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스카 기지에 정박한 美원자력 항모 로널드 레이건.
■1865년 당시 총공사비 240만 달러, 아시아 최대 건설
駐日 美海軍 司令部가 위치한 요코스카(横須賀, 가나가와현)
기지. 서태평양에서 인도양까지를 작전해역으로 하는 美 제7함
대의 본거지로서, 同함대의 旗艦 '블루리지'와, 유일한 海外常駐
航母 '조지 워싱턴'의 母港이 되고 있다. 이 요코스카(横須賀)기
지의 前身이 된 것은 바로, 도쿠가와(徳川)막부(1603~1867년)가
그 기초를 쌓아올린 요코스카(横須賀) 造船所다.
도쿠가와(徳川)막부의 말기인 1853년, 가나가와(神奈川)의 '우라
가'(浦賀)지역 앞바다에 美国의 페리提督이 이끄는 흑선(黒船)이
나타나자, 막부(幕府)는 軍艦과 船舶의 建造와 購入에 힘을 쏟기
시작해, 이후 海軍의 대폭적인 強化를 도모하게 된다.
하지만, 대량의 軍艦과 船舶을 保有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修理
와 부품 등의 기구(器具)製造를 위한 설비 또한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막부의 재정담당이었던 '오구리 다다마사'
(小栗忠順)라는 인물은, 종합적인 造船所의 건설계획을 발안(發
案)하게 된다. 대부분의 重臣들은 조선소 建設에 반대했지만, 당
시 쇼군(将軍,막부실력자)의 後見職으로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
부'(徳川慶喜)가 이 안(案)에 승낙을 하여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
게 된다.
막부(幕府)는 1864년, 造船所 建設을 프랑스 공사(公使)인 '레온
로슈'에게 의뢰하게 된다. '로슈'는 현장을 시찰하고 나서, 만(湾)
의 구조상 風波에 따른 걱정이 없다는 장점 등을 바탕으로, 요코
스카(横須賀)를 造船所 건설 예정지로 확정한다. 아울러, 프랑스
본국으로부터 海軍 大技士였던 '프랑소와 레온스'라는 인물을 초
빙하여, 造船所 建設 責任者로 任命한다.
■프랑스人 技師에 의해 建設된 요코스카(横須賀) 造船所
이렇게 해서, 1865년 9월에, 造船所 建設이 시작된다. 부지가
약 24만6천 평방미터로서 建設費는 4년간 총 240만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다. 당시 아시아 최대규모의 건설이
었고, 그 비용은, 금(金)의 함유량이 적은 금전화폐를 발행
하는 식의 화폐발행익(貨幣発行益)으로 충당하고, 그래도 부
족한 자금에 대해서는 프랑스에 소정의 담보(絹,명주)를 제공
해 주고 차관을 얻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프랑스가 造船所
建設에 적극적이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유럽 전역을
강타한 미립자병(微粒子病, 누에에 생기는 전염병)으로 인해
양잠업이 붕괴되어, 프랑스로서는 자신의 최대의 輸出品인
견직물(絹織物)의 原料로서 品質이 뛰어난 日本의 명주(絹)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68년에 戊辰戦争(막부와 新정부간 1년 동안 이어진
내전)이 발발하여, 造船所는 新정부軍에게 접수된다. 維新 후,
工事는 新정부가 이어받아 계속 진행되어, 1871년 完成을 보
게 된다. 그 후로, 조선소는 海軍省의 所管으로 들어가게 되고
1875년경부터 본격적인 軍艦 건조에 들어가게 된다.
■日露海戰 승리는 요코스카(横須賀) 造船所 덕분
하지만, 造船所의 산파역을 했던 막부 재정담당 '오구리'(小栗)
는 조선소의 完成을 보지 못하고 戊辰戦争 당시 新정부軍에게
붙잡혀 斬首되고 만다.
日本海軍 나아가 세계海軍 역사에 남는 勝利가 된 東海에서의
<日露海戰>에서 러시아의 발틱艦隊를 격파한 '도고 헤이하치로'
(東郷平八郎) 元帥는, 그 7년 후인 1912년 7월, 自宅으로 '오구리'
(小栗)의 遺族들을 초청하여, <東海海戦의 勝利는 오구리(小栗)
가 만든 요코스카(横須賀) 조선소 덕분>이라고 감사의 뜻을 전
했다. 오구리(小栗)의 선견성(先見性)이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오구리(小栗)는 현재 <明治의 아버지>라고도 이야기되며 높이
평가받고 있다.
■막부의 재정담당을 맡았던 오구리 다다마사(小栗忠順)
그런데 日露戦争의 승리를 언급하는 데 있어, 빼놓으면 안되는
것이 1902년 1월에 締結된 日英同盟의 존재다. 정확히 그 해
(1902년)에 東海에서의 日露海戦의 連合艦隊 旗艦이 된 戦艦
'미카사'(三笠)가 就航했던 것이다.
英国이 <栄光있는 孤立(도도한 홀로서기)>을 포기하고 日本과
同盟을 체결하게 되는 결단을 내린 理由로는, 1900년 北清事変
(義和団事件, 청말기 외세배척 운동) 당시 中国에 出兵했던 日
本軍이 보여 준 높은 수준의 規律과 태도를 評価한 점과, <中国>
에 대한 英国의 権益과 <中国・朝鮮>에 대한 日本의 権益을 日英
이 상호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한 점이라는 2가지가
일반적으로 거론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되는 理由
로서, 軍艦을 修理해낼 수 있는 높은 技術力을 구비한 도크
(Dock)를 갖춘 요코스카(横須賀) 조선소의 존재가 있다. 이 점
이, 日英同盟 締結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당시, 아시아에서 '미카사'(三笠) 클라스(級)의 戦艦을 修理할 수
있는 도크(Dock)를 갖춘 造船所는, 요코스카(横須賀) 뿐이었다.
'도고'(東郷)가 <東海海戦의 勝利는 요코스카(横須賀) 조선소 덕
분>이라고 말한 것 같이, 造船大国인 英国도 요코스카(横須賀)
造船所의 能力을 당시 높게 評価했던 것이다.
■ 향후 1세기 동안도 現役으로 駐日美軍 지탱
요코스카(横須賀)조선소는, 요코스카(横須賀)海軍조선소, 요코
스카(横須賀)海軍공창(工廠)이라고 명칭을 바꾸어 나가면서
그 후로도, 戦艦'무쓰'(陸奥), 航母'시나노'(信濃)를 비롯한 수
많은 軍艦을 건조하게 된다.
종전 후에는 美軍에게 접수되었지만, 3基의 <드라이 도크(Dock)>
는 최초 완성으로부터 100년이 넘은 지금도 美海軍 요코스카(横
須賀)기지의 선박수리 시설로서 계속 사용되고 있다. 同盟의 상
대가 과거 英国에서 지금은 美国으로 바뀌었을 뿐, 예로부터
지금까지 요코스카(横須賀)조선소에서 일하는 日本人 技術者는
그 技術力으로 同盟으로서의 한쪽 날개(一翼)를 담당하며 그
역할을 수행해 내고 있다. (2014. 9. 23. 산케이 신문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