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자妃와 함께 한 韓國人의 증언

(2014. 4. 25, 산케이 신문 게재)


¶이방자(李方子=梨本宮方子, 나시모토노 미야마사코,1901~1989년)
1901년 日本 황족 나시모토(梨本宮)의 장녀로 태어나 1918년 가쿠슈
인(學習院)을 졸업한 뒤, 1920년 4월 日本 황실의 韓日 융화정책에 따
라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李垠'(이은=영친왕, 1897~1970年)과 정
략결혼한 妃로서 태평양 전쟁 종료 후에는 日本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한국인으로 살았다. 1963년 염원이던 한국으로의 귀국이 이루어
져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살며 장애인복지에 힘썼다.

¶김수임(金壽姙)
1921년 개성(현재 北韓)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금
융조합에 근무했다. 1938년 미션스쿨인 호수돈 女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같은 고향 남성과 결혼했다. 1941년 만주로 건너가
1942년 장남이 태어났으나 장남은 생후 6개월경 뇌막염으로 청각장
애를 입게 된다. 1965년 이방자妃와 만나게 되고 장애인을 지원하는
사단법인 '慈行會' 및 복지법인 '明暉園' 등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以下는, 김수임氏의 증언(2014. 4. 25, 산케이 신문 게재)

妃殿下가 1989년 4월말에 돌아가신 후 금년으로 벌써 25년이 됩니다.
저는 妃殿下의 생전, 25년 남짓 걸쳐 그와 함께 자선활동에 종사해 왔
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도 봉사정신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妃殿下의
뜻에 따라 산 지 '半百年'이 되었습니다. 50년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百年의 절반이라고 하는 표현이, 좀 더 긴 시간을 妃殿下와 함께한 것
이 되는 느낌이 들어 '半百年'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妃殿下와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5년,
저의 장남(당시 24세)이 교원으로 근무하던 '수원 농아 학교(수원市)
에 견학을 오셨습니다. 당시 妃殿下는 62세로, 한국에 정착은 하게 되
었지만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제가 통역을 맡게 된 것입니
다. 저와는 언어소통의 벽이 없어서인지 서로 잘 통하게 되었습니다.

妃殿下는 장애인 복지에 그때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하시던 시기였기
때문에 '金상,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로 제게 부탁해 왔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설이 거의 없었습니다. '慈行會'
가 知的장애아를 위한 학교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 학교를 세우기
위해 妃殿下가 土地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그만 사기를 당하게 되셨
습니다. 妃殿下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셨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셨습니다. 별 도리없이 校舎가 없는 상태로 건물을
빌려 급한 대로 開校를 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지역의 한 독지가께
서 땅을 기증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校舎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妃殿下는 한국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지나 '쪽바리'라는
소리를 들으시기도 하고, '이제와서 한국에서 무얼 한다고 그러나?'
라는 식의 차가운 시선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한국은 모두가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봉사 같은 것에는 신경쓸
여유가 없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셨을 당시 妃殿下는 財産을 거의 잃어버리신 상태였기
때문에, 복지활동을 위한 자금은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모아야 했습
니다. 항상 日本과 한국을 오가면서, 독지가나 사업가 등을 찾아가
기부금을 모으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셨습니다. 남편이신 '이은'(李
垠) 殿下가 1970年에 별세한 이후로도 日本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
에서 복지활동을 하며 계속 머무시게 되었습니다.

기부금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妃殿下는 몸소 陶磁器나 칠보 등을
구워 만들기도 하고 회화나 글씨(書)를, 그리거나 쓰시느라 무리를
하신 끝에 손목이 다 부어오를 정도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
서 만들어진 作品들은 '바자'에 내놓아 팔아서 열심히 資金을 모으셨
습니다. 妃殿下는 자주 '봉사란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이예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80세를 넘기고도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본과 한국 사이를 왕래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습은 정말 애처로울 정도였습니다. 福祉活動에
헌신하는 妃殿下의 필사적 노력은 점차 한국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
었고 妃殿下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도 점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한국의 장애자를 생각하
시면서 '하면 된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 가운데 혼신의 힘을 다해 매
진해 나가셨습니다.

妃殿下는 만년에, 장애자用 양로원을 세우고자 서울 교외에서 土地를
알아보고 계셨는데, 그 때, 아는 목사님으로부터 한국정부에 妃殿下의
叙勲을 上申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훈장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필요한 것은 土地입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
니다.


저의 부친은 開城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금융조합
에 근무했습니다. 직장동료는 전부 日本人이었는데, 부친은, '日本人은
모두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정직하다'고 자주 이야기 했습니다. 집에서
는, '義理를 저버리지 마라', '배신하지 마라', '他人에게 폐를 끼치지 마
라'는 日本式 예절을 교육받았습니다. 부친으로부터 日本人의 좋은 점을
들으며 자라서 그런지 日本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朝鮮人으로서
差別이나 虐待를 받은 일도 없고, 뭔가 손해를 입은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日本에 대한 '恨'도 없습니다. 일본 통치를 받게 된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친은 朝鮮人으로서의 자부심도 갖고 있었습니다. '姓까지 바꾸고 싶지
는 않다'며 創氏改名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被害를 입은 일도 없
었고, 創氏改名을 강요 받은 일도 없습니다. 다만, 편의상, 日本式 인명
이 필요한 경우를 위해 '金 村'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부친은 만들어 놓았
습니다. 저는 여학교 졸업후, 동향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1941년에 남편
이 만주에 있는 '흥농합작사'(興農合作社)에서 일하게 되어 중국의 '무순'
(撫順)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태어난 장남은 生後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뇌막염을 앓아 장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故人이 되신 李方子 妃殿下의 선행을 표창하시려던 '다가마도노미야'(高
円宮, 일본황족)가 갑자기 젊은 나이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1周忌
가 되었을 때 어떻게든 '미야'(宮)가 잠들어 있는 '도요시마오카'(豊島岡)
墓地를 다녀오고 싶어 여러가지 애를 써 봤지만, 일반인의 성묘는 어렵다
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日本行을 決行하여 그 墓地와 가까운 장소
에서나마 손을 모으고 추도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습
니다. 이것이 2003년의 일이었는데, 그 다음 해에는 염원이 이루어져 직
접 墓地에 가서 추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生을 마감한 조선청년 2만1천여 柱가 야스쿠니(靖国)神社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알고, 日本에 갔을 때 검은 색 치마 저고리를 입고
참배했습니다. 日本人은, 치마 저고리 모습을 한 한국인이 야스쿠니(靖
国)를 참배했다고 하면 놀랄 일이겠지만, 한국인에게 있어 치마 저고리
는 정장에 해당하므로 엄숙한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日本에서든, 한국에서든 '누가 야스쿠니(靖国)를 참배했다'고 하
면 시끄러워지지만, 저는 오로지 순수하게 전장에서 生을 마감한 朝鮮
青年들의 英霊을 위로하기 위해 참배했습니다. 안내해 주신 담당자(야
스쿠니측)가 '正式으로 昇殿 참배하는 한국인은 처음'이라고 말해 주었
습니다. 전사한 朝鮮의 青年들이 측은합니다. 조국의 사람들 누구 한 명
도 와주지 않으니까요. 참배 후, '유자와 조'(湯沢貞) 당시 宮司(최고위
神官職)와도 면회했습니다. 당초 5분 정도의 짧은 약속이었지만, 韓日
교류와 생전의 '李方子 妃殿下' 관련 등으로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1시
간을 훨씬 넘겼습니다. 그 때 저를 아주 정중하게 대해 주셔서 고마웠
습니다.

한국에 와서, 야스쿠니(靖国) 참배 때문에 '매국노' 혹은 '親日派' 소리
를 들은 일은 없습니다. 아무도 내가 참배한 것을 알지도 못했고, 한국
에서는 원래부터가 日本人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으니까요. 아울러, '親日派'라는 소리는 평소 항상 듣던 것이기도 하
니까 별 신경 안썼습니다. 開城 출신자들이 출판하는 간행물에 일본 관
련 내용으로 정기적으로 기고를 하기도 하는데, 日本에 대해 좀 호의적
으로 쓰면, '아줌마 親日派죠?'라는 항의성 전화가 걸려 오는 경우가 있
습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맞습니다. 저 親日派예요.
제가 쓴 글을 한 번 더 잘 읽어주시고 그래도 이해가 안되시면 제 집
으로 찾아 오세요. 만나서 이야기 하시죠.' 그러면, 두 번 다시 전화가
안옵니다.

한국은 그 동안 日本을 철저하게 惡者로 간주하는 反日교육을 실시해
왔습니다. 日本의 나쁜 점만 가르치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에만 얽매
여서는 양국간의 우호 증진은 어렵습니다. 1989년 4월30일 李方子妃
께서 87세로 永眠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
장(勲一等)에 追贈(사후 증정)되었습니다. 장례 당시, 妃殿下가 생전
에 거하시던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부터 동대문까지 행렬이 이어졌
습니다. 많은 市民들이 행렬을 지켜보았는데, '가엾게 살다가 가셨네'
라며 우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妃殿下는 한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계셨던 것이죠.

妃殿下는 생전에, 양국간 우호를 진심으로 원하고 계셨고, 한국에 오
셔서 장애인 복지에 여생을 바치셨습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한국
과 일본 양국 사람들의 記憶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안타
깝습니다. 妃殿下 생전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妃殿下로부터 배운 봉사 정신을 생각하며, 지금도 '바자'에 내놓을 作
品 만들기를 쉬지 않고 있습니다. 버스 등을 타고 移動할 때도, 바자에
내놓을 編物(뜨개) 챙기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년 2015년은
妃殿下와 처음 만나 봉사활동을 시작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므로, 이
를 기념하는 '불우이웃돕기 바자'를 열어, 제가 만든 作品들을 전시하
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妃殿下에 대한 생각 등을 담은 著書를 한국에서 자비출판
했습니다. 妃殿下의 감추어졌던 선행들이 좀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
에서입니다. 금년에는, 妃殿下를 생각하며 지은 歌集을 책으로 엮어,
그 동안 신세를 진 日本 內 많은 분들께 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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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코더 2017-08-24 오후 7:38

    개인적으로 친일을 뭉뚱그려 반대하지 않는다. 매국적 반민족적 從倭가 아닌 선의의 친일을 적대시하는, 반일을 정치도구화하는 일당들의 선동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 '일본놈'보다 훨씬 많은 '일본인'이 있고, 이런 일본인까지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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