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존경받는 舊 日本軍 파일럿

'飛虎 장군'의 기개는 지금도 자위대 파일럿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2016. 9. 23. 산케이(産經)신문

대만에서는 南部 지역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日本人이
神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있다. 일본통치가 시작되면서
대만의 카기현(嘉義県)에 부임한 모리카와 세이지로
(森川淸治郞) 巡査도 그 중 한 명이다. 모리카와(森川)
순사는, 학교를 세우고, 기근이 닥치면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증세 정책이 나오면, 정책에
반하여 경감을 주장했다.

▼이런 일 때문에 징계 처분까지 받게 된 모리카와(森川)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약 20년 후, 마을 주변에서 콜레라가
창궐한다. <주변 위생에 주의해 주세요>. 어느날 밤, 村長의
꿈에 나타난 모리카와(森川) 순사의 당부대로 따르자, 혼란이
수습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義愛公이라는 존칭을 붙여, 神體를
조각해놓기에 이른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대만의 臺南市에서 전사한 스기우라
시게미네(衫浦茂峰) 소위는, 대만 현지에서 '飛虎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 일본인 작가의 노력으로, 대만에 세워진
스기우라(衫浦) 소위의 神像이, 일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제로센(零戰) 전투기 조종사였던 당시 20세의 스기우라
(衫浦) 소위는, 來襲한 미군機를 요격하던 중에 被彈했다.
낙하산 탈출이 늦어진 것은, 기체가 집락촌으로 추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被彈된 기체를 가급적 멀리 떨어지도록
끝까지 조종간을 잡았기 때문이다. 기체가 공중에서 폭발하기
직전에 낙하산 탈출을 하여, 하강하는 도중에 미군機로부터
기총소사 세례를 받았다. 대만 현지 마을의 수호신이 된
경위다.

▼1999년 11월, 항공자위대 연습기가 사이타마(崎玉)현
사야마(狹山)市의 하천 부지에 추락하여 두 명의 자위관이
순직하는 사고가 있었다. 원인은 엔진 고장이었다. 조종석의
두 명은 거주지를 피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위험회피
비행을 했다.

▼추락 직전, 낙하산으로 탈출했을 때는 이미 고도가
충분하지 않아, 낙하산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飛虎
장군'의 기개는 지금도 자위대 파일럿에게 그대로 전수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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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펀드빌더 2016-09-24 오후 3:52

    일부 한국인들은, 일본과 관련된 미담 같은 것이 알려지면
    매우 당황해 하고 기분 나빠합니다. 심지어 가짜로 의심
    합니다.

    세상의 모든 미담은, '착한' 한국이 독차지해야 한다는
    식의 질투 같은 것이라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본과 제3국(다른 나라) 간의 이야기
    에도 신경질을 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항상 쓸데 없는 참견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나라에 위기가 닥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앞가림부터 잘해야 합니다.

  • 비단향꽃무 2016-09-24 오후 2:26

    점령지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했다 이 말인가?

    그렇다고 신으로 여길까?
    침략국의 관리와 침략군을?

    대만 남부 여기저기가 그런다고?
    일제강점의 역사가 있는 대만인들이
    그럴까하고 믿기지 않지만
    관련 자료가 있으면 보고 싶네.

    대한민국 사이트에는
    이런 분을 올리는거다 이 일본인아!!!



    후세 다쓰지
    布施辰治

    출생 1880년 11월 13일 일본 제국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
    사망 1953년 9월 13일 (72세) 일본
    국적 일본
    학력 메이지 대학 법학부
    직업 변호사, 사회운동가
    상훈 200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후세 다쓰지
    (일본어: 布施辰治 ふせ たつじ,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 출생)는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 출신의
    일본의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이다.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변호사 개업 후 인도주의와
    사회는 평등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일본내에서는 농민, 노동자, 부라쿠민 등의
    권리보호를 위해 투신하였고,
    국외에서는 한반도, 타이완 등 식민지에서의
    민족 및 민중의 권리보호를 위한 각종 사건에 투신하였다.


    그가 맡은 주요한 사건은
    도쿄시 전기공사 요금인상 반대소요사건(1906년),
    도쿄시 전기공사 파업투쟁(1911년) 쌀소동(1918년),
    천주 사건, 가마이시(釜石) 광산,
    아시오(足尾) 동산, 야하타 제철소 파업사건(1919년),
    군대 적화 사건(1921년),
    제1차 공산당 사건, 간토대지진의 아마카스 사건,
    박열 대역사건(1926년), 조선 공산당 사건,
    타이완 농민조합 소요사건등이 있다.


    한국병합을
    일본 제국주의의 자본주의적 침략으로 규정한 그는
    한국의 독립 운동과 민중 운동을 적극 지지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로
    독립 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1919년 재일 조선 유학생들이 선포한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 송계백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호를 맡았다.


    1920년대에는 의열단원으로
    일본황궁의 니쥬바시에 폭탄을 던진
    이중교 투탄의거를 일으킨
    김지섭의사의 변호를 맡았다.


    그는 또한
    관동대지진시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본군 계엄사령부와 경찰에 의한
    "조선인 폭동조작"이었음을 비판하다가
    치안당국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1926년에는 천황가 암살을 기획한
    이른바 대역사건의 모의로 체포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제국이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설립하여
    토지 조사 행위를 명분으로
    조선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을 때에는
    나주지역 농민들을 위해
    510만평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여,
    총독부의 토지조사행위를
    합법을 가장한 사기로 규정하였다.


    천민차별철폐를 위한 단체인
    형평 운동에도 참여하는등,
    한반도와 타이완의 식민지 민족문제와
    계급, 신분 차별 문제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광복후에는
    한신교육투쟁사건, 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등
    재일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다.
    1946년에는 광복된 한국을 위해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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