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10월7일 朴正熙 대통령은 하루 전에 일어났던 태국의 군사 쿠데타를 보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10월6일 오후 3시 태국에서 무혈 쿠데타가 발생. 1973년10월 학생들에 의해 군정이 붕괴되고 그 후 불안과 혼미를 거듭하면서 민정의 출범을 보았으나 결국은 민정이 붕괴되고 군정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서구식 민주주의가 活着을 하자면 얼마나 힘이 들고 至難하다는 것을 또 한번 실증한 셈이다. 그 나라의 실정을 무시한 형식만의 모방은 십중팔구 실패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뼈저린 체험을 했고 또 다른 나라의 예를 수없이 보아왔다.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는 나라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성장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유신체제는 이러한 귀중한 교훈에서 우러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는 한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는 역사발전 단계상 前근대적 봉건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고 둘째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가 계속되는 비상사태임으로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의 수호를 민주주의의 수호보다 위에 놓은 것이다. 생존의 문제가 자유의 문제보다 우선한다고 보았다. 그런 그도 민주주의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1961년 군사혁명 때부터 박정희는 한국사회의 당면과제를 <봉건 對 근대화> 시각으로 보았다. 즉 봉건적 잔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전략을 밀고나가 富國强兵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야당세력은 한국사회가 당면한 당시의 역사적 과제를 '민주 對 反民主의 구도'로 해석했다.
혁명에는 혁명의 논리가 있고 그것은 혁명적 역사관에 기초한다. 1961년의 한국을 봉건사회, 당시의 집권세력인 민주당을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를 쓴 봉건적 잔재」라고 해석했다는 데 박정희의 혁명성이 있다. 그는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4·19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라고 썼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유당을 反민주, 민주당을 민주로 보았는데 박정희는 두 당이 똑같이 내건 민주주의를 가면으로 규정하고 그 뒤에 있는 부패와 무능을 봉건적인 것, 전근대적(前近代的)인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런 시각은 다리가 안무너지고 있는 것은 교각(橋脚)때문이란 피상적 시각을 무시하고 「다리가 안무너지는 것은 구조물의 역학공식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식의 보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접근법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불가피성을 부인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 민족성과 사회 발전단계에 맞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을 꿈꾸었고 야당은 서구식 민주주의 이외의 대안(代案)을 거부했다. 민주주의의 주체적 수용과 무조건적 수용이 대치하는 가운데 박정희 근대화의 산물(産物)인 중산층은 한국적 민주주의보다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또 권력의 남용과 권력의 비호에 익숙해진 기회주의적 정치세력밖에 남기지 못해 그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어나갈 기수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박정희의 실용적 정신은 명분, 허례, 과시, 미신을 배격하는 실리(實利)·근검(勤儉)·소박(素朴)한 자세로서 나타났다. 1960년대에 활약했던 혁명가들은 대부분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자력갱생, 수입대체 정책으로 나아갔다. 나세르, 카스트로, 김일성, 네윈이 대표적이다. 이런 정책은 대중을 선동하고 끌고가는 데 있어서는 퍽 유리하다. 박정희는 인기가 별로 없는 대외개방적 수출입국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그는 매판자본의 비호자니 매국노니 하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민족주의란 명분을 버린 데 대한 응징이었다.
1970년대 공고(工高)를 정부에서 육성하고 있을 때 工高교사들이 대기업체로 뽑혀가는 일이 잦아 당시 문교부에서 규제방안을 올렸다. 박정희는 화를 내면서 『돈 많이 준다는 데로 가는 게 당연하지 왜 그걸 막느냐』고 했다. 기생관광을 단속해야 한다는 건의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도 돈을 벌면 그 짓이 창피해져서 하라고 해도 안할 거야』라고 말했다. 이 두 마디 말에서 엿볼 수 있는 박정희의 사고방식은 시장원리에 대한 신념,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직시(直視), 그리고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생긴다」는 경제 중심적인 체계를 갖고 있다.
박정희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중앙청으로 계속 쓰고 낡아서 삐걱대는 총독관저를 집무실로 쓴 것도 「누가 지었건 건물은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건물에 무슨 죄가 있나」라는 실용적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명분론적으로 보면 「일제가 만든 건물을 때려부수면 민족정기가 살아난다」는 非과학적 처방이 나온다. 민족정기란 막연한 관념이 1조원(새 박물관 신축경비 등)이나 되는 실리를 무시하게 된다. 확실하게 보병 1개사단을 만들 수 있는 경비와 불확실한 민족정기 회복, 이 둘 가운데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결국 그 인간의 교양 문제이다. 실용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은 그 정신이 갖고 있는 정직성과 과학성 때문이고 명분론이 열등한 것은 여기에 내재(內在)된 허위와 사대, 그리고 미신성 때문이다.
권력을 잡고도 부패하지 않은 魂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생긴다」는 말은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이것은 또 생산양식이란 하부구조가 정치 사상 의식 법률과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 이론과도 통할 뿐 아니라 2차세계대전 후 후진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거의 정설로 증명된 것이다. 근대화된 기업, 관료제도, 의료보험과 같은 사회제도, 군대, 중산층…. 이런 하부구조의 정비가 박정희식 근대화였다면 민주주의적 정치관행, 법치, 건전한 시민윤리의 확립과 같은 상부구조의 근대화는 先行한 하부구조의 근대화를 따라서 진행되어야 했고 그 책임은 김영삼 대통령 시대에 부과되었다. 군인출신 혁명가는 하부구조의 근대화를, 문민출신 정치인은 상부구조의 근대화를…. 이것이 우리 역사가 설정한 역할분담이었을 것이다.
수구(守舊)보다 더 후진적인 김대통령의 복고적(復古的) 정치행태에 반발한 것이 한국사회의 주류인 중산층이었다. 노동법 날치기 파동, 한보사건은 김영삼 정권이 가진 위선과 非민주성을 폭로했고 이것이 불만 속에서 참고 있던 중산층의 분노를 터뜨리고 이 여론이 검사와 기자로 전달되어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을 심부름꾼으로 삼아 김영삼 권력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의 인기가 올라가고 그만큼 김영삼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한국의 중산층이 박정희로 대표되는 한국 역사상의 실용 자주노선의 타당성과 정통성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는 해석을 낳게 한다.
한국역사상 실용자주 노선에 속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중국과 미국에서 들어온 사상 종교 정책 제도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데 반대하고 한국적 변형을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한국적 변형의 이유는 조국이 처한 상황과 국민들의 실리에 맞지 않는다는 데 있었고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국민들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인도주의, 실용정신, 자주성은 서로 연결되는 친화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실용적인 지도자는 자주적인 지도자일 가능성이 많고 위선적인 지도자는 사대적인 지도자일 가능성이 많다. 남조선 해방이란 위선적 명분론과 공산주의라는 외래사상에 포로가 되어 왔던 김일성-김정일은 주체를 내걸었지만 그 본질은 외래이념에 충성하기 위하여 국민들의 행복을 팔고 있는 사대주의자들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반대한 선비들, 광해군의 실리외교에 반대한 주자학자들도 같다. 위선은 남을 속이고 사대는 자신을 속인다. 세종대왕, 이승만, 박정희, 正祖 같은 지도자들은 권력을 잡고도 국민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약한 편에 대한 동정심과 강자(强者)에 대한 정의감을 보존했던 이들이다. 권력자의 부패하지 않은 이런 정신과 혼은 실용과 자주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검토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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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8-02, 16: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