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料/47세 金泳三총재의 등장과 언론반응

1972년10월17일부터 1979년10월26일까지 계속된 朴正熙 대통령하의 유신통치기에 언론이 권력에 굴종하여 침묵했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의 신문철을 읽어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시기 언론과 야당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중단하지 않았다. 학생들과 종교계(특히 천주교 신교)가 對정권 투쟁을 했던 것 이상으로 기자들은 직무의 범위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는 기자들의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자유 언론의 생리이자 선비의 바른 말 하기 전통이 강한 한국적 풍토의 발로이기도 했다.

유신시대 언론의 정권비판은 야당의 투쟁 강도와 정비례했다. 야당이 정부 비판에 앞장서면 언론은 반보쯤 뒤에서 따라갔다. 야당은 치열하고 적나라한 黨內투쟁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도 했으나 全黨대회 같은 큰 집회에서는 대의원들이 놀라운 大義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들은 계보나 금전적 유혹을 초월하여 일반 국민들의 여망을 따르는 역사적 선택을 했다. 그 예가 1974년8월22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조직력과 금력이 가장 약한 47세의 金泳三씨를 총재로 뽑은 사건이다. 이 선택은 그 뒤 약10개월간 계속된, 朴정권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거센 도전기를 연 단초가 되었다.

8월23일자 거의 모든 신문은 이 사건을 1면 머리 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면 해설기사를 통해서 金泳三 총재의 등장은 '표로 표현된 야당성 회복'이라고 분석했다. 조선일보뿐 아니라 동아일보 등 주요신문의 논조는 강경투쟁노선을 내건 金泳三 총재의 등장을 반기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 8월24일자 '횡설수설'난은 김영삼 총재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능변으로써 만인의 심금을 흔들게 했던 것도 아니오, 권력과 술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오, 금전과 권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불퇴전의 기개로써 그의 궤도를 그대로 밀고나갈 경우 그의 앞날에는 오직 큰 희망과 大成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련다>
신문이 이런 찬사를 여당의 권력자에게 보냈더라면 그 기자와 신문은 독자들의 비판으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민심의 물줄기는 다른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조선일보 1면 해설기사를 소개한다.

<지난 4월 柳珍山 前 總裁의 別世를 계기로 시작된 신민당의 黨派싸움은 1백17일 동안의 치열한 接戰끝에 金泳三씨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3次 決選에 진출했던 金義澤씨의 사퇴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날 大會가 金泳三씨의 당선선포를 유보하고 散會함으로써 23일 속개회의에서 당선 선포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인지는 다소 불투명하다.
이는 金義澤씨가 자신의 사퇴를 밝힌 신상발언에서 23일대회에서 3차 決選투표 云云함으로써 이상한 여운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忠煥 전당대회의장은 2차투표 결과를 발표하고 2차 投票 최고득점자인 金泳三씨 등 兩金씨간의 決選투표에 들어간다고 선포한뒤 金義澤씨가 決選투표참가를 포기했으므로 法理論上 3차투표가 필요없이 金泳三씨의 당선이 확정되었다는 것이 신민당의원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이날 金義澤씨가 23일에 3차 決選투표를 하자고 끝내 고집하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사퇴를 선언한 것은 자신을 미는 舊珍山系그룹인 堅志同友會와 辛道煥씨 系의 참모들이 사퇴를 중용한 결과 때문이다. 이 참모들은 이미 大勢가 기운데다가 두 차례의 亂動으로 이들 파벌의 이미지가 흐려져 3차 결선투표를 해도 표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라는 판단과 大會亂動의 책임을 어느 정도 벗어보려는 데서 이같이 결정한 것 같다.
金泳三씨의 당선 확정은 신민당 대의원들이 系譜를 초월하여 그들이 평소 품고 있던 野黨性 회복이라는 열망을 票로써 표현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우선 다섯 후보 가운데 가장 강경한 對與자세를 취하고 있는 金泳三씨가 1차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데 반해 대의원들의 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하는 지구당 위원장을 가장 많이 확보(院內 14, 院外 7)하고 있는 李哲承씨가 末席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우선 들 수 있겠다. 국회부의장의 입장 때문에 국회 正常化 문제에 유연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고충을 안고 있었던 李씨가 예상외로 참패한 것은 이번 대회에 임한 대부분의 대의원들이 系譜보스의 지시에 움직이는 지구당 위원장의 지시에 抗命한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前無한 타락 金力선거라고 지탄되어온 이번 대회에서 금전과 거리가 먼 상태에서 고군분투해 온 金泳三씨에게 표를 몰아준 것은 대의원들이 金씨를 통해 野黨性회복이라는 그들의 여망을 실현시키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대의원들의 投票性向은 黨內派閥의 뒷받침이 없이 黨權투쟁에 뛰어든 鄭海永씨가 3위를 차지케 한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鄭씨의 표가 그의 財力의 영향을 입기는 했어도 黨權 투쟁과정에서의 鄭씨의 강경발언 및 鮮明論 제시가 대의원들에게 먹혀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대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를 입증할 수 있겠다.
이에 반해 대회 3일 전에 당수출마를 선언한 金義澤씨가 2위를 차지한 것은 마지막 단계에서 辛道煥씨 系의 加勢가 따르긴 했어도 우선 舊 珍山系의 底力이 아직도 상당하다는 점과 현상유지를 바라는 당내 온건파가 이에 첨가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당초부터 예상되기는 했으나 金義澤씨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당수 출마는 반사적으로 高興門씨에게 致命打를 안겨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金義澤 高興門씨의 票가 당초부터 同質的이었고 高씨를 지지하던 많은 대의원들이 金義澤씨의 출현을 계기로 金씨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번 당권투쟁이 先頭走者가 누구인지 모르는 暗中 모색 속에서 진행된 데 이어 2차투표에서까지 당선자를 내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측한 대로였다.
그러나 이들 후보가 2차 투표에 앞서 3명의 후보로 압축시켰다는 사실은 「예상된 混亂」을 신민당 스스로가 훌륭히 처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 大會에서 특히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3차 決選투표에 앞서 있었던 일부 당원들의 亂動이다. 이같은 亂動은 그동안의 신민당 전당대회 및 당직개편 때마다 고질적으로 나타나 언제나 신민당의 黨內民主主義에 먹칠을 해왔다는 점에서 볼 때 차제에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대의원들의 소리인 것 같다.
이번 대회에서 또 한가지 지적된 사실은 1차투표 결과 나온 46표의 무효표 중 30여표가 金大中씨에게 던져진 표인 데다가 일부 대의원들이 신상발언을 통해 당수후보등록제를 비난하고 나온 점으로 보아 黨內에는 아직도 상당수의 金大中씨 세력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金泳三씨는 현재와 같은 野黨의 존재보다는 다른, 野黨다운 野黨을 희망하는 대의원들의 표에 의해 당수로 확정된 만큼 金씨가 앞으로 이같은 대의원들의 여망과 現時局과는 어떻게 매치시키느냐가 그에게 주어진 첫 宿題가 아닐 수 없다.
또 前 總裁인 柳珍山씨가 黨內의 확고한 조직을 기반으로 국민의 비난에도 당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왔다는 점에서 볼 때 이른바 「政治勢」에 의해 大權을 잡은 그가 어떻게 잡음 없이 당을 이끌어 나가느냐도 그에게 안겨준 큰 시련의 하나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동안 金씨를 지지한 인사들이 院內에선 몇몇의 少壯의원들 뿐이었다는 점에서 그와 대결했던 후보 및 당내 重鎭들과 어떻게 융화를 이루어 당을 이끌어 나가느냐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의 하나라고 하겠다.安秉勳 기자〉



金泳三 총재의 등장
*조선일보 1974년 8월 23일 기사


亂動 부른 黨權熱風
- 新民全黨대회 現場중계

大會 1시간 前부터 붐벼

제 1야당 신민당의 전당대회가 열리는 明洞 한복판의 예술극장 부근은 대회시작 1시간 전인 아침 8시부터 붐비기 시작했다. 이 시각부터 입장을 서두르는 대의원들과 오가는 행인들,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극장부근에 모여든 시민들로 혼잡한 거리는 교통순경들의 정리로 간신히 승용차가 빠져나갈 정도였다.
대회장 입구에는 20여명의 청년당원들이 출입구 질서정리를 맡았고 移動마이크까지 동원된 가운데 입장하는 代議員들의 신분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대회장 오른쪽에는「受權政黨으로 전진하자」왼쪽에는「民權투쟁의 前衛가 되자」는 플래카드가 붙었고 壇上에는 民主共和黨, 維新政友會, 民主統一黨, 무소속 의원회와 金在光의원이 보낸 5개의 큰 화환이 놓여있었다.
냉방시설이 되어있지 않은 식장 안은 대회의 熱氣와 후보의 角逐戰으로 찌는 듯이 더웠고 1층과 2층에 지역별로 자리를 잡아 앉은 代議員은 웃옷을 벗은 채 中央黨에서 나눠준 부채로 열심히 더위를 쫓고 있었다.
9시 30분 개회선언과 함께 진행되던 大會에서 李尙信 당기 위원장이 지난 한 해의 신민당의 財政收入이 2억 3천만원이라고 보고하여 신민당의 살림살이가 쪼들리는 것만으로 알고 있던 관객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옳소, 집어치우라” 뒤범벅

순조롭게 진행되던 대회는 10시 35분 黨憲改正案을 상정한 뒤부터 熱을 띠기 시작했다. 黨憲심의특위 소집책인 李忠煥의원이 개정 黨憲의 골자를 간략히 설명했고 代議員들로부터도 이에 대한 異議가 제기되지 않아 손쉽게 넘어가는 듯싶었으나 회의도중에 참석한 鄭一亨의원이 黨憲에 대한 질문이 있다고 발언을 요청한 데서부터 문제가 발단. 발언권을 얻어나간 鄭의원은 안주머니에서 미리 써온 원고를 꺼내 黨首후보의 등록제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鄭의원은 黨首후보 등록제는 당원이면 누구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도록 한 黨憲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불법적인 黨規라고 단정하고 이러한 후보 등록제는 金大中씨 표가 나올 것을 막기 위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의혹을 많이 준다고 비난했다. 그는 신민당이 이런 짓이나 하니 사꾸라 御用野黨이라는 비난을 받는다면서 나도 이제 黨을 떠날 때가 온 것이 아닌가고 身上문제까지 건들였다.
鄭의원의 발언이 시작될 무렵에는 代議員석으로부터 “옳소” 하는 박수와 “집어치우라” 라는 야유가 함께 터져나와 뒤범벅이 됐으나 그의 발언이 진행되는 동안 어느덧 장내는 조용해졌고 부채부치는 소리와 함께 鄭의원의 발언은 무게있게 전달되는 인상이었다.
술렁댔던 분위기는 전당대회의장 선출을 뜻하는 임원개선에 들어가자 代議員들의 利害가 첨예화하기 시작, 일부에서는 權中敦 전당대회의장을 유임시키자는 의견이 나오고 투표를 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가운데 후보들은 대리인 한 사람씩을 선정, 조정을 위임했다.
대회장 막 뒤에서 숙의를 거듭한 朴容萬 (高興門 후보대리) 文富植 (金泳三 후보대리) 嚴永達(鄭海永 후보대리) 千命基 (李哲承 후보대리) 黃明秀씨 (金義澤 후보대리) 등은 李忠煥의원을 전당대회의장으로 추대할 것을 합의했다.
宋完英의원이 이러한 사실을 대의원들에게 알렸으나 일부대의원들은 ‘막후정치를 배격하라’고 고함을 질러 혼선이 계속되었다.
두번째로 李重載의원이 올라가 대의원들에게 합의에 따라줄 것을 호소하고 후보들도 이에 협조, 결국 李忠煥의원의 口頭추천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긴장됐던 대의원석에는 1차 關門을 무사히 극복했다는 自信感과 安堵感이 번졌다.

“登錄制는 惡法” 소동

오전 11시 25분 黨首선출 안건이 상정되자 대회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전당대회의장의 의안 상정이 선포되자 웃옷까지 벗고 나선 金應柱 대의원과 朴永祿 의원이 단상으로 올라가 발언권을 요구했고 좌석에서는 “발언을 주라” “주지 말라” 는 고함이 함께 나왔다.
抱川-加平-湜川 지구당의 鄭在寅씨 등 4~5명의 대의원들은 흥분을 참지 못하는 듯 “등록제는 惡法”이라서 시위라도 하듯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혼란을 더했다.
전당대회의장이 金應柱 대의원에게 발언권을 주어 분위기가 간신히 가라앉았고 金대의원은 소수의견도 반영해야 한다는 이유로 등록제 폐지를 요구했으나 黨規 개정에는 찬성자의 連書를 받아 書面으로 3일 전에 제출해야 한다는 議事규정을 충족치 못한다 하여 문제제기로 끝나고 말았다. 의장의 '黨首 선출은 黨憲에 따라 발언없이 無記名투표로 들어간다는 선언과 함께 壇上에는 투표함과 記票所가 차려지고 투표요령과 유무효 판정기준 등이 설명되었다.
단상에 자리잡은 黨職者들이 壇下로 내려오고 후보별로 선정된 투표 및 鑑票요원들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투표는 金義澤 당수권한대행, 權仲敦 前 전당대회의장을 비롯, 총재단, 지도위원, 정무의원, 국회의원, 지구당 의원장 순으로 진행되었다.
단상 오른쪽과 왼쪽에 마련된 등록소에서 대의원증과 주민증을 제시한 뒤 투표용지를 교부받아 했다. 호명되는 대의원중에는 金大中씨의 이름도 들어있었으며 安養 교도소에서 복역중인 趙尹衡 , 金相賢, 趙淵夏, 金漢洙, 李鍾南씨 등의 이름은 빠르게 불려 지나갔다. 투표하는 대의원중에는 政界 일선에서 물러나있는 李相喆 고문과 10月維新후 政治에서 손을 땐 朴鍾律씨의 얼굴도 보였다.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후보들은 사방을 살피면서 분위기 파악에 분망했고 그들의 조직 참모들은 투표하기 위해 단상으로 나가는 대의원들을 붙들고 귀엣말을 주고 받는 등 최후의 호소를 하는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12시가 되자 미리 배부된 대의원들의 식권이 빵과 우유를 넣은 점심식사 봉지와 교환됐으며 회의장은 후보들의 초조감, 담배연기, 빵봉투 뜯는 소음 등으로 사막에서의 전쟁을 방불하는 더위가 짓눌렀다.

白紙-金大中씨 票도

오후 1시에 呼名이 끝나자 곧이어 투표종료가 선언되고 개표가 선언됐다. 투표자 7백 29명, 투표용지교부 7백 29장이라는 대조 결과가 발표되고 후보 이름 밑에 붓 뚜껑으로 기표된 투표용지가 개표책상에 쏟아졌다. 보도진들과 개표종사원들로 40여 평의 壇上은 완전히 메워졌다. 투표용지를 점검한 결과 투표자보다 2장이 많아 관계자들을 긴장케 했으나 사무착오임이 곧 밝혀졌다.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후보들은 초조한 빛으로 신문을 보거나 대회장을 거닐었다. 후보참모들은 개표의 중간중간 결과를 후보들에게 보고하여 혼잡을 빚기도 했다. 투표용지 중에는 白紙 투표와 金大中이라고 씌어진 것도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개표가 반 이상 진행되자 金泳三씨의 우세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기쁨에 넘친 金 후보 지지자들은 단상과 단하에서 손으로 V字와 동그라미 표시를 지으며 승리를 기뻐했다. 그와 동시에 각 후보참모들은 2차 決選 투표준비를 위해 이곳 저곳에서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실로 傳統野黨의 새 旗手를 정하는 幕後의 密談이 이날의 하일라이트를 받은 숨가쁜 순간이 펼쳐진 것이다.
오후 2시25분 1차 투표결과가 발표되자 회의는 停會된 가운데 각 후보간의 제휴협상이 본격화했다. 金泳三씨는 高興門 부총재와 같이 기자석 부근에 와 귀엣말을 주고 받았다. 이때 주고받은 얘기는 3일 전에 있었던 합의 사항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金泳三, 高興門 씨는 이미 대회 3일 전 南山外國人 아파트村에 있는 喜來登 에서 金泂一씨 주재로 만나 1차 투표에서 단 1표라도 많은 사람을 밀어주기로 했고 21일 밤에도 이들 3者가 서울클럽에서 만나 이를 다시 확인했다.
1차 투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鄭海永씨와 자리를 같이한 金씨는 鄭씨가 안 포켓에서 제휴에 관한 서류를 내놓으면서 제휴문제를 거론했으나 金씨는 “우리끼리 잘해보자”면서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 金씨는 이때만 해도 鄭씨의 표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아래 이 같은 태도를 취한 것 같다.
1차 투표가 끝나자 辛道煥 사무총장과 李敏雨 원내총무는 鄭海永씨와 小道具室 에서 만나 제휴를 요청했으나 鄭씨는 “일단 2차 투표에 임하겠다”고 거절했다. 이에 앞서 鄭씨 측의 白寬玉씨가 黃洛周의원에게 다가와 제휴문제를 논의했는데 이들의 대화결과에 따라 金씨와 鄭씨가 幕뒤로 돌아갔으나 주변에 사람이 많아 협상얘기를 꺼내지도 못한 채 2차 투표에 들어갔다.
이 때의 협상내용이란, 白씨가 黃의원에게 제시한 鄭씨에 대한 向後의 자리보장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李哲承씨는 宋元英, 吳世應 의원 등과 논의한 뒤 金義澤씨와 회의장 구석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1차 투표 결과를 보고 李哲承씨는 겉보기에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李씨의 측근들은 鄭一亨씨의 金泳三씨 지지 선언으로 뒤집혔다고 화를 냈고, 宋元英의원은 “鄭씨 선언이 대세에 영향이 없었다” 고 말하기도 했다. 李씨는 곧 참모 모임을 열어 金義澤씨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敗者는 쓰라림 딛고…

오후 3시 회의는 막후협상에서 사퇴를 결정한 高興門씨와 李哲承씨의 신상발언으로 속개됐다. 高씨와 李씨는 각각 金泳三, 金義澤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여 대의원들로부터 우뢰 같은 박수를 받았다. 신상발언을 끝낸 高씨는 金씨와 두 손을 움켜잡고 높이들었고 李哲承씨도 金義澤씨와 마찬가지의 포즈를 취해 敗者의 쓰라림을 딛고 깨끗하게 협조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투표는 1차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돼 4시 30분에 끝났다.
2차 투표의 집계가 계속되고 金泳三 후보가 當選圈엔 미달되는 優勢로 나타나자 회의장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黨憲에 따라 응당 뒤따를 3차의 決選투표가 있는 대신 회의를 23일로 연기하려는 세력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회의가 하룻밤 연기되면 資金 등 여러 면에서 열세인 金泳三 후보가 불리하리라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역사를 밤에 이루어 보자” 는 책략이 꼬리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靑年黨員 司會席 발로차

李忠煥 대회의장이 2차 투표결과를 선포하자 金 후보 지지자들의 함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李의장이 “최다득점자인 金泳三 후보와 차점자인 金義澤 후보를 놓고 決選투표를 하겠다” 고 선포하자 폭력배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평소 辛道煥 사무총장을 따른 것으로 알려진 崔某, 金某 등 청년당원들이 壇上으로 뛰어올랐다.
이들은 李의장과 盧承煥 부의장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주먹 세례를 할 듯한 협박적 자세를 취했다. 일부는 사회석을 발로 차고 의자를 뒤엎었다. 연기하자는 것은 점심에 빵 한 조각 먹어 배가 고프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때가 5시 25분. 暴力 등살에 밀려 李의장도 壇下로 내려와버렸다. 이와 때를 맞추어 예술극장長 金會九씨가 辛道煥 사무총장을 찾아와 장소를 비어달라고 요구했다. 저녁 스케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金泳三후보계의 黃洛周의원이 극장 사무처에 가서 확인해보니 저녁 스케줄은 하나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辛총장이 대의원들에게 “장소를 내달라는 요청이 있다”고 마이크로 말하다가 야유만 받았다. 어떤 대의원은 “스케줄도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극장측과 金義澤, 辛道煥씨의 손발이 어떻게 그렇게 잘 맞아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폭력사태로 회의가 중단되자 대의원석에서 “빨리 속개하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고 “내일 하자”는 요청도 간간이 들렸다.
金泳三후보가 壇上에 다시 올라간 李의장을 찾아 올라가 속행을 요구했다. 대의원석에서는 예의 靑年당원들과 대의원들간에 산발적인 시비가 붙었다. 카메라맨들은 현장을 잡기에 바빴다. 흥분된 대의원들로 인해 대회 분위기가 흉흉하기까지 했다.

“나는 죽어도 野黨 살아야”

6시 10분, 李 대회의장이 속개를 선언한 뒤 “조금 전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선 안 된다. 내게 物理的 작용이 있었다고 해서 방망이 친 것을 철회하지 않는다”면서 決選 투표에 들어간 두 후보가 협상을 하라고 제의했다. 이에 따라 金泳三씨는 金義澤씨 자리로 찾아가 “표 결과에 승복하기로 서약하지 않았느냐, 이것은 누구 당수 못되게 하는 장난이 아니냐”면서 결선투표에 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金義澤씨는 “내일 해도 표 변동은 없는 것이 아니냐, 지금 장내가 소란하니 내일 하자”고 맞섰다.
이 같은 대화가 끝난 뒤 金泳三씨는 李대회의장에게 올라가 눈물을 머금고 내일 대회를 감수할 테니 신상발언을 달라고 얘기했다. 壇下에서 이 기미를 본 高興門, 李重載씨는 “무슨 얘기냐, 오늘 해야 된다”면서 黃洛周, 文富植 의원에게 신상발언을 못하도록 말리라고 했다.
高씨는 “내일하면 다 틀리는 것”이라면서 “밤을 대회장에서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결선투표를 해야 한다”면서 黃洛周의원의 등을 壇上으로 밀어 黃의원이 金泳三씨의 신상발언을 못하게 막았다. 兩派의 팽팽한 대결로 시간만 끈 채 결선투표에 들어가지 못하자 金씨는 黃의원과 崔炯佑의원과 숙의 끝에 신상발언을 하기로 결심했다.
장내를 진동하는 박수가 터졌다.
그가“나 金泳三이는 죽어도 신민당은 죽을 수 없다는 결심으로 눈물을 머금고 대회 연기에 합의했다”고 외쳤을 때 특히 많은 박수가 나왔다. 그의 말은 차라리 절규와 울음이었다.
이무렵 장내 분위기는 완전히 기울어 연기를 책동했던 세력은 그 분위기에 짓눌려 버린 듯했다. 金후보의 발언이 계속되는 동안 金義澤씨의 후보 사퇴 소문이 갑자기 장내에 퍼졌다. 辛道煥, 柳致松의원과 申東準 前 柳珍山 총재 비서실장이 막후에서 숙의를 한 뒤 申실장이 대의원석에 앉아있는 金義澤씨에게 급히 뛰어 간 뒤 사퇴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金후보가 이들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대의원들과 보도기관은 이 놀라운 소문 확인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大會 끝난 것 아니다” 아리송

金義澤씨가 신상발언에 나섰다. 정말 사퇴표시가 나올 것인지 가득한 의문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약 10분간 계속된 金후보의 말은 “黨職에 연연하지 않는다” 는 말과 “소요가 본의가 아니었다” 는 해명이었다. 말미에 가서 본론이 나왔다. “나는 次點者 자격을 포기한다. 결선에서의 兩후보에서 탈락시켜달라. 이것으로 대회가 끝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일 대회에서 이에 따른 의사 절차를 밟아달라”고 말했다.
명확한 뜻이 선뜻 전달되지 않아 대의원들은 서로 되물었다. “23일 투표가 있는가 없는가” 하고. 저녁 7시 10분 파장의 혼란속에 산회가 급히 선포되었다. 李의장은 “내일의 일은 지금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 내가 이곳에서 단정해서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있다”면서 총총히 자리를 떴다.
金泳三 후보 지지자들은 당선 선포만을 남긴 金씨를 이왕법의하듯 둘러싸고 대회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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