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의 이대용-신영복 교환 공작은 이래서 좌절되었다! (上)

“이것(1 對 7 교환)은 김일성 수령님의 명령이다”(조명일 북측 수석대표)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글 : 이지영  조갑제닷컴 기자

뉴델리 비밀회담 외교 문서 입수
북(北)은 남파간첩이나 재일동포 간첩보다 ‘남선(남한) 혁명가’ 신영복 등을 데려가는 데 더 집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자국민 송환 불가’ 입장을 고수, 신영복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수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 “이것(1 對 7 교환)은 김일성 수령님의 명령이다”(조명일 북측 수석대표)
⊙ 한국은 이대용 공사 등 3명을 구출하기 위해 21명의 남파간첩 등을 보내주기로 합의했으나 북한이 ‘남조선 혁명가’에 집착하는 사이에 다른 채널로 교환 없이 구출에 성공하였다
⊙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둘러싼 북한과의 갈등, 유대인 아이젠버그 등장으로 활로를 찾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신영복 교수(왼쪽). 그는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관이었다.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은, 겨울철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것을 정겹게 일컬어 ‘원시적 우정’이라 했습니다. 오늘 세계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의 우정이 강원도의 추위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리라 믿습니다.〉
  
  (2018년 2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의 평창 동계올림픽 리셉션 연설 중)
  
  
1979년 5월 17일 자 이범석 대사의 보고. 북한이 인도받기를 원하는 대상자 이름 중에 ‘신영복’이 보인다.
  1978년 12월 인도 뉴델리, 북한 측 대표단이 입을 열었다.
  
  “이 회담은 남선(南鮮·남한-편집자 주) 혁명가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선 인원과의 교환을 위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입장에 있는 남선 측은 재판관인 북선(北鮮·북한-편집자 주)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출생지와 거주지에 관계없이 당연히 이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남선 측은 남선 출신 ‘혁명가’들을 연고자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 가족을 함께 받을 용의가 있다.”
  
  북한이 이토록 애타게 데려가고 싶어 했던 ‘남선 혁명가’는 누구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 동계올림픽 리셉션 환영사에서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라고 밝혀 새삼 조명된 신영복(申榮福·1941~2016) 성공회대 교수다. 이 사실은 2016년 외교부가 ‘베트남 억류공관원 석방교섭 회담(뉴델리 3자회담)’ 외교문서철을 비밀해제하면서 밝혀졌다. 재미(在美)언론인 안치용씨가 이 사실을 최초 보도했던 2016년 7월 당시에는 이 외교문서철이 전문(全文) 공개되어 있었으나, 기자가 2018년 3월 외교부 산하 외교사료관을 방문해 문서를 확인했을 때는 일부 비공개로 전환된 상태였다. 다행히 국가기록원에서 외교부가 비공개 처리한 기록물의 사본을 열람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 억류된 외교관들
  
이대용 전 주월공사.
  남(南)베트남이 패망한 1975년 4월 30일, 공산화된 베트남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우리 외교관은 9명이었다. 이들 중 최선임자는 이대용(李大鎔) 공사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남베트남 한국대사관 무관(대령)으로 재직하였고 1968년 준장 진급 후 다시 파월(派越)되어 한국대사관 공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6·25 남침 직후 6사단 장교로서 춘천 지역 방어에서 공을 세웠고, 북진 때는 가장 먼저 압록강에 이르러 일시적으로 통일의 기분을 만끽하였던 이다.
  
  북(北)베트남 공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북한은 이들 한국 외교관 9명의 신병(身柄) 인도를 요구하고 나선다. 외교관은 ‘빈 협약’에 의거 면책특권(免責特權)을 가진다. 어떤 형태의 체포 또는 구금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형사재판 면제권을 가진다. 교전(交戰) 당사국 내에 상대국인 적국(敵國) 외교관이 머물러 있어도 제3국을 통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당시 한국은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 측에서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전쟁을 치렀고, 북한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잔류 한국 외교관들을 북한으로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9명의 외교관 중 6명은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퇴거 조치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3명은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사이공에서 계속 억류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이 바로 그들이다. 이 공사와 안 영사는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서 경무관은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 소속 총경으로 대사관 내에서 정보를 다루는 특수 신분이었다. 때문에 북한이 ‘거물급 인사’로 표적 삼아 북송공작(北送工作)을 벌인 것이다.
  
  특히 이대용 공사는 황해도 출신의 현직 외교관이자 6·25 참전 영웅으로서 선전 가치가 매우 컸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은 이 공사를 전향(轉向)시켜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일곱 차례에 걸쳐 신문하며 설득하였다. 북한에 남아 있는 누님과 조카를 들먹이며 회유하는 한편 ‘북반부에서 도망친 도주범’이라며 평양으로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북베트남 특수경찰들도 시시때때로 이 공사를 신문하며 ‘가이따우(改造·사상전향)’하지 않으면 총살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협박했다. 이 공사는 치화형무소의 햇볕도 안 드는 방에 갇혀 78kg이던 몸무게가 46kg이 되도록 인권유린을 당하면서도 끝내 그들이 요구하는 ‘북한 망명 자술서’를 쓰지 않았다.
  
  이대용 공사는 저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외교관을 강제로 납치해 간다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다. 그러나 자의(自意)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불법이 아니다. 내가 자의에 의해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서명한다면, 그것으로 나의 평양행은 합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한 노동당 3호 청사 측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베트남 안닝노이찡(安寧內政·베트남 특수경찰)과 협조하여 나에게 참기 어려운 굶주림, 육체적 고통, 공갈, 협박, 그리고 함정으로 몰아넣는 회유책을 쓸 것이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수도 없이 많이 이루어질 신문에서 어떠한 강압적인 변고가 일어날 것인가? 죽어야 할 시기가 오면 깨끗하게 목숨을 끊어야 한다. 나는 결심을 더 굳게 다졌다.〉
  
  
  뉴델리 3자회담과 ‘남한 출신 혁명가’
  
이대용 공사 송환을 위한 남북대화 때 우리 측 수석대표였던 이범석 당시 주인도 대사.
  한국 정부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이들 억류 공관원을 석방하기 위해 프랑스, 미국, 스웨덴, 유엔 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베트남에서 반응이 왔다. 주(駐)베트남 프랑스 대사가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고위층 인사에게 한국 외교관 석방을 권유하자 “북한이 한국 공관원 석방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조치와 계기 없이는 석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우선 목표는 억류 공관원들의 조기(早期) 석방”이라는 지침을 주었다. 프랑스의 중개로 한국에 억류 중인 북한 간첩들과 우리 공관원들의 교환 교섭을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다. 1978년 극비리에 진행된 ‘베트남 억류 공관원 석방 교섭을 위한 뉴델리 3자회담’이 그것이다.
  
  우리 정부는 3자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치화형무소에 갇혀 있는 이대용 공사에게 이순흥 베트남 교민회장을 통로로 외무부 장관 훈령을 전달한다. “현재 억류된 3명의 외교관 석방을 위해 한국, 북베트남 공산 정부, 북한이 3자회담을 하고 있으며 본인 의사에 반해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북한 요원의 협박과 공갈에 겁내지 말고 버텨라”는 내용이었다.
  
  1978년 7월 24일 막을 연 3자회담 본회담에서 우리 정부는 이범석(李範錫·외무부 장관·대통령비서실장 역임. 아웅산사태 때 순국) 인도 대사가 수석으로, 하태준 중앙정보부 제1차장보와 공로명(孔魯明·외무부 장관 역임) 외무부 아주국장, 송한호(宋漢虎·통일원 차관 역임) 중앙정보부 아주국장이 대표로 나섰다. 북한 측은 조명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수석대표로 박영수, 한영국, 김완수 등이 대표로 참석했다. 북측 대표로 참석한 박영수는 억류된 이대용 공사를 찾아가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회유, 협박, 신문했던 사람이다.
  
  
  간첩보다 ‘남한혁명가’ 더 중시
  
1978년 11월 17일 이범석 대사의 보고. 북한 측이 ‘수령님의 명령’ 운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한국과 북한,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3자 비밀협상은 사실상 한국과 북한의 양자(兩者) 대화로 진행됐다. 회담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남한에서 복역 중인 북한 간첩’들과 베트남에 억류된 공관원들의 교환으로 이해하고 회담에 나섰던 우리 측에 북한이 ‘체포 구금된 남조선 혁명가들’로 교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 실랑이가 시작됐다. 교환 비율에 있어서도 우리 정부는 1대 1을, 북한은 1대 70을 요구하고 나섰다. 무려 4개월여의 논쟁 끝에야 비로소 억류 외교관 1명당 7명, 총 21명을 북한에 인도하기로 합의했다.
  
  교환 비율 합의 과정에서 이범석 대사가 서울에 보낸 긴급 전보에는 중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교환 비율의 타결이 임박했던 1978년 11월 17일, 조남일 북측 수석의 요청으로 이 대사가 개별접촉을 갖는다. 조 수석은 북한이 제시한 1대 7 타결안을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까 안달하는 모양새로 이런 말을 덧붙인다.
  
  “1대 7이 사실은 김일성 수령의 명령이다. 우리들 체제상 ‘수령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은 남측도 잘 알지 않는가?”
  
  이 3자회담에 김일성이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다음엔 북한에 인도할 21명의 명단 선정이 쟁점이 되었다. 우리는 북측에 인도받길 원하는 21명의 명단을 일괄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北)은 1차 회의에 1명, 2차 회의에 1명 등 산발적으로 이름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가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람”이라고 답하면 사형 집행 증거를 제시하라는 등 무리한 주장을 계속했다. 우리 측 대표가 “더 이상 개별 확인은 없다”며 명단의 일괄 제시를 강력하게 요구하자 3차 회의에서 7명, 4차 회의에서 12명, 총 21명(1~4차)의 명단을 전달해 왔다.
  
  북한이 제시한 21명을 확인해 보니 사형이 집행된 자가 13명, 무기수(無期囚) 7명, 유기수(有期囚) 1명이었다. 살아서 복역 중인 8명은 모두 남한 출신이었다. 복역 중인 8명 중 3명이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남한 내 지하당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었다. 우리 대표는 “북괴 측은 우리의 회담 진전을 위한 성의를 역이용, 이 회담을 대남(對南) 간첩의 재고조사를 위한 기회로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편 교환 대상에 남한 출신은 포함될 수 없으며 남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도 넘겨줄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유지했다. “억류 인원의 교환 결과로 말미암아 비인도적 결과, 즉 이산가족 발생이라는 비극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측 대표가 북한 출신 남파간첩 및 재일교포 출신 중형자(重刑者)들의 명단 제시를 권하자 북측은 “필요치 않다”며 남한 출신 복역자의 인도를 다음과 같이 끈질기게 고집했다. 이는 북한 정권이 남파간첩이나 재일교포 간첩보다는 남한 내의 김일성 추종자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北, “가족도 함께 받을 용의 있다”
  
  〈“남한 출신 혁명가는 정말로 넘겨줄 수 없는가? 남한 출신 혁명가를 남한 내 가족문제로 인하여 넘겨주기가 곤란하다면 가족과 함께 넘겨주면 어떤가? 이 경우 그 가족도 21명 속에 계산할 용의가 있다.”(1978년 12월 4일 1차 회의)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한다면 회담이 성립될 수 없다.”(1978년 12월 8일 3차 회의)
  
  “이 회담은 ‘남선 혁명가’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선 인원과의 교환을 위한 것으로서 ‘남선 혁명가’ 중에는 남한 출신자가 당연히 포함된다. 남한 출신자를 인도할 수 없는 입장이 진정 강하다면 이 회담은 결렬될 수밖에 없다.”(1978년 12월 11일 4차 회의)
  
  “남한 출신자는 진정 인도가 불가한 것인가? 그렇다면 회담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형편이라면 월남(북베트남 공산 정부)을 시켜 회담을 그만두도록 할 수밖에 없다.”(1978년 12월 15일 6차 회의)
  
  “억류 인원의 교환에 있어 요청자의 의사에 따라 인원을 넘겨준다는 것은 국제관례에 비추어서도 당연한 것이다. 피고인의 입장에 있는 남선 측은 재판관인 북선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출생지와 거주지에 관계없이 당연히 이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1978년 12월 16일 7차 회의)
  
  “21명 중 기(旣) 사형 집행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있으나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러나 현재 살아 있는 8명에 대해서는 어떤 성의를 보여주어야 다음 명단 토의에 들어갈 수 있을 것 아니냐?”(1978년 12월 21일 양측 대표 개별접촉)
  
  “살아 있다고 한 8명에 대해서는 이들을 전원 인도해 주고 기 사형 집행된 자에 대해서는 믿을 수 있도록 납득시켜 주어야 다음 명단 토의에 들어갈 수 있다.”(1978년 12월 26일 양측 대표 개별접촉)
  
  “남선 측은 남선 출신 ‘혁명가’들을 연고자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 가족을 함께 받을 용의가 있다고 시사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천명코자 한다.”(1978년 12월 28일 남북 대표 4자회담)〉
  
  
  북한이 간절하게 데려가고 싶어 했던 사람, 신영복
  
  북한 대표들이 집요하게 ‘남한 출신 혁명가’를 인도해 달라고 주장하는 강도(强度)로 미뤄 교환 비율 합의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직접 관심사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산가족 발생이 우려된다면 “가족과 함께 넘겨주면 어떤가”라고까지 물고 늘어진다. 심지어 “이 회담을 통해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 동(同) 사실을 월남에 통보해 주면 월남은 억류하고 있는 남한 외교관 3명을 월남법에 따라 재판해 사형을 집행하고 그 사실을 신문에 공포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우리 정부는 자국민 보호 원칙을 내세우는 한편, “북괴 측이 남한에 본적을 두고 있는 자들의 인도를 통하여 남한에도 자생 혁명가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 가족까지 데려가려는 의도는 가족을 인질로 하여 재차 남파시킬 것과 가족들이 대한민국에 염증을 느껴 북으로 왔다고 국내외 모략 선전에 이용할 것으로 사료되므로 인도 불가”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우리 정부는 북한 출신으로 구성된 21명의 자체 명단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북측은 이어 우리가 제시하는 북한 출신 10명, 북한이 제시하는 남한 출신 11명으로 명단을 확정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북한이 제시한 남한 출신 11명이 진정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최후의 최후까지 간절하게 원하던 사람들 중에 바로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던 신영복이 있다. 신영복의 이름은 3차 회의에서 북한이 제시한 7명 명단에 처음 등장한다. 북측은 “신영복은 독신자로 이산가족이 생기는 ‘비인도적 결과’가 초래하지 않는다”며 끈질기게 인도를 요구했다.
  
  당시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 관련 반(反)국가 단체인 ‘민족해방전선’ 결성 모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당(地下黨) 조직으로서 북한 노동당의 지령과 공작금으로 운영됐으며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 요인암살·정부전복을 하려다가 일망타진되었다.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로서 김질락 등 통혁당 사건의 핵심 인물들과 자주 만나 지시를 받고 청년들을 포섭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서울(외무부)에서 회담 대표자들에게 보낸 ‘북한 요구 교환 대상자에 대한 인적사항’ 자료에는 신영복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남한 출신 무기수, 재북 가족 없음, 1968년 8월 16일 간첩죄 등으로 검거, 형 인도일 1970년 4월 30일, 전향일 1970년 12월 21일, 근면 성실.〉
  
  서울에선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린다.
  
  “북괴 측이 요구한 이○○, 신영복은 이북에 연고자가 없으며 검거 후 조기에 사상 전향하여 남한 내 가족들과 긴밀히 접촉을 지속하고 있으므로 ‘출신지에 관계없이 전향한 좌익수를 본인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지난 훈령에 준하여 절대 인도 불가하다.”
  
  이어 남한 출신 전향 좌익수의 인도문제에 대해 “출신지가 남북한 어디이든 간에 기히 전향한 좌익수를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국가의 자국민 보호원칙, 우리의 반공정책,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절대 불가하며, 대상자의 전향 여부도 밝히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시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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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서리 2018-04-23 오후 10:16

    야! 이대용!!!! 미투세상인데 지영이를 달구 다니면 어쩔려구 그류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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