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직후 高建 행적 관련 기사

*월간조선 2002년11월호 기사

[秘話 추적] 5·17 직후 高建 정무수석의 행방 묘연

『 高建씨는 5.17 직후 국가위기 때 사표도 안 내고 20일간이나 행방을 감췄다』

高建씨는 朴正熙 대통령 이래 金大中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여섯 대통령 시대를 통틀어 내리 특급 要職에만 기용된 유일한 인물이다. 현재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 있지만, 그에 대한 찬사는 아직도 대단하다. 「새마을운동의 설계자」, 「권위주의 시대의 反권위주의 행정가」, 「1987년 6월사태 때 軍 투입에 반대한 내무장관」, 「청렴과 至誠의 관리철학으로 伏魔殿이라 불리던 서울시의 부정적 모습을 바꾼 名市長」 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런 高建씨의 名望을 뿌리부터 흔드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가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해야 할 政務首席으로 재직하던 1980년 5·17 사태 당시 위기에 처한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는 일부의 비판이다. 그는 과연 22년 전 出處의 문제로 平價切下될 것인가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사표도 내지 않고 행방을 감췄다」


<1988년 7월 18일.최규하 前 대통령의 고희연을 축하하는 측근인사들.화살표가 高建씨.>


『정치, 내무, 국방 등 주요 업무를 관장하는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국가의 비상시기였던 1980년 5·17 당시 대통령의 눈과 귀, 그리고 머리가 되어야 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고 20일간이나 행방을 감췄다는 것은 고위공직자으로서는 물론, 인간적으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배신행위이다』(申斗淳)

5·17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은 高建(고건)씨였다. 崔圭夏 대통령 시절 청와대비서실에 재직했던 인사들의 다수는 그때 高建씨의 행동에 대해 아직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지난 22년간 참아 왔다」는 그들이 高建씨에 대해 위와 같은 직격탄을 날리게 된 까닭은 月刊朝鮮 9월호에 보도된 인터뷰 기사 「행정의 達人(달인) 高建 前 서울시장」 중 일부 내용 때문이었다.

인터뷰 기사에서 月刊朝鮮의 질문 중 하나는 『1980년 5·17 때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한동안 출근하지 않았는데, 공직자로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의 사정을 설명해 주십시오』였다. 답변을 통해 高建씨는 『그 당시 저의 행적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분이 몇 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방어했다.

高建씨의 인터뷰 기사에 대해 가장 먼저 「사실과 다르다」면서 月刊朝鮮에 이의를 제기해 온 사람은 崔圭夏(최규하) 대통령 시절 의전비서관을 지냈던 申斗淳(신두순)씨였다. 申斗淳씨는 崔圭夏씨가 국무총리를 지낼 때부터 그 비서관이었으며, 대통령 퇴임 후 국정자문회 의장을 역임할 때(1981~1987)도 그 비서실장을 맡은 바 있는 「崔圭夏 사람」 중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다.

申斗淳씨는 月刊朝鮮과의 전화통화에서 『月刊朝鮮의 인터기사 내용과는 달리 당시 高建 정무수석이 사표도 내지 않고 행방을 감췄다』고 했다. 高建씨라면 광복 이후 한국 관료사회가 배출해 낸 정상급 행정가 중 한 사람이며, 이미 국무총리와 民選 서울시장을 거친 만큼 앞으로 그가 앉을 자리는 꼭 한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만큼 위신이 높다. 현실 정치의 상황에 따라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유력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옹립된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닐 만큼 정치적 비중도 가진 인물인 것이다.


「陽地만을 指向하면서 의리를 저버린 사람」

「전환시대의 앞서가는 행정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官運(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손꼽히는 그는 官界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다. 일찍이 명문 경기高와 서울大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시 행정과에 합격(1961)했다.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을 지내면서 재능을 보여 朴正熙 대통령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불과 37세에 전남도지사가 되었고, 1979년 1월에는 대통령 정무제2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그해 10·26 사태 후 朴正熙 대통령을 승계한 崔圭夏 대통령은 정무제1수석(정치담당)과 정무제2수석(행정담당)을 통합해 그 자리에 高建씨를 앉혔다.

그러나 그는 崔圭夏 대통령을 사실상 下野시킨 全斗煥 대통령 밑에서도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국회의원,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盧泰愚 대통령 밑에서는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金泳三 대통령 시절에는 3년간 명지大 총장을 역임한 데 이어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으며, 金大中 대통령 시대에 들어와서는 집권여당에 입당하여 서울시장 후보로 공천을 받고 당선되어 민선 서울시장직을 4년간 역임하고 지난 6월29일 퇴임했다.

이렇게 朴正熙-崔圭夏-全斗煥-盧泰愚-金泳三-金大中 시대를 통틀어 요직만을 역임한 高建씨의 경력은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高建씨에게 처음으로 「陽地를 지향하기 위해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是非가 대두된 것이다.


申斗淳 당시 비서관과의 문답

필자는 지난 10월10일 오후 경기도 군포시 山本아파트단지에 있는 申斗淳씨의 자택을 방문했다. 이어 金相榮(김상영), 鄭東烈(정동렬), 鄭基鈺(정기옥), 崔興洵(최흥순), 李在遠(이재원)씨 등 崔圭夏 대통령 시절 수석비서관 및 비서관들과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접촉했다. 당시의 대통령비서실장 崔侊洙(최광수)씨는 신병치료차 日本을 방문 중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다음은 필자와 申斗淳씨 간의 문답.

─崔圭夏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재임기간이 가장 짧았습니다. 재임기간이 고작 8개월이었지요. 그래서 전직 대통령을 논하는 자리에서 崔圭夏 대통령은 이름 석 자가 빠지는 「잊혀진 대통령」이 되기도 합니다. 新군부의 압력에 밀려 막중한 대통령 자리를 너무 싶게 내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잘 알다시피 朴正熙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金載圭(김재규)에게 시해되는 10·26 사태가 발발함으로써 崔圭夏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代行에 올랐습니다. 1개월간 권한代行을 담임한 데 이어 그 해 12월6일 崔圭夏 후보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임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그 헌법에 따른 정부를 구성한다는 공약을 하고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요. 이른바 「위기관리정부」의 출범이었습니다. 崔圭夏 대통령의 下野는 나라의 보다 심각한 파국을 막았다는 측면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의 1기 임기는 6년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78년 12월 제8대(유신 제2기) 대통령에 취임했으므로 그의 사망 당시 잔여임기는 약 5년이었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에서 당선된 崔圭夏 대통령은 차기 직선 대통령에 대한 야망이 없었습니까.

『崔圭夏 대통령은 첫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국회의 건의에 따라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했습니다. 이로써 在野인사들이 정치적 복권을 하게 되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 전개되었습니다. 드디어 金鍾泌, 金泳三, 金大中의 3金 대권 레이스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지요. 崔圭夏 대통령은 「난 심판이지 선수가 아니다」라는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급진좌파와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잇달았습니다』

─그것은 崔圭夏 정부가 제시한 정치일정이 너무 느슨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당시 대통령께서는 국민 대다수의 의견을 수렴한 헌법개정안을 마련하고 이에 의해 빠른 시일내에 민주적이며 공정한 선거를 통해 수립되는 새로운 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학생들의 시위 자제를 촉구하는 한편 각계의 지도층에게도 질서유지와 정치발전에 협조를 당부하면서 국회와의 개헌안 협의, 절충 등 정치일정을 충실히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국회 헌법특위에선 제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가는 헌법개정에 합의하고 있었는데, 崔圭夏 정부에서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검토하는가 하면 정치일정을 1년6개월 정도로 잡으니까 정치권과 운동권에서 반발하여 정치일정이 더욱 혼미해진 것 아닙니까.

『그 시기에 정부의 헌법개정심의위원회는 당초 5월 중에 전국 각 도청소재지에서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가질 계획이었으나, 당시 주요도시의 치안상태나 학원사태로 보아 공청회가 질서 있게 진행되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계획을 취소했던 것입니다. 朴正熙 대통령 유고時처럼 권력의 진공상태가 빚어내는 국가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으로서 二元집정부제를 검토해 본 것이 정치권의 의심을 사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로서도 새롭게 국가의 백년대계를 만드는 데 있어 정부가 국회의 헌법안만을 아무런 검토 없이 받는다는 것은 정부의 개헌발의권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책임한 정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1960년 4월혁명 후 들어선 許政(허정) 과도정부가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새(민주당) 정권을 출범시키는 데 불과 4개월밖에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崔圭夏 대통령께서 1년6개월이 좀 느슨하다면 再검토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습니다. 이런 지침을 받아 정무수석비서실에서 건의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中東순방이 불가피했던 까닭

당시 崔圭夏 정부는 시위의 농도가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軍部內에서도 시국관에 혼란이 조성되고 있었다. 강·온 양론의 충돌위기 상황이 민감한 파장을 빚고 있었다. 그런데도 崔圭夏 대통령은 中東순방에 나섰다. 왜 그랬을까.

『이른바 視界(시계) 제로(0) 먹구름이 「서울의 봄」을 뒤덮고 있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 경제의 뿌리를 위협하는 2차 中東 오일 쇼크가 밀어닥쳤습니다. 원유는 배럴당 12달러에서 며칠 사이에 35달러로 치솟았어요. 대통령으로선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초 朴正熙 대통령의 사우디 아라비아 방문이 1979년 12월로 예정되어 있어서 양국간에 구체적 협의가 진행되었으나 10·26 사건으로 일단 중단된 바 있었습니다. 그 후 사우디 국왕이 신임 한국 대통령의 공식방문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崔圭夏 대통령으로서는 국내 정치일정도 중요하지만, 바깥일이 더 급하게 되었습니다. 原油 생산국들의 일방적인 原油 가격 인상으로 유가가 단시일內 2·5배로 급등하고 설상가상으로 이란 사태가 겹쳐 그 폭등한 가격으로도 原油의 물량 확보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원유의 국내 재고량이 별로 없었던 우리나라로서는 유가의 폭등과 더불어 原油 수요량의 확보가 어려워짐으로써 경제의 급격한 후퇴와 민생에의 위협, 그리고 안보상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우디 왕국과 쿠웨이트 왕국의 방문이 불가피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中東순방에 오르시기 직전에 金鍾泌 공화당 총재와 金泳三 신민당 총재에게 전화 통화로 中東 2개국 방문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당신의 부재 중 정국안정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통령비서실장의 국내 잔류를 명하고 대통령 부재 중 비서실의 근무기강과 내각에 대한 업무협조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한 바도 있었습니다』


崔圭夏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진의 反論

月刊朝鮮 9월호에 실린 高建씨의 회고에 대해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했던 인사들은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高建씨의 회고=석유외교차 中東순방 길에 나선 崔圭夏 대통령의 귀국일정에 맞춰 정무수석으로서 건의서를 작성했습니다. 과도기간을 단축해서 정치일정을 투명하게 밝힐 것과 계엄령의 시한을 명시하고 개각을 한다는 내용이죠.〉

▲당시 정무비서관 李在遠씨(現 건양大 교수)=당시 대통령 국빈방문 기간 중 국내 주요 업무는 관례에 따라 정무수석비서실에서 일일상황(DI)을 公電(오피셜 텔리그램)으로 보고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정무비서관실에서는 국내 문제에 관한 한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각계 의견을 수렴한 정치일정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崔侊洙(최광수) 비서실장은 정치일정과 관련하여 崔圭夏 대통령의 지시로 공화당 金鍾泌 총재와 신민당 金泳三 총재를 각각 사저로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한 바 있는데, 두 분은 정치일정을 단축하는 것을 희망했습니다. 특히 金泳三 총재가 3개월內에 완료할 것을 주장하는 바, 崔侊洙 비서실장은 정치권의 이같은 정치일정 단축을 공론화하는 문서를 작성토록 정무수석에게 지시했으며, 따라서 당시 작성한 「보고서」는 정무수석이 독단으로 추진한 보고서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특히 「개각」이란 수석비서관이 공식문서로 건의할 사항의 범주를 넘는 행위로서 정치일정 등에 관한 보고서 작성時 개각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의전수석비서관 鄭東烈씨(現 레고코리아 고문)=高建씨는 그동안 언론으로부터 「5·17 당시 어떻게 된 거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충 우물우물 답변하고 넘어갔는데, 月刊朝鮮 9월호가 보도한 高建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그가 뭔가 작심하고 말한 것 같았습니다. 22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으니까 高建씨가 가만히 있었으면 우리도 구태여 그 문제를 새삼 거론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판단해 보니 역사는 역시 진실하게 기록되어야 하겠습디다. 우리가 고생할 때 高建씨는 全斗煥 정권에 협조하여 장관을 세 번이나 역임했습니다.


「사표나 私信을 받은 적 없다」

〈高建씨의 회고=5월16일 崔侊洙 비서실장을 통해 이러한 건의를 한 후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죠. 잠시 시위가 수그러들었던 5월17일 토요일 오후, 청량리에 사시던 부모님 댁에 잠깐 가 있었는데, 당시 중앙일보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成炳旭(성병욱)씨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청와대 지시로 軍이 이화여대를 덮쳐 전국의 대학생 대표를 연행해 갔다는 것입니다. 부리나케 청와대로 돌아와 보니 별을 단 지프차들이 나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들을 불러모아 「군부가 건의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해요. 완전히 군정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그러니까 정무수석인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고, 내가 건의한 것과는 전혀 반대방향이었어요.〉

▲李在遠씨의 증언=5월17일(토요일) 오후 2시30분경 퇴근길에 중앙청 테니스장에 들렀는데, 거기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뉴스를 들었습니다. 軍이 이화여대 강당에 집결한 각 대학의 학생회 간부 회의장을 기습하여 학생들이 도피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각(오후 3시경) 청와대로 복귀, 마침 자리에 있던 高建 정무수석에게 그 뉴스의 내용, 그리고 장성 출신으로서 金鍾泌 총재 특보였던 張榮淳(작고) 의원의 정세분석을 전했습니다.

동향 선배인 張의원과는 평소 정보를 교환하던 사이였는데, 그분은 그날 아침 국방부에서 열린 軍 주요 지휘관회의를 주목해야 한다고 귀띔해 줍디다. 그래서 그런지 그 날, 景福宮 뒤뜰에 주둔했던 軍부대의 동향도 좀 특이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군인들이 중앙청의 동문인 迎秋門(영추문)을 지키면서 거총까지 합디다. 정무수석께 이런 특이상황을 보고했습니다.

〈高建씨의 회고=비상계엄확대를 위한 국무회의에 배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나는 이때 평생 처음으로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불 덩어리를 느꼈습니다. 나는 그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바로 군정을 의미한다고 판단했고, 군정은 절대로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무회의 배석을 거부하고 곧바로 사표를 써서 私信과 함께 비서실장에게 전하도록 부속실장(비서실장 보좌관을 뜻함)에게 주고, 장위동 집에 칩거했습니다.〉

▲당시 비서실장 보좌관 金相榮씨(現 전자신문 회장)의 반론=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한데, 高建 수석을 만났거나 私信이나 사표는커녕 종이 쪽지 한 장 받은 것이 없으며, 국무회의에는 누가 배석을 지시하지 않아도 정무소관으로 수석이나 담당 비서관이 당연히 배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비서실장실에는 비서실장 보좌관 외에 행정보조 서기관, 수행비서관, 여직원 한 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실장실 근무자 누구도 정무수석으로부터 그런 중요한 문건을 받고 비서실장에게 보고를 태만히 할 수 없습니다.

▲申斗淳씨=비서실장도 정무수석의 私信과 사표를 누구로부터도 전달받은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정무수석의 거취에 대해 대통령께 사실을 확인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첨언하면 대통령비서실의 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을 뵙고 보고를 드림에 있어 어떠한 제약을 받는 바 없이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한 위치임에도 의로운 행동을 보이는 거취와 관련된 인사상의 주요 문건들을 비서실장의 보좌관에 맡긴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분이 뭔가 착각한 것 같다」

▲당시 본관 의전비서관 鄭基鈺씨(現 외교안보연구원 대사)=(1998년 駐싱가포르 대사 재임時 서울시장 자격으로 방문한 高建 시장이 대사관저 만찬회에서 1980년 회고하는 가운데 『바로 여기 계신 鄭基鈺 대사에게 사표를 주었다』고 술회했다고 하는 데에 대한 확인 요청에 대한 답변) 1980년 당시, 제가 高建 수석으로부터 사표를 받은 사실이 없었지만, 만찬장의 분위기상 듣기만 했습니다. 사표 수리와 같은 일은 당시 저의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분(高建씨)께서 뭔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당시 정무비서관 李在遠씨=5월18일(일요일) 오전 8시30분경 출근하여 정무수석실에 가보니 백형완 사무관이 『수석께서 어젯밤 췌장 결석 수술을 받으셨다』 면서 『연락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평소 담석 증세가 있어 약을 먹어 왔기에 그것이 도져서 그런가 하고 상상해 보기도 했지만, 특별한 사전 언질도 없이 갑작스럽게 『췌장 수술을 했다』고 전하는 보좌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전 10시경 정무비서실의 안치순(故人), 최규장 비서관 등 4~5명과 함께 高建 수석의 자택을 방문했으나 가족들은 없고 가정부가 나와서 『아무도 안 계시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만 대답하여 아무런 확인을 하지 못하고 청와대로 돌아왔습니다.

5월19일(월요일) 오전에는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로 행정기관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무비서실의 기능이 수석 不在로 어렵게 되자 李元洪(이원홍) 민정수석비서관이 정무·민정비서실의 업무를 일괄 지휘한다는 命이 내려왔습니다. 이같은 민정수석의 일괄 지휘는 6월9일 金昶植(김창식) 신임 정무수석이 임명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의전수석 鄭東烈씨=高建씨가 『평생 처음으로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 덩어리를 참지 못하고 사표를 던졌다』고 하는데,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함께 근무한 수석비서관의 한 사람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그렇게 全斗煥 군사정권에 반대했던 분(高建씨)이 全斗煥 대통령 밑에서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高建씨는 췌장 수술을 받은 사실도 없다고 합디다.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당시 정치, 내무, 국방 등 주요 업무를 관장한 주무수석으로서 그 직무를 유기했다는 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이며, 그로부터 2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高建씨는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근신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高建씨의 회고=칩거 중인데 정부에서 대학동기인 徐錫俊(당시 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보내 사표 번의를 종용해 왔어요. 거절했습니다. 국무회의 결과는 물어봤습니다. 金玉吉(김옥길) 문교부 장관과 李漢彬(이한빈) 부총리만 질문이 있었고,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비서실장실에서는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光州 진입으로 사태가 일단 진정되자 무단결근하는 정무수석의 행방을 찾았다고 합디다. 崔侊洙 비서실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高建 수석에게 복귀할 것을 종용했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버리자 나중에는 高建씨가 쑥스러워서도 복귀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압니다.


「과거에 대해 솔직해야 할 것」

〈高建씨의 회고=다음엔 崔대통령께서 연락을 해 오셨어요.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번의하고 나와서 도와 달라고 하십디다. 『각하, 저는 할 일이 없습니다. 사표를 수리해 주십시오』 그래도 아무 말씀이 없어요. 그래서 타협안으로 정부 산하 국토개발연구원의 고문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토요일이었던 6월7일 오후 2시 高建 정무수석을 접견하였을 적에 대통령께서는 이미 金昶植 총무처 차관을 정무수석비서관으로 내정한 상태였습니다. 金昶植 정무수석에게는 6월9일 오전 9시에 임명장이 수여되었습니다. 高建씨는 대통령과 만나 보직문제를 놓고 「타협」 운운했는데, 그것은 기상천외의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月刊朝鮮의 질문:『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은 뭡니까』에 대한 高建씨의 답변=집으로 전화가 오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라』고 했거든요. 그 당시 저의 행적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분이 몇 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만, 일부러 찾아다니며 해명할 수도 없고….〉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이는 해명이 아니라 괴변이지요. 국가의 祿(녹)을 받고 고위직을 역임한 분인 만큼 다른 뜻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지위가 높은 분일수록 겸손하고 솔직해야지 거짓을 사실인 양 호도해서는 안 됩니다.


高建씨의 해명

지난 10월12일 밤 9시 高建씨의 동숭동 자택으로 사실 확인을 위해 전화를 넣었다.

─月刊朝鮮 9월호에 실린 高建 前 서울시장님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는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어느 부분에 대해서입니까』

─1980년 5·17 당시, 정무수석(高建씨)의 사표를 접수한 비서실 관계자가 없다고들 하는데, 그것을 누구에게 제출하셨습니까. 또 당시 정무수석으로서 시국에 대한 건의서를 내셨다 했는데, 그 내용에 관해서도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디까』

─申斗淳씨 등 崔圭夏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여러분들입니다.

『그런 말들을 한 사람들과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를 데리고 오시오. 한번 확인해봅시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5·17 전후 崔圭夏 대통령의 동향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유고로 권한대행

11월 故 朴正熙 대통령 장례위원장

12월6일 제10代 대통령에 被選

12월7일 긴급조치 9호 해제

12월12일 申鉉碻 총리에 대한 국회의 임명동의. 오후 7시 12·12 사태 발생

12월21일 제10代 崔圭夏 대통령 취임식

1980년 1월22일 중진 23명으로 구성된 국정자문회의 첫 회의 개최

2월29일 尹潽善·金大中 등 687명에 대한 복권 조치

5월 제2차 석유파동 해결을 위한 중동방문

5월16일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

5월17일 정부,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

5월18일 光州사태 발생

5월25일 光州에서 「光州시민에게 보내는 특별담화」 녹음 방송

5월31일 정부, 계엄下의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신설

8월16일 崔圭夏 대통령 사임.

대통령 권한대행에 朴忠勳 국무총리서리 취임

8월27일 「체육관선거」를 통해 全斗煥 제11代 대통령 당선(9월1일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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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建 전 총리의 반론(2002년 월간조선 12월호 기사)

'나는 분명 1980년 5월 17일 辭表를 냈고, 그 辭表는 6월 7일 수리됐다'

[편집자 注] 高建(고건) 前 서울시장은 月刊朝鮮 11월호에 게재된 「秘話 추적 5ㆍ17 직후 高建 정무수석의 행방묘연」 제하의 기사에 대해 「5ㆍ17 備忘錄(비망록)」이라는 이름의 反論(반론)을 보내왔기에 옮겨 싣는다. 맞춤법과 漢字(한자)는 月刊朝鮮식으로 고쳤다.



시국에 관한 건의서 작성


1979년 12월14일. 청와대 비서실은 기구감축을 단행하여 政務(정무) 1ㆍ2가 政務로, 經濟(경제) 1ㆍ2가 經濟로 통합되었다. 비서실 조직을 감축하고 새로운 진용을 짜면서 인사개편이 이루어졌다. 徐錫俊(서석준) 경제1수석은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으로 전보되었다.

政務2首席(수석)이던 나는 남아서 政務首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行政專門(행정전문)이었는데 政治分野(정치분야)까지 맡는 데 대해서 주저하게 되었다. 그러한 뜻을 (崔圭夏)대통령께 말씀 올렸더니 현실 정치분야에 대해서는 별도로 그쪽에 정통한 人士의 人選(인선)을 이미 끝내 놓고 있다는 말씀이 계셨다. 얼마 후에 언론인 李元洪(이원홍)씨가 民願首席(민원수석)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자연스레 政治分野 중 제도와 공식적인 사안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國政元老(국정원로)자문위원회의 제도화 및 발족, 憲法改正(헌법개정)심의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에 정성을 쏟았다.

어느 날 아침 수석회의에서 崔(侊洙)비서실장이 「全斗煥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에 대한 의견을 구하였다. 나는 법적으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開陳(개진)하였다. 회의의 전체 분위기도 반대였다. 그러나 수일 후, 겸직발령이 보도되었다. 中情(중정)과 保安司(보안사)는 서로 견제해야 하는 정보권력기관인데 양쪽을 1人이 겸직한다는 것은 법적 문제를 떠나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人事였다.

서울의 봄은 5월이 되면서 「안개정국」 논란이 일고 시위가 악화되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누구누구 물러가라는 주장과 구호가 난무했다.

나는 석유외교를 위해 中東(중동) 순방길에 나선 崔圭夏 대통령의 귀국 일정에 맞춰 時局(시국)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했다.

언론인을 비롯한 외부인사들의 의견을 들었고 주로 安致淳(안치순) 정치담당 비서관을 시켜 정리하였다. 崔비서실장에게 우리의 작업내용을 구두로 중간보고를 하였다. 큰 줄거리는 過渡(과도)기간을 길게 잡지 말고 단축해서 정치일정을 투명하게 밝히고, 계엄령의 조건부 해제시한을 밝히고 全面 改閣(개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崔대통령께서는 순방일정을 하루 단축하고 (1980년) 5월16일(금요일) 귀국하였다. 5월16일에는 소요가 小康(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공항으로 영접나가는 崔비서실장에게 시국에 관한 건의서를 드리고 同乘(동승)하는 車中(차중)에서라도 보고를 드려달라고 하였다. 5월16일 밤늦게 도착한 崔대통령께서는 밤 11시경 관계부처 장관과 三軍(삼군)총장, 中情부장대리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를 主宰(주재)하면서 보고를 들었다. 崔대통령께서는 보고를 받으시면서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회의는 30~40분 만에 끝났다.


5월17일, 퇴근 후 다시 청와대로

5월17일. 토요일에는 騷擾(소요)가 전혀 없었다. 무언가 대통령의 결단을 기다리는 정적과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이날 오전 내내 본관 쪽의 下回(하회)를 기다렸으나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이즈음 우리 정무비서실은 근 열흘 동안 비상근무로 인해 직원들의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별 상황이 없는 토요일 오후까지 직원들을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사무실은 首席이 상황을 유지하기로 하고 全 직원을 퇴청시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나는 그동안 바빠서 매주 꼭 가던 부모님 댁 문안을 두어 차례 거르고 있어서 이날 토요일 오후에 청량리 부모님 댁에 잠시 들렀다. 그런데 부모님 댁에 도착하자마자 당시 중앙일보 청와대 출입기자인 成炳旭(성병욱)씨가 급한 전화를 걸어 왔다. 『軍(군)이 이화여대에 진입하여 전국의 대학생 대표들을 연행해 가고 있는데 청와대는 알고 있는가?』 확인전화였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부리나케 청와대 본관으로 달려갔다.

비서실장이 首席들을 불러모아 『軍部(군부)의 건의에 따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國保委(국보위)」 건의는 일단 유보했다고 덧붙였다.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는 「軍政(군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올린 시국건의의 내용과 正反對(정반대)였다. 곧이어 5ㆍ17 비상계엄확대를 의결하는 비상국무회의에 陪席(배석)하라는 지시가 나에게 떨어졌다. 나는 이때 평생 처음으로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덩어리」를 느꼈다. 나는 아주 격한 음성으로 『내가 왜 거길 갑니까?』라는 한마디로 거부했다. 잠시 서먹한 침묵이 이어졌다. 비서관이 아닌 수석비서관이 국무회의에 陪席하는 것은 당시에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비상계엄 확대의결을 독려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때 首席 한 분이 『全 司令官이 겸직을 내놓으면 될 텐데?』 하고 침묵을 깼다. 이어서 (崔侊洙)비서실장은 『그러면 政務 쪽의 비서관이라도 陪席시키시죠』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귓전에 흘리면서 신관 비서실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점에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것은 軍政으로 간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나는 軍政을 찬성할 수 없었다. 내가 政務首席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다면, 나는 軍政에 동조하고 나아가 軍政에 참여하는 입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보았다.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20년 직업 공무원 생활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萬感(만감)이 교차했다. 무엇보다도 軍部의 의지에 反하는 처신을 할 경우 신변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前 직위였던 전남도지사 자리를 떠나 청와대로 부임할 때에 전별금 한푼 안 받을 정도로 자기관리를 엄격히 해왔다. 따라서 아무리 軍政下일지라도 약점이 없는 나를 軍政에 非협조한다고 어쩌지는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표의 철회나 軍政에의 협조를 위해 상당한 强勸(강권) 내지는 압박을 해 올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래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소신대로 행동에 옮겼다.


사표와 서신을 동봉해 비서실장에게 보내

辭表(사표)를 쓰려고 용지를 꺼내들었는데 문득 국무회의 陪席 件이 생각났다. 우선 먼저 국무회의에 陪席할 행정담당 비서관을 찾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정치담당 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법무담당인 金有厚(김유후) 비서관에게 오후 9시에 비상 국무회의가 열린다는 사실과 행정담당비서관을 대신하여 陪席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辭職書(사직서)를 간략하게 썼다. 이어서 崔비서실장 앞으로 書信(서신)을 썼다. 「이제 政務首席으로서 해야 할 일이 없는 것 같아서 사직하고자 한다. 辭職後에는 지병인 신장결석 치료차 入院하겠으니 나를 찾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崔侊洙 비서실장 앞으로 봉투를 마련하여 辭職書 1매와 서신 1매를 同封(동봉)하였다.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실장실에서 보좌하고 있는 李松容 비서관에게, 아주 중요한 서류봉투를 지금 人便(인편)으로 올려보내니 잊지 말고 明日(명일) 아침에 崔실장께 직접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다짐을 받았다. 나는 마침 대기 중이던 愼判根(신판근) 기사에게 본관 2층 실장실에 있는 李비서관에게 봉투를 전달토록 하였다.

10여 분 쯤 지나서 愼判根 기사로부터 제대로 전달하고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어서 한 시간 남짓 책상서류 정리를 하였다. 그리고 청와대를 떠나 부모님 댁에 다시 들러 辭職書를 제출했다는 전말을 말씀드리고 장위동 집으로 돌아오니 밤 11시경이었다. 나의 辭表를 직접 手交傳達(수교전달)한 愼判根 기사는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별첨 1 :愼判根 기사의 「사실 확인 진술서」).

나는 장위동 집에서 외출을 삼가고 주로 독서를 하면서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2~3일 후에 소위 光州事態(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을 5월19일, 20일 뉴스와 光州로부터 전화로 알게 되었다. 5월20일인가 21일인가 밤늦게 金壽煥 추기경의 전화를 받았다. 『高지사가 청와대에 있는데 어떻게 光州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하는 하소연이었다. 나는 『辭表를 제출하고 민간인 신분이 되어 있다』고 말씀드리면서 울먹였다.


청와대의 사퇴의사 번의 설득

이때쯤 해서 3金의 連行(연행), 軟禁(연금)과 동시에 高建 정무수석이 고급 정보의 유출혐의로 連行되어 갔다는 警察情報(경찰정보)가 흘러다닌다는 얘기가 들렸다. 나는 각 언론사 정치부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5ㆍ17 비상계엄령 확대조치와 軍政에 반대해서 내 스스로 辭表를 써내고 내 발로 걸어나와서 장위동에 健在(건재)하다는 사실을 누누이 해명하였다.

한 사흘 쯤 지나서 총리실 徐錫俊 行調室長이 장위동 집까지 왔다. 청와대의 부탁으로 사퇴의사의 번의를 설득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표를 제출하게 된 이유와 경위를 설명하고 소신을 바꿀 수 없음을 말했다. 대학 동기인 徐실장은 자신의 임무가 있었을 테지만, 내 입장을 곧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5월17일 오후 9시 비상 국무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물었더니, 한두 국무위원의 질문이 있었을 뿐 반대는 전혀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집 문 앞에서 서로 웃으며 악수하고 헤어졌다.


나는 의원면직되었다

나는 5월 下旬(하순)에 가까워지면서 6월부터의 생활비로 年金(연금)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辭表를 수리해야 연금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청와대 본관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 崔대통령께서 직접 면담을 하시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혼자 본관 서재로 들어가 崔대통령을 獨對(독대)하게 되었다. 대통령께서는 나에게 辭表의사를 飜意(번의)하고 다시 일해 달라는 당부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당초의 소신대로 당시 軍政으로 가는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辭表를 수리해 주시도록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대통령께서는 『끙』 하시면서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말씀이 안 계셨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잠시 후 나는 이러는 경우 준비해 왔던 차선책을 건의드렸다. 『정 곤란하시면 제 辭表를 수리함과 동시에 저를 연구기관에 보내 주십시오. 제가 환경대학원에서 전공한, 국토계획과 관련된 연구원에서 공부나 하겠습니다』고 대안을 말씀드렸다. 이 대안이 흔쾌하게 즉석에서 받아들여졌다. 나는 『가까이서 더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 후, 국토개발연구원에서 顧問(고문)자리를 만드는 작업이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서 추진되었다. 그 관계로 徐(錫俊)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나는 저간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이 일은 빨리 진행되었고 국토개발연구원 盧隆熙(노융희) 원장실 옆에 「顧問室」이 마련되었다.

나는 내 희망대로 辭表가 수리되어 의원면직되었고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근래 일부에서는 내가 5월17일에 辭表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것은 語不成說(어불성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떻게 나의 辭表도 없이 依願免職(의원면직)으로 발령을 낼 수 있는가. 내가 5월17일 제출한 辭表에 의해서 6월7일 依願免職으로 대통령 裁可(재가)가 내려졌다(별첨 2:대통령 인사 재가문서 사본).

극동빌딩 22층의 고문실에서는 유리창으로 남산이 보였고 그 밑으로는 首警司(수경사)의 연병장에 정렬해 있는 장갑차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 방을 南山齋(남산재)라 이름지었다. 나는 이때 要注意人物(요주의인물)이었고 경계대상이었다. 그래서 南山齋를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옛 친구 몇 사람이 들러 剛庵(강암)이 쓴 「南山齋」라는 액자를 만들어 내 방에 걸어 주었다. 나는 이 액자를 지금도 항상 내 방에 걸어 놓고 있다.

그리고 南山齋 시절 잊을 수 없는 것은 成炳旭, 尹國炳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위로 방문이었다. 바로 옆골목에 있는 「成田」이라는 식당에서 이 분들과 나누었던 얘기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來訪(내방) 성격은 다르지만, 잊을 수 없는 내방객이 있었는데 高明昇(고명승) 장군이었다.

高장군은 나에게 軍部 핵심의 전언이라면서 國保委(국보위)에 참여해 달라는 얘기를 진지하게 하였다. 나는 거절했으나 거듭 권유를 해왔다. 나는 『行政이나 하는 사람인데 지금 상황에서 특별히 도와드릴 일이 없다』고 극구 固辭(고사)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國保委 위원이 되는 것을 면하였다. 사실 國保委 출범 초, 며칠동안은 國保委 위원 명단에 「청와대 정무수석 高建」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辭表를 제출한 것을 모르고 있던 시점에서 軍部에서 내 이름을 당연직에 포함시켰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1980년 5ㆍ17 때, 내가 내린 결단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軍部의 건의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인 崔대통령의 정책방향에 따르지 않고 내 스스로의 時局觀(시국관)에 따라 독자적 처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公人으로서 더욱이 政務職(정무직) 공무원으로서 스스로 정치적 소신에 따라 進退(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軍政에 반대한다면서 辭表를 낸 사람이 왜 5共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소위 「國保委 時代」가 지나고 헌정체제로 들어서면서 나는 또다시 정부에 참여할 것을 교섭받았다. 金瓊元(김경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헌정체제下의 행정부에 참여해 달라는 권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때부터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으로 1년9개월간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在野(재야)에서 反정부 투쟁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공무원으로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天職(천직)으로 삼아온 전문 행정인이었다.

나는 5ㆍ17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조치에 따른 軍政(國保委)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결단으로 사직을 하였으나, 國保委 時代를 마감하고 헌정체제로 환원된 상황에서 나의 天職으로 돌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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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3년3월호
申斗淳 前 崔圭夏 대통령 의전비서관의 高建 前 서울시장 주장 반박 공개장


申 斗 淳 당시 儀典秘書官
1939년 충남 예산 출생. 성균관大 정치학과 졸업. 국무총리 비서관 대통령 비서실 의전비서관 역임.



『首席의 사표를 받아 보관했다는 사람은 이미 故人이 되었습니다』


22년 前의 기억을 생생하게 재생하여 1980년 5ㆍ17 당시 숨가쁘게 돌아가던 시기의 기록을 備忘錄(비망록)의 형식을 빌어서 작성, 月刊朝鮮 독자들에게 소개한 글을 보았습니다. 친절하게도 당시의 사실에 증거가 된다는 愼判根 기사의 「사실확인진술서」와 1980년 6월7일자 대통령이 최종 재가한 해임 발령문서의 寫本(사본)을 별첨하여 신빙성 있게끔 쓰셨습니다.

그러나 高建 당시 政務首席(정무수석)께서 記述(기술)하신 내용 가운데 상식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몇 가지 의문을 제기, 讀後感(독후감)으로 이름 붙입니다.

首席(高建 총리 내정자)께서는 5ㆍ17 당일 비서실장실에서 수석회의 중 비서실장으로부터 계엄을 확대하는 비상국무회의에 배석하라는 지시를 받는 순간 「이는 軍政으로 政局이 가는 것이다」라고 판단하여 「평생 처음으로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덩어리」를 느껴, 아주 격한 음성으로 『내가 왜 거길 갑니까』라는 한 마디로 거부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비서실 신관으로 내려와서 비서실장 앞으로 「이제 정무수석으로서 해야 할 일이 없는 것 같아서 辭職(사직)하고자 한다. 辭職 후에는 지병인 신장결석 치료 차 入院(입원)하겠으니 나를 찾지 말아 달라」는 내용과 사직서를 간단하게 작성 동봉해서 비서실장실에 근무하는 李松容 비서관에게 전화를 하고 『중요한 문건을 올려 보내니 비서실장에게 明日(명일) 전달토록 하라』는 다짐을 받아 놓고 마침 대기 중인 수석의 관용차 기사인 愼判根씨를 통하여 중요 문건을 전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지적하고 싶은 이야기는 당신께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비서실장실에 근무했던 李松容씨는 1981년 지병인 위암으로 故人(고인)이 되어 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故 이송용(당시 4급 서기관, 행정관 - 총무처에서 파견 근무)씨는 성품이 온유하면서도 강직하여 업무수행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성실한 공무원으로서 비서실장실의 서무를 총괄하여 비서실장과 실장보좌관(1급)을 보좌함에 있어 자신의 임무를 정확하게 파악, 처리하는 유능한 공무원이었음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그분은 崔圭夏 대통령 中東 순방 당시 방문국 유공자들에 대한 훈장수여를 지원하기 위하여 일행과 함께 비공식 수행원으로 中東 순방을 마치고 5·17 하루 전날에 돌아왔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는 이유는 만약에 故人이 首席으로부터 사표를 전달받았다면 실장보좌관이나 비서실장에게 首席께서 인편에 보냈다는 중요문건(사표)을 반드시 전달하였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참고 : 당시 비서실장실 조직 - 비서실장(장관급), 보좌관(1급), 행정관 2명(4급), 여직원 1명이며 내부적 통제는 1급 보좌관이 하였음>.


왜 鮮明의 말씀이 자주 바뀝니까

지난 月刊朝鮮 9월호에 首席께서는 『1980년 당시의 행적에 대하여 오해가 있는 분들이 있어 해명한다』고 하면서, 당시 상황에 대하여 말씀하신 기사를 읽고, 首席이 말하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몇몇 분들인 최광수, 정동렬, 김상영씨와 제가 자리를 함께 하여 몇 차례 그 「辭表」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月刊朝鮮 2002년 9월호에서는 李松容씨를 거명하지 않고 「비서실장실 부속실장」이라고만 지칭하셨는데 당시 부속실장이라는 직명을 가진 사람은 본관에 令夫人(영부인) 부속실의 부속실장(4급 외무서기관, 權寧民 現 외무부 본부 대사)이 있었을 뿐이어서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잘 알 수 없었으나, 본관비서실에 근무하던 사람으로서는 당시 비서실장인 崔侊洙씨, 비서실장 보좌관 金相榮(現 전자신문 상임 고문)씨, 그리고 의전수석비서관 鄭東烈(現 LEGO 고문)씨, 본관 1의전비서관으로 있던 鄭基鈺(現 외교부 본부 대사)씨, 그리고 행정관 두 명이 실장실에 근무하고 있었음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金相榮 당시 실장 보좌관을 부속실장이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였으나, 金相榮 실장보좌관은 정무수석실의 首席께서 보낸 중요서류를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月刊朝鮮 11월호 기사 참고>

여하간 首席께서 밝히신 대로 중요한 문건이라고 행정관인 이송용씨에게 확인까지 하였다고 하신 그 문건은 수석비서관의 중요문건(사의 표명)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비서실장에게 전달되고, 또한 비서실장은 바로 이를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어야 할 중요 사안임에 틀림없는데, 실장실이나 본관에 근무하였던 사람들 중 생존해 있는 그 누구도 5월17일 오후 수석비서관 회의 후에 정무수석실에서 人便(인편)으로 올렸다는 서류를 받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참고:공식적으로는 당시 본관 출입 秘標(비표)는 제한이 있어 허가 없이는 본관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음>.

더구나 서울市長 재임 당시에 首席께서 싱가포르를 방문하였을 때, 대사관저에서 주최한 관저 만찬 석상에서 1980년을 회상하는 발언을 통해 1980년 당시 본관 1의전 비서실에 비서관으로 근무하였던 鄭基鈺 대사에게 『사표를 여기 있는 鄭대사에게 전했다』는 발언을 하신 일이 있었다는데, 이는 무슨 말씀이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위기에 처한 대통령을 떠난 政務首席이 高位 공직자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대사관저 만찬시에 이러한 발언 부분에 대하여 月刊朝鮮 11월호에 鄭淳台 기자가 鄭대사에게 그러한 발언 사실을 확인하였는 바, 鄭대사는 『그분(首席을 가리킴)이 무엇인가 착각한 것 같아 그 당시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이번에 게재된 비망록이라는 글에서 李松容씨에게 사표를 전달한 것이라고 하시려면 前에 하신 말씀이 착오라든지, 아니면 그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든지, 또 아니면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든지, 어떻든 그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없는 故人에게 핑계를 대는 그러한 적당한 말로 문제의 핵심을 얼버무리는 것이라는 誤解(오해)를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당시 비서실장이 首席의 사표를 어떤 경로를 통하여서든 간에 전달을 받았다면 무슨 이유로 대통령께 보고를 드리지 않고 청와대 밖으로 首席의 행방을 며칠씩이나 찾았겠습니까?

22년 前의 5ㆍ17 당시는 상황이 급변하던 위기 상황이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대통령의 국정수행을 보좌하는 핵심 참모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리인 정무수석 직에 있었던 분이 본인 개인의 信念(신념)이라고 하면서 대통령 보좌임무를 포기, 사표 하나만 던져 놓고 그 職(직)을 떠났다면 그러한 것이 公職社會(공직사회)의 倫理性(윤리성)은 제쳐 두고서라도 일반상식으로 보더라도 그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를 首席께 묻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사건이 한 집안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집안의 어른이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하였을 때, 자식으로서 설사 바깥에 나가 있다손 치더라도 귀가하여 수습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도리이지, 본인의 소신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하여 잠적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首席께서 所信(소신)에 반하여 사표를 던져 놓고 떠났다고 하시면서 그 처신이 民主化에 반하는 新軍部(신군부)에 저항한 장한 행동이었던 것같이 변명하고 계시는 것 같아 首席의 변명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공직자로서의 처신이 옳았다고 보는지 首席의 소견을 듣고 싶어 묻는 것입니다. 당시 대통령께서 寬仁厚德(관인후덕)하셔서 그렇지, 공직자의 근무지 이탈은 罷免(파면)에 해당하는 사안이 아닙니까?

설령 사표를 제출하였다고 하더라도 수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行政의 達人」이라는 首席께서는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계시리라 믿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5월17일에 잠적하고 난 후 20여 일이 지난 다음 6월7일자 解任發令(해임발령)이 마치 수석께서 新軍部에 저항하여 사표를 수리한 행위를 입증하는 것같이 변명하고 계시나, 청와대 비서실의 정상적인 조직운영을 위하여 金昶植(김창식) 총무처 차관을 政務首席으로 전보 발령하기 위한 선행조치로서 대통령께서 해임 발령을 하신 것이며, 청와대 조직의 성격, 즉 조직이 흐트러진 것을 세상에 알릴 수도 없는 정치적 조직이라는 성격상 수석비서관을 파면할 수도 없고 또 寬仁厚德하신 대통령의 배려였음을 아직도 모르고 계신다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작성했다는 建議書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首席께서 말씀하시는 「時局에 대한 建議書」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겠습니다.

건의문 작성을 주도하였다는 安致淳 비서관도 故人이 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涉外(섭외:정치)담당 비서관이었던 李在遠 비서관(現 건양대 교수)은 『본인의 기억으로도 당시 시국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은 하였으나 전면개각에 대한 기록을 첨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이 부분에 대한 당시 최광수 비서실장의 말에 따르면 崔圭夏 대통령께서 출국하시기 전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치일정을 단축하는 것과 계엄을 해제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여 보라는 지시가 있어서 비서실장께서 직접 각계 인사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방문하여 면담을 하였고, 이를 주관하는 정무에서 의견을 수렴하여 案을 올리도록 한 것이지 개각을 포함한 내용을 준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준비는 정부에서 마련한 헌법개정안의 전국 시·도 공청회를 취소하여 시간의 여유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中東 순방 얼마 전인 4월22일경 鑛山地帶(광산지대)에서 일어났던 소위 舍北事態(사북사태) 당시, 同 사태를 수습하고 돌아온 李起昌 民情비서관(現 변호사)이 현장에서 있었던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스러운 문제 등이 노출되어 불순세력의 개입을 의심할 만한 사태로 사회상황이 진전되고 있었던 사실도 보고드림으로써 실시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태 즉, 수습하기 어려운 사태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위기 상황이며, 전체적인 수습이 지체되면 결국 강력한 統治秩序(통치질서)가 다시 필요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보고도 있었고, 立案된 새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려면 계엄을 해제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시기를 공론화하여 시국을 전반적ㆍ일괄적으로 수습해 보려는 대통령 각하의 구상에 따라 출국 직전에 비서실장에게 지시, 立案(입안)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당시 5ㆍ17 前의 申鉉碻(신현확) 내각은 아무런 하자가 없어 대통령과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사이에 특별히 개각을 해야 할 사안도 없었다는 점도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하면 정무수석실에서 立案된 서류는 위와 같은 대통령의 指示(지시)에 의해 작성된 문서일 뿐 정무수석의 憂國衷情(우국충정)에서 나온 독자적인 시국 건의서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 정권에 出仕했습니까

다음으로, 首席께서 단순 정무관계만 주력하고 李元洪 民願首席이 정치를 담당하였다고 하여 首席께서는 행정적인 업무만을 주로 하신 것으로 記述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기술하였는지는 잘은 모르겠으나, 민원수석은 계엄업무에 관한 업무를 주로 관장하였고, 또 정치담당수석을 폐지한 것은 대통령께서 정치를 청와대에서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셨는데, 그 대신에 정무수석 산하에 정치담당 비서관 두 명(安致淳ㆍ李在遠)을 두어 改憲 업무와 政治日程(정치일정) 등을 정무수석실에서 취합하도록 한 것이 아닙니까?

또한 首席께서는 자신의 時局觀(시국관)에 따라 군정에 반대하여 사직을 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잠적을 하였으며, 그 후 合憲政府(합헌정부)에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본인의 천직으로 여기고 出仕(출사)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데, 이는 自家撞着的(자가당착적)인 말씀이 아닐까요? 계엄령 확대선포는 軍政이고, 소위 新軍部가 집권한 정부는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정권이기 때문에 軍政이 아닌 合憲政府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정무수석으로 계셨다면 그 당시 시행되고 있는 헌법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생각에서 정무수석을 하셨을 터인데, 계엄령 확대선포는 軍政이어서 사표를 던지고 출근하지 않았고, 그 직후에, 바로 계엄령 확대선포시의 군인 신분에 있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 정권은 合憲政權이기 때문에 所信에 의하여 出仕하였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자신이 보좌하던 대통령이 軍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포하는 계엄 확대선포는 헌법에 따른 것일 터인데 軍政이고, 그 건의를 했던 군인 출신들이 政權을 잡은 것은 軍政이 아니라는 그 논리는 바로 曲學阿世(곡학아세)하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까지도 버리고 새로 등장하는 新軍部를 嫌惡(혐오)하였다면 당연히 그 정권에 出仕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지를 묻고 싶습니다.

자신은 소위 말하는 민주화세력에 속한다고 하고 싶어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시다 보니 그와 같은 自家撞着的인 말이 나오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더하여 지적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무수석비서관은 당연히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首席께서는 5ㆍ17 당일, 비서실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하라고 특별히 지시한 것같이 말씀하고 계신데, 정무수석 비서실에서는 당연히 국무회의에 참석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민정수석비서실과 경제수석비서실 등에서는 司正협의회와 경제장관회의 등에 참석하게 되어 있는 등 그 직무가 주어져 있던 것인데, 특별히 참석하라고 하였다고 주장하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首席의 말씀 중 『5ㆍ17 國保委(국보위) 건의는 일단 유보했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國保委에 관한 사항을 首席께서도 알고 계셨다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國保委 설치와 관련하여 정무수석비서실에서는 어떠한 관련도 없었습니까? 관련이 있었다면 누구를 나무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과 위기상황에 대비한 國保委 관계를 알고 계셨다면 軍部에서 취한 조치에 대하여 분노할 위치, 즉 獨也靑靑(독야청청)한 위치에 계시지도 않았지 않느냐는 관점에서 묻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獨也靑靑한 위치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은 대통령을 위한 기구로서 비서실 직원 모두가 팀워크를 이루어 칭찬을 받든 비난을 받든 대통령 재임 중의 功過(공과)에 대하여 대통령과 運命(운명)을 같이해야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있고, 질서가 무너져 사회가 불안해지면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첫째 임무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비서실 직원이 위기 상황下에서 직무를 포기하고 행방을 감추었던 것이 무슨 훈장감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5ㆍ17 당시, 「나만이 계엄확대에 반대, 옳게 처신했고, 비서실장 이하 다른 동료 관계자들은 군부에서 하자는 대로 끌려갔다」는 感을 주는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위치에 首席께서 계시지 않았었음을 깨달으신다면, 자기 관리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위기 상황하에서 질서라도 잡아보려고 노력하고 고생한 비서실 직원 누구에게도 累(누)가 되지 않게 처신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국가 최고의 의사결정권자를 보필하는 사람은 그 직책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과 신념을 갖고 보필해야 한다는 것은 고금의 역사를 통하여 변함없는 원칙일 것입니다. 그러한 철학과 신념이 있었느냐 여부에 대한 평가는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있었던 고려시대 徐熙(서희) 장군의 일화를 통하여 볼 수 있듯,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설득함으로써 적의 침입을 막은 고사 등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1980년 당시에도 위험한 데모 현장에 직접 들어가 사태를 수습한 대통령비서실의 비서관도 있었음을 상기하는 바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직책을 포기했던 사실을 가지고 마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군부세력에 항거하는 방법이었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사태가 있고 난 후 바로 이야기를 하였다면 혹시 납득이 가나 세상이 몇 번 변하여 민주화 투쟁경력이 각광을 받는 이제 와서야 뒤늦게 사실을 그렇게 왜곡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철학이나 원칙도 없이 시류에 영합하려는 행위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讀後感을 정리하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 見蚊拔劍(견문발검: 모기를 보고 칼을 빼들다)이 될지 모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義를 중시하고 同志的 信賴(신뢰)를 돈독히 하여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무너져 가는 인륜적 大義(대의)와 책임 있는 言行一致(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여 흐트러진 國家紀綱(국가기강)을 바르게 하는 喚起國魂(환기국혼)의 자세를 보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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