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패망의 길(4)/LST 떠나다



교민 철수선 파견을 결정한 것은 1975년4월3일 金正泰 외무부차관 주재로 열린 관계부처 대책회의였다. 이 회의는 교민철수에 관한 결정권을 駐越대사에게 일임키로 하고 自費퇴거가 불가능한 교민들을 위해서는 전세기를 투입하기로 하는 등의 방침(나중에 이 계획은 해군수송선 파견에 의해 취소됨)을 정해 4월4일 국무회의에 보고했다. 대책회의에서 월남근무경력이 있는 李熺性 국방부 기획국장(나중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한 참석자가 “아직 월남군이 건재하고 있지 않으냐”고 위기론에 의문을 제기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월남군은 벽돌로 지은 집과 같습니다. 기초가 제대로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벽돌이 하나 빠져 기초가 기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집니다”

월남대사관에서는 해군 LST를 기다리면서 우선 대사관 가족들과 상사주재원들을 여객기편으로 내보내고 교민들에 대한 철수권유, 월남정부와의 교섭에 나섰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월남정부는 ‘적법출국수속’을 요구했다. 출국비자를 받으라는 뜻인데 수년간 불법체류한 사람들과 세금을 안낸 사람들이 문제였다.
4월22일 우리 해군 LST 두 척이 구호물자를 싣고 사이공 외항인 뉴포트에 도착했다. 한국 대사관은 구호품 전달행사를 거창하게 거행했다. 월남사람들의 협조를 받기 위함이었다. 23일 오전부터 구호물자 하역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사관이 철수교민들의 승선시기를 26일로 잡아놓았기 때문에 하역 시간을 천천히 끌어야 했다. 4월25일 상부에서 두 LST를 지휘하고 있던 權尙虎 대령에게 指示電文이 내려왔다.
“즉시 하역을 중지하고 교포를 탑승시킨 뒤 귀국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본부에서 본 월남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으므로 한국해군함정이 월맹군에게 억류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金榮寬 대사와 權尙虎 대령은 현지 지휘관의 판단으로써 이 전문을 무시하고 교민들을 다 태워가기로 결심했다. 26일 본부에서는 다시 즉시 귀국명령이 내려왔다.
“귀 분대가 사이공에 채류한 채 메콩강이 봉쇄될 때 이에 따른 문제의 중요성과 그 결과를 감안하면 한시라도 체류할 수 없는 실정임을 명심하여 군 통수계통의 지시에 의거 행동하라”
金榮寬 대사는 權 대령에게 “여기까지 온 이상 대사의 지휘를 받으라. 나를 대사로 생각하지 말고 해군참모총장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朴대통령도 국방부에 대해서 “현지 대사의 의견대로 하라”고 정리해주었다.
일부 교민들은 대사관이 피말리는 철수작전을 하고 있는데도 철수선을 탔다가 도로 내리고, 일부러 뒤로 빠지는 등 한심한 행동을 보였다. 이 광경을 본 해군장병들은 “위기 때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울화통이 치밀었다”고 한다.
26일 오후 6시30분 두 해군함정은 뉴 포트항을 출발했다. 한 섬으로 데려다 줄 월남난민을 포함하여 약2500명을 실었다. 한국 교민들외에 교민들과 결혼한 월남여자들도 많았다. LST 두 척은 메콩강을 따라 내려가 바다로 나가는 야간항해를 시작했다. LST 815 함장 李允道중령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으나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메콩강 주변은 미군이 싹 쓸어버렸기 때문에 레이더도 별 쓸모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강줄기를 대충 보면서 항로를 잡아나가야 했다. 갑판에 불을 전부 켜고 난민 텐트도 쳤다. 이 배에 대한 포격을 면해보려는 것이었다. 보통 5~6시간 걸리는 메콩강 하류 항해에 9시간이 걸렸다. 새벽에 파도가 치는 바다를 만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한국 해군함정이 교민들과 난민들을 싣고 떠난 다음 날 아침 뉴포트항은 월맹군의 포격을 받고 크게 부서졌다. 두 해군함정으로 교민들이 떠난 시점에서 사이공에는 공관원 10명과 교민 164명이 남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駐越한국대사관은 4월 중순부터 비상대책위원회를 가동했다. 참석자는 金대사외에 공사 李大鎔(준장), 무관 정순영(대령), 정치참사관 이규수, 공보관 김기원씨였다. 이 회의는 李 공사를 철수대책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어느 날 정순영 무관이 월남군총사령부에 갔다오더니 이런 보고를 했다.
“신문에 보면 戰况이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있는데 총사령부에 가보니 전투서열(Order of Battle)이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월남군총사령부의 현황판이 마비되었다는 의미, 즉 전쟁수행 의지를 버렸다는 뜻이었다. 李공사는 티우 대통령과는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때부터 아는 사이여서 사이공에서 고급정보를 쉽게 수집했다. 그는 미국 CIA 사이공 지부장을 통해서도 많은 정보를 수집해와서 알려주었다.

4월21일 저녁 金基源 공보관은 NHK 지국장으로부터 “키신저와 레독토가 4월30일에 미국이 완전히 손을 떼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일본 대사관도 극히 일부만 남겨놓고 철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대책회의에서 金공사는 이 정보를 보고한 뒤 “대사관의 직원을 더 줄이고 몸을 가볍게 한 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고 말했다. 李공사는 “아직은 월남군이 건재하고 있으니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고 반론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견해가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金 대사는 金공보관에게 그 정보를 대사의 私信형식으로 朴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아주국장 대리였던 孔魯明 전 외무장관도 “본부에서보다 현지 외교관들이 월남정세를 낙관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월남을 잘 알수록, 그 속에서 생활한 사람일수록 월남의 급작스런 붕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밤에 두 해군함정으로 교민들을 태워보낸 다음날 4월27일 날이 밝자 대사관 뜰로 한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보따리를 싸들고 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사태가 전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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