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공산주의]
러시아는 수천 년 동안 1%의 귀족이 99%(1861년 노예 해방 당시 귀족 1만명, 농노 4,000만명)의 농노 위에 군림한 나라였었다. 지식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라에서 1%의 귀족을 무너뜨리고 99%의 농노를 누구나 평등한 농민과 노동자로 만들어 준다는 데에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귀족과 왕족이 재산을 독차지했을 뿐 아니라 군대와 경찰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와 경찰을 의식화시켜 그 총칼을 1%의 귀족과 왕족에게 향하게만 하면, 즉시 공산국가가 탄생하게 되어 있었다.
이 의식화 교육에 마르크스의 자본론만큼 좋은 교과서는 없었다. 세계의 심금을 울린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은 무력하기만 했었지만, 이 마르크스의 이론은 즉시 성경의 복음보다 더 설득력 있는 복음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의식화 교육으로 군대와 경찰을 무력화시켜 마침내 이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공산화 이후의 문제와 그 해결책]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가 생겼다. 인민이 무지몽매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면 좋은데, 이자들은 노예근성을 못 버리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일은 죽어도 안 하려고 하고 먹을 것만 밝혔던 것이다. 이들만 문제가 많았던 게 아니다. 새로이 정권을 탈취한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권력 맛은 꿀처럼 달았다. 옛 귀족은 오랜 통치로 탐욕스럽지는 않았다. 단지 양심의 일부가 마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권력자들은 게걸들린 자들이었다. 양심이고 뭐고 아예 없었다. 고기 맛본 스님이었다. 여자 맛본 10대였다.
[감독]
마르크스 이념에 충실했던 애국자들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다섯 가지 방법이었는데, 그 첫째가 바로 감독이었다. 인민이든 공산당원이든 권력자든 아무도 믿을 수 없느니만큼 철저하게 감독을 해야 했다. 음지에서 비밀 경찰이 더욱 방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양지에선 어디나 다섯 명에 한 명 꼴로 생산을 않고 감독을 했다. 마침내 본말이 전도되었다. 무엇을 위한 체제인지 스스로 헷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이 그 제도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그냥 그대로 모순이 극대화되어 스스로 무너지거나 외부의 충격으로 무너질 때까지 계속 흘러간 것이다.
[교육]
두 번째 방법은 교육이었다. 공산주의가 최고라는 것을 조직적으로 가르쳤다. 공산주의는 철학이요, 종교요, 윤리요, 학문이요, 예술이요, 생활이었다. 유일무이한 진리였다. 현실과 점점 동떨어지는 이론이었지만, 아랑곳없었다. 무상 교육을 통하여 누구나 보통교육을 받게 하고 성인도 학교에 무관하게 끊임없이 비조 마르크스와 교주 레닌, 스탈린, 브레즈네프, 모택동, 김일성, 차우세스쿠, 티토, 카스트로를 경배하게 했다. 자나깨나 따라 배우게 했다.
[산업화]
세 번째 방법은 산업화였다. 웅장한 중화학 공업 위주로, 군수 산업 위주로, 공장을 정신없이 지었다. 효율성, 경쟁력, 경제성 따위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선전 효과는 대단했다.
[국가주의]
네 번째 방법은 국가주의였다. 특히 러시아인들은 그럴 듯한 형제국이란 말 이면에 있는 러시아의 팽창 정책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유럽의 후진국으로 가슴 앓던 지난날이 꿈만 같이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남한을 침략하여 민족해방을 시도한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짜릿한 흥분을 심어주었다. 거기에 더하여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쓰는 것은 엄청난 긍지를 심어 주었다.
[적대 세력 조작]
다섯 번째 방법은 적대 세력 만들기였다. 현실 생활에서 오는 좌절과 스트레스를 적대 세력을 만들어 터뜨림으로써 해소했다. 안으로 자본가와 지주, 그 후손은 영원히 죽일 놈이었다. 밖으로 미제국주의자와 그 동조 세력을 쳐부수어 전세계의 인민을 해방시키면, 전세계에 낙원이 건설될 수밖에 없다고 날마다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의 공산주의와 중화사상]
중국은 겉보기와는 달리 러시아와 전혀 달랐다. 중국은 뭐니뭐니 해도 중화사상이 마르크스 이론을 능가했다. 겉으로는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였지만, 속은 중화주의자 모택동이었다. 러시아가 스스로의 역사를 부끄러워한 것과는 달리 중국은 스스로의 역사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단지 19세기 중반부터 이민족인 만주족의 지배를 받다가 보니까, 어쩌다가 산업화에 좀 뒤진 정도로 보았다. 어떻게 중국이 이 일시적인 후진성을 떨치고 세계를 다시 발 앞에 조아리게 만드느냐, 그 방법을 찾던 중에 마르크스를 만났던 것이다.
중국에는 당면한 두 적이 있었다. 하나는 중국을 유린한 일본제국주의자와 인민을 착취한 장개석 정부였다.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동족끼리 손을 잡고 먼저 일제를 물리쳤다. 이어 당연한 수순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모택동과 주은래, 등소평은 전통적인 중국 건국 모델을 따랐다. 그것은 백성(인민)과 한 몸이 되고 한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부하들이 인민에게는 절대 피해를 못 끼치게 했다. 그런 놈이 있으면 언제든지 가차없이 사형시켜 버렸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중국에서는 일시적으로 군림할지는 몰라도 절대 오래 갈 수가 없는 법이다. 민심을 사로잡은 이들이 절대적인 약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승리하고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실 소련과의 결별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산업화가 잘 이루어지고, 군사력이 우세하다고 해도 천자의 나라 중국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화사상을 우위에 둔 모택동]
공산주의, 마르크스 이념도 당연히 중국이 정통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은 수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단, 마르크스가 노동자 중심으로 설명한 부분은 중국을 모르고 그런 만큼 당연히 모택동은 이를 바로 고쳤다. --엄밀한 의미에서 봉건주의 → 자본주의 → 공산주의의 순서를 새로이 인정한 데서 소련과 유소기, 등소평이 정통 곧 교조주의이고 봉건주의 → 공산주의의 순서로 비약한 모택동이 수정주의자이다. 모택동의 중화사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라고 본다.
봉건주의는 타파의 대상이라고 한 것은 마르크스의 견해가 맞다고 보았다. 당연히 장개석을 물리친 이후엔 대대적인 봉건주의 타파로 물꼬를 틀었다. 소련 흉내를 내려던 주자파들이 일시적으로 득세하게 되지만, 금방 소외되고 숙청되고 정통 마르크스 이념을 계승한 모택동의 어록이 붉은 수첩에 인쇄되어 누구나의 가슴에 새겨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중화사상을 계승하되 마르크스 이념으로 누구나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5,000년 중국 역사에서 비원으로 남아 있었던 농민이 주인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봉건주의자와 그 이념을 철저히 부수어 버려야 한다는 게 모택동의 사상이었다.
[문화혁명--사상 개조와 권력 투쟁, 인권유린]
물론 그것은 양면성이 있었다. 아니 이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었고 실은 모택동이 20세기의 진시황으로 등극하려는 권력 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때려죽인 자가 천만 명, 굶어죽은 자가 3천만 명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죽음을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마르크스 사상이었다. 인민의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봉건주의자들의 싹을 말려 버리는 수단인 몽둥이에 피가 좀 묻은 것은 크게 보아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으로 인간의 양심을 무력화시키는 이론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죽은 사람은 하나같이 선량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기꺼이 새 세상을 맞이하여 인민들과 더불어 살 사람들이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대륙은 넓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이미 싫든 좋든 하나의 전통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값비싼 수업료였다. 그로써 사람들의 의식이 엄청나게 바뀌었다. 전통적인 중국인과 문화혁명 이후의 중국인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게 현실이다. 어쨌건 집단 광기에서 중국인은 깨어났다. 제 정신을 들게 만든 사람이 바로 부도옹 등소평이었다.
[위대한 등소평]
등소평이 뛰어난 것은 정통보다 전통을 중시한 정책이었다. 이전 지도자를 매도하는 짓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일부 과오만 인정하는 선에서 그쳤다. 자기를 괴롭힌 혁명 동지의 관을 꺼내어 매질을 하는 순간, 다시 피의 보복이 따르고 또 다른 집단 광기에 휩싸인다는 것을 그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명분은 공산주의, 실리는 자본주의, 형식은 공산주의, 내용은 자본주의라는 이원체제를 서서히 정착시켜 나갔다. 인민이 감당할 만큼 도입한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싶으면 과감히 단호하게 피를 흘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사태에 대비해 마지막까지 군대 지휘권은 내놓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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