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기 신라와 일본의 대외정책
*아래 글은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가 펴낸 신라문화 제25집에 실렸던 논문(일본율령국가와 통일신라의 형성에 관한 일고찰)에서 일부를 뽑은 것이다. 필자는 부산동의대학교 鄭孝雲 교수이다.
<백제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신라의 對일본 외교는 적대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는 655년부터 668년까지 왜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왜는 백제와 고구려 군사동맹 노선에 가담하여 백제 부흥운동 과정에 있어 군사적 지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白江전투에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대해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倭의 입장에서 본다면 적극적으로 참가한 663년 白江전투에서의 패배란 상황은 倭를 정치·군사적 양면에서 대외적 위기에 대응하는 체제로 전환하게 하였다. 군사제도 면에서 방위태세의 확충과 정치제도 면에서 國制의 개혁이 그것이다. 패전 후 일본의 정치적 과제는 국내 민심의 수습과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통해 압박해오는 唐의 외교적 압력의 극복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상되는 신라와 唐의 무력적 외교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 방위시설의 증설을 강화하였다.
<三年 是歲 於對馬嶋 壹岐嶋 筑紫國等置防與烽 又於筑紫大堤貯水 名日水城 四年 秋八月遺達率答春初築城於長門國 遺達率憶禮福留 遺達四比福夫於筑紫國築大野及椽二城
六年 十一月 是月築倭國高安城 讚吉國山田郡屋嶋城 對馬國金田城 (이상 「日本 書紀」 天智天皇條)
3년 이해 대마도 일기도 축자국 등에 방안과 봉화를 두었다. 또 축자에 큰 제방을 쌓고 물을 저장하였다. 이름하여 水城이라 한다.
4년 추 8월에 달솔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도록 하였고 달솔 억례 복류와 달솔 사비복부를 축자국에 보내어 대야 및 연성의 두 성을 쌓게 하였다.
6년 11월 이 달에 왜국의 고안성과 찬길국 산전국에 옥도성과 대마도의 금전성을 쌓도록 하였다.>
664년에서 667년에 걸쳐 對馬에서부터 畿內지역에 이르기까지의 요지에 많은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방어 전략과 연계하여 667년 3월에는 수도를 내지인 近江大津宮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국적 방어 태세의 정비는 唐과 고구려의 전쟁이라는 동아시아 정세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려는 의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시기 倭의 對外정책은 더 이상 한반도 정세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불간섭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는 666년(天智 5) 10월과 668년(天智 7) 7월의 2회에 걸쳐 군사동맹국이었던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 파병을 요청하고 있지만 응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668년(天智 7) 7월의 고구려 사신 파견에 뒤이어 9월에는 신라로부터 사신이 倭에 파견되고 있다.
<秋九月壬午朔癸巳 新羅遺沙級金東嚴等進調 丁未 中臣內臣使沙門法弁·秦筆 賜新羅上臣大角干庾信船一隻 付東嚴等 庾戌 使佈勢臣耳麻呂 賜新羅王輸御調船 一隻 付東嚴等 … 十一月辛巳朔 賜新羅王絹五十疋 綿五百斤 韋一百枚 付金東嚴等 賜東嚴等物 各有差 乙酉 遺小山下道守臣麻呂 吉士小?於新羅 是日 金東嚴等罷歸
(「日本書紀」 天智天皇 七年條)
추 9월 임오 초하루 계사에 신라가 사록 급손 김동암 등을 보내어 진조하게 하였다. 정미에 중신 내신이 사문법변과 진필을 사신으로 하여 신라의 상신 대각간 유신에게 배 한 척을 주어 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였다. 경술에 포세신이마려를 보내어 신라왕에게 조를 나르는 배 한척을 하사하여 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였다. … 11월 신사 초하루에 신라왕에게 비단 오백필과 면 오백근, 가죽 일백매를 하사하고 김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고 동암 등에게도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이가 있었다. 을유에 소산하 도수신마려와 길사 소유를 신라에 보내었다. 이 날에 김동암 등이 파하고 돌아갔다>
이들 신라 사신 파견의 의미는 656년(齊明 2) 이후 13년만이라는 점보다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唐軍에 의해 함락되었던 시점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사신의 파견은 앞으로 예상되는 唐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외교적 목적을 가진 파견으로 생각된다. 이에 倭의 天智조정은 다량의 답례품을 사여하는 등 후한 대접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倭의 행위는 군사적 긴장관계에 있던 신라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외교책에서 나왔다고 보아진다.
이 점은 군사동맹국이었던 고구려의 지원 요청에 대해 협력하지 않은 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것과 동시에 당시의 신라와 倭가, 당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해 공통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倭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중립적 불간섭 외교정책은 신라가 唐과 전쟁을 수행하였던 시기에도 일관되게 추진되었다고 보아지며, 이는 白江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추진한 소극적 양면외교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왜의 對唐외교는 주로 熊津都督府 鎭將과의 교섭이었기 때문에 당조정과 직접적으로 외교를 추진하지는 못했다. 이는 한반도의 정세가 격변기란 점도 작용하였지만 唐과 적대적이었던 고구려·백제의 군사노선을 선택하였던 것이 唐과의 직접 교섭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와중에 669년(天智 8)에 제 5차 遺唐使(견당사)가 파견되었다.
이 사신의 파견에 대해서는 시기적으로 보아 고구려 멸망과 관련된 축하사절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점 역시 倭의 중립적 외교의 표현으로 보아진다. 이후 701년(大寶 1)에 6차 遣唐使가 파견될 때까지 33년간 唐과의 국가적 교섭은 보이지 않는다. 天智朝의 唐과의 외교단절 정책과, 신라와의 외교 재개란 대외정책의 방향은 天武·持統朝에도 계승되고 있다.
이 시기 왜의 對外정책을 제약한 요인은 白江전투의 패배에 따른 패배감과 唐의 위협이라는 국가적 위기감이었다. 후자는 신라와 공통하는 대외인식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이 일본의 외교를 唐보다는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우선시하는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고 생각한다>
왜 일본은 신라와 친해지려 했나
- 鄭孝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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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9-12, 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