이 나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
서도 많은 촛불을 켜두는 것처럼…. 또는 앞의 비유인 「밀폐된 체육관」에서 사람이 죽을
것을 알면서, 또 일부에서 사람이 죽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 다른 조치 없이 독가스가 방
출되는 공기공급장치를 그대로 틀어대는 것처럼….
이는 결국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虐殺이라고 비난받을 소지가 다분하다는 게 기자
의 생각이다.

2. 政治囚 수용소의 처형과 인권 유린

▶ 고발장 본문

피고발인은 북한 지역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독재적 지위의 강화를 위해,
함경남도의 요덕·단천·덕성군, 함경북도의 화성·청진·회령군, 평안남도의 개천·북창군,
평안북도의 천마군, 자강도의 동신군 등 함경도, 평안북도, 자강도를 중심으로 한 산간 오지
에 특별독재대상구역, 정치범독재구역, 사상범 집단수용소의 이름으로, 혹은 조선인민경비대
예하부대 등으로 위장한 각종 政治囚(정치수) 수용소를 설치하거나, 피고발인의 父 金日成이
절대적 지위를 갖고 있던 시절부터 설치된 수용소를 강화하면서,
피고발인의 절대적 지휘 선상에 있는 이들 수용소의 간부 등을 통해 일체의 재판절차 없이
현재 북한 지역 전체 주민의 약 0.8%, 즉 1백15명당 1명꼴에 해당하는 약 20만명을 불법 감
금해 1인 1일 기준 1백∼2백 g 정도의 식량만을 배급하면서 1일 17시간씩의 중노동에 동원
하고, 역시 재판절차 없이 1980년대 중반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1개 수용소당 매년 수백명
씩의 政治囚를 소위 공개처형의 형식으로 살해하거나 작업 중 사고, 질병 등으로 사망에 이
르게 한 것이다.

▶立證 및 덧붙이는 말

북한에서 주민들의 인권과 생명이 유린되는 대표적인 곳이 政治囚 수용소라는 사실은 국제
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注:일반적으로 「政治犯 수용소」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으나,
「犯」이라는 호칭이 이들의 수감을 정당화시키는 어감이 있어, 이들이 단지 갇혀 있을 뿐
이라는 보다 중립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政治囚 수용소」라는 용어를 이 기사에서는
사용한다)
북한이 정치사상수 등을 수용하기 위해 이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북한을 탈출한 체험자
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며,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약칭 AI) 등 권위 있
는 국제인권단체들의 추적으로 그 실체가 밝혀지고 있다.
수용소의 존재 사실은 국가정치보위부 정보원으로 일하다가 1982년 1월 국내에 들어온 탈북
자 김용준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이후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출소하여 탈출한 강철
환, 안혁(1992년 8월 입국), 「회령수용소」 경비대원으로 근무하다가 탈출한 안명철(1994년
10월 입국), 1980년대 중반 국가안전보위부 경비대원이었던 최동철(1995년 12월 입국) 등에
의해 증언됐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 국가정보원이 인터넷 홈 페이지에 정리해 내놓은 수용소의 실태는 다
음과 같다.
<북한은 정치범수용소를 「특별독재대상구역·정치범독재구역·사상범 집단수용소」등 다
양한 호칭으로 함남 요덕, 함북 회령 등 산간오지에 10개 수용소를 설치하여 반당·반혁명
등 체제 위해분자 20여만 명을 재판절차 없이 집단 수용하고 있다. 이는 북한 총인구의 약
0.8% 에 해당되어 인구 1백15명당 1명꼴이다.
수용소는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자강도 등 모두 지형이 험악한 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역별로 보면 함남의 요덕·단천·덕성군, 함북의 화성·청진·회령군, 평남의 개천·북창
군, 평북의 천마군, 자강도의 동신군 등 10개로 파악되고 있다.
종래는 이른바 「적대계층」중 체제 위해분자 즉 숙청된 종파분자, 반당 반혁명분자, 과거의
地主(지주), 친일파, 종교인 및 월남자 가족, 북송교포 중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자유세계를
동경 찬양해 온 자등이 대부분이었으나, 노동당의 간부로 있다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정치
인과 가족이 점차 주류를 이루었으며 특히 김일성우상화 강화과정에서 수용대상이 증가하였
다.
수용인들의 탈주 소요방지를 위해 철저한 감시 통제체계를 운영하는데 외곽 경계선에는 3∼4m 높이의 4∼6중 철책 울타리가 쳐져 있으며, 탈주가 용이한 곳에는 전기철조망, 지뢰밭, 함정 등을 설치하고 외곽의 울타리를 2Km간격으로 7m 높이의 감시망루를 통해 감시하고 있다. 탈주를 기도하다 발각이 되면 경비원들에 의해 무차별 사살되며 체포될 경우에는 유격대 훈련장에서 살인훈련용으로 제공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일단 수용소에 수감되면 주민으로서의 권리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도 일체 박탈
당한 채 생산력을 제공하는 도구로서 존재하며 입소 즉시 공민증을 박탈당하고 선거권 교육
받을 권리 등도 제약받으며 식량 생필품 배급은 물론 결혼 출산 등도 금지시키고 있으며 면
회 및 서신연락 금지 등 외부와 연락을 일체 차단당하고 있다.
수용자 일과는 작업반별 성격 및 계절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농장작업반의 경우 새벽 5∼6
시경 기상, 저녁 8시까지 작업을 실시하고 사상교양과 인원점검 후 밤 10시 취침하며 탄광
작업반은 동 하절기 구분 없이 1일 3교대로 작업하는 등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주식은 강냉이와 감자, 밀, 보리로서 수확기에 각 1회 배급하며 공급량은 종류에 관계없이 1
인 1일 기준 탄광은 600g, 지역지구는 500g이나 최근에는 식량사정을 이유로 100~200g 정도
배급된다. 부식은 채소류는 거의 공급이 없고 소금이나 간장 된장 등을 소량 지급, 마늘·고
추가루 등은 텃밭에서 조달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먹을 것의 절대 부족으로 나물 풀뿌리 외에 쇠똥 속의 콩이나 개구리알
까지도 취식하는 형편이며 판자나 거적으로 만든 집의 나무껍질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고 이
로 인해 수용자 대다수가 영양실조로 페라그라병, 결핵, 간염 등 질병에 걸려 있는 실정이
다.
수용소는 죄질에 따라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완전통제
구역」은 북한이 주장하는 이른 바 반당·반혁명·종파분자나 해외로 도주하려다 잡힌 政治
囚들이 종신 수용되고, 「혁명화구역」은 다소 죄질이 경미한 政治囚들이 수용되며 3~10년
이 지나서 金父子 체제에 충성할 만큼 사상개조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심사를 거쳐 출소할
수도 있다.
수용소의 관리는 이분화되어 총괄조정과 통제는 국가안전보위부 수용소관리국에서 담당하
되, 경비는 사회안전성 산하 인민경비대에서 맡고 있다>

현재 수용인원 20만명에 달해

「북한인권백서 1999」에 의하면 수용소의 초창기에는 그 면적이 한국의 면 단위에 해당하
는 1개 리 정도였지만, 1973년 金正日의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3大혁명소조 활동이 시작되
면서 수용소와 수용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 1980년 노동당 6차 대회 이후 金正
日의 세습체제를 반대한 黨, 軍, 政 간부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특별독재대상구역이 최소한
4개 이상 늘어났고, 1982년에는 8개 政治囚 수용소에서 약 10만명이 넘는 인원이 사회와 격
리된 채 종신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이후 1980년대말 東歐(동구)의 붕괴로 자유와 개혁의 바람이 북한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내부 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특별독재대상구역은 더욱 늘어났으며 수용인원도 약 20
만명에 달하게 됐다.
많은 수용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영양실조와 심한 육체노동으로 폐렴, 결핵 감염, 영양 실
조 등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나 예외 없이 작업장에 동원되고 있다. 작업반장이 더 이상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판정하는 수용자들은 중환자가 수감되는 요양소로 보내지지만, 이들을
치료할 의사나 약이 없기 때문에 격리 수용돼 방치되는 셈이다. 이같이 방치돼 죽는 사람이
1개 수용소에서 매년 40∼50명에 이른다. AI는 수용소 규칙을 어긴 죄수들을 가두기 위한
형벌실(구류장)이 설치돼 있다고 밝혔는데 이곳은 서거나 눕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 곳으로
囚人들이 이곳에 한 번 들어가면 몇주씩이나 갇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엔도 우려 표명

1998년 8월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채택된 북한인권상황 관련 제50차 유엔 인권 소위 결의
문은 『북한 내에서 불법 처형, 실종에 관한 빈번한 보고와 수많은 政治囚가 억류돼 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심각한 학대에 따라 질병, 기아 및 유기로 사망하고 있다는 보고를 우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 국무부도 1998년 1월30일 발표한 「1997 각국 인권보고서」에서 북한 정치수 수용소에
15만∼20만명의 政治囚가 수용돼 있다고 밝혔다.
조셉 피츠 美 하원의원은 북한 인권과 관련, 1998년 5월6일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강철환씨는 할아버지가 간첩죄를 지었다고 하여 9세에 불과한 손자임에도 불구하고 政治
囚 수용소에 투옥됐다.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강씨는 다른 囚人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영
양실조에 시달렸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뱀, 쥐, 개구리를 잡아먹었다. 그밖에 姜씨는 囚人들
이 교수형 또는 총살형으로 처형당하는 광경을 수없이 보았다』
미국 방위포럼재단의 수잔 숄트 회장은 강철환씨와 이순옥씨 등의 증언을 근거로 1998년 4
월3일 워싱턴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북한 政治囚 수용소에는 외국방송을 청취했다든지, 식량사정에 불만을 표시했다든지 하는
「죄 같지도 않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갇혀 있다. 囚人의 20%는 그런 「죄」를 지은 사
람이고 나머지 80%는 그 가족들이다.… 북한에는 최소한 10개소의 政治囚 수용소가 있고
囚人들은 매일 17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囚人들은 좁디 좁은 방에서 5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할 수 있고 식사와 용변에 1시간이 허용된다.
강철환씨는 「최소한의 음식을 주고, 최대량의 무상노동을 시킨다는 게 수용소의 방침이다.
그렇게 되면 수인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수용소 당국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강씨는 10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통해 굶주림과 공개 처형으로 수백명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
고 폭로했다>
1997년 8월8일 유엔 인권 소위에서의 연설을 통해 바이스브로트 小委 위원(미네소타大 법학
교수)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政治囚 수용소의 수
감자 학대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있다. 수감자의 상당수는 고문, 질병, 굶주림, 방치 등으
로 사망했다. 囚人의 강제노동은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흔히 어린이를 포함한 전가족이
정치적인 이유로 함께 투옥당하고 있다. … 정보의 분량이 한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권
小委의 관심을 끌 만한 광범위한 인권침해에 대한 충분한 증거는 존재한다』
정치수 수용소와 관련, 주목할 만한 사항은 「집단 학살」이다. 안명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1986년 10월 함북 온성의 12호 관리소에서는 정치수들이 인권탄압에 대한 항의를 하는 과정
에서 수용소 내 보위원 가족 마을을 습격하는 일이 생기자 당시 국가안전보위부는 경비대 1
개 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약 5천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한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고통 등을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다가 체포된 자, 보위부원에게 반
항하는 자 등을 재판 등의 절차 없이 수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리
에 교수형이나 총살 등의 방법으로 살해한다. 강철환, 안혁, 안명철씨 등의 증언에 의하면
이같은 처형과 작업 중 사고 등으로 사망하는 인원은 1개소당 매년 수백명에 달한다고 한
다. 강철환씨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은 폐쇄된 승호리 수용소에서는 1개월에 3백명 이상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안명철씨는 국가안전보위부 3국 관할의 정치수 수용소에서는 비밀 처형과 함께 수용소
醫師(의사)들에 의해 일본의 731 부대나 나치 수용소에서 자행됐던 것과 유사한 생체 실험
이 행해지고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3. 申相玉 崔銀姬씨 등 대한민국 국민의 略取·誘引, 監禁

▶ 고발장 본문

피고발인은 북한 영화의 질적 향상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작전부 임호군 등에 지시해 1978년
1월 홍콩에서 한국 영화배우 崔銀姬(최은희)를, 다시 6개월 뒤인 1978년 7월 그 前(전)남편
인 申相玉(신상옥)을 납치한 후 申相玉은 5년여 동안 政治囚 수용소에 감금하는 등, 여러 경
로와 지휘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 다수를 납치했고,
피고발인이 납치한, 혹은 越北(월북)한 대한민국 국민 중 다음과 같은 34명을 政治囚 수용소
에 감금하고 있는 것이다.

▲강광석(1992년 12월 납북, 부동산중개업) ▲강중석(1971년 북한 정보원에 의해 강제납북,
서독광부) ▲고상문(78년 4월 노르웨이에서 납치, 前수도여고 교사) ▲김보겸(휴전선 부근에
서 북한군에 의해 강제납북, 택시기사) ▲김성배(1983년 5월, 건설회사 임원) ▲김성진(1984
년 9월, 군인 이병) ▲김순성(서독 광부) ▲김원석(1990년 2월, 관광사 대표) ▲ 노준우(농
부) ▲신숙자(1985년 11월 남편 오길남과 월북, 在獨간호원) ▲신원식(1991년 6월, 미국 교량
설계원) ▲양칠성(1988년 9월, 부동산중개업) ▲염규환(1981년 在日조총련 조직에 의해 납치,
제약회사 직원) ▲유성근(1971년 4월 서베를린 여행중 강제납북, 駐서독 한국대사관 노무관)
▲이대식(1988년 9월, 파라과이 이민) ▲이영훈(1992년 4월, 변호사 사무장) ▲이장수(1976년
10월, 해군 수송기지창 근무원) ▲이재관(1989년 12월, 삼성전자 대리점 근무) ▲이재환(1989
년 7월, 재미유학생, 이영욱 前의원 아들) ▲이준광(진급 누락 불만으로 월북, 육군 중령) ▲
이치수(농부) ▲정락호(1991년7월, 조광해운 선원) ▲정종도(인도네시아에서 북한 공관원에
의해 강제 납북, 在美과학자, 북한당국은 1989년 사망했다고 AI에 답변) ▲조병욱(1976년 10
월 월북, 해군 수송기지창 근무원) ▲조홍래(1992년 8월, 운동기구점 운영) ▲최종석(1987년
1월, 동진27호 납북선원) ▲최희창(1991년 10월, 조광해운 선원) <신원 미확인자> 권오문
▲조생구 ▲서학식 ▲박총신 ▲이찬수 ▲유재원 ▲김춘길
(통일연구원刊 북한인권백서 1999. 괄호 안의 연월일은 입북 시점, 직업은 입북전 前職)

▶立證 및 덧붙이는 말

1986년 申相玉(신상옥), 崔銀姬(최은희)씨가 북한을 탈출하며 갖고 나온 金正日의 육성 녹음
테이프에는 金正日이 납치를 自認(자인)하는 부분이 나온다. 1983년 10월19일 저녁 6시부터
평양 시내 노동당 중앙당사 3층 金正日 집무실에서 이루어진 申, 崔씨와 나눈 대화를 崔銀
姬씨가 핸드백 속 녹음기로 몰래 녹음한 이 「희귀한 자료」에는 金正日의 이런 말이 담겨
있다.
『…영화 그 자료들 다 훑어보니까 … 남조선에서는 누구를 제일 꼽느냐 그러니까 申감독이
다. … 그래서 좋다. 그러면 그 사람을 한번 데려와야갔는데, 그런데 그 사람 데려오는 것,
남자 데려오는 건 좀 무리다. 그래 무린데 남자 데려오지 말고, 申감독을 유인, 유혹하자면
뭐가 필요한가? 그래서 실제 崔선생을 이렇게 데려다 놓았습니다…』
金正日이 자신의 육성으로 崔銀姬씨를 납치했다고 자백한 물증인 것이다.
북한은 또 1979년 노르웨이에서 납치한 한국인 교사 고상문씨와 1995년 7월 중국 延吉(연
길)에서 납치한 안승운 목사를 현재까지 강제 억류하고 있는 등 현재 총 4백42명의 납북자
를 억류하고 있다.
고상문씨나 안승운 목사에 대해 북한 당국은 自進(자진) 입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
지만 1996년 9월13일 중국정부는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된 안 목사 납치범 중 1명인 이경춘
에 대해 「불법 감금 및 불법 出境罪(출경죄)」로 징역 2년과 강제추방형을 선고, 안 목사
사건이 납치 사건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밖에도 신원과 납치 과정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납북 억류자가 더 있는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또 탈북자 안명진(1993년 입국)씨는 『남파 간첩에 의해 납치된 한국 사람들이
북한에서 간첩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安씨의 증언에 의하면 납북 억류자 중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20여명이 평양 용성구역 소재
「이남화 혁명관」에서 남파 간첩을 교육시키는 교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남화 교육
관」은 남파 간첩 양성기관인 중앙당 3호 청사 내 작전부가 관할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
학」 출신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실상과 한국에서의 생활 방법 등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들어
진 축소된 한국 모형관이다.
한편 이용가치가 없는 나머지 납북 억류자들은 정치수 수용소에 수용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1994년 7월30일 국제사면위원회(AI)는 「북한政治囚에 관한 새로운 정보」라는 특별보고서
를 통해 고상문(전 수도여고 교사)·신숙자(간호사)·정종도(재미 과학자) 등 납북 억류자들
도 政治囚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고 확인했다.
지난 1월 국가정보원도 이재환씨 등 납북, 월북자 22명이 정치수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4.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

▶ 고발장 본문

피고발인은 1980년에 새롭게 수립된 고려연방제 통일전략과 對南(대남) 혁명전략을 달성하
기 위해 보다 유리한 여건과 새로운 국면 타개를 목표로, 정치적 대중적 토대가 취약한 당
시 5공화국 정권의 최고통치부를 암살함으로써 통치권의 공백과 지배층의 내부 교란, 전반
적 사회혼란과 동요를 조성해 집권층을 약화, 고립화시키고 한국 내의 전국적 소요 사태를
일어나게 하려는 의도로,
1983년 중반 당 對南비서 김중린, 인민무력부장 겸 총참모장 오진우, 인민무력부 특수정찰국
장 박태진, 특수공작부문 담당 부총국장 송기호, 육군 소장 강창수, 작전부 임호군 등을 통
해 인민무력부 특수정찰국 특수공작부대 소속 대위 강민철, 대위 신기철, 소좌 진 모 등 3명
에게, 같은해 10월 버마(現 미얀마)와 호주, 브루네이, 인도, 뉴질랜드, 스리랑카 등 6개국을
순방할 예정이던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全斗煥(전두환) 일행을 버마에서 살해할 것을 지시
했다.
이에 따라 작전부 등의 주도와 강창수 등의 지휘하에 강민철, 신기철, 진 모 등은 같은 해 8
월 개성시에서 특수 임무 훈련을 거친 후, 「애국부대」라는 공작조 명칭 하에 9월9일 원산
항에서 화물선 「동건애국호」에 승선해 9월22일 내지 9월23일 버마 랭군에 침투했고, 9월
24일 북한 대사관의 조언자로부터 각 25㎝의 길이에 쇠구슬이 끼워져 있는 플라스틱 폭탄,
히다치 배터리에 의해 작동하는 전자폭파 장치로 이루어져 있는 폭발물과 원격조정장치를
받아 10월7일 아웅산 순교자 묘소의 묘역 지붕에 폭탄 3개을 설치한 후, 10월9일 오전 대한
민국 방문단이 아웅산 묘역에 도착할 무렵 진 모가 원격조정장치의 방아쇠를 눌러 폭탄을
폭파시켜 당시 부총리 서석준 등 대한민국 방문단원 17명과 버마인 4명을 살해하고 당시 합
참의장 이기백 등 방문단원 14명과 버마인 32명에게 부상을 입힌 것이다.

▶立證 및 덧붙이는 말

당시 전 세계에 주요 뉴스로 타전된 이 사건이 발생하자 버마 당국은 수사에 착수, 발생 20
여일 후인 11월4일 암살계획의 배후가 북한이라고 단정적으로 발표했다. 이어 버마 정부는
북한 대사관을 폐쇄했으며 모든 북한 외교관에게 48시간 이내에 버마를 떠날 것을 명령했
다.
「예상대로」 북한 당국은 『사실상 랭군 사건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고, 남쪽 괴뢰 정권
이 조작한 것』(군사정전위원회 4백22차 회의, 북한 이태호 소장)이라며 이 사건 관련 사실
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버마 랭군 법원은 열 차례의 재판 끝에 진 某(모) 소좌와 강민철 대위가 북한에서
침투한 특수공작조원임을 명백히 확인한 후 사형을 선고했고, 버마 대법원도 이들의 상고를
기각해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공작조원 중 나머지 하나인 신기철은 도주 과정에서 사살돼
재판은 두 사람만 받았다. 당시 랭군 地區(지구) 재판소 제8부에 의해 작성된 판결문과 대법
원 판결문을 보면 강민철은 자신의 범행 사실을 꽤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있는 반면, 진 모
는 일체 입을 열지 않은 채 일종의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범행의 세세한 부분까지 판결
문에 적시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강민철의 자백 덕을 본 것이다.
암살 기도의 실패로 이 사건 지휘선상에 있었던 김중린 당 對南비서는 1984년 비서직에서
물러나고 허담에 의해 대체되기도 했다.
黃長燁씨는 일본 文藝春秋(문예춘추)지 1999년 2월호와의 인터뷰에서 『미얀마의 아웅산 묘
역 폭파 때 작전부의 책임자가 사전에 내게 와서 거리와 지형은 어떤가, 묘지는 어떤 상태
인가 등을 가끔 물어보았다. 그러한 의도를 나에게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고, 폭파한 뒤에도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다. 자신들이 해냈다고』라고 말했고, 月刊朝鮮 3월호의 특별대담에서
『아웅산 테러는 작전부가 주도하고 인민무력부의 정찰조원들이 참가한 것』, 『아웅산 사
건도 이 사람(작전부 임호군)이 만든 것입니다. 金正日이한테 「내가 꼭 암살하겠다」고 맹
세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黃씨는 특히 文藝春秋와의 인터뷰에서 『테러 행위나 38선에서의 도발 행위 같은 것은 1
백% 예외 없이 金正日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라는,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의 최고위층에서 장기간 활동했던 黃씨의 이런 언급은 아웅산 사건이나 뒤에서 살
펴볼 KAL기 폭파 사건, 이한영씨 피살 사건, 또는 그외에도 다른 대형 테러 사건의 경우
북한 당국에 의해 자행된 것임이 증명될 경우, 대단히 높은 개연성의 차원에서 김정일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이 사건의 범죄 사실을 작성하면서 참고한 자료는 이 사건에 대한 「랭군 地區 재판소 제8
부 판결문」, 「버마 대법원 판결문」과 「Terrorism:the North Korean Connection(Joseph
S. Bermudez,Jr. 著)」, 「김정일과 대남공작(신평길 편저)」, 「文藝春秋 1999년 2월호 黃長
燁 인터뷰」, 「月刊朝鮮 3월호 黃長燁·申相玉 특별대담」 등의 관련 부분이다.

5. KAL 858기 폭파 사건

▶고발장 본문

피고발인은 한국의 해외취업 근로자들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중동 지역을 선택, 이들이
탑승한 한국 민항기를 폭발시킴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을 야기시키고 1988년 서울올림픽
에 참가할 전 세계 선수들에게 한국행 항공기에 대한 공포와 위협감을 주기 위해,
1987년 10월17일 대외정보조사부 부장 이용혁을 통해 일본인, 중국인 등 외국인 신분으로
잘 위장할 수 있고 공작 경험이 많은 노련한 기본 공작원 김승일과 외국어 구사 능력을 갖
춘 미모의 女(여)공작원 김현희 등 두 명의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에게.
『당은 두개의 조선을 영속화하고 또한 88올림픽을 그들만의 힘으로 주최하려는 남한의 의
도를 봉쇄하려는 목적에서 대한항공 비행기를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이 계획이 때맞춰
결정적인 시기에 수행되면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세계 모든 국가들의 요구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이며 남한 괴뢰정권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이 계획은 반드시 성공적으
로 수행되어야 하며 절대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는 등의 지시를 하달, 김승일과 김현희가
약 한달 간의 특수 폭파 훈련을 거치게 했다.
다시 11월10일 이용혁으로 하여금 김승일과 김현희에게 『이 임무가 중요하다』, 『이것은
김정일 동지가 개인적으로 서명한 지령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게 했고,
이틀 후인 11월12일 평양을 떠나는 날 김현희로 하여금 피고발인의 사진 앞에서 『1980년대
를 맞이하여 모든 국가들이 사회주의의 위대한 건설을 수행하고 있어 남쪽에서의 혁명이 고
조되고 있으며 두 개의 조선을 영속화시키려는 적의 의도가 점점 사악해져 가는 시점에서
나는 전선 밖의 전투 임무를 부여받으면서 당의 신뢰와 고려를 마음에 새기고 3대 혁명규율
을 지키고, 나의 동료와 함께 긴밀히 협조하여 나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이다. 나는 친
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명예와 높은 권위를 위해 죽도록 싸울 것이다』라는 맹세 서약을 하
게 했다.
이에 따라 신이치와 마유미 히치야라는 가짜 일본 여권으로 마치 父女(부녀) 관계인 것처럼
위장한 김승일과 김현희가 11월27일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에서 북한 대외
정보조사부 소속의 최 과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파나소닉 라디오로 위장된 시한 폭탄과 술
병에 든 액체 폭발물을 건네 받아 11월28일 바그다드로 가는 이라크 항공기에 탑승하고, 이
어 같은날 저녁 아랍에미레이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거쳐 서울로 가는 KAL 858기에
탑승한 후,
機內(기내) 그들의 좌석 위에 있는 선반에 폭탄과 액체 폭발물을 설치하고, 비행기가 아부다
비에 도착했을 때 기내를 빠져 나와 11월29일 오후 2시5분쯤(한국시각) KAL 858기가 안다
만海 상공을 비행하던 중 폭발하도록 해 1백15명 탑승객 전원을 살해한 것이다.

▶ 立證 및 덧붙이는 말

불과 10여년 전에 일어나 아직도 많은 국민들 뇌리에 생생한 이 사건의 悲劇性(비극성)에
대해서는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건 직후 아부다비와 한국 기관의 민첩한 수사와 일본, 바레인 당국의 적극적인 협조로 바
레인을 떠나기 직전 김승일과 김현희는 검거됐다. 김승일은 自殺(자살)했지만 김현희는 未遂
(미수)에 그쳤고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다. 앞의 범죄 사실은 김현희의 안기부, 검찰 진술에
근거한 것이다.

6. 李韓永씨 살해 사건

▶고발장 본문

피고발인은, 前妻(전처) 成蕙琳(성혜림)의 조카로 1982년 스위스 한국대사관을 통해 귀순한
李韓永(이한영)이 1995년 이후 피고발인을 비롯한 북한 권력층의 실상을 언론에 폭로해오자,
사회문화부 소속 최순호 등 2명의 테러전문요원에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李韓永의 살해
를 지시, 최순호 등이 「순호組(조)」라는 이름의 특수공작조로 1997년 1월 남한에 침입해
심부름센터를 통해 李韓永의 주소, 행적 등을 알아낸 뒤 1997년 2월17일 오후 9시52분 경기
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현대아파트 418동 14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李韓永의 머리와 가슴
에 권총 두 발을 근접 발사해 살해한 것이다.

▶立證 및 덧붙이는 말

북한 당국에 의한 보복 살해로 추정돼 큰 충격을 주었지만 발생 후 아홉 달여가 지나도록
정확한 범인의 신원과 행방이 밝혀지지 않아 미궁에 빠져 있던 李韓永씨 피살 사건은 1997
년 11월 부부간첩단 사건 당시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진상이 확인됐다.
남파 부부간첩 중 체포돼 조사를 받던 최정남이 李씨가 북한에서 남파된 공작원에 의해 피
살됐음을 진술했기 때문이다. 최정남은 『순호組가 심부름센터를 이용한 사실이 탄로났으므
로 대상자를 접촉하려 할 때는 심부름센터를 이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든지 『비상
시에는 순호組가 귀환 전 신림동에 묻어둔 공작 장비를 발굴, 사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는 구체적 진술을 해 李씨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실제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드보크(無人 據點·무인 거점)에서는 독침 10개가 들어있는
분당 서현동 근처의 모 외국어학원 편지봉투와 1997년 1월20일자 생활정보지, 무전기 등이
발견됐다. 최정남은 또 최순호 등이 북한에 무사 귀환해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는 진술도 했
다.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로는 金正日이 어떤 경로로, 어떤 지시를 내려 최순호 등이 李韓永씨
를 살해하게 했는지 구체적 정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선 이 기사는 기본적으로 북한 당
국을, 이런 殺人 정도는 손쉽게 자행하는 범죄단체로 상정하고 있고 金正日을 그 首魁로 지
목하고 있으므로 최순호 등 단체 소속원이 저지른 殺人행위의 많은 책임은 당연히 金正日에
게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또 앞에서 보았듯 『테러 행위나 38선에서의 도발 행위 같은 것은 1백% 예외 없이 金正日
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는 黃長燁 前비서의 증언 역시 金正日의 책임을 면키 어렵게
하는 증언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제3부 맺는 말

어디에 고발하나?

거친대로 대강의 고발장은 여기서 끝이다. 그럼 이제 남는 문제는 과연 어느 곳의 어느 기
관이 현재 북한 국방위원장 겸 당 총비서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金正日의 고발장을 접수하
고, 실제로 수사나 訴(소)제기 등을 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피노체트의 사례를 보며 얼핏 기자는 國際 法廷(국제 법정) 어딘가 反인류 범죄자를 세울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취재 결과 現存(현존)하는 국제법 체계에서는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을 대상으로 형사
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常設 國際法院(상설 국제법원)」은 아직 없었다. 잘 알려진 네덜
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의 경우, 재판소 규정 34조에 「국가만이 재판소에 제기되는
사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듯 국가간의 분쟁을 다룰 뿐 金正日과 같은 한
개인의 범죄를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지는 않고 있다.
제2차 대전 직후 뉘른베르그와 도쿄에 세워진 국제 戰犯(전범)재판소에서 군사재판을 통해
평화·人道에 反한 죄, 전쟁 범죄를 이유로 최초로 개인의 국제 인도법 위반을 단죄한 적이
있었고, 유엔 안보리의 결의로 1993년 舊(구)유고와 1994년 르완다에 각각 특별재판소가 설
치돼 개인에 대한 형사 재판이 열린 적이 있었지만, 모두 특정 사안에 대한 限時的(한시적)
인 법원이었을 뿐이다.
주목할 만한 기구로는 「國際刑事裁判所(국제형사재판소)」라는 곳이 있다. 집단 살해나 反
人道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기 위한, 그야말로 「상설 국제형사법원」의 성격을 띄고
있는 이 기구는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설립이 추진되기 시작해 미국의 반대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난해 7월17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외교전권대표회의에서 찬성 1백20국, 반
대 7국, 기권21국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창설 협의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60개국의 批准(비준)이 있어야 發效(발효)되는 이 기구는 아직 세네갈 한 나라에서
만 비준이 이루어지는 등 정식으로 활동을 개시할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국제형사재판소가 다루는 범죄는 「집단살해죄(Genocide)」, 「人道에 반하는 죄」, 「전쟁
범죄」, 「침략 행위」등이다.
「집단살해」란 민족, 종족, 인종 또는 종교 집단의 전부, 혹은 일부를 말살하려는 행위로
구체적으로는 ▲집단 구성원에 대한 殺害(살해)나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침해 ▲집단 생활
조건의 의도적 침해 ▲집단의 출산을 금지시키려고 강요되는 조치 ▲어린이들의 강제 이주
등이 포함된다.
「人道에 반하는 죄」란 민간인에 대한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공격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민간인 대상 殺人 ▲인구 일부를 제거하기 위해 식량 의료품 제공을 거부하
는 抹殺(말살) 행위 ▲투옥 및 신체적 자유의 심각한 박탈 고문 등이 포함된다.

체포·사전구속영장 발부해 놓아야

이 재판소에 사건이 提訴(제소)되는 것은 국제형사재판소 당사국이 범죄 개연성을 재판소에
통보하거나, 유엔 안보리가 통보하거나, 재판소 검사가 독자적으로 수사에 착수하는 등 세
가지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
만일 국제형사재판소가 이미 활동중인 기구이고, 北韓이 이 협약에 가입하거나 해서 이 재
판소의 관할권이 미치는 범주에 있었다면 우리는 민간인 대상 殺人 인구 일부를 제거하기
위해 식량 의료품 제공을 거부하는 抹殺(말살) 투옥 및 신체적 자유의 심각한 박탈 등의 혐
의로 유엔 안보리나 국제형사재판소 검사를 통한 金正日의 제소를 시도해 볼 수 있었을 것
이다.
하지만 앞에서 밝혔듯 이 기구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앞으로 문을 연다고 해도 不遡及
(불소급) 원칙에 따라 이전에 자행된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다. 결국 이 재판소가 발
효되고, 그 이후에도 대규모 餓死나 정치수 수용소의 만행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어떤 형
식을 통해서도 북한이 국제 형사재판소의 관할권 안에 들어온다면 그때는 金正日에 대한 국
제 법정의 斷罪(단죄)가 현실적인 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고발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결국 현재로서는 국내법에 근거해 대한민국
검찰에 고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헌법상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일어난 범죄들이
고, 또 피해자가 대한민국 국민들이므로 법리적으로는 당연히 대한민국 검찰이 수사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
물론 남북이 대치 중인 지금 상황에서는 金正日에 대한 직접 수사나 金正日 신병의 확보 등
이 현실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또 「햇볕 정책」을 추구하는 현 정부 기조
나 사실상 남북한을 두 개의 나라로 간주하는 국제 사회의 분위기를 볼 때 대한민국 헌법에
근거한 논리로 우리 검찰에 「김정일에 대해 수사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인 일일 수도 있다.

主意의 환기

하지만 피노체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금까지 확보된 자료나 증인의 수사를 통해 이를테
면 체포 영장이나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등 견제 장치를 해두는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
을 것이다. 혹시라도 북한에서 쿠데타 같은 政變(정변)이 발생해 金正日이 외국으로 급히 도
망가고, 마침 그 나라가 우리와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고 있다면 우리는 이 견제 장치를 근
거로 金正日의 신병을 요구하고 단죄의 길을 밟아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글이 담고자 하는 가장 큰 의미는 다름 아닌 「注意(주의)의 喚起(환
기)」이다. 휴전선 이북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범죄에 대해 무덤덤한 「이곳 사람」들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귀띔하는 「喚起」, 이런 일들에서 애써 눈길을 돌려 무시하려는 우리
정부 책임자들에게 「봐라, 이렇게 극악한 일들이 저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눈길을 주
게 하는 「喚起」,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金正日이나 북한 당국자들
에게 「당신들, 그러다가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喚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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