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사카 다카시(早坂隆)
논픽션 작가
태평양 전쟁 당시 특공(가미카제)으로 전사한 日本軍
장병은 4000명 이상인데, 이 중 20명 정도가 朝鮮人
이었다. 그 중, 탁경현(卓庚鉉)은 1920년 11월5일, 경상
남도(慶尚南道) 사천(泗川)市에서 태어났다. 日本名으
로는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다.
탁경현 출생 당시 일가는 유복한 편이었지만, 조부(祖
父)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생활이 어려워졌고 일가는 돈
을 벌기 위해 日本으로 가게 되었다. 정착한 곳은 교토
(京都)였다. 당시 교토(京都)에는 1만 명 이상의 한반도
출신자가 살고 있었다. 합병 이후, 한반도보다 임금 조
건 등이 좋은 日本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많은 朝鮮人
이 건너오게 되었다. 탁경현의 부친 탁재식(卓在植)씨는
교토(京都) 시내에서 건어물商을 하게 되었다.
탁경현은 교토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리쓰메이칸(立
命館) 중학교에 진학했다. 탁경현은 인생의 대부분을 日
本에서 보냈다. 탁경현은 교토(京都) 약학전문학교(薬学
専門学校, 현京都薬科大学)에 진학했다. 1943년 9월 전
문학교를 졸업한 탁경현은 10월에 육군특별조종견습사
관(陸軍特別操縦見習士官)으로 지원하여 합격했다.
합병 후 日本은 朝鮮人에 대해서는 징병제(徴兵制)를 적
용하지 않았다. 朝鮮人에 대한 징병제(徴兵制)가 시행된
것은 전쟁 말기인 1944년 9월 이후다. 日本은 구미열강과
는 대조적으로 '식민지 사람의 군사적 이용'에 소극적이
었다. 영국군의 경우 동남아시아 전선에 인도 출신 병사
나 구르카 병사(네팔산악 민족)를 가장 위험한 최전선
으로 투입했지만, 日本은 그러한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가고시마(鹿児島)県 남부의 육군비행학교(陸軍飛行学
校) 지람분교소(知覧分教所)에 입교한 탁경현은 항공
병으로 기초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탁경현은 쉬는 일
요일이면 근처의 '도미야(富屋)' 식당을 찾아갔다. 지
람(知覧)역에서 가까운 도미야(富屋) 식당은 1929년
여주인 도리하마 도메(鳥濱トメ)씨가 개업했다. 지람
분교소(知覧分教所)는 1941년에 개교했고, 1942년부터
이 식당이 육군의 지정식당이 되었다. 우동과 소바 등
면류와 카레라이스가 인기였고 여름에는 빙수도 호평
을 받았다.
탁경현은 도메(トメ)씨를 친어머니와 같이 생각했다.
탁경현은 처음부터 도메(トメ)씨에게 자신이 朝鮮人
임을 밝혔다. 당시 日本内에는 朝鮮人을 부당하게 멸
시하는 어리석은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시대 배경 때문에 도메씨는 탁경현을 더
욱 신경쓰며 잘해 주었다. 도메(トメ)씨의 남편은 버
스 운전수였고 두 딸이 있었다. 장녀 미아코(美阿子)
는 17세, 차녀 세쓰코(節子)는 13세였다. 탁경현은 이
들과도 잘 지냈다.
1944년 7월 탁경현은 도치기(栃木)県의 교육대(教育
隊)로 전속되었고 이후로 이바라키(茨城)県의 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탁경현은 틈틈이 도메씨에게 엽서
를 보내는 등 연락을 유지했다. 1944년 10월, 탁경현
은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11월에 교토(京都)에 거
주하던 모친이 별세했다. 임종을 못했지만, 부친으로
부터 전해들은 모친의 유언은 다음 같았다.
'경현이는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몸이 되었으니,
부디 최선을 다하거라…'
탁경현은 특공에 지원하게 된다. 상관(上官) 중 한 명
이 탁경현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특공에 대
한 지원 여부를 그에게 거듭 확인했다. 하지만, 탁경
현은 확고했다. 1945년 3월 탁경현은 미에(三重)県 교
도비행사단(教導飛行師団)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재
차 지람비행장(知覧飛行場)으로 배치된다. 탁경현이
재차 밟은 지람(知覧) 땅은 '특공기지'로 바뀌어 있었
다. 탁경현은 처음 외출을 하자마자 그리워하던 도미
야(富屋) 식당을 찾았다.
'아주머니'.
가게 문을 열며 들어서는 탁경현을 본 도메(トメ)씨는
놀랐다.
'이게 누구?, 미쓰야마(光山)상!'.
도메(トメ)씨는 탁경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도메(トメ)씨는 탁경현이 특공대원인 것을 이내 알아
차렸다. 지람(知覧) 기지로 돌아오는 경우는, 특공대
원일 경우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탁경현은 도미
야(富屋) 식당을 거의 매일 찾았다. 특공대원(特攻隊
員)은 여타 부대원들과는 달리 외출이 거의 자유로웠
다. 탁경현은 교토 시내에 거주하는 부친과 여동생을
한반도(朝鮮)로 귀향시켰다. 전황이 악화되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탁경현은, 미군의 공격과 관련하여 일본 본
토보다는 조선 땅이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이다. 출격하기 하루 전날인 5월 10일, 탁경현은 마지
막 이별을 위해 도미야(富屋) 식당을 찾았다.
'아주머니, 내일 출격입니다. 오랫 동안 신세를 졌습
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같이 좋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도메씨와 두 딸은, 탁경현에게 직접 손으로 정성스럽
게 만든 인형을 선물했다.
'아주머니, 오늘은 노래를 부르고 싶네요. 노래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그럼, 제 조국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탁경현이 부른 노래는 조선의 노래, 아리랑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탁경현은 모자를 힘껏 내려 쓰고 얼굴을 반쯤 가렸
지만 흐르는 눈물을 숨길 수 없었다. 아리랑을 알고
있던 도메씨는 함께 부르기 시작했고, 나중에 탁경
현과 도메씨, 두 딸은 함께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주머니, 가진 것이 없어서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지만, 저의 유품이라고 생각하시고 저의 지갑
을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갑을 건넨 탁경현은 그날 밤 등화관제로 어두워진
거리로 나서며 손을 흔들며 도메씨 가족과 이별했다.
다음날인 5월 11일, 제7차 항공총공격 작전의 일환으
로 탁경현은 오전 6시33분, 포탄을 적재한 일식전투
기(一式戦闘機) 하야부사(隼)에 탑승하고 지람비행장
(知覧飛行場) 활주로를 이륙해 출격했다.
육군 소속 탁경현의 탑승기 등 29기(機)는 해군 소속
의 69기(機)와 함께 오키나와(沖縄) 근해의 미군함정
을 향해 비행했다. 이날 특공작전으로 미군 항공모함
1척과, 구축함 2척이 전렬복귀불능(戦列復帰不能)의
피해를 입었다. 탁경현의 전투기는 오전 9시30분경
교신음이 끊겼다. 향년 25세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많은 朝鮮人이 日本人과 함께 싸웠
다. 이러한 것을 두고 '강제'(強制)라는 단순한 표현
으로 재단하는 것은 탁경현을 포함한 고인에 대한 예
의가 아닐 듯 싶다. 한국의 '反日'은, '이성'(理性)을
파괴하는 일종의 탁류다. 이러한 한국내 분위기 속에
서, 탁경현은 '대일협력자; '친일파' '매국노' 등으로
매도되고 있다.
2008년 5월에 몇몇 日本人들이 뜻을 모아, 탁경현의
고향인 경상남도(慶尚南道) 사천(泗川)市에 '귀향기
념비(帰郷記念碑)'를 건립했지만, 한국 현지 단체 등
의 격렬한 반대로 제막식이 봉쇄되는 일이 발생했다.
사천(泗川)市의 시의원 한 명은, '출격전에 아리랑을
불렀다는 것을 어떻게 믿나', '日本軍에 지원한 인간
을 이렇게 좋게 대해줄 수 없다'는 말들을 쏟아냈다.
결국, 기념비는 철거되었다. 한국인의 이러한 피상적
역사인식은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다. 아
울러, 한국인의 뿌리 깊은 '在日한국인 차별'의 단면
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측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헤이트 스피치' 혹은 '헤이트 액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매국노'라는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비난이 퍼부어지
는 순간, 그래도 마지막에는 조국의 노래인 아리랑을
부르던 탁경현이 품었던 최소한의 자부(自負)와 우민
(憂悶)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지람특공평화회관(知
覧特攻平和会館) 부지내(敷地内)에는 많은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중에는 '아리랑 진혼가비'(鎮魂歌
碑)라는 석비(石碑)도 있다. 이 비(碑)는 日本人 독지
가의 기부로 건립되었다. 비(碑)의 전면(前面)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아리랑의 노래 소리와, 어머니의 나라(조선)에 염원
을 남기고 산화한 꽃들(花花)'
오늘날 한국內 度를 넘는 '反日 내셔널리즘'과, 그에
따른 日韓관계의 혼미에, 탁경현은 심히 안타까워하
고 있을 듯 싶다.

탁경현.

탁경현씨가 출격 전날 밤 아리랑을 불렀던 지람특공(知覧特攻)기지
근처 도미야(富屋) 식당 내부 현장. 붉게 표시된 것이 탁경현씨 사진.

2008년 5월, 경상남도 사천(泗川)市의 조선인(朝鮮人)
'귀향기념비'(帰郷記念碑) 제막식에 참가한 일본 여배
우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씨. 親韓派인 구로다 후쿠
미(黑田福美)씨는 당시 한국 단체 등에 의해, 현장을
봉쇄당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손을 모으고 탁경현씨
의 명복을 빌었다.












1944년 9월 이후, 조선인은 징용이 적용되었고,
일부 징병에 해당된 조선인의 경우 사실상 훈련소에서 훈련받다가
종전을 맞음.
1943년까지의 조선인 일본군 자원입대 경쟁율은
수십대 일 수준으로까지 치열.
자원입대에 떨어졌다고 자살하는 경우까지 발생.
王家부터 나만 살자판에 국가가 없는데 무슨 애국이 있으며, 그것도 30년간 일본에 예속되어 탁씨같은 청년이 있는데 한가하게 무슨 봉창두드리는 친일 소리! 그러니 미군에 의해 독립되어도 패전국 일본에 어떤 구상권을 요구할 수 있나? 강력한 한미연합군 힘에 그런 소리치지. 한국이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 반일운동하기 전에 일본보다 강한 국력과 국방역을 가져라, 이 조선의 후예들이여!!
일제시대때 일본이 우리에게 피해를 준 부분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죠.
그런 역사를 부정하자는게 아니에요..
우리가 기억해야할 역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강제징용자 보상이 끝나지 않았다느니,,대통령 바뀔때마다 위안부 문제 걸고 나오는게 문제라는겁니다..
이미 1960년대 일본이 거액의 식민지 피해 배상금을 지불했구요.
일본만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 국가에게 피해 배상금 준거랍니다..
거기다 1960년대 우리가 경제개발 시작할때,,많은돈을 빌려주었구요..
우리가 다시 갚긴 했지만,,전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에겐 돈을 빌려주지 않은 상황이었답니다.
1960년대 한국은,,지금의 소말리아 같은 수준의 나라인데,,뭘믿고 몇억불 돈을 빌려주나요?
이런식으로..일본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많이 보답을 해왔답니다.
위안부 문제도..이미 1990년대에는 고노수상이 일일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편지를 보냈고,,많은 위로금을 주었죠..그런데,,정부에서 편지나,돈을 모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전달하지는 않았구요...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짚고 넘어갈 부분이 많답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피해준 부분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 없을테고,,그런 역사적 사실을 잊어버리자고 떠드는 사람 역시 없을거에요.
그런데,,기억해야한다고 해서,,언제까지 과거사만 물고 늘어지는건,,결국 우리에게 득될건 없다는거죠..우리끼리 죽어라고 일본욕만 해대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생각해 볼 일이랍니다.
日帝의 徵兵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전시체제하에서 병력보충을 위해
한국인 청년들을 강제로 군대에 복무하도록 했다.
당초 일제는
한국인의 무장항쟁을 염려하여
한국인을 징병하지 못했으나,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이래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적인 병력보충이 필요해지자
한국인 청년에 대한 징병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일제는 지원병(志願兵)의 형태로
한국청년을 징병하기로 하고,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했다.
이에 한국청년들 중에는 주로 지원병제도를 성공시키기 위한
일본의 교묘한 술책과 전시하의 농촌 피폐에 못 견뎌 자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지원병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곧 군대식 훈련을 시행하기 위해 나남·함흥·평양·대구 등에
육군지원자훈련소를 설치하여 강제적인 동원·훈련을 실시했다.
1941년에 발생한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해군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1943년 7월 '해군특별지원령'을 공포,
같은 해 8월부터 시행하여
해군병지원자훈련소를 설립하고
강제적인 동원·훈련을 실시했다.
1943년 10월에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이 공포·시행되면서부터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 아래
전문학교·대학 재학생들에 대한 강제징집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8~43년에 2만 3,681명의 지원병으로 동원되었다.
한편 1942년 5월 일본 각의(閣議)는
보다 강권적으로 한국인 청년들을 의무동원하기 위하여
지원병제가 아닌 징병제를 실시하고,
1944년부터 징집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에 총독부는
'징병제시행 준비위원회 규정'을 발표하고,
선전계발·호적정비·일어보급과
청년적령자의 연성(鍊成) 등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선전공세가 강행되고
군복무에 필요한 언어적 예비훈련으로서
일어 강습회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중,
1942년 10월
징병 적령자에 대한 일제 신고가 있게 되었다.
국민총력운동조선연맹의
'애국반'이 총동원되어 실시된 이 사업에서는
적령자의 96%인 25만 8,000여 명이 신고되었다.
아울러 일제는 징병령 시행 후
군복무에 필요한 자질의 단련을 목적으로
중등학교 이상에는
현역장교를 배속시켜 군사훈련을 하고
국민학교 졸업생은 청년훈련소,
이를 수료하지 못한 자는
청년특별훈련소에 입소시켰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944년 4월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한국인 청년들은
대거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리게 되었다.
1944~45년 강제 징집된
한국인 청년의 수는 20만 9,279명에 달했다.
이처럼 패전의 위기에 몰린 일제의 최후 발악 속에서
한국인 청년들은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희생을 강요당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지금 한국에서의 반일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거의 종교화 되가고 있죠..
일부 사람들은 반일교 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같이 되버렸네요..
지금은 일본과 자존심 싸움할때도 아니고,,약점 물고 늘어지기 할때가 아니랍니다..
냉정하게 실속을 차려야할텐데..
이건 대통령부터 위안부,징용 보상이 아직 안끝났다는 발언을 하다니,,쯧쯧..
반일감정을 자신의 인기유지에 써먹고,,참으로 답답하네요.
감동적입니다.
당시 일제 통치가 30년 이상 계속되고, 조선은 흔적도 없는 데, 언젠가 조선왕이 다시 복위될 것이라고 믿고 조선 민중이 모두 독립투쟁에 나서야 했나요? 실제로 조상들 모두가 독립투사가 됐나요? 그래서 조선이 독립됐나요? 미국 덕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