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와의 車中 대화 한 토막

5.16군사혁명의 참여자이자 공화당원내총무 출신인 김용태(金龍泰)의 자서록을 잠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박정희를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대로 옮겨 본다.

1975년, 포항종합제철 확장공사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항으로 내려가면서 나눈 朴 대통령과 김용태 원내총무의 차중 대화 내용이다.

“김 총무! 자네가 처음 당선돼서 국방위원을 하던 때가 1963년이었던가? 그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던 때라 나라살림이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 국군의 살림도 말이 아니었지. 이제는 3군 사령부까지 신설되어 우리 예산으로 운용하게 됐단 말야…”
“……”
“자네가 국방위원으로 처음 국정감사를 나갔을 때 원주, 대구, 광주 등지에서 지휘관들에게 술대접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대견스럽게 생각했네. 5·16 전에는 국정감사에 나온 의견들이 격려는 고사하고 심한 사람은 욕지거리까지 했단 말야! … 내가 그때 자네에게 술값을 단단히 변상한 것으로 아는데…”
“네! 제가 군인들에게 대접한 술값의 세 곱절은 받았습니다. 국정감사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부르시어 청와대에 갔을 때 〈자네는 무엇 때문에 군지휘관들에게 술을 사주고 다니는 거야〉 하시며 나무라실 때는 크게 잘못된 줄 알고 간이 콩알 만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돈을 주시어 그 뒤로는 군인들과 더욱 자주 어울렸습니다.”
“오늘의 우리 국군은 세계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자랑스러운 강군이 됐어! 자유진영 군대로선 실전경험도 했고, 다만 장비가 현대화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야. 방위산업을 일으켜서 최신무기들을 우리 손으로 모두 만들어야 하는데 미국이 찬성을 하지 않는단 말야!”
대통령께서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여보게 신발 벗게나. 장거리를 뛸 때는 신발을 벗는 것이 편하이” 하시며 손수 껌을 까서 주시기도 한다. 백발이 성성한 나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시며 무엇인가 솟구치는 고민을 억제하고 계시는 모습이 역연하게 보였다.

“용태! 벌써 대전이구먼! 자네 고향이 대덕군 기성면 산직리(大德郡 杞城面 山直里)라고 했지? 자네 출생지 말야! 안평산(安平山)이란 높은 산이 있고 용바위라는 물맑은 곳도 있다고 그랬지? 자네는 분명 안평산의 영기를 받고서 세상에 태어난 걸세…”
“각하! 어떻게 저의 고향을 그처럼 소상히 알고 계십니까? 정치인들의 신상명세서에 고향까지 조사를 하십니까?”
“자네가 말해 주지 않았나! 5대 대통령 선거 때 기차를 타고 호남선을 오르내릴 때 대전역을 떠나 흑석리(黑石里)역이던가 그곳만 지나면서 자기 입으로 고향 자랑을 해 놓고서… 조사는 무슨 조사!”
“각하! 죄송합니다. 각하의 기억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대전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다가 점점 사라져 가다. 멀리 보문산(普門山)이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고 대전을 지키고 있는 것만 같다.
“자네는 5·16혁명 후에 정치인은 결코 되지 않겠다고 했지? 민병도씨와 조림사업이나 하겠다고 고집부릴 때 내가 공연히 자네 앞길을 꺾어 놓은 것 같아. 내가 그때 자네를 왜 그렇게 야단까지 치면서 자네 전도를 막았는지 모르겠단 말야.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는 자네의 생각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몰라!”
이렇게 말하며 차창 밖을 바라보시는 대통령은 〈정치무상〉 〈무정세월〉을 되씹고 계시는 듯싶었다. 5·16혁명 후 벌써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빈곤추방을 위해 조국근대화의 이상을 향해서 경제건설의 기적을 창출하고 막강한 국방력을 길러놓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 어느덧 15년, 남들은 긴 세월이라 할지 몰라도 혁명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짧고, 혁명의 목표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많은 일이 가로놓여 있었다.
자동차는 어느덧 추풍령 마루턱을 달리고 있었다.
“용태! 용태! 너무 달리지 말고 천천히 가!” 하고 말하자 앞자리에 앉아 있는 정인영(鄭仁永) 경호처장이 뒤를 돌아본다. 나에게 무엇을 천천히 가라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사람아! 자네만 용탠 줄 아나! 저 운전기사도 김용태(金容太)란 말야!”
그래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가슴이 아프다 못해 찢어지는 것만 같다. 그날 관1호차에 탔던 박정희 대통령, 정인영 경호처장, 김용태 운전기사 등, 나만 빼놓고 전원이 金載圭의 반역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추풍령 휴게소에서 잠시 머물러 이상국 장군의 영접을 받았다. 차 한잔을 마시고 다시 남으로 달린다.
“용태! 피곤하지 않은가? 졸리거던 기대서 한숨 자게.”
“저는 괜찮습니다. 각하께서 좀 쉬시지요.”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지 자꾸만 옛일들이 머리에 떠오르는구먼!”
“각하! 종일 차만 타고 가시면서 시상(詩想)이라도 떠 오르시는지요.”
“자네나 나는 정치 부적격자(不適格者)인지도 몰라.”
“……”
“자네는 경성사범이고 나는 대구사범이니까 훈장 노릇이나 할 것을…”
“각하! 지금의 막중한 책무를 후회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후회한다기보다 항상 자신의 운명이 타율에 의해서 가식(假飾)이 될 때가 있어서…”
“각하! 사람은 누구나 지난 일을 후회할 때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1980년에는 나도 대구로 내려가 훈장 노릇이나 해야겠어. 그때가 되면 누가 정권을 맡아도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겠어?”
“……”
“한국의 정치풍토가 개선되기에는 너무나 큰 응어리들이 있어. 초과학(超科學)으로도 어렵고 도덕·윤리로도 고치지 못할 고질병 같아. 불신과 아집, 흑백논리(黑白論理)와 극한투쟁으로만 치닫고 있으니 조선당쟁사(朝鮮黨爭史)와 무엇이 다른가. 조국을 근대화하고 새마을운동으로 가난을 없애놔도 국민총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朴 대통령은 지난 15년 동안 자신을 불태워 민족중흥에 이바지해 왔으나 정치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 데 대한 회의와 아쉬움에 잠기는 것 같았다. 특히 대구가 가까워지자 대구사범학교 시절, 6·25 때 대구 육군본부에서의 군복무, 그리고 육영수 여사와의 결혼 등 지난날을 회상하시며 만감에 휩싸이는 듯했다.

“자네도 정치에 증오를 느끼고 있겠지? 공화당 창당 때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하고, 부인은 낙태까지 당하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항명사건, 불충사건, 복지회사건 등으로 공화당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자네는 분명 풍운아여! 내가 한일회담을 할 때 자네를 〈두목〉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것은 다 이유가 있다네…”
“각하! 왜 하필이면 오늘따라 저의 불명예스러운 상처를 한꺼번에 털어놓으십니까. 저에게 인생무상(人生無常)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아니면 정치무상(政治無常)을 일깨워 주시렵니까?”
자동차는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경주를 거쳐 포항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용태! 사람이란 내일을 모르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지난 15년을 되돌아보면 난들 정치를 알아서 했나? 좀 쓸 만한 인재가 나타나면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죽여야 한다느니, 제거해야 한다느니 하는 보고만 올라오니 내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처리를 해야만 했겠나.”
“……”
“용태 자네에게 내가 빚을 너무 많이 졌네! 6·25사변 때 대구 내집에 머물고 있을 때 나는 이미 자네의 충청도 기질을 알아챘네! 지난 15년 동안 정치문제가 있을 때면 자네에게 매질을 해서 불을 끄곤 했어! 이제는 한국정치의 작태를 뒤늦게나마 좀 알 것만 같네. 이젠 자네에게 매질을 못하게 할께!”(중략)
용용(溶溶)한 한강수가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을 무렵 우리는 다시 서울로 되돌아 왔다. 이틀간의 여행거리도 멀었거니와 행사도 중요한 것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을 모시고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 분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순교자적 정신을 우리 국민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 그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붓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조국은 한강처럼 끊임없이 발전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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