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1월24일 키신저 안보보좌관은 백악관에서 월남휴전협정을 보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협정은 관련 당사자들의 권위와 자존심을 지켜줄 것이고 인도지나의 상처를 치유함과 더불어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이다』
키신저는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요지의 고백을 한다.
『내가 이 말을 할 때, 나는 워커게이트 사건이 미국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희망을 망치게 될 것이고 월맹이 평화협정을 새로운 공세로 가는 휴식기로 사용할 것이란 것을 몰랐다. 미국의 反문화·反戰운동가들은 우리가 자유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1945년 이후의 외교정책을 부패한 사회의 오만이라고 몰아세웠다. 3대에 걸친 미국 정부가 막으려고 했던 인도지나 赤化는 이들에게는 바람직한 국가적 스트레스 해소였다. 문제는 이런 여론이 언론과 미국 의회를 흔들어대어 월남에 대한 방위공약을 실천할 수 없게 했다는 점이다』
1968년부터 미국과 월맹 사이에서 시작된 파리평화협상은 월남의 티우 정부를 회담 당사자자격에서 제외하였다. 미국과 월맹은 침략피해당사자의 운명을 당사자의 참여 없이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월맹의 함정에 빠진 회담이었다. 월맹은 4년간 줄기차게 월남적화에 대한 방해물의 제거를 시도했다. 그들이 미국에 제시한 뒤 양보하지 않은 조건은 「駐越미군의 철수, 미국의 괴뢰인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의 교체, 그런 뒤에 공산주의자·중립인사·티우정부의 잔존세력 사이에 聯政을 수립하여 베트콩과 협상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월남정부에 대해 자살하라는 처방에 불과했다.
1973년10월 월맹은 닉슨 대통령이 아홉 달 전에 제안한 휴전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는 발표를 했다.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다. 닉슨 행정부로서는 받지 않을 수 없는 逆제의였다. 그 내용은 「티우 월남정부의 존속, 駐越미군의 철수, 휴전, 월맹군의 월남침투 중지, 포로 교환, 정치협상 계속」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월맹측이 대폭 양보한 모습이었다. 미국의 여론은 닉슨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키신저와 닉슨은 越盟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군사적 강제수단을 유지하지 않으면 월맹이 협정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駐越미군은 철수를 개시하여 한때 50만 명에 달하던 병력이 3만으로 줄었고, 육상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닉슨의 안보보좌관 키신저는 미국이 월남정부에 군사, 경제원조를 계속하고 월맹이 협정을 위반하여 월남을 침공할 때는 해공군력으로 응징할 경우 월남에서 군사적 균형은 유지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朴正熙 대통령의 판단은 달랐다. 1972년10월21일 駐韓미국대사 하비브가 키신저와 만나고 와서 朴대통령에게 협정안을 보고하자 그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미 월남으로 침투해 있던 월맹정규군의 철수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대통령은 맨 먼저 문제삼았다. 당시 약14만 명의 월맹군이 월남에 들어와 베트콩으로 위장하여 싸우고 있었다. 미국과 세계의 많은 언론은 이들이 自生的인 反독재 투쟁조직이라고 오보하였다. 월남침투 월맹군에 대해서는 잔류를 허용하고 駐越미군은 철수시키고, 휴전협정에 대한 국제감시는 불가능한 이런 협정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朴대통령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越南戰 참전국 원수로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한국상황과 대비하여 보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이런 협정을 맺으면 티우정부와 월남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막대한 희생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며 월남정부는 1년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대통령은 나흘 뒤엔 駐越한국대사 柳陽洙씨에게 歸任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걱정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티우 대통령도 미국의 키신저가 들고온 협정안을 거부했다. 1972년10월22일 대통령궁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를 향해서『귀하는 월남을 팔아넘길 작정인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키신저는 급했다. 11월7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이 反戰평화운동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던 민주당 조지 맥거번을 꺾기 위해서는 월남휴전협정을 맺어야 했다. 이런 타이밍을 계산하여 월맹이 양보하는 척하면서 함정을 깐 휴전안을 제의했던 것이다.
柳陽洙대사를 만난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와 만나 나눈 대화를 전해주었다. 티우는 월남내에 침투한 월맹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휴전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는 또 1954년의 제네바 협정의 재확인을 요구했다. 그래야 앞으로 월맹이 침략할 때 국제여론에 고발할 수 있다. 티우는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형태의 연립정부도 반대한다고 했다. 월맹측은 중앙정부에서 마을단위까지 티우정부와 베트콩 사이의 연립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左右합작으로써 월남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고전적인 술책이었다.
키신저는 월남정부를 압박하여 字句 수정 정도만 한 뒤 10월26일엔 협정안을 발표하고 31일 파리에서 조인할 계획이었으나 티우의 거부로 霧散(무산)되었다. 키신저에게 티우는 거의 막말 수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공산당과 직접 대화하지 않고 귀하가 중계를 했는데 귀하는 누구편인가. 왜 적에게 호의적이고 우방을 희생시키려 드는가. 왜 월남의 외국군대는 60일 이내에 철수한다고 해놓고 들어와 있는 월맹군에 대해서는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가』
小國이 자신을 도와준 大國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1953년 휴전협정 때 미국이 서둘러 협정을 맺고 한국에서 물러나려 한다고 판단하여 北進통일 선언과 反共포로 석방으로써 미국 정부를 압박하였다. 미국은 李承晩 정부를 달래기 위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 국군현대화 계획, 주한미군 유지 등을 약속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한반도 평화와 한국 번영의 울타리가 되었다. 티우 대통령은 그러나 닉슨을 상대로 그런 게임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李承晩만큼 유능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미국의 여론과 언론이 反戰·反티우로 돌아서 있어 미국안에서 지지세력을 동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닉슨은 티우에 대해서 월맹이 협정을 위반하여 침공하면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응징할 것이고 경제 군사적 원조를 계속할 것임을 문서로 보증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티우가 동의하지 않자 1973년1월16일 닉슨은 티우 대통령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그는 이 편지에서, 티우정부가 휴전협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과 월맹이 조인을 강행할 것이며 자신은『월남정부가 평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미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1월21일 티우는 결국 굴복한다. 그는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미국이 사이공정부를 월남의 정통정부로 인정한다는 것, 월맹은 월남에 병력을 잔류시킬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성명해줄 것」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휴전협정은 1월23일 파리에서 가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이때부터 휴지조각이 되었다. 휴전협정 이후 1975년4월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떨어질 때까지 월남내의 전투는 더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파리휴전협정은 월맹 협상전술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들은 戰場에서 얻을 수 없었던 것을 협상테이블에서 얻었다. 월맹은 미국 여론을 反戰·反티우로 돌려놓기 위해서 전투를 하고 협상을 했다. 미국 여론이 한번 돌아가버리니 월맹의 월남적화 전략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것은 미국의 언론과 의회였다. 월맹이 월남을 적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닉슨 대통령이 티우에게 약속했던 군사적, 경제적 원조 및 협정위반시의 군사적 응징조치 약속이었다. 국가원수의 이런 약속은 조약에 준하는 효력을 갖지만 미국 의회가 叛旗(반기)를 드니 속수무책이었다.
1973년 6월 미국 의회는 미 군사력을 인도지나의 육상이나 상공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닉슨 대통령의 발목을 묶어버렸다. 월남에 대한 군사원조액도 의회에 의해 깎여나갔다. 1974년8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사임한 닉슨을 이어 포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도 의회와 언론의 反戰행태는 계속되었다. 휴전협정을 어겨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자신을 가진 월맹은 월남내의 공세를 강화하여 협정 이후 20개월 사이 2만6000명의 월남군인이 전사했다. 휴전협정 이후 1년 반 사이 월맹은 13만 명의 월맹정규군을 월남으로 침투시키고 결전에 대비한 도로망 정비, 보급품 쌓아두기를 계속했다. 휴전협정이 금하고 있는 탱크, 장갑차, 로켓포, 장거리포, 對空砲까지도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키신저는 회고록(「再生의 시기」)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월맹군의 침투와 협정 위반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은 월남의 목을 조으고 자신의 응징능력을 마비시켜갔다. 이 비극은 월맹정규군이 월남을 침공하는 사이 미국은 국론이 분열하여 이를 방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 CIA는 1974년5월23일자 「국가정보평가서」에서 「월남군은 주도권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해공군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면 월남군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대규모 지원만이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라고 예측했다.
월맹은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1975년의 작전을 준비해갔다. 월맹 지휘부는 자신들이 월남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할 경우 미국이 약속대로 월남을 돕기 위해 해공군력을 동원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고심했다. 이들은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월맹공산당 서기장 레 두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월맹군 사령관 둥의 회고록).
『미국 행정부의 내부 갈등과 정당 사이의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이공 괴뢰정권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줄고 있으며 미국은 사이공 정권의 파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월맹은 1976년을 決戰의 해로 정하고 1975년 공세로써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기로 했다.
월남 패망의 길(1)/미국의 反戰여론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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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9-04, 16: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