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 3대혁명소조, 386 운동권


*2004년 1월에 쓴 글입니다.

홍위병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10년간 전도하여 그가 죽는 날까지 시황제의 권좌를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3대혁명소조는 김정일의 전위대로서 주체사상의 이행여부를 감시감독하여 현인신 김일성의 권좌를 공공히 하는 한편,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결혼해서도 같이 살면서 부모를 극진히 모신 장남이 그 집을 상속받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절대반지를 물려받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자생집단인 386 운동권은 조선말에 스스로 천주교도가 되어 교황의 대리자를 모시고 와서 정식 천주교도가 된 것처럼 공산권의 몰락 이후 심한 정체성을 겪다가 주체사상을 직수입하여 주사파의 전사로 거듭난 후, 민주를 내세워 김대중 정부를 탄생시키고 민족을 내세워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홍위병과 문화혁명 그리고 모택동은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넓고 깊게 연구되어 아직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원인과 전개과정과 결과는 하나의 역사로 정리되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가치관을 정립할 시기에 접어든 청소년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3대혁명소조와 386 운동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셋은 아주 유사하다.

3대혁명소조는 1973년 김일성이 만들어서 1974년 김정일에게 넘겨주었다. 그에 앞서 북한은 1969년 유일사상체제를 확립하고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그 해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의장 황장엽을 포함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41명이 100% 참석하여 100% 찬성으로 전세계 최초로 한 개인을 우상화한 헌법 곧 '주체사상(김일성) 헌법'을 제정했다. (김일성의 3년 상을 치른 후에 김정일이 주도하여 만든 1998년 헌법은 아예 그 前文에 김일성의 이름을 17번이나 사용하게 된다.) 중국은 이 무렵 문화혁명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전국토가 전쟁의 폐허보다 더 황폐해져서 만주의 중국인들이 심심찮게 북한에서 밥 한 끼라도 얻어 먹으러 목숨을 걸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던 때였다. 배불리 먹지는 못했지만, 그 때만 해도 북한이 중국보다 훨씬 잘 살았던 꿈 같은 시기였다.

북한판 문화혁명은 워낙 주도면밀하고 은밀하고 장기적으로 이뤄져서 그 실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지금까지 연구된 바도 거의 없다.

1973년 2월 김일성은 1971년에 시작된 6개년 경제계획이 지진부진하다는 이유로 사상과 기술과 문화 세 부문에 걸쳐 3대혁명소조를 만들었다.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까닭은 '주체' 사상이 부족하고 '주체' 기술이 뒤떨어지고 '주체' 문화가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4만 명 내지 5만 명 규모로 조직되었는데, 한창 나이의 학생과 기술자, 과학자, 당 일꾼이 20명 내지 30명 많으면 50명으로 무리를 지어 전국의 모든 일터에서 수령님의 대리인으로 감시감독하고 지도편달하게 하였다. 가난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인정의 샘이 점점 말라가고 정의의 저울이 한편으로 급격히 기울어지고 자유의 여신이 두레박을 타고 달나라로 올라간 상황에서 주민들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서 은밀히 주고받던 때에 절묘하게 3대혁명소조를 결성하여 전인민과 전공산당원을 정신없이 '뺑뺑이' 돌렸다.

'주체' 사상이 아니라 '민주' 사상을 받아들이고 '주체' 기술이 아니라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고 '주체' 문화가 아니라 '세계' 문화를 받아들여서 스웨덴 같고 일본 같은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할 때에, 전인민의 입과 귀와 머리를 하나의 쇠사슬에 묶어 멸망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김일성 가문만이 절대권력의 산봉우리에 거대한 황성(皇城)을 쌓아 놓고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릴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이다.

1974년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어 새로운 세대의 우상이 된다. 부자세습과 세대교체를 동시에 뒷받침하는 절묘한 장치를 갖게 된 셈이다. 그 해 10월부터 12월까지 그는 '70일 전투'를 벌인다. 기존의 모든 경제계획, 행정일정, 학사일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단 시작한 일을 늦잡지 않고 이악하게 달라붙어 불이 나게 해제끼며 쉼없이 새로운 혁명 과업 수행에로 돌진해 나가는' 이 속도전으로 300명에게 노력 영웅 칭호가 주어졌고, 15만 명에게 국가 훈장이 주어졌다. 김정일은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 받고 아무도 모르게 이 때부터 '당 중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안보회의 사무차장 이종석이 <현대북한의 이해>에서 인정했듯이 '대중의 사상을 자극하는 속도전인 경제방식은 결국 경제불균형을 심화시키고 동원적 성격 속에서 내포적 발전의 필수요인인 창의력에 바탕을 둔 기술 혁신을 어렵게 만들었다.' 쉽게 말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경제의 문외한인 김정일이 친아버지인 수령님로부터 절대권력을 일부 위임받아 일으킨 '70일 전투'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무차별 폭격을 맞은 도시처럼 완전히 결딴 나게 되었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북한의 최고 노른자위인 노동당의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에서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은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로 '문화혁명' 내지 '의식화 작업'을 성공하여 탄탄대로를 걷는다. 일제시대보다 못 살고 일제시대보다 자유가 없어도 그의 지위는 오히려 높아만 갔다.

알게 모르게 느슨해진 북한을 다시 다잡기 위해 2003년부터 다시 3대혁명소조를 재가동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중국과 대비하여 말하면, 홍위병을 내세우고 4인방에게 위임한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그가 죽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4인방이 쫓겨 나고 경제파이자 실리파이자 현실파인 등소평이 집권하면서 '성숙을 위한 큰 아픔'으로 나름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지만, 3대혁명소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장남인 김정일에게 위임한 김일성의 문화혁명 곧 주체혁명은 그가 죽은 후에도, 워낙 치밀하게 권력세습이 이루어져서 '멸망을 위한 고난의 행군'으로 그대로 이어져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김정일에게 중국식 개혁개방을 기대하는 것은 4인방의 강청에게 등소평이 주도한 개혁개방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망상이다.

386의 운동권은 중국이나 북한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문화혁명'이라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은 민주사회이기 때문이다. 군사독재라고 하지만, 한국은 중국이나 북한의 공산독재에 비하면, 천국과 같은 나라였다. 야당 국회의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개발독재국가인 싱가포르나 대만과는 달리 한국은 개발독재국가였지만 늘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야당 국회의원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았다. 상대적으로 독재의 수위가 훨씬 낮았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유겐트'가 조직될 수 없었다. 오히려 경제개발의 성공으로 중산층과 지식층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광주사태 이후 생겨난 386세대 운동권은 그 이전의 운동권과 전혀 달라졌다. 70년대만 해도 미국의 민주주의를 모델로 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대세였지만, 80년대부터는 사회주의를 모델로 하게 되었다. 80년대말 소련과 동구가 몰락하게 되면서 그들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한 때 이들은 방황했으나 그 이전까지 소수 세력이었던 주체사상파가 권력투쟁에서 최후 승리를 쟁취함에 따라 노골적으로 수령님과 장군님을 따라 배우게 된다.

현실적으로 이들은 구미에 딱 맞는 정권을 세울 수 없어서 비판적 지지를 내세우고 사표를 방지한다며 처음에는 김대중을 밀었다. 한 번은 실패했지만, 김영삼 정부 때부터 선배들을 내세워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김대중 정부 이후 정치계, 문화계, 시민단체, 노조, 학계와 사법계, 언론방송계, 심지어 군대까지 진출하게 된다. 마침내 노무현을 내세워 이들은 정부를 거의 접수하게 되었다. 무혈혁명에 거의 성공한 셈이다. 이제 국회만 남았다. 이들이 전역량을 2004년 총선에 기울이지 않을 리 없다.

대학의 교수들은 그러면 그 동안 무얼 했을까.
일부는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이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집단이 노사모이다. 아시다시피 여기에는 386 외에도 교수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대다수 교수들은 침묵했다. 왜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만있었을까.

386을 설복 시킬 이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학생과 거의 비슷하게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그들과 결국 사상의 출발이 같은 입장에서 그들과 논쟁해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국 이론만 줄줄 외웠을 뿐, 그것을 응용해서 현대 한국을 명쾌하게 설명한 이론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에 대해 학생들과 비슷하게 근본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는 오로지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 투사에 의해 달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누가 봐도 자랑스러운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못한 것이다.

제대로 된 스승이 없는 상황에서 순진하고 열정적인 학생들은 외국에서 이론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역시 외국인 북한에서, 세계의 공산주의가 다 무너져도 꿋꿋이 살아남은 북한에 감동을 받고 그 토대가 되는 이론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는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나눠서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20%의 소득의 5배밖에 안 되는, 거의 서구와 일본과 비슷하고 그 비율이 10배가 되는 미국보다도 월등히 평등한 나라라는 것만 말해도 학생들에게 일단 권위를 세울 수 있지만, 이것 하나도 아는 교수가 거의 없다. 늘 이론만 말하기 때문이다. 산업화를 통해 성장한 중산층이 없으면 어떤 나라도 민주화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 더 말하면, 이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면 386의 딱딱한 가슴을 상당히 부드럽게 할 수 있지만, 이런 정도로 말할 줄 아는 교수도 거의 없다. 소피스트만 무수했을 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었던 것이다.

홍위병이 사라짐으로써 중국이 부활했듯이 북한에는 3대혁명소조가, 짙게 드리운 그 영향력이, 한 마디로 말해서 김정일이 사라져야만, 겨우 밥 먹고 살 토대가 갖춰진다. 한국에도 386 세대의 운동권이 여론주도층으로 계속 남아 있는 한, 중국을 따돌리고 일본을 추월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전선동으로 나라가 제대로 일어설 수는 없으니까.

(2004.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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