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죽지 않았고 아직 12척이나 있습니다'
倭軍과 전쟁중에 모함에 걸려 투옥되고 고문까지 당하였던 李舜臣은 누명이 풀려 백의종군을 하다가 조선 水軍이 전멸하다시피 하자 다시 三軍수군통제사로 복직된다. 남은 배는 12척. 그래도 충무공은 '舜臣不死 尙有十二'라는 보고를 올린다. '이순신은 죽지 않았고 아직 12척이나 있습니다'는 말이다. '12척밖에 없다'가 아니라 '아직도 12척이나 있다'고 한다. 이 말이 가슴을 친다. 우리 민족사에 남을 만한 가장 감동적인 말중의 하나이다. 12척에 한 척을 보태어 13척을 이끌고 가서 敵船 200척과 싸운 것이 명량전투이다. 이순신의 亂中日記 중 가장 생생한 묘사가 이 海戰에 관한 것이다. 從軍기자의 기사처럼 生動하는, 李舜臣의 르포를 소개한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명량)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 玄字 등 각종 銃筒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이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 軍令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를 세웠더니 中軍將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敵勢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라고 했다. 내가 無上(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이었다.>(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玉浦에서: 이순신이 기뻐할 위대한 역전승
충무공이 孤軍奮鬪하여 지켜낸 바닷가에서 세계 제1이던 일본 조선공업을 누르고 한국의 조선업이 지금 세계 頂上에 올라 있다. 세계 7대 造船所가 한국에 있다니 이야말로 충무공이 기뻐할 민족적 逆轉勝이 아닌가.
어제 尙美會(02-734-1245) 여행단 32명은 거제도 옥포만을 내려다 보는 玉浦大捷기념탑을 방문했다. '亂中日記를 들고 떠나는 민족의 聖地순례' 2박3일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전 퍼부었던 폭우가 걷히고 파아란 하늘과 청명한 공기 속에서 옥포만의 위용이 압도적으로 우리 눈앞에 다가왔다. 세계 제2위의 대우조선 공장이 내려다 보였다. 건조중인 수십만톤짜리 巨船들이 옥포만을 좁게 만들고 있었다. 900톤까지 들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 등도 보였다. 쇳덩어리의 집합체가 일대 장관이었다.
옥포海戰은 李舜臣 장군의 첫 승리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중 조선군의 첫 승리였다. 1592년 4월14일(음력) 부산포에 상륙한 15만 명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4월말에는 서울을 점령한다. 서울을 방어하도록 명령받은 金命元은 장수 된 몸이면서도 일본군이 다가오자 武器를 강에 버리고는 변장하여 달아나버렸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왜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서울을 점령했고, 宣祖는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1592년 5월초의 상황이었다. 정규군인 官軍이 붕괴되었으니 나라의 운명은 절망적이었다. 이러한 때 玉浦 해전 승리는 그 어느 누구의 지시도 도움도 없이 李舜臣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남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사 李舜臣은 우수사 李億祺(이억기)와 함께 85척의 함선을 이끌고 5월8일 옥포만에 도착했다. 일본 해군은 50여척을 정박시켜놓고 있다가 우리 水軍 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기세에 눌려 우리 배 6척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충무공은 직접 敵陣으로 들어가 26척을 불살랐다. 배를 잃은 일본군은 거제도에 상륙하여 도망했고, 살아남은 함선은 부산포로 물러났다. 이 승리는 조선과 일본의 정규군끼리 대결하여 조선군이 올린 첫 승리였다. 이 첫 경험이 李舜臣 함대의 자신감으로 굳어졌을 뿐 아니라 패퇴를 거듭하던 宣祖 정권도 逆轉勝의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해전을 기려 巨濟市가 옥포만을 내려다 보는 산꼭대기에 만든 옥포대첩기념공원은 한려수도를 둘러볼 수 있게 하고 호젓한 산책로가 있어 생각에 잠기게도 했다. 특히, 그 勝戰의 현장에 해양강국 한국의 한 상징적 공장이 健在한 것을 내려다 보니 “이순신의 정신과 숨결이 저렇게 살아 있구나”하는 감회에 젖었다. 李舜臣의 이야기가 화석화된 역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實感이 드는 것이었다.
李舜臣이 남해안 바다를 지키지 못했으면 호남 곡창지대로 일본군이 들어가 明軍이 구원하러 오기 전에 조선은 일본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충무공이 孤軍奮鬪하여 지켜낸 바닷가에서 세계 제1이던 일본 조선공업을 누르고 한국의 조선업이 지금 세계 頂上에 올라 있다. 세계 7대 造船所가 다 한국에 있다니 이야말로 충무공이 기뻐할 민족적 逆轉勝이 아닌가.
오후에 그 옥포조선소에 들렀다. 휴일인데도 李學文 홍보팀장(부장)이 나와서 尙美會 여행단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130만 평에 들어서 있는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DSME)는 종업원이 1만2000명, 협력업체 종사원은 약 1만900명이다. 올해 매출액은 약 5조 원, 영업실적은 100억 달러(수주물량)를 예상하고 현재 수주 殘量이 149억 달러어치나 된다. LNG 운반선 건조량에서는 대우조선이 세계1위이다. 건조 선박의 약 97%를 수출한다. 한 해에 이 조선소가 사용하는 철강무게만 해도 100만 톤을 넘는다. 그 중 약 70%는 포스코에서 사들이고 나머지는 수입한다. 포스코가 철강생산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생산자가 큰 소리 친다고 한다.
대우조선이 만드는 32만 톤 유조선의 경우 어른 500만 명분의 무게를 실을 수 있다. 이 조선소에서 짓는 배들중 가장 비싼 것은 浮游式원유생산저장하역선(FPSO: Floating Product Storage Off-loading)이다. 한 척이 10억 달러선이다. 아마도 9만 톤짜리 원자력 항공모함과 핵추진 잠수함 및 이지스 순양함을 제외하면 가장 비싼 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는 약 1500명의 설계요원들을 데리고 있다. 한국의 조선업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이유는 이 기술력인 것이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의 조선업이 싼 임금으로 성장했고,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 등 조선업종에서 노사분규가 가장 심했던 시절이 있었다. 李學文 팀장은 “대우조선 공장은 그린 앤드 클린(Green and Clean)하다”는 표현을 했다. 둘러보니 공장이라기보다는 ‘쇳덩어리를 조각하는 공원’이란 느낌이 들었다. 쇳물이 녹아내려 바다를 더럽히는 그런 조선소를 생각하면 이 또한 오해이다. 공장을 한 바퀴 둘러보아도 휴지 한 조각, 오물 한 점, 쇳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
유조선 한 척을 만드는 데 약 8만 조각의 철판이 필요하다. 이 조각을 이어붙여 가는 것이 造船이다. 그래서 건설업종과 生理가 비슷하고 현대건설처럼 건설업에서 성공한 기업이 진출하면 잘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동행한 여행단 사람들에게 “이것이 바로 한국의 피라미드가 아니겠습니까. 프랑스는 에펠탑을 갖고 있지만 이런 조선소는 없으니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가장 감동적인 관광거리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지키자, 지키도록 하자, 지적확인하자.”
“No change, no future.'(변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이런 모토가 쓰여진 공장을 구경하던 여행객이 “이 공장을 만든 金宇中씨야말로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은 분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다른 분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부심을 느낀다고도 했다. 李舜臣의 위대성은 조정이나 국가가 전혀 지원하지도 않는 가운데서 水軍을 精兵으로 훈련하여 프로 戰士 집단인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이른바 白衣從軍 정신에 있다. 조선조는 임진왜란을 당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침략을 허용하고 말았다. 李舜臣을 기렸으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했던 것이 조선조였다. 실천력이 약한 선비집단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李舜臣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것은 李承晩이 建國과 建軍을 주도했고, 朴正熙가 근대화와 자주국방정책을 이끌었던 대한민국이었다. 두 위대한 대통령은 富國强兵을 목표로 삼아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과 과학기술력을 건설했다. 종합 國力面에서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대한민국이야말로 李舜臣의 자주국방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정신과 실력을 두루 갖춘 자랑스러운 후손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李舜臣 정신은 말장난이나 글짓기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실력으로써 계승하는 것이다.
대우조선 공장을 나서면서 옥포대첩비가 있는 산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내 곁의 한 분이 말했다.
“기업은 이렇게 잘 하는데 정치는 왜 그 모양입니까. 정치도 기업에 맡기면 안될까요?”
옥포대첩비 아래 效忠祠에는 ‘尙有十二微臣不死’(상유십이미신불사)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 충무공이, 元均의 패전으로 사라진 水軍을 재건하여 일본군과 싸우려고 준비하고 있던 중 조정에 보고한 문서의 한 구절이다. “아직 12척이 있고 제가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12척밖에 남지 않았던 朝鮮水軍으로 기적의 鳴梁대첩을 만들어냈던 李舜臣이 還生하여 대우조선의 위용과 巨船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여러분들, 정말 수고했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 2006-05-08, 18:17 ]
*한 바이킹 戰士의 생애
바이킹 시대의 시작은 서기 793년 바이킹 해적들이 잉글랜드 노섬버랜드의 린디스파르네 수도원을 습격, 약탈한 때를 기준으로 한다. 종말은 1066년 9월 노르웨이의 하랄드 하르드라다 왕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잉글랜드에 상륙, 요크셔의 스템포드 다리 결전에서 잉글랜드 군에 패배한 사건이다. 793년에서 1066년까지 약300년간 유럽(잉글랜드, 프랑스 등), 흑해, 러시아, 비잔틴, 중동, 지중해,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아메리카까지를 활동무대로 삼았던 이 戰士집단은 여러 가지 상반된 얼굴을 가졌다. 약탈자, 해적, 상인, 왕, 공작, 용병, 경건한 기독교인, 야만적 원시종교 신봉자, 匠人, 예술인, 행정가, 건축가, 문명 파괴자, 문명 건설자, 무법자, 법치 수호자 등등.
공통점은 건장한 체구와 용맹무쌍한 정신으로 무장하여 여행, 탐험, 개척을 즐긴 모험가였다는 점이다. 바이킹의 전형적인 삶을 보여준 이가 바이킹 시대의 막을 내리는 데 主役이 된 하랄드 하르드라다 왕이다. 이 사람의 생애는 바이킹적 삶의 한 표본이 될 것이다.
하랄다는 1015년 노르웨이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당시 노르웨이의 왕좌는 덴마크 바이킹 왕국의 크누트가 차지한 상태였다. 11세기 초 크누트는 덴마크, 잉글랜드, 노르웨이, 핀란드를 통치 하에 둔 '북해 제국의 大王'이었다. 1030년 하랄다는 형 올라프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노르웨이의 왕좌를 되찾으려 하였지만 크누트에 충성하는 노르웨이 군대에 패배하였다. 형은 전사하고 하랄다도 다쳤다.
그는 노르웨이의 오지에 숨어서 상처를 치유한 다음 산을 넘어 스웨덴으로 갔다. 1031년 하랄다와 그에게 충성하는 일단의 바이킹은 모험을 찾아나섰다. 호수와 강을 건너 키에프의 러시아 공국에 도착한 것이다. 키에프에 9세기경에 세워진 러시아 公國은 스웨덴 바이킹의 작품이다. 키에프 루스로 알려진 이 나라가 나중에 러시아의 기초가 된다. 러시아라는 말도 스웨덴 바이킹 언어에서 나왔다.
키에프 大公 야로슬라브는 하랄다를 환영하여 군대 지휘관을 맡겼다. 그의 형 올라프도 야로슬라브를 위하여 일한 적이 있었다. 키에프 공국의 군대를 지휘하면서 하랄다는 폴란드, 에스토니아, 비잔틴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하였다. 몇 년을 그렇게 보낸 뒤 하랄다와 500명의 전사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비잔틴 황제의 친위대에 들어갔다. 1033년 전후였다. 비잔틴 제국은 바이킹 傭兵으로 구성된 친위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황제를 보호하는 부대였지만 일반 전투에도 투입되었다. 하랄다가 왕족 출신이고 용맹하다는 평판은 널리 알려져 여러 戰場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아랍 해적 소탕 작전을 벌이다가 해적을 지원하는 소아시아 내륙으로 들어갔다, 나중에는 이라크의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출, 수십 개의 근거지를 소탕하였다고 한다. 하랄다는 곧 비잔틴 황제 미카엘 4세의 용병대장이 되었다. 그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투르크 군대와도 싸웠고,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인의 보호 임무에도 종사하였다.
1038년 하랄다는 지중해의 진주 시실리에 나타난다. 게오르그 마니아케스 장군이 이끄는 비잔틴 군대는 아랍 지배하의 시실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 섬에 상륙하였다. 하랄다의 바이킹 용병은 노르만 출신 용병들과 함께 비잔틴 군대를 도왔다. 하랄다는 네 곳의 마을을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고 한다.
1041년 시실리 원정이 끝난 직후 남부 이탈리아에선 노르만과 롬바르디 세력이 합세, 이곳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잔틴에 도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랄다가 지휘하는 바이킹 용병은 비잔틴 주둔군을 도와 노르만 군과 싸웠다. 노르만 전사들은 선조가 바이킹으로서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살다가 남부 이탈리아에 용병으로 온 이들이었다. 결국 바이킹 계열의 용병들끼리 싸운 셈이다. 비잔틴 군은 올리비에토 전투, 몬테마지오레 전투에서 連敗하였다. 하랄다 부대는 패전 후 콘스탄티노플로 복귀, 1041년 말엔 반란이 일어난 불가리아 전선으로 보내졌다.
하랄다는 미카엘 4세로부터 총애를 받았지만 그가 1041년 말에 죽고 미카엘 5세가 등극하자 권력투쟁에 휘말려 투옥되었다. 미카엘 5세와 황비 조 사이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하랄다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탈옥, 친위대를 이끌고 반란군에 가담, 미카엘 5세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다. 미카엘 5세는 숨어 있다가 성공한 쿠데타 세력 앞에 끌려나와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을 받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하랄다는 용병대장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富(은화와 보물 등)를 축적하였다. 비잔틴 궁정 변란에 개입하여 궁정 보물들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들 보물을 모아두었다가 키에프 공국의 대공(스웨덴 바이킹)에게 보내 보관시켰다.
하랄다는 미카엘 4세를 몰아낸 조 황비에게 노르웨이로 돌아가도록 허가해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는 부하들과 작당, 배를 타고 흑해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다.
하랄다가 키에프 공국으로 돌아온 것은 1042넌 말이었다. 10년 만의 귀환이었다. 여기서 하랄다는 야로슬라브 대공의 딸이자 스웨덴 올라프 왕의 손녀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한다. 야로슬라브의 다른 딸들은 프랑스와 헝가리의 왕과 결혼하였다. 야로슬라브 대공은 하랄다의 명성과 그가 보내준 보물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랄다는 노르웨이 왕좌는 자기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였다. 이복형 올라프가 잘못하여 왕위를 놓쳤으므로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1045년 귀국 길에 오른다. 강과 호수, 그리고 핀란드만과 발틱해를 건너 1046년 초 스웨덴의 지그투나에 도착하였다. 금은 보물을 하도 많이 실어 타고 있던 배가 기우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하랄다가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 노르웨이의 왕좌는 이복 형 올라프의 아들 마그누스가 차지하여 善政을 베풀고 있었다. 11년 동안의 재위 기간 노르웨이는 평온하였다. 노르웨이, 덴마크, 잉글랜드를 통합 통치하던 크누트 대왕의 아들은 노르웨이 왕좌를 포기하였으므로 도전자도 없었다. 크누트의 아들이 덴마크를 다스리다가 죽어 왕위가 공석이 되자 노르웨이 왕 마그누스는 덴마크 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때 스베인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하랄다는 스웨덴 왕 아눈드 및 스웨덴으로 도망 온 스베인 잔당과 공모하여 마그누스 타도 작전을 계획한다. 이들은 덴마크 해안 지방을 공격, 마그누스 왕이 덴마크 사람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마그누스는 이들의 목표가 노르웨이라고 판단, 덴마크에 있던 全軍을 이끌고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노르웨이 사람들도 하랄다의 편을 들 생각이 없었다. 마그누스 왕의 측근들은 삼촌 뻘 되는 하랄다와 싸우지 말고 타협을 보도록 권하였다. 바이킹과 노르만 전사들의 한 특징은 전투를 일상적으로 할 뿐 아니라 타협도 잘 한다는 점이다. 이런 실용적 자세는 병자호란 식의 무모한 전쟁을 막아준다.
1046년 하랄다와 마그누스는 노르웨이를 공동 통치하기로 약속하였다. 하랄다는 그가 가져온 富를 마그누스와 나누는 데도 동의하였다. 그때 마그누스는 파산 직전이었다. 두 공동왕은 별도의 궁전을 가졌다. 1047년 마그누스가 후계자 없이 죽었다. 조카의 죽음을 알자 말자 하랄다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노르웨이뿐 아니라 덴마크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언하고는 덴마크로 쳐들어가자고 했다. 마그누스는 죽기 전 덴마크 왕좌는 반란을 일으켰던 스베인에게, 노르웨이 왕좌는 하랄다에게 준다는 유언을 하였다. 하랄다는 한때의 동지였던 스베인을 몰아내려고 원정을 획책하였지만 부하들이 반대하였다. 하랄다는 마구누스의 시신을 노르웨이로 가져오는 것도 반대하였지만 군인들이 이를 무시, 시신을 가져와 안장하였다.
하랄다의 야망은 너무 컸다. 그는 크누크 대왕처럼 노르웨이와 덴마크와 잉글랜드를 아울러 통치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하랄다는 이듬해부터 스베인이 다스리는 덴마크를 끊이 없이 공격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작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덴마크를 점령할 수는 없었다.
1062년 8월엔 노르웨이와 덴마크 쌍방이 각각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하는 니사 해전이 벌어졌지만 무승부였다. 하랄다는 직접 활을 쏘면서 奮戰하였다. 10여년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자 하랄다와 스베인은 무조건적 평화 협정을 맺는다. 1064년이었다. 그 뒤 하랄다의 관심 지역은 잉글랜드로 바뀐다.
영국은 덴마크의 바이킹 왕 크누트가 죽자 아들 하트하크누트가 왕좌를 이어받았지만 그는 아들 없이 1045년에 죽었다. 당시 덴마크 왕 마그누스는 자신이 잉글랜드 왕조를 이어 받을 자격이 있다면서 잉글랜드 침공 작전을 계획하였지만 스베인의 반란으로 포기하였다. 그러는 사이 고백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다시 앵글로 색슨 왕조로 돌아갔다. 에드워드가 1066년에 죽었다. 공석이 된 잉글랜드 왕좌는 '내 것'이라고 여기는 두 사람이 있었다.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과 하랄다였다. 앵글로 색슨 귀족들은 그러나 에드워드 측근의 아들인 해롤드 고드윈슨을 잉글랜드 왕으로 선출하였다.
하랄다는 잉글랜드 침공 작전을 준비한다. 잉글랜드 왕으로 선출된 해롤드의 동생 토스틱 고드윈슨은 자신이 다스리던 노슴브리아 領地를 동생이 빼앗아가자 앙심을 품고 하랄다에게 쳐들어오면 돕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하랄드는 1066년 8월 송네 피요르드 근처의 소룬드에서 함대를 발진시켰다. 부인, 딸, 아들을 데리고 탔으나 큰 아들을 왕으로 임명, 남겨두었다.
함대는 잉글랜드에 상륙하기 전 노르웨이 바이킹이 점거중인 세트란드와 오르크니 섬을 거쳤다. 함대의 규모는 약300척에 1만5000명의 전사를 태웠다. 당시로서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만든 대함대였다. 마중 나온 토시틱의 함대는 12척 정도였다. 잉글랜드 중북부 해안에 상륙한 하랄다의 바이킹 군단은 잉글랜드 군을 連破하면서 남하하였다.
잉글랜드 왕 해롤드는 급히 군대를 편성, 요크 쪽으로 진격하였다. 하랄다는, 9월20일 잉글랜드 중부 지방의 요크 근방 풀포드에서 지방군과 격돌, 완파, 항복을 받았다. 그는 요크 성에 대한 약탈을 금하고 인질을 잡는 데 그쳤다. 항복한 요크 영주들은 하랄다와 손 잡고 해롤드 왕을 타도하기로 합의하였다. 하랄다는 바닷가(리칼)에 정박시켜놓은 함대로 돌아갔다. 9월25일 하랄다는 병력의 3분의 2만 데리고 , 그것도 갑옷도 입히지 않은 채 요크 근방의 스탬포드 다리를 향하여 갔다. 요크 영주와 의논할 일이 있었다.
당시 해롤드 왕은 전력을 다하여 북상중이었는데 하랄다는 이를 몰랐다. 먼저 敵情을 파악한 쪽은 해롤드였다. 그는 하랄다 군대가 다리 쪽으로 접근중이란 보고를 받고 놀랐다. 점령한 요크 성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야외에서, 그것도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진군중이라니! 해롤드 왕은 잉글랜드 군을 스탬포드 다리 쪽으로 직진시켰다. 하랄다는 잉글랜드 군이 접근중이란 사실을 모르고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스탬포드 다리로 나아가다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해롤드 왕이 지휘하는 잉글랜드의 중무장 부대가 방패와 칼과 창을 번쩍이면서 다리를 향하여 진격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격전이 벌어졌다. 소수의 바이킹 전사들이 잉글랜드 군의 다리 진입을 막는 사이에 하랄다 군단은 방패를 벽처럼 만들어 공격에 대비하였다. 다리를 건넌 잉글랜드 군이 바이킹을 덮쳤다. 하랄다는 갑옷도 입지 않은 채 용감하게 싸웠지만 목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토시크도 전사하였다. 정박한 함대를 지키던 바이킹 부대가 뒤늦게 와서 가세하였지만 잉글랜드 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들도 배를 향하여 달아났다.
노르웨이 바이킹 군단은 스탬포드 전투에서 거의 전멸하였다. 무장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쌍방의 전사자는 1만 명을 넘었다. 50년 뒤 이곳을 여행한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들판에 버려진 유골이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300척의 원정 함대 가운데 생존자를 싣고 노르웨이로 돌아간 배는 2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전투는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공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해롤드 잉글랜드 왕은 대승을 거두었지만 불길한 소식이 남쪽으로부터 들어왔다.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출발한 윌리엄 공의 함대가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 상륙, 해이스팅스에 집결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승리의 기쁨을 나눌 시간도 없이 해롤드는 병력을 남하시킨다. 그것도 강행군이었다. 10월14일 아침, 해롤드 왕의 군대가 해이스팅스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먼저 안 쪽은 노르만이었다. 이번엔 해롤드가 정보의 실패를 경험한다.
해이스팅스에서 마주한 노르만과 잉글랜드 군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전을 벌인다. 승자는 노르만의 윌리엄 공이었다. 해롤드는 화살을 맞고 죽었다. 앵글로 색슨의 귀족들도 그와 함께 거의 전멸하였다. 이 결전으로 영국의 운명이 달라졌다. 선진된 프랑스 문화를 흡수하고, 프랑스 말을 하는, 바이킹의 후손 노르만 전사 집단이 앵글로 섹슨 귀족을 몰아내고, 잉글랜드, 스콧랜드, 아일란드의 새로운 지배자로 화려하게 등장, 영국을 침공만 받던 나라에서 침공하는 나라로 바꾼다. 바이킹과 노르만의 戰士的 성격이 영국의 국가적 성격으로 변하여 19세기엔 해가 지지 않는 세계제국으로 커 가는 것이다.
하랄다가 스탬포드 다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을 때 나이는 51세였다.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러시아, 오스만 터키, 중동, 지중해, 시실리, 이탈리아 남부가 그의 활동무대였다. 그가 상대한 이들은 이슬람, 기독교, 유대인, 동방정교 신봉자들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런 영웅적 삶으로 몰아붙였던가? 권력욕, 물질욕, 그리고 명예욕이었다. 戰場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아는 전형적인 바이킹 戰士의 생애였다.
스탬포드 전투에서 그는 갑옷을 입지 않은 채 狂戰的(berserk)으로 싸웠다고 전해진다. berserk는 싸움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는 뜻의 바이킹 말이다.
노르웨이의 초기 교회 건물. 1000년 경에 바이킹은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 이런 모양의 교회건물을 지었다. 약1000년이 된 이 목조교회 건물은 지금 수리중이다.
*노르만 세력이 영국, 이탈리아, 스콧랜드 등에 세운 城과 성당(대표적인 것)
잉글랜드: 캔터베리 성당, 웰스 성당, 링컨 성당, 더함 성당, 윈체스터 성당, 엘리 성당, 피터보로 성당, 킬펙 성당, 옥스퍼드 성, 성 니콜라스 교회, 노르위치 성당, 성에드워드 교회, 런던 타워, 로체스터 성, 노르위치 성, 콜체스터 성,
스콧랜드: 던펌라인 교회, 성앤드류 성당, 성마가렛 예배당, 성마그누스 성당, 제드버 교회, 성애더나세 교회
시실리: 팔레르모 성당, 몽레알레 성당, 체팔루 성당, 카타니아 성당, 노르만 왕궁 예배당
아일란드: 두블린 성
말타: 비토리오사 요새 등
*남자의 美學, 바이킹의 경우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일본 등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는 데 성공한 나라들이다. 대부분의 一流국가는 게르만족이 세운 나라이다. 게르만족은 로마와 싸울 때 야만족으로 분류되었으나 法治 하나는 로마에 못지 않았다. 게르만족의 법치전통이 질서 속의 자유와 안정을 낳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보장한 셈이다.바이킹도 게르만족의 一派로서 가장 늦게 文明化되었는데 법치로써 일류국가를 만들었다.
미국의 南일리노이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스웨덴의 역사'(著者 프랭클린 D. 스콧)는 약 700페이지나 된다. 내가 바이킹과 노르만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안 후배 외교관이 구해 준 것이다.
바이킹과 노르만(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의 후예)은 서기 800~1200년 사이의 약 400년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를 무대로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삶의 자취를 남긴 민족이다. 이 戰士(전사)집단의 활동 범위는 지금의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영국, 아일란드, 아이슬란드, 그린랜드, 캐나다, 러시아, 그리스, 터키(당시는 비잔틴 제국), 이스라엘, 카스피해, 지중해, 北海, 北대서양, 北아프리카, 스페인, 프랑스, 南이탈리아와 시실리에 걸쳤다. 콜럼부스보다 500년 먼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들이다.
오늘의 영국은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 있던 노르만(바이킹 출신의 정착민) 세력이 바다를 건너가 점령하여 세운 왕조의 후예이다. 비슷한 시기 南이탈리아와 시실리를 점령, 태양의 왕국을 건설, 당대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고 개방적인 나라를 만든 세력도 노르망디에서 원정 온 일단의 戰士들이었다. '러시아'라는 나라도 스웨덴 바이킹이 키에프에서 세운 공국이 母胎(모태)이다. '러시아'라는 말 자체가 바이킹의 '루스'라는 낱말에서 나왔다.
인류역사상 한 민족집단의 에너지가 이처럼 단기간에 대폭발한 예는 흔지 않다. 기원 전 4세기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대원정, 7~9세기 이슬람 세력의 팽창, 13세기 몽골 군단의 유라시아 대원정이 비슷한 예일 것이다.
당시 바이킹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거창한 우주관과 용맹한 인생관을 지닌 原始(원시)종교를 따랐다. 바이킹 戰士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덕목은 '남자의 美學', 그리고 명예였다. '스웨덴의 역사'는 바이킹의 인생관을 엿보게 하는, 돌에 새긴 詩를 소개한다.
가축들이 죽는다.
친척들도 죽는다.
너도 죽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은
죽은 이들 하나 하나의 정정당당한 이름이다.
著者(저자)는 이 시에 담긴 바이킹의 윤리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들은 영웅적 신념의 소유자들이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궁극적 결과물이 아니라 어떻게 이 운명적 게임을 감당하였는가였다. 고통은 참아내야 한다, 남을 위해서나 원칙을 위해서가 아니라 운명의 실천을 위하여, 미리 주어진 삶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폭력과 잔인한 행동도 예사로 했다. 이 또한 변명이 필요 없다. 운명이니까.
그들은 사회적 의무나 도덕적 금기 따위는 무시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과 경제적 利害得失(이해득실) 같은 것들은 경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나쁘고 옳다는 것에 대해선 확실한 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美學이었다. 그들이 한 일들이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할 정도의 이야기꺼리가 된다면 그것은 멋진 것, 그래서 옳은 것이 된다.>
著者는 이런 가치관을 '변명도, 거칠 것도 없는 거친 개인주의'라고 표현했다. 문명사회와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바이킹 사회가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정교한 법적 장치를 고안한 것도 개인들이 가진 이런 야성적, 미학적 행동양식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런 인생관은 젊은이들의 모험을 장려하고, 여성들의 독립성을 보장하였다. 중세 유럽에서 바이킹 여성들만큼 독립성이 강하였던 나라는 없었다.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나라의 모범적 남녀 평등도 이런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여성은 재산의 소유권을 가졌고, 집안과 농장의 실질적 운영권도 지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서구 여성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천년 전 바이킹 여성이 가졌다는 이야기이다.
바이킹과 노르만에 대한 중세 문명인들의 기록엔 공통점이 있다. 육체는 멋지게 발달하였고, 성격은 용감하며, 너그럽고도 잔인하며 교활하다. 법을 잘 지키고, 명예를 존중하며, 무엇보다도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 치졸, 치사, 비겁, 용렬, 옹졸이란 단어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이들이었다.
바이킹 언어에서 유래하는 영어 단어로 버서크(berserk)라는 형용사가 있다. '狂暴(광폭)한'이란 뜻이다. 명사형으로 berserker는 狂戰士(광전사)로 번역된다. 戰場(전쟁)에서 용맹무쌍한 싸움꾼을 일컫는다. 늑대처럼, 곰처럼, 미친 듯이, 그러나 신들린 듯 싸우는 戰士들이다. 미칠 정도로 신나게 싸우다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 이를 멋진 인생으로 여겼던 이들이 11세기를 前後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문명화되었고 지금은 사회복지 제도를 발전시켜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를 만들었다. 세계사의 가장 위대한 逆轉劇(역전극) 중 하나이다.
남자의 美學이 실종된 곳이 요사이 한국이다. 막말, 떼쓰기, 폭로, 배신, 저질, 거짓말, 사기, 무례가 배운 층에서 더 기승을 부린다. 이순신의 절대고독, 박정희의 초인적 결단, 김유신의 장엄한 자주정신, 계백의 決戰(결전)의지, 이승만의 자존과 자유, 성삼문의 절개, 안중근의 仁義(인의) 같은 남자의 美學이 우리에게도 있긴 했었다. 요즈음 한국 정치와 언론의 추태는 계급투쟁적 저질 행동 양식에다가 한글專用으로 한국어가 망가지고 思考(사고)체계가 흐트러지고 행동이 그렇게 따라간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글專用엔 미학이 없다. 깊은 생각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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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히스토리 채널의 연속 드라마 ‘바이킹’엔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史實(사실)에 충실하다. 8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 유럽을 뒤흔든 바이킹-노르만은 용맹하고 잔인하고 영리한 戰士(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유럽 기독교 문명을 공격하다가 기독교화 된다. 문명 파괴자가 문명 건설자로 바뀐다. 천주교의 개혁을 지원하고 십자군 전쟁에 앞장서고 로마네스크 건축 붐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바이킹 시절의 野性(야성)과 용맹성은 잃지 않았다. 바이킹-노르만은 정복지를 잘 다스려 一流 국가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들이 다스린 나라들은 예외 없이 富國强兵의 法治국가가 되었다. 잉글랜드, 시실리 왕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 그런 비결의 핵심은 이들의 法治(법치) 정신이었다. 야만 상태에서도 法的 제도와 전통을 유지, 발전시켜간 점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바이킹-노르만의 法(법)에 대한 관점이 독특했다. 그들은 법을, 正義(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질서로 여겼다. 그들의 법 집행은 증거와 證人(증인)을 重視(중시)하고, 매우 실용적이었다. 바이킹은 나쁜 행위가 반드시 나쁜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殺人(살인) 행위에 대한 처벌도 슬기롭게 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일정한 時限(시한)에 자수하면 정상을 참작하였다. 바이킹 법은 살인한 자는 행위를 한 뒤 만나는 첫 번째 사람에게나 세 집을 지나치기 전에 자수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살인을 한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을 경우엔 추장이 재판장 역할을 하는 주민회의에서 피살자 가족에 대한 배상을 하는 조건으로 死刑(사형)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신고하지 않거나 밤에 몰래 죽이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았다. 바이킹은 善과 惡보다는 명예와 수치심을 法治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정정당당한 행동을 했느냐의 與否(여부)가 유무죄를 판단하는 데 잣대가 되었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고를 만나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행위는 살인죄에 준하여 처벌했다. 회식 장소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모든 참석자들은 가해자를 체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는 피살자 유족들에게 배상해야 했다. 도둑질을 하다가 발각된 절도범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지만 강도를 죽여선 안 된다. 절도는 피해자 몰래 하지만 강도는 面前(면전)에서 이뤄지므로 최소한의 방어 수단은 보장되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사소한 절도에 대한 처벌법은 통로를 만들어 지나가게 해놓고 마을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 집단 폭행에서 빠지는 주민에겐 벌금을 물렸다. 범죄자 처벌을 공동체의 의무로 규정한 것이다. 종북세력에 대해서도 한국인이 이런 法的 의무를 지도록 하면 문제 해결이 쉬울 것이다.
법치엔 王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천재지변이 잦고 농사를 망치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주민들이 굶게 되면 神(신)에게 황소를 잡아 바쳤다. 효과가 없으면 산 사람을 祭物(제물)로 바쳤다. 이것도 소용이 없으면 왕을 祭物(제물)로 바쳤다.
바이킹은 ‘피의 독수리’라는 잔인한 死刑(사형) 집행 의식을 유지하였다. 바이킹이 남긴 詩와 그림에 소개된 방법은 이렇다. 히스토리 채널 시리즈 ‘바이킹’에선 그 장면이 생생하게(처참하게) 방영되었다. 이 사형 방식은 왕이나 주교, 또는 추장과 같은 자가 重罪(중죄)를 범했을 때 적용하였던 것 같다.
사형수의 등을 칼로 갈라 가죽을 벗기고, 등뼈를 드러낸다. 갈비뼈를 부러뜨려 날개처럼 펼친다. 상처엔 소금을 뿌린다. 허파를 등 뒤로 잡아 당겨 어깨 위에 얹어 놓는다. 이 모습이 ‘피로 그린 독수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렇게 칼질을 해도 사형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버티면서 죽어야 바이킹 신화에 나오는 오딘 神(신)을 만날 수 있다. 한번이라도 소리를 질렀다가는 죽어서 좋은 데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 잉글랜드의 노슴브리아 왕, 노르웨이의 왕자가 이런 형을 받아 죽었다고 전한다.
노르만 戰士(전사) 집단의 이탈리아 남부 정복 역사를 다룬 책 ‘南의 北人’(The Normans in the South, 1016-1130) 著者 존 율리우스 노르위치(John Julius Norwich)는 유럽에서 無法(무법)천지를 만든 노르만과 바이킹이 法治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파라독스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파렴치한 노르만 지배자라도 아주 독창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곤 하였다는 것이다. 노르만 戰士들은 국가를 세우는 데는 법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법치를 강화하는 것이 정권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계산하였다. 이들은 법을 도덕적으로 보지 않고 실용적으로 인식하였다.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 헨리 2세와 시실리의 노르만 王朝 건설자 루제로 왕은 치밀한 법적 제도를 갖추는 데 총력을 경주하였다. 그들은 법을, 관념적 理想(이상)이나 正義(정의)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노르만은 법을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여겼다. 노예는 튼튼할수록 도움이 된다. 법치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지배자와 공동체에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야만의 바이킹이 유럽 문명의 위대한 遺産(유산)인 法治의 한 건설자가 된 것은 세계사에서 가끔 발견되는 경이로운 逆轉劇(역전극)의 한 幕(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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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美學:유목민의 경우
'위험한 변경(The Perilous Frontier)'은 북방 유목민족 전문학자 토마스 J.바필드가 쓴 책인데 이런 대목이 있다.
<이 기마유목민족들은 가장 발달된 정착문명인 중국과 인접하여 살면서도 중화적 문화와 이념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경멸했다. 돔의 천장 같은 광활한 하늘 아래에서 말젖과 말고기를 먹으면서 천막에서 나고 죽고 전쟁과 모험을 동경하는 자신들의 삶이 농경민족보다도 더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목축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고 이에 기초한 기만군단의 우세도 계속될 수 있었다.>
高麗史에는 몽골장군 흔도가 고려 장군 金方慶(김방경)에게 한 이런 말이 실려 있다.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漢族(한족)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를 멸시하면서 '몽골 사람들은 살륙만 일삼으니 하늘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에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골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다.>
먹물 먹은 사람들에 대한 武士들의 경멸과 '우리식'에 대한 자부심을 담고 있는 흔도의 이 오기서린 일갈은 몽골기마군단의 파괴력이 자라난 정신적 토양, 그리고 그들의 美學을 보여주고 있다.
金庾信의 자주국방
삼국통일기에 신라가 唐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것은 金庾信으로 대표되는 자주국방의 의지 덕분이었다. 唐은 신라와 손잡고 백제, 고구려를 친 뒤 신라마저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이때 金庾信 등 지도부가 對唐결전을 결단한 덕분에 민족통일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승부는 군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선비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원래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여세를 몰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태종무열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多美公(다미공)이란 사람이 나와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백성을 백제 사람으로 위장하여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하면 唐의 사람들이 반드시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더불어 싸우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金庾信이 『그 말도 취할 만하니 따르십시오』라고 했다. 태종무열왕은 내키지 않았다.
『唐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 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소.』
이에 金庾信이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金庾信이 한 말은 삼국사기에 「自救」로 표현되어 있다. 신라가 개노릇을 하여 唐을 섬길 용의는 있다. 唐이 신라를 존중해 주면 말이다(이것이 자주적 사대주의의 정신이다). 만약 唐이 크고 힘센 것만 믿고 신라의 자존심과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한다면 신라는 唐을 물어뜯어서라도 自救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新羅와 같은 小國이 大國을 옆에 두고도 自我를 지켜갈 수 있게 한 정신무장의 핵심 논리이다.
신라가 臨戰태세를 갖추자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은 백제 포로들만 데리고 귀환했다. 당시는 唐의 전성기 고종시대였다.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소정방의 대답은 그대로 신라에 대한 세계 최강국의 최고 찬사이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謨也)
기록에 나오는 仁愛忠事. 즉 어짐, 사랑, 충성, 섬김, 이것이 신라의 공민 윤리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덕심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加減(가감) 없이 쓸모 있는 국가와 국민의 윤리이다. 국가와 지도층은 국민들을 어짐과 사랑으로 대하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며 지도층을 섬긴다. 이것은 국민국가의 이상적인 「국가-국민」 관계이다. 화랑도의 武士道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국가윤리는 근대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근대성의 핵심은 자존심과 실용성이다. 金庾信의 직설적 말에서 그런 정신이 잘 묻어 나온다. 우리는 아무리 개처럼 작은 나라이지만 주인이 그 존재를 무시하면 사생결단하여 싸워서 지킬 만한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야말로 아무리 힘센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나만의, 우리만의 自我이고 自尊인 것이다. 신라 지도층의 위대성은 이런 집단적 自我를 발견하고 이를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지켜내는 과정에서 민족적 自我로 확대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여기서 종족을 민족으로 만든 동족의식이 생겨났던 것이다.
신라는 자주성을 지켜내는 방식에서 국력을 초과하는 무리를 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처럼 유아독존으로 모험을 하다가 必亡의 길을 걷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신라는 唐의 힘을 빌리고 그 唐의 패권을 인정하고 감사하려고 했다. 唐에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 唐과 결전할 때도 외교적으로는 항상 유화책을 썼다. 자존심을 뱃속에 숨겨 놓고 펼친 强穩 양면의 실용노선이 신라의 독립을 성취했다.
자주국방이란 말을 신라 이후 처음으로 되살려낸 朴正熙의 다음 어록은 金庾信과 같은 맥락이다.
<자주국방이란 것은 이렇게 비유해서 얘기를 하고 싶다. 가령 자기 집에 불이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 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 하고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왜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멍청해 가지고 앉아 있느냐?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 집 식구들을 총동원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서 꺼야 한다.> (1972년 1월11일 기자회견에서)












■■ 단독) 문죄인 실종
지금 이 시각 ( 금, 20시 )
미국의 각종 인터넷 뉴스 싸이트
( WSJ, WP, NYTIMES , CNN , FOX , GOOGLE 등 )
헤드라인 혹은 메인화면에
문죄인 사진이 실린 싸이트는
단 한군데도 없다
며칠전
나렌드라 모디 인도 수상이 미국을 방문하였을때는
대부분의 싸이트 헤드라인 혹은 메인화면에
그의 사진이 실렸었다
각 싸이트 화면 캡쳐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5898851
조갑제 기자는 이런말 할 자격이 없다. 병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치료해야 한다. 현재 한국병의 원인은 북한군이 일으킨 광주5.18 폭동이다. 국군이 시민을 학살하고 난자했다고 믿고, 주사파가 생겨나고, 전라도는 반역의 온상이 되고, 국가에 원한을 가진들이 설친다. 5.18은 북한군이 했다고 구국의 영웅 지만원 박사가 목숨걸고 수십년 조사해서 밝히고 대법원 판결도 났다. 조갑제 기자는 비중있는 언론이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여 5.18진실을 덮어 국가 멸망에 기여하고 있다. 연천 530 GP 김동민 일병 조작 사건도 입닫고 있다. 모른면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고, 알면서도 모른척하면 반역자나 다름없다.
다 좋은 데..
6.25를 북침으로 만드는 재주(노벨평화상을 핵무기로 만드는 재주와 같다)가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민주화 운동
5.18에 북한군 개입주장이 들끓고 있는 데
앞장서서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를 밝히려는 것이 째째하게 구는 것이기 때문인가?
개인적으론 한국의 현대사 및 현재와 미래까지도
뒤바꿀 파급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 지..
보통사람들을 하찮게 아는 갑질하는 쓰레기 먹물들이 너무 많아요. 공직자, 정치인, 판검사, 교수, 기자, 목사신부중, 노동귀족,,,
그들에게는 천국이지만, 보통사람들에게는 피곤한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