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기조강연: "朴正熙는 문명건설의 챔피언이었다"

어제 구미에서 열린 박정희 탄생 100돌 국제학술대회 기조강연: 그는 개인의 恨을 민족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수백 년간 억눌렸던 熱望과 野性을 폭발시킨 사람, 더러운 강물 같은 세상을 들이마시고 바다 같은 새 세상을 만든 사람이다.
朴正熙는 문명건설의 챔피언이었다

1. 인간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그는 富國强兵과 實事求是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知性과 野性, 상무정신과 선비정신, 특권층에 대한 반골정신과 弱者들에 대한 동정심을 겸비한, 균형과 절제의 사나이였다.
*그는 개인의 恨을 민족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수백 년간 억눌렸던 熱望과 野性을 폭발시킨 사람, 더러운 강물 같은 세상을 들이마시고 바다 같은 새 세상을 만든 사람이다.
*淸濁을 가리지 않았지만 영혼은 순수하였으니 그가 바로 超人, 부끄럼 타는 초인이었다.
*그는 교사-군인-혁명가-경영자의 삶을 살았는데 무엇을 하든지 교사적 품성을 깔고 사람을 아끼고 키웠다. 李承晩과 함께 국민을 가르치려 한 두 대통령이다.

2. 업적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중 87위로 최하위권(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 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1965∼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을 운영하던 1965-89년 사이 세계은행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이 기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나라이다.
세계은행이 1965-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소득 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였다. 일본과 대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
이 기간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즉, 上位 20%의 소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5-1989년 사이 한국을 이끌었던 朴正熙, 崔圭夏,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과 국가 엘리트에게 우리는 고생했다는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1965∼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D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D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貧富격차 심해지지 않았다.
1978년 10월에 한국개발연구원은 1965년과 1976년의 家計(가계)소득 분포를 조사하여 비교했다.1965년 全國 家計 소득 분포에서 下位 4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9%였다. 上位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42.3%였다. 11년 뒤인 1976년 下位 4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17%이고 상위 2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45%였다. 즉 경제개발 시기 고도성장으로 貧富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11년 사이 다소 계층간 격차가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비교에 따르면 1976년의 한국은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로 나타났다. 소득의 균형분배면에선 거의 선진국 수준이었다. 이 기간에 上位, 下位를 불문하고, 국민소득은 다 같이 올라갔다. 너가 잘 되었기 때문에 내가 가난해진 게 아니고 너나 나나 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통계는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고도성장이 貧益貧富益富(빈익빈부익부)의 격차를 만들었다고 공격하는 이들의 무식을 폭로한다. 한국의 경제개발은 모든 국민들의 소득이 비교적 골고루 올라가는 경로를 걸었다. 1975년 세계은행의 조사에서도 한국은 전체 조사대상 국가 66개국중 소득의 평등도 순위가 14위였고, 42개 개발도상국중에선 6위였다.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계급혁명론으로 빈곤층을 공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또한 평등지향이라 南美式의 빈익빈부익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1964-1970년 사이 한국의 평균 GDP 성장률은 연간 9.5%였다. 이 기간중 소득 하위 40%의 소득증가율도 9.5%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수층에만 돌아가지 않았고 저소득층에게도 똑 같이 돌아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것이다.
박정희는 富國强兵을 위한 대기업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특권층에 대한 반골정신과 서민들에 대한 동정심을 같이 가진 이였다. 이런 균형감각이 정책에 반영됨으로써 한국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동시에 이룬 것이다.


3. 수구적 특권층과 싸운 사람

그는 특권층을 혐오한 권력자였다. 박정희가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엔 시가 한 편 실렸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가 국가원수의 저서에 실리게 된 사정은 이러하다. 책의 초고를 정리하는 데 박정희 의장을 도와주고 있었던 박상길(朴相吉, 청와대 대변인, 水協 회장 역임)의 회고이다.
"그날도 장충동 공관에서 박 의장과 담론을 나눈 끝 무렵이었습니다. 화제는 아마도 박 의장이 겪었던 가난이었을 겁니다. 그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박 의장이 다른 방에 갔다가 오더니 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게 하나 있는데 넣을 데가 있겠습니까" 하고 메모지를 건네주는 거예요. 받아보니 친필로 쓰고 고친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조판이 다 돼 있었던 책에 무리를 해서 끼워 넣었습니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인지, 그분 자신의 창작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래 글은 1999년에 산업자원부가 펴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역대 상공ㆍ동자부 장관 에세이집》에 실린 朴忠勳(박충훈) 前 국무총리의 회고이다.
<이것은 좀 감상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인상 깊었기에 적어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타고난 손재주도 물론 대단하지만 배우겠다는 向學熱(향학열) 또한 세계 제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날짜가 확실치 않은데 어느 날 九老工團(구로공단) 作業場(작업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朴正熙 대통령은 몇 사람의 수행원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여남은 살 된 少女(소녀)가 제 옆에 大統領(대통령)이 와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일하고 있었는데, 대통령께서는 바쁘게 놀리고 있는 少女의 손을 내려다보다 덥석 그 소녀의 손을 잡고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대통령에게 손목을 잡힌 소녀는 어리둥절했다기보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아닌가 해 겁에 질렸을 게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은 가볍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재차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주위에 있던 수행원들이 그 소녀에게 안심하고 네 소원을 말해보라 했다. 그제서야 소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교복 한 번 입어 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순간이었지만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朴 대통령은 군인이면서 다정다감한 데가 있었다. 내가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엄명을 내렸다. 그 엄명은 지체없이 시행됐다. 工團(공단)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원한다면 어떤 법을 고치고 또 절차를 바꾸어서라도 학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기회를 주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夜勤(야근)을 마치고 다닐 수 있는 학교와 어떤 졸업장과도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졸업장을 주도록 하라 엄명했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소녀가 아무도 보지 않는 밤길이었지만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 나갔을 때의 心情(심정)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감격이요,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 소녀가 얼만큼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며 직장에서도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했을 것인가는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1972년 연두순시에서 노동청을 방문하고 이런 말을 한다. 다음은 속기록으로 작성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작년에 구로동 어느 수출 공단에 갔을 때입니다. 아주 정밀한 기계를 취급하는 직공인데, 그렇다면 그게 상당히 조명시설이 잘 돼 있고, 그 아주 정밀하고도 작은 이런 것을 들여다보고 작업하기 때문에 視力이 대단히 피로하기 쉽고 또 어두우면 아주 작업에 지장이 많고, 가보면 저쪽 한쪽 구석에서 컴컴한 거기서 일하는데 불은 여기서 거꾸로 뒤로 비치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 지적을 했지만, 한 가지 간단한 예지만 그런 정도라도 거기에 기업주라든지 거기에 무슨 책임자가 다닐 때 여기는 이런 작업을 하는 어떤 사람한테는 좀더 전기를 하나 따로 더 달아 준다든지 조명을 더 밝게 해준다든지 이런 그 간단한 착안입니다.
이것을 안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 가보면 직공들이 머리가 또 요즘 히피마냥 이만큼 길게 하고 있는데 "왜 자네 머리 안 깎느냐?"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늦게 일하고 가면 뭐 이발소 가고 할 시간이 없다, 그런 것은 기업주들이 조금만 더하면 그런 사람들한테는 하루에 시간 1시간쯤 정 못하면, 가서 이발하고 오라고 이런 정도로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이발사를 데리고 와서 할 수 있고, 조금 전에 기업주가 사용하는 종업원들이나 직공들이나 이런 사람을 자기 가족같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을 시켜야 능률이 오르고 생산이 늘고 이러지 그런 정신 안 가진 기업체는 나는 절대 성공 못 한다고 봐요.
오늘의 기업가들, 기업윤리, 기업정신, 경영개선 등 여러 가지 구호는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도 역시 일은 사람이 하는 거고 종업원들이나 직공들이 하는 건데 그 사람들이 참 그건 자기를 사용하는 고용주가 인간적으로 대우를 해주고, 뭐 할 수 있는 데까지 어느 정도 기업주가 하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것도 있겠지.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해줄 수는 없겠지만 기업주의 형편으로서는 할 수도 있고 능력 범위에서는 최선을 다해 주고 성의를 다한다, 이거로써 거기 있는 종업원들도 참 이 공장이 내 공장이다, 내 일이다, 그런 생각 밑에 능률이 오르고 하지 않겠나.
요즈음 국가 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돼서 과격한 노동쟁의 같은 것은 규제한다, 혹 일부 기업가들은 노동쟁의가 나오기만 하면 정부가 눌러버린다며 문제없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물론 노동자들도 그 어떤 부당한 너무 억지 과격한 노동쟁의 같은 것은 정부가 앞으로 상당히 규제해야 되겠지만 기업주들도 이런 것을 빙자해 가지고 거기에 있는 종업원들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환경의 개선이라든지 또는 노동자 권익 이런 것을 무시한다든지 태만하다든지 이런 것 역시 정부로서는 더 우선해서 철저히 단속해야 될 줄 압니다.>

박정희는 士農工商의 신분의식을 商工農士로 바꾸려 한 사람이다. 군인, 기업인, 과학 기술자를 역사 창조의 새로운 主役으로 밀어주었다. 그는 약한 실천력을 관념적이고 위선적인 도덕론으로 메우려 하는 지식인들을 경멸하였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이들 지식인은 언론, 학원, 사법, 노조의 주도권을 잡고 박정희에 도전하였으며 그의 딸을 정치적으로 파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기자, 검사, 판사, 정치인, 교수, 귀족노조가 신종 양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4. 문명건설세력의 챔피언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 세계 5위의 수출국 및 공업국, 세계 12위의 삶의질, 세계 최장수국 그룹, 세계 3위의 旅券 파워국(무비자 입국 가능 국가수 기준), 재래식 군사력에서 세계 7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는 가장 값이 싸고 효율적이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 능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8년의 통치로 기초를 크게 깊게 다진 덕분이었다. 그는 문명건설세력의 챔피언이었다.

1. 朴正熙는 文明건설자이다. 삶의 진보로 정신의 풍요를 가져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의 문명 건설 전략은 중국, 월남 등지에서 참고서가 되어 더 많은 인류를 문명 세계로 포섭하였다. 실천론에 보편적 성공원리가 들어 있었던 덕분이다.

2. 朴正熙는 管仲에서 비롯된 동양적 실용정치의 맥을 이은 經世家였다. 주체적 實事求是論者였다. 사실과 현실에 입각하여 정책과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항상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주체적 실용정신이야말로 東西古今을 관통할 수 있는 만고불변의 정치적 성공 원리이다.

3. 朴正熙는 李承晩, 文武王과 함께 민족사의 가장 큰 인물이다.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완성한 문무왕, 최초의 국민국가를 세운 李承晩의 정통노선을 이어받은 그는 國力, 즉 富國强兵의 측면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만들었다. 오늘의 한국은 GDP 세계 13위, 세계 최장수국, 공업생산 및 수출 세계 5위, 세계 7위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적인 민주 복지국가인데 박정희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4. 朴正熙는 인류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위대한 경영자였다. 최단 시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1961년의 한국은 最貧國 대열에 있었지만 지금의 한국은 最富國 그룹에 있다. 그가 유신선포로 욕을 먹어가면서 추진하였던 중화학공업건설은 일류강대국으로 가는 막차였다. 국력을 조직화하여 능률을 극대화한 그의 경영술엔 가정, 기업, 국가 등 모든 조직의 운영에 다 통용될 수 있는 간단명료한 원리가 있다. 이를 찾아내어 응용의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박정희를 연구하는 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좋은 제도와 조직을 만들어 국가운영에 항구적으로 기능하도록 한 그의 일하는 방식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5. 朴正熙는 超人이었다. 더러운 강물을 들이마셔도 영혼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거대한 바다, 즉 새로운 시대를 빚어낸, 그러면서도 부끄럼 타는 초인이었다. 자신의 한을 민족의 한으로 승화시켜 수백 년 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대폭발시킨 사람이었다.

6. 朴正熙는 남자의 美學을 보여준 武士였다. 부인이 총을 맞았을 때, 그리고 자신이 총을 맞았을 때 보인 행동은 준비된 것도, 훈련된 것도 아닌 그의 삶의 총체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체념한 듯 해탈한 듯하였다’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한국에서 약800년만에 등장한 군인정권은 "교장 같은 장군" 덕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근대화 혁명에 성공하였다.

7. 朴正熙는 前任者와 後任者를 잘 둔 행운아였다. 이승만이 지도한 자유민주주의 건국, 강군 건설, 교육확대, 한미동맹, 농지개혁이 박정희 식 고도성장에 기반이 되었다. 그의 國政 노선을 부정하지 않고 계승, 발전시킨 全斗煥이 있었기에 박정희는 더욱 빛난다.

8. 朴正熙는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고 말한 사람이지만 李承晩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근대화 혁명가이며 한국 민주주의의 두 건설자이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우상화와 교조화를 거부하고,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맞추어 민주주의를 變容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자주적 민주주의자이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고 박정희는 집을 지었다. 민주주의의 3 요소인 안보, 자유, 복지의 인프라를 만든 두 분이다. 두 사람은 혁명가와 건설자를 겸한 사람이다. Revolutionary and Visionary였다.

9. 朴正熙 또한 실수나 결함이 적지 않은 인간이었다. 한글專用 정책은 한국어의 반신불수를 초래하여 국민교양의 붕괴를 재촉하고 있으며 名門 고교를 없앤 것은 국가 엘리트 양성의 통로를 막은 실수이다. 정규육사 출신이란 물리적 후계자 그룹은 양성하였지만 한국적 민주주의 이념을 계승할 정치세력 육성에는 실패하여 좌익의 도전과 이에 따른 박정희 지우기를 부르고 말았다. 반면, 김일성은 한국의 민주화 흐름을 역이용, 민주투사로 위장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꾀하였는데 이 전략이 1980년대에 적중하여 한 세대의 젊은이들을 좌경화시켰다.

10. 朴正熙는 조선조적인 士農工商의 신분차별을 타파하려 하였으나 신종 양반세력의 보복을 받았다. 그는 군인, 기업인, 과학 기술자를 새로운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세계를 무대로 雄飛하도록 하였지만 조선조 양반세력의 후예들인 지식인 집단의 비판 앞에서 苦戰하였고 死後에는 그의 딸까지 이들의 보복에 희생되었다. 박정희는 위선적 지식인들을 守舊사대세력으로 규정, 경멸해 마지 않았지만 이들은 때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자, 때로는 민중민주주의자로 행세하면서 자신들의 사대성을 감추고 박정희를 포위 공격하였다. 박정희는 말년에 미국, 북한, 남한 내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3면 공격을 받았다. 비록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신종 양반 지식인 세력의 공격 때문에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 실패하였다. 박정희는 조선적 봉건 잔재와 싸우다가 戰死한 셈이다.

11. 朴正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통일의 여하에 따라서 좌우될 것이다. 적화통일이 되면 그는 중국의 장개석 정도의 평가를 받을 것이고, 자유통일로 귀결되면 레이건이나 진흥왕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12. 이젠 朴正熙를 우리 곁의 친구로 맞아들일 때이다. 망국, 식민지, 분단, 전쟁, 가난, 재건, 도약의 과정에서 국민과 함께 기뻐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났던 그였다.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오고 간 그의 삶은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부모와 삼촌들이 겪었던 표준적 삶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상이 아닌, 독재자도 영웅도 아닌 우리의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13. 그가 꿈꾸었던 한국은 특권층을 몰아낸,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이었다. 이것이 소망일 뿐 아니라 생리라고 했다. 그는 가난을 스승이자 恩人이라고 불렀다. 박정희는 가난이란 스승 밑에서 배운 수백만의 同門이 건재하므로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가난을 이기는 이가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된다고 한다(토마스 칼라일). 가난의 제자들이 박정희의 영도 하에서 건설한 ‘천국 다음 한국’을 가난의 기억이 없는 세대가 ‘헬 조선’이라 저주하고 이들이 주도권을 잡은 한국이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하였지만 신종 양반 특권층의 의식화에 넘어간 부하가 쏜 배신의 총탄으로 생이 끝났으며 그의 딸은 선동 언론, 정치검사 및 판사, 제왕적 국회, 그리고 귀족노조가 작당한 촛불 狂風의 희생자가 되어 지금 감옥에 있다.

14. 朴正熙가 만든 국민국가의 문명적 토대가, 민주와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를 부정하는 남북한 좌익, 즉 계급투쟁 세력의 총공격에 직면한 지금 무슨 수로 진실 정의 자유를 지켜낼 것인가? 과연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는 自淨능력을 갖춘 것인가, 핵무장한 북한정권과 권력을 잡은 친북세력의 협공 속에서 대한민국은 반공자유민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은 자유통일·분단고착·적화통일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박정희가 답을 내려주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너무 엄혹하고 국제정세는 유동적이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에 여러 번 목숨을 걸었다. 형은 우익 손에, 부인은 간첩 손에, 자신은 부하 손에 죽었고 딸은 신종 양반들 손에서 정치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박정희는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처럼 목숨을 걸어라! 자유는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 자유의 방파제 역할은 그만하고 자유의 파도가 되어 평양을 쓸어버려라! 나의 답은 간단하다. 적이 목숨을 걸고 달려드니 너도 목숨을 걸어야 게임이 될 것 아닌가?”



5. 참고자료: 모든 지도자를 위한 참고 자료: 朴正熙 리더십 12계명

1. 화합형 정책 결정: 朴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이었다. 엉터리 보고라도 끝까지 들어주었다. 좀처럼 즉석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 뒤 主務(주무)장관이 다시 한번 심사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라 주무장관이 發案(발안)한 정책이 채택되는 방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야 정책에 대한 주인의식이 생기고 일을 할 때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남을 통해서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2. 민주적 정책 결정: 朴 대통령은 어떤 회의에서도 먼저 발언하지 않았다. 토론을 시켜 문제가 제기되고 贊反(찬반)의견의 방향이 잡혀가면 그때 결론을 도출하고 필요한 보충지시를 내렸다. 당시의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은 민주적이었다.

3. 생산적 회의: 朴 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무역진흥회의), 청와대 국무회의, 국가기본운영계획 심사분석회의,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를 정례화하였다. 이들 회의는 대통령이 國政을 종합적으로 규칙적으로 파악 점검하고 살아 있는 정보를 얻는 기회였다.

4. 철저한 확인과 일관된 실천: 朴 대통령은 계획수립에 20%, 실천과정의 확인에 80%의 시간을 썼다고 한다. 중앙부처 및 지방 순시 등 현장 시찰을 자주 한 것도 집행의 확인과 士氣(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계획의 수정이 필요할 때는 토론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했다.

5. 국민의 각성과 참여: 朴 대통령은 국민들이 自助(자조)정신을 발휘하여 자발적으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인간과 조직의 정신력에 주목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인의 패배의식과 싸워 이긴 사람이다. 그는 京釜(경부)고속도로 건설 같은 눈에 뜨이는 구체적 업적을 통해서 국민들의 체념과 自虐(자학)을 자신감으로 교체해갔다.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 도 작사 작곡했다.

6. 정부는 맏형, 기업은 戰士(전사): 朴 대통령은 경제관료와 기업인이 異見(이견)을 보이면 많은 경우 기업인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을 채택했으나 기업이 엔진이고, 경제전선의 戰士는 기업인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기업 엘리트를 존중해주었고, 기업인들은 대통령을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7. 내각에 권한과 책임 위임: 청와대 비서실이 장관 위에 군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장관의 인사권을 존중했다.

8. 관료엘리트 중시, 학자들은 자문역: 실천력을 중시하던 朴대통령은 집행기관장으로서는 학자를 거의 쓰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문역으로만 부렸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서강대학교 교수 출신인 南悳祐 부총리였다. 南부총리도 실무능력의 검증을 거친 다음에 重用(중용)되었다.

9. 정치와 군대의 압력 차단: 그는 관료들이 國益(국익)과 효율성의 원칙하에서 소신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군인들과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개입을 차단하고 견제했다. 군대의 힘으로써 집권한 사람이 군대의 영향력을 약화시킨 예는 매우 드물 것이다.

10. 경제발전 우선주의: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이 결국은 안보와 민주주의 발전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先 경제발전, 後 민주화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 따른 비난에 대해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대응했다.

11. 市場(시장)의 한 멤버로서의 정부: 朴 대통령은 정부가 시장의 규제자가 아니라 한 참여자라고 생각했다. 朴대통령 시절의 정부는 시장 지배자라기보다는 시장의 일원으로서 시장 기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부는 기업가, 은행가, 개혁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電力(전력), 철강 등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부가 公기업을 만들어서 맡아서 하되 경영은 민간기업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官治(관치)경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CEO로 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김용환)"

12. 선택과 집중과 고집: 朴 대통령이 채택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 중점 투자전략, 先성장-後분배 전략, 과감한 외자유치 전략은 모두 성공했다. 朴 대통령은 정책과 전술은 수시로 변경했지만 철학과 전략은 18년 동안 그래도 밀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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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중히 2017-12-04 오후 1:36

    막연하게 박정희를 찬양하는 것보다
    수치로(박정희 대통령 답게) 나타내 주니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통계에 의한 경제성공에 좌익들은 무슨 괘변을 들이 댈 것인가?
    이때 다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며 미래를 위해 희생한 세대들이 있었기에
    풍요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 당시 박정희에 반대하고 경제건설에 걸림돌이 되었던 자들이
    지금 청와대와 사회지도층을 점령하고 박정희를 폄하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왜 우리 국민들이 이들에 침묵하며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는가?
    이들이 두려워서인가? 한번 빨갱이들에게 당한 것이 아직 두려워
    끽소리 못하고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고,
    이 자녀들은 부모가 희생해 온 이 나라를 저주하며 헬조선을 만들고 있다.

    한마디로 죽써서 개준 결과가 된 현실에 인생의 패러독스를 느끼게 해 준다.

  • Moltke 2017-12-02 오후 4:36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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