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일본군 장교가 1,000명만 있었다면


일본군 소위라는 직책 하나 때문에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람이 있다. 역사의 숲은 보지 못하고 역사의 나무 아니 역사의 나뭇잎이나 풀을 보는 자들의 코미디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포복절도하게 할 코미디다.

조선이 작은 전투 한 번 못 치르고 일본에 넘어간 가장 큰 원인은 허약한 군사력이었다. 고려초에 이미 30만 대군을 거느렸던 나라가 조선말에는 그 때보다 인구는 최소한 두 배 이상 늘어났지만, 상비군이 5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월급도 못 받았다. 무기 체제는 더 형편없었다. 이들은 일본군이든 청국군이든 러시아군이든 1개 소대도 이기지 못했다. 일본의 깡패 몇 놈한테도 상대가 안 되어 국모가 시해될 정도였다.

한국이 다시 일어서려면 힘이 있어야 했는데, 그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였다. 하나는 군대 근대화, 둘은 산업화. 군대 근대화든 산업화든 배워야 했다. 조선인으로서는 가르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10년이면 이미 일본은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초단기로 산업화와 군대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1854년 페리제독의 흑선에 충격을 받은 후 군사와 산업을 근대화하기 위해 서구열강에게 목숨을 걸고 배우면서 학교와 공장을 세우고 신무기를 도입하고 개발하여 일본은 과학기술, 군사, 경영, 법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전문가들이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미․영․불․독보다 적지 않았다.

해방 직전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합국과 함께 국내에 진공할 군사를 기르고 있었다. 광복군! 그러나 이 광복군은 겨우 5천여 명밖에 안 되었다. 무기와 식량 등 보급품도 형편없었다. 이 광복군이 드골의 레지스탕스처럼 연합군과 상징적이나마 일본과의 전투에 참전했더라면, 해방 후 역사가 얼마간 달라졌을지 모른다. 설령 그런 행운이 있었다고 해도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미군과 소련군을 다 합하면 1945년에 약 10만 명이 조선에 들어왔는데, 그들을 상대로 광복군 5천명이 발언권을 내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에 한국인들이 일제시대에 안보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 있었다면, 대대적으로 일본군 장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보다 우월한 군사지식과 훈련이 없이는 일본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암암리에 실력을 기른 한국계 일본군 장교가 1,000명만 있었더라면, 일본이 패망하는 순간 이들은 즉시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을 접수하고 한국인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여 미군과 소련군과 거의 동시에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장교 한 명이 최소한 20명의 사병을 거느릴 수 있으니까, 일본의 무기와 장비, 편제를 그대로 접수한 군대가 2만 명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랬다면 괴뢰정부를 만들려는 소련의 야욕을 바로 분쇄할 수 있었을 것이고 미군과 힘을 합쳐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간디는 영국에서 법률을 배워 변호사가 되었고, 장개석은 일본에서 군사학을 배워 장교가 되었다. 백 번 잘한 일이다. 일단 적에게 이기려면 배워야 한다. 그들을 보고 그 누구도 영국 앞잡이, 일본 앞잡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엄격히 말하면, 학문이나 기술, 군사지식 등은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나쁜 것이 되기도 하고 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

독립군 때려잡는 일본군이란 세뇌작용용 공식을 만들어 일본군에 들어간 장교는 모조리 친일파라고 욕하는 것은 군사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열강의 먹이가 되었다가 중국이 장개석과 모택동을 중심으로 떨치고 일어나 열강을 몰아내고 일본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은 그들이 양성한 군대 덕분이었다. 동시에 외교전에서도 승리하여 미국과 소련을 한 편으로 만듦으로써 국공이 연합해도 도저히 물리칠 수 없었던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이든 소련군이든 김일성이 장교가 된 것까지는 뭐라고 할 게 못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자는 소련군의 대위로 들어와서 소련군의 주구가 되어 북한을 소련 괴뢰국으로 전락시켜 동족을 노예로 만들고 자신은 폭군이 되었다. 그리고는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한국에 온 일본군 출신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군에 빌붙은 자가 없었다. 미국은 소련처럼 일일이 간섭도 안 했다. 소련처럼 꼭두각시 정당 외에는 모조리 박살내는 짓을 않았다. 좌익이 설치는 것도 자유민주주의 입장에서 용납하고 한국에 맡겼다. 그래서 한국은 다소 혼란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이 빈 틈을 노리고 소련과 북한의 지시를 받고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기에 혈안이 된 좌파도 그 기세가 등등했던 것이다. 하여튼 그 숫자는 얼마 안 되었지만, 일제시대의 장교들이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군대가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란 걸 알고 이들은 어려운 여건에서 군대를 창설하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설령 그 이전에 친일부역을 한 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공(功)이 과(過)를 10배는 초과했다.

이들은 미군과 함께 공산침략도 물리쳤다. 후에 일부는 군복을 벗고 100년의 비원인 산업화도 일으켰다. 근대 군대는 산업화의 결과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이들은 산업화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넓고 깊었다. 대학의 학자들보다 뛰어났다. 김영삼 정부 이후 경제가 갈수록 죽을 쑤는 것을 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산업화의 성과를 눈으로 확인하고도 그에 대한 전문적 안목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장면의 민주당이 계속 집권했으면 산업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보다 잘 살았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등의 무수한 나라들이 줄줄이 실패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고 본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농업과 대체산업을 위주로 한 자립경제였기 때문에, 半폐쇄형 경제를 지향했기 때문에, 설령 실행했다고 하더라도 성공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박정희 정부도 처음에는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거의 그대로 따라 하다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전격적으로 수출주도의 개방형 경제로 나아가면서 비로소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통해 집권세력이 잘못을 깨닫고 올바른 방향을 잡는 것은 한국적 문화 풍토에서는 거의 기적적인 일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정부를 보라. 지난 약 15년 동안 반시장경제적 친사회주의적 경제정책 때문에 국가 경쟁력이 나날이 떨어지고 있지만, 집권 세력의 좌파적 경향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해지기만 한다.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와 교육,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방향 자체가 잘못되어 그 피해가 나날이 눈덩이처럼 커지지만, 오히려 이들은 그것을 정반대로 해석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자유는 억압하고 평등과 진보의 이름으로 획일과 수구를 강요한다.

군 출신 집권자들은 자유를 일부 제한하기는 했지만, 당시 국내의 민도나 북한의 독재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관용을 베풀었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으니까. 100년의 비원인 산업화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오로지 권력을 잡기에 혈안이 된 자들과 김일성 독재를 흠모하는 자들의 자유를 일부 제한했을 따름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가 되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다.

일제시대에 한국인들이 나라의 패망 원인을 냉철히 깨달았다면, 똑똑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일본군에 자원해서 들어갔을 것이다. 최고의 군사전문가로 거듭나서 호시탐탐 때만 노렸을 것이다. 실력 있는 자에겐 반드시 기회가 오니까! 그러나 조선 500년 문인 정치는 뿌리 깊어서 이른바 집안이 좋은 집 자손들 중에 일본군 장교가 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역사의 숲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30년 좌파공작으로 마침내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될 위치에 오르게 되자, 일제시대에 장교가 된 것 하나만으로 일개 소위를 친일파로 매도한다. 무능하고 무식하고 간악한 원균이나 선조 같은 자들이 질투를 정의로 호도한다. 그 소위가 나라에 큰 공을 세우지 않았으면,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중국보다 10배나 잘 살게 하지 않았으면, 불과 20년도 안 되어 한국을 북한보다 100배 잘 살게 하고 1000배 자유롭게 하지 않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선인을 버러지 취급하던 일제시대의 헌병이나 동족을 개돼지 취급하는 북한의 보위부 못지않게 사악한 자들이다.
(2005.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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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의 숫자


다음은 국사편찬위원회서 펴낸 한국사 제22권 중 金成植의 논문
'독립운동'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중국에 있던 광복군이 약 5천 명이라고 나옵니다.
일본인 丸山正雄의 논문을 재인용한 것이라는 주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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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김구를 중심한 임시정부의 활약도 대단한 바 있었다. 처음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이 만주국이 생김과 동시에 중국대륙으로 자리를 옮기자 중국인들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봉창의 日皇爆殺未遂사건과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윤봉길의 폭탄사건을 본 중국인은 韓人의 독립운동을 크게 평가하고 중국의 명사들이 김구를 만나자고 자청까지 하였고 또 물질로 원조도 하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에 한중 합작으로 항일전선을 펴기도 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광복군의 일부는 인도와 미얀마전선에서 활약했다. 미국에 있던 교포중 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사이판이나 필리핀 작전에서 활약했다. 중국의 광복군은 약 5천명 정도였고, 미국 교포 의용군은 약 6백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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