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19일 李源京 문공부 장관은 중앙일간지와 방송국의 편집 및 보도국장들에게 「학원문제(대학생들의 시위), 연탄문제(연탄이 귀하고 질이 떨어져 발생하는 불만사태), 월남사태(월남에서 발생하는 反정부 시위 등)에 대해서는 기사화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보부도 같은 지시성 부탁을 했다. 학생시위는 1단 기사로도
실리지 못하게 되었다.
1974년10월5일 한국기자협회 운영위원회는 내무부 대변인으로 轉職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기자협회장 金仁洙씨에 대한 징계문제를 논의한 끝에 사과를 받고 사표를 수리하기로 했다. 19일 기자협회는 동아일보 문화부 金炳翼 기자를 제12대 회장에 선출했다. 기자협회장이 官界로 진출한다는 소문 자체가 징계사유가 될 정도로 당시의 기자사회는 反정부적이었다. 이 사건은 기자들의 언론자유투쟁으로 확대되는 한 계기가 된다. 10월24일 한국언론사와 민주투쟁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동아일보에서 일어났다.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은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 주최로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집회를 갖고 선언문을 채택했다. 역사적 문건이므로 全文을 소개한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未曾有의 難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自由國家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自由言論은 어떠한 구실로도 抑壓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宣言한다. 우리는 敎會와 大學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自由回復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覺醒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언론자유는 바로 우리 언론종사자들 자신의 實踐과제일 뿐 當局에서 許容받거나 國民大衆이 찾아다 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逆行하는 어떤 壓力에도 굴하지 않고 自由民主社會存立의 基本要件인 自由言論實踐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決議한다.
1. 新聞 放送 雜誌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一致된 團結로 강력히 排除한다.
2. 機關員의 出入을 엄격히 拒否한다.
3. 言論人의 不法連行을 一切 拒否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不法連行을 자행하는 경우 그가 歸社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年10月24日
東亞日報社 記者一同>
그 전날인 10월23일 동아일보 宋建鎬 편집국장과 방송뉴스부 부장대우 朴重吉씨가 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이날짜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서울농대생 300명 데모」란 제목의 1단짜리 기사 때문이었다. 이 기사는 제2판 신문에서부터는 빠졌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편집국에서 농성에 들어갔고 연행되었던 두 사람은 밤늦게 돌아왔다. 그
다음날 아침에 역사적인 自由言論實踐宣言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정보부는 학생들 시위 기사를 일체 보도하지 못하게 하고 있을 때였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이 선언 직후 전국적으로 자유언론수호선언이 잇따랐다. 일주일 사이에 전국의 27개 언론사 기자들과 4개 記協지부가 이 선언에 동참했다. 기자협회가 이런 확산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기자협회는 10월26일 긴급 분회장 회의를 열고 언론자유수호특별대책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기자가 몸담고 있던 부산의 국제신보 기협분회도 10월25일 오전 결의문을 채택했다.
<1. 우리는 그동안 알릴 權利와 의무를 다하지 못했던 점을 통감하고 진실한 보도로써 言論人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2. 우리는 言論人이 連行되고 있는 최근의 사태를 중시하고 즉각적인 시정을 요구한다.
3. 우리는 사실을 보도한 이유 때문에 人權을 침해당한 동료에게 성원을 보내며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編輯간섭도 배격할 것을 결의한다>
기자들은 이번엔 선언으로 끝내지 않고 행동으로 들어갔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신들이 채택한 결의문을 신문에 게재해줄 것을 회사측에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제작거부에 들어가 10월24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회사측에서 기사게재를 허용함으로써 25일 오전에 24일자 신문이 배달되었다. 한국일보에서도 기자들이 결의문을 싣기
위해 3일간 윤전기를 점거하고 철야농성했다.
한국일보 10월22일자 신문에 실린 월남사태 관련 기사 때문에 張康在 사장, 金庚煥 편집국장, 李祥雨 편집부장이 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날 정보부 요원 두 명이 편집국장실로 찾아와 金국장을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리고 갔다. 국장의 歸社를 기다리던 기자들은 연행사실과 기자들의 결의문을 기사화해야 한다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틑날 돌아온 金국장이 『나는 고생이 없었으나 여러분들이 고생이 많았다』면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으나 기자들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기사화를 요구했다.
10월24일엔 기자들이 윤전기 앞에서 농성하면서 기사를 싣지 않으면 신문 인쇄를 못하게 하겠다고 버티었다. 인쇄팀에서 윤전기를 돌리면 지키고 있던 기자들이 인쇄중지 보턴을 눌렀다.
25일 새벽에 한국일보 경영층이 기사 게재를 결심하여 농성이 풀렸다. 이날 이화여대와 연세대 치과대학에서 反정부 시위가 있었다. 한국일보는 이 시위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사회부 기자들과 대책위원회가 편집국장에게 항의하여 5판부터 기사가 실렸다.
이런 식으로 反정부적 기사를 1단이나마 지면에 확보하려는 언론 내부의 싸움이 전국적으로 번졌다. 이런 줄달이기는, 정부의 압력을 직접 받는 편집국장과 경영층을 상대로 기자들이 항의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가 때문에 정권과의 투쟁 이전에 社內갈등으로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움직임이 신속하게 전국 언론기관으로 확산되는
데는 기자협회와 기자협회보(주간)의 역할이 컸다.
1974년11월8일자 기자협회보는 「우리의 주장」이란 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3000 기자들이 공감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강력한가. 「1단의 벽」을 깨는 것이 왜 어려운가. 우리의 이성이 조금씩은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이 들어가야 할 기사, 큰 단수로 취급되어야 할 기사가 他意에 의해서 우표딱지처럼 한구석에 쳐박혀 있다. 마치 紙面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이 오
늘 우리의 自畵像이다. 일그러진 얼굴을 펴게 하는 것, 그것이 문제이다>
일선 기자들이 시작한 언론자유운동은 反정부적 목표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언론의 正道, 민주주의의 원칙을 내세운 것이기 때문에 보다 넓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민주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었으므로 이를 막으려는 朴정권의 시도는 논리가 서지 않았다. 당시 정보부가 언론사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할 때도 결국은 부탁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의 언론감시가 법적인 뒷받침도 없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논리는 「남북분단 상황에서 이런 보도는 안보에 危害가 된다」는 정도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가톨릭 주교회의, 그리고 신부들과 수녀들도 기자들의 언론자유투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金泳三 총재가 취임한 이후 투쟁성을 회복한 신민당도 국회에서 朴정권의 언론규제를 猛攻했다. 1974년 후반기의 反정부 투쟁은 언론, 특히 신문기자들이 앞장서고 야당 학생 기독교(신구교)가 뒤를 따르는 형국으로 넓은 前線
을 형성했다.
오늘의 관점에서 31년 전의 이 상황을 돌이켜보면 朴정권이나 기자들이나 한국의 진로를 놓고 진지하고도 근원적인 고민과 대결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불과 수개월 전에 북한정권이 파견한 암살자가 대통령의 부인을 살해하는 한국에서, 또 對南武力赤化 노선을 추구하는 북한정권을 지척에 두고 안보를 유지하면서 석유쇼크 이후에 어려워진 경제를 발전시켜야 했던 朴正熙 정권이 과연 어느 정도의 언론의 자유를 허용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의 국민과 언론 수준에 비추어 이 자유는 충분했던가 부족했던가?
기자들과 야당 학생 종교계의 도전은 1972년10월17일의 비상계엄에 의한 유신조치 이후 2년만에 처음으로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저항운동이었다. 광복 이후 언론자유가 가장 크게 억제되었던 시기는 1961-1963년의 군사혁명정부 시절, 1972-1974년, 그리고 1975년 월남패망 후 긴급조치 9호가 공포된 이후 1979년 10월26일 朴대통령이 피살되기까지이다. 여기에다가 제5공화국 시절을 보탠다면 1980년5월 신군부 집권 이후1985년2·12 총선까지가 된다. 한국 현대사 60년 가운데 15년 정도가 언론자유의 근본적인 규제가 있었던 시기인 셈이다. 이 기간중에도 정권적 차원의 비판을 못했다 뿐이지 정책적 행정적 비판은 허용되었다. 이 시기조차도 「언론자유의 암흑기」라고 표현하면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朝鮮朝의 전제정치 전통밖에 없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시작했고, 그것도 북한정권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던 시기에 이 정도의 언론통제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어떤 국제적 비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한국의 언론은 결코 낮은 점수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한국의 언론발전을 평가하는 가장 유효한 기준은 똑 같은 역사적 조건에서 출발했던 북한과 비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란 말로써 경제발전만 높게 평가한다. 경제 발전은 정치 발전, 언론 발전 없이 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발전도 한강의 기적에 못지 않는 발전을 했다고 평가될 날이 올 것이다.
한국의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어간 이유 몇 가지를 꼽아본다.
첫째, 조선조의 정치풍토가 선비 양반층의 활발한 言路를 보장했다. 말과 글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정권을 잡았고, 在野 지식인인 士林의 영향력이 강대했던 조선조에선 활발한 언론활동이 항상 이어졌다. 조선조의 선비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의 기자들을 늘 아주 높은 영향력과 사회적 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李承晩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걸고 국민국가 건설에 나섬으로써 언론자유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當爲의 대명제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하는 한 언론자유는 부인할 수 없다는 거대한 大義名分을 그 어떤 권력자도 무효화시킬 수 없었다.
셋째,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기계적 적용은 국가의 안보와 경제발전에 위해가 된다고 확신했던 朴正熙 대통령조차도 언론자유 규제는 한시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그 부하들에 의한 언론탄압엔 한계가 있었다.
넷째, 1990년대 이전에는 기자들도 좌경화되지 않아 反정부 활동을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의 원칙하에서 온건하게 했기 때문에 정권측의 탄압도 상대적으로 덜 무자비했다.
한국의 언론자유는 이렇게 쟁취되었다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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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8-03, 17: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