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의 이대용-신영복 교환 공작은 이래서 좌절되었다! (下)

北은 남파간첩이나 재일동포 간첩보다 ‘남선(남한) 혁명가’ 신영복 등을 데려가는 데 더 집착했다
뉴델리 비밀회담 외교 문서 입수
북(北)은 남파간첩이나 재일동포 간첩보다 ‘남선(남한) 혁명가’ 신영복 등을 데려가는 데 더 집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자국민 송환 불가’ 입장을 고수, 신영복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수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 “이것(1 對 7 교환)은 김일성 수령님의 명령이다”(조명일 북측 수석대표)
⊙ 한국은 이대용 공사 등 3명을 구출하기 위해 21명의 남파간첩 등을 보내주기로 합의했으나 북한이 ‘남조선 혁명가’에 집착하는 사이에 다른 채널로 교환 없이 구출에 성공하였다
⊙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둘러싼 북한과의 갈등, 유대인 아이젠버그 등장으로 활로를 찾다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북한 관계 급랭(急冷)
  
  시간낭비만 하며 이견(異見)이 좁혀지지 않는 회담만 계속되던 1978년 12월부터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북한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우리 측 수석대표 이범석 주(駐)인도 대사가 응우옌 반 신(Nguyen Van Sinh) 인도 주재 베트남 대사와 비공식 개별 접촉을 해보니 초기 베트남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트남 대사는 개인 의견을 전제로 “베트남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이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억류하고 있는 3명의 한국 인사를 북한에 인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다. 이어 북한 측이 남한 측에 한, “남한 외교관 3명을 월남법에 따라 재판해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위협 발언에 냉소적 논평을 한다.
  
  “하노이 정부가 나와는 별도로 조명일과 직접 통신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본국 정부로부터 그런 훈령을 받은 바도 없고 사람을 죽임으로써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이 월맹 정부의 방침이다.”
  
  1979년 1월 12일 자 《로동신문》은 사설에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관련하여 “월남이 캄푸차(캄보디아)의 독립과 주권을 유린했다. 월남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월남의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인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신용추락”이라고 비난했다. 양측 관계가 급랭(急冷)하기 시작한 것이다. 3자회담에 대표로 참석했던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 변화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79년 3월 19일 이범석 대사와 신 베트남 대사의 접촉에서 이 대사가 북한이 교환 대상자 명단 접수를 거부하고 있어 회담의 진전을 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베트남이 중간 역할을 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베트남 대사는 “현재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는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는 말을 했다. 그 전날의 접촉에서도 신 대사는, 이범석 대사가 “인도차이나 정세가 많이 변화된 이때, 하노이 정부가 이 문제를 재평가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고 묻자 “아직까지 그런 시사를 받은 적은 없으나 북한 태도에 베트남이 불유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덧붙였던 것도 주목되는 일이었다.〉
  
  
  회담 결렬
  
  이 무렵 3자회담에 임하고 있던 한국 대표단에 상부로부터 특별훈령이 하달됐다.
  
  〈가. 현재 진행 중인 회담은 적절한 명분을 내세워 모양 좋게 즉시 결렬시킬 것. 결렬 이유는 억류 중인 우리 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기 때문임.
  
  나. 향후 북괴 측에서 회담 계속을 종용하는 태도로 나오더라도 북괴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명분을 내세워 회담을 결렬시키고 이를 정식으로 북괴 측에 최후 통첩할 것.
  
  다. 회담 결렬 직후 월남 측에 대해 북괴의 무성의한 태도 및 비인간적 처사로 인하여 북괴와의 회담 지속은 무의미하며 시간낭비이므로 부득이 회담이 결렬됐음을 정식으로 통고할 것.
  
  라. 동 회담 결렬 사실을 인도 정부 측에도 적절히 통보하되 결렬 책임이 북한 측에 있다는 점을 설명해 둘 것.〉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억류 외교관 3명을 자력(自力)으로 구출할 수 있으니 회담을 결렬시키라는 지시였다. 이범석 대사는 훈령에 따라 1979년 5월 23일 남북한 비공식 회담에서 회담 종결을 선언했다. 북한 수석대표 조명일은 “한국 측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회담을 깨버릴 생각이 없다”고 매달렸지만 이 대사는 회담 종료 후 신 베트남 대사를 만나 남북한 회담 종결을 통보했다. 교환 비율 결정에 4개월, 명단 선정에 7개월. 근 일 년의 지루한 공방에서 ‘남한 출신 혁명가’를 고집하던 북한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자국민 북송은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기에 신영복씨는 한국에서 여생(餘生)을 보낼 수 있었고 여러 권의 책을 썼으며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10·26으로 중단되었다가 성공
  

이대용 공사를 회유·협박해 북으로 데려가려 했던 북한의 박영수.
  우리 정부는 3자회담 진행 중에도 억류 공관원들의 석방을 위해 우방국들의 협력을 모색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3명의 억류 공관원들을 살려내라”는 지시를 받은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외교 공관망과는 별도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1979년 초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던 독일 출생의 유대인 상인 사울 아이젠버그가 등장하였다. 그가 “이대용 공사 등 3명의 한국 외교관을 서울에 데려올 수 있다”고 장담하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접근해 왔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무역상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며 턴 키 베이스의 기간산업 건설과 이에 따른 외자(外資) 알선으로 떼돈을 벌었다. 1969년에는 한국 정부 고위층에 캐나다의 중수로(重水爐) 원자로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재규 부장은 즉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외교관들을 데려올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3자회담을 뒤엎었다. 특별훈령 중 “억류 중인 우리 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다”는 대목이 바로 아이젠버그를 이용한 방안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이종찬(李鍾贊·국가정보원장 역임) 국제정보국 과장에게 아이젠버그를 통한 억류 외교관 3명의 송환을 일임한다. 김 부장이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는 비밀 임무였다. 순조롭게 송환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 아침, 태국 주재 한국 대사가 외무부로 급전(急電)을 보냈다.
  
  “ESCAP 총회 도중 구엔 코 탁 베트남 외교담당 국무상을 만났는데 그가 억류 공관원 송환에 대해 ‘아이젠버그를 통해 연락해 주겠다. 시간문제이니 최대한 보안에 유의해 달라’고 했다”는 전문(電文)이었다. 이는 즉시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됐지만 그날 밤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서거했고 김 부장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2012년 5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10·26사태 후 중정(中情)이 추진하던 기존의 사업들은 사실상 마비됐다. 나는 구출 공작건(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2·12사태 후 사태가 안정을 찾기를 기다려 12월 말, 나는 보안사로 찾아가 전(全) 사령관 면담을 신청했다. 전 사령관은 17년 만에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간의 억류 외교관 구출 공작에 대해 설명하고, 그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김재규를 만나 관련 서류를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사령관은 김재규와의 만남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연금(軟禁) 중이던 김재규의 비서실장 김갑수 장군이 보관하고 있던 관련 서류를 입수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은 5년여의 수감생활 끝에 석방되어, 1980년 4월 12일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스웨덴 외무부 차관 라이프란드와 외무부 비서실장 넬슨이 이(李) 공사 일행을 인수하였고, 아이젠버그의 하노이 지사장 그윌크맨이 구출 공작의 실무를 맡았다고 한다. 
  
  
  “통일혁명당은 없었다”는 신영복
  
  북한의 강력한 희망을 한국 측이 받아들였다면 여생을 북한에서 보낼 수도 있었던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아 복역한 지 20년 만인 1988년 8월 14일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 중 한 사람인 김질락은 처형되기 전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이라는 옥중 수기를 남겼는데, 여기에 신영복을 어떻게 포섭했고 신영복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자세히 썼다.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우리 집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중위 신영복은 이미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교양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들의 인품과 사고의 특수성을 간파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다. 적어도 이들 두 사람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ABC를 알고 있었고, 자진해서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왔다. (중략) 나는 그들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종태 삼촌으로부터 불온문서를 받아 신영복에게는 〈청춘의 노래〉, 이진영에게는 〈제야의 종소리〉를 주며 읽어보라 했다.〉
  
  〈신영복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기독교 학생단체인 CCC 내의 경제복지회와 서울상과대학 내의 경우회에 관련하고 있었고, 구성원의 대개가 이화여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여학생 서클을 하나 지도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기존 서클에 당원을 침투시킨다는 지하당 조직방법은 신영복에게 있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신영복을 향해 조직을 함에 있어서 너무 덤벼서는 안 된다고 수차에 걸쳐 당부했다.〉
  
  출소 이후 신영복은 각종 인터뷰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1989년 1월 김정수 신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학생운동) 과정에서 여러 선후배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는데, 대학 선배이고 또 《청맥》이라는 잡지사를 경영하고 있던 김질락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발표되면서 다른 사람들 이름도 알게 되고 제가 관여하고 있던 학생 서클이라든가 학생운동 전체가 통혁당의 이름 밑에 전부 망라되어서 커다란 피라미드의 하부를 이루는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저도 그 피라미드의 메커니즘 속에 일정한 자리를 찾아 도표에 올라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확실한 자료로서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문제 제기를 시작한다.
  
  이후 1992년 10~11월 정운영씨와의 대담에서는 “《청맥》지 편집을 맡고 있던 김질락과의 인연으로 집필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학생 서클 운동에 열심이었던 때라 기관지나 교재 편집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청맥》의 편집에 관여해 서클의 교재로 이용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맥》에 글을 쓴 적은 없지만 김질락 선배와 잡지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 논의를 많이 했고 이 과정에서 법률적 용어로 포섭당하게 된 셈”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발전한다. 포섭 자체가 공안당국의 누명이라는 뉘앙스다. “통일혁명당은 조선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는 발언도 덧붙인다.
  
  
  사상 전향 부인
  
  《인물과 사상》 2007년 11월 호에 실린 인터뷰에서는 더 대담해진다. 아예 통일혁명당이 만들어졌고 주요 간부라는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제가 학생 서클 운동의 1세대입니다. 사실, 당시엔 통일혁명당이란 게 없었어요. 감옥에 들어간 후에 만들어졌다는 걸 들었죠. 아무튼 감옥에 가게 되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줄 전혀 몰랐죠. (중략)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서울대 학생 서클 간부 하나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해요.”
  
  이런 신씨의 주장은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좌파 진영 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2015년 5월 9일 자 《한겨레》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는 기자가 이렇게 단정해 쓰고 있다.
  
  〈스물일곱의 신영복은 육군 중위로,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1968년 8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그는 ‘간첩’이 되었다. 대학의 독서회와 연합 서클 세미나를 지도한 이력이 ‘반국가단체구성죄’로 ‘구성’되었다.〉
  
  1970년 9월 안양교도소에서 신영복이 전향서를 쓴 것에 대해서는 이런 면죄부를 준다.
  
  “교도소 당국은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전향을 했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가족들도 통혁당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도 전향서에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인적사항을 적고,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전향의 변’ 난을 메워 전향서를 작성했다.”(한홍구, 《신영복의 60년을 돌아본다》 중)
  
  신영복씨는 1998년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물론 사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밖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가족들이 그게 좋겠다고 권해서 한 겁니다. 전향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사상 전향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
  
문재인 대통령은 2월 10일 신영복 교수의 글씨와 민중미술가 이철수씨의 판화 앞에서 김여정을 맞았다. 배경 왼쪽의 ‘通(통)’이라고 쓴 글씨가 신 교수가 쓴 것이다. 사진=뉴시스

  신영복씨는 옥중에서 쓴 서신 모음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일약 ‘스타 교수’ 반열에 올랐고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이름났지만 근래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로 더 유명하다. 문 대통령이 2월 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을 앞두고 열린 리셉션 행사에서 한 발언은 신씨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인용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 북한의 김영남, 김여정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신영복 교수의 서화(書畵)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고, 각 비서관실에 신영복 교수가 쓴 춘풍추상 액자를 선물해 걸도록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사람이 먼저다’ 슬로건은 신영복 글씨체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관저에 걸려 있다고 알려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 족자도 신영복씨의 친필이다.
  
  문재인 대통령(당시 민주당 전 대표)은 2017년 1월 신영복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신 선생은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라는 당명(黨名)을 주고 가셨다. 선생의 ‘더불어숲’에서 온 말이다. 여럿이 더불어 함께하면 강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많은 촛불이 모이니 세상을 바꾸는 도도한 힘이 됐다. 촛불과 함께 더불어 정권을 교체하고 내년 2주기 추도식 때는 선생이 강조하신 더불어숲이 이뤄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영복을 사상가로 존경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사상은 이처럼 구체적 행동이나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영복의 사상이 김일성주의라는 점은 확정된 재판으로, 그리고 그를 이대용 공사와 맞바꿔 데려가려고 그토록 집착하였던 김일성 정권의 행태로 뒷받침된다. 좌파 정권 시절에도 신영복은 재심 신청을 하지 않았고 과거사 조사 항목에서도 통혁당 사건은 빠졌다. 평양엔 통일혁명당의 주범으로 사형된 김종태의 이름을 딴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이 있다. 남북한 정권의 수뇌부가 통일혁명당의 핵심 인물들을 같이 존경하고 있는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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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 (8)
일본인 납치범 辛光洙를 北送시킨 노벨 수상자의 人間觀
   
 <辛은 金正日을 만나 직접 일본인 납치를 지시받았다고 진술했다. 金大中 정부는 金正日을 전범 재판에 걸 수 있는 物證인 납치 자백범을 놓아 보내면서 납치된 사람의 生死도 묻지 않았다. 辛光洙가 납치해 간 하라타다아키는 金賢姬의 일본어 선생 이은혜(다구치야에코ㆍ피랍자)와 결혼하여 살다가 간경변으로 죽었고, 이은혜는 그 며칠 뒤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북한 측은 주장하고 있다. 두 사람의 유골은 홍수로 무덤이 유실되어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북한 측의 이런 주장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권력자가 외치는 평화는 공동묘지의 평화인가

2000년 가을 金大中정권이 북한으로 돌려보낸 일본인 납치범 辛光洙는『金正日로부터 직접 납치 명령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가 납치해 간 하라타다아키는 의문의 죽음을 했다고 발표되었으나 생존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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