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운영의 귀재 朴正熙연구(2)

吳源哲(박대통령 시절 중화학공업 담당 수석비서관)

머리말

박정희 대통령이 사업을 추진할 때는 정해진 단계가 있다. ①원리의 도출 ②원칙의 수립 ③시행계획 작성 ④집행 단계이다.
그리고 朴대통령은 ⑤정기적인 회의에도 참석해야 하고 ⑥연초에는 각 부처나 지방관서 순시도 해야 한다. ⑦인사 행정조직도 갖추어야 한다. ⑧국가 원수로서 중대한 결단도 내려야 한다. 이런 순서로 설명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브리핑 행정시대」 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컸다. 브리핑 제도를 이해 못하고는, 朴대통령 시대의 행정을 이해할 수 가 없다. 그래서 브리핑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브리핑할 때에는 「브리핑을 하게 된 목적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내용」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이 브리핑의 골자를 이룬다. 통칭 “시나리오”라고 했는데, 내용이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브리핑의 성패가 결정된다.

나머지 문제는 「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잘 설명하느냐」 인데, 이것은 브리핑 담당자의 몫이다. 그러나 브리핑에 어떤 양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복잡한 내용을 설명할 때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럴 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워 놓고, 브리핑 원고를 작성했다.

○ 「출발점」부터 「결론」까지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 줄거리는 일로 매진하는 식으로 나가야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 구분을 해 주어야 이해하기 쉽다. 구분에는 큰 구분과 작은 구분이 있다. 그리고 메시지 전달을 돕기 위해 도표를 많이 사용한다. 필요하다면 한 메시지를 한 박스로 만들어서 전달한다. 박스 형태를 사용하면 브리핑을 받은 사람에게 주의를 환기 시킬 수도 있다.(이렇게 돼서 본 논문에서는 100개에 가까운 구분이 있는데, 이 만큼의 크고 작은 메시지를 전달코자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브리핑 설명은 순식간에 납득이 가능하도록 간단명료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해하기 쉬운 말을 써야하고, 거부감이나 혼선이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난해한 이론은 금물이다.
○ 강조해야 할 사항은, 되풀이 설명한다. 되풀이 설명하면 여러 사람이 머리에 남게 된다. 학술논문 발표와는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 결론은 명확해야 한다. 이론 정연하고 실시 가능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청취자 전부가 동감을 하게 되고, 대통령은 결단을 내릴 수 있다.

① 첫번째, 원리(原理)의 도출

원리라는 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생각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원리는 불변이다. 일단 정해지면 바꾸어서는 안된다. 행정면에서는 “국시(國是: 나라의 기본이 되는 방침)' 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정해지면 모든 행정의 판단 기준이 된다. 이 점은 경제면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의(意義)를 내포한다.

「경제원리」 라는 것은 국가경제 발전이 목적이다. 따라서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수립된 정책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변동이 생긴다 해도, 국가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바꾸어지게 된다. 예를 든다면 「국민의 민생고 해결과 경제자립」은 우리나라 60년대 초기의 「경제개발 원리」였다. 朴대통령은 이 원리를 달성 하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이라는 정책을 수립해서 추진했으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출제일주의 정책」으로 전환을 했는데, 이러한 정책변경도 똑같은 「경제원리」를 달성하기 위해 수립된 정책이기 때문에, 서로 상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더구나 수출을 하다 보니 「수출이야말로 국가 기본전략」 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 朴대통령은, 「수출제일주의」를 우리나라의 국시(國是) 즉, 「경제발전 원리」로 승격시켰다. 「국민생활향상」 「고용증대」 「수출제일주의」 「공업입국」 「전산업의 수출화」 「국민의 과학화」 「남북한 경쟁에서의 승리」 「고도산업국가 건설과 선진국 진입」 등이 「경제원리」에 속하는 사항이다. 국가원수인 朴대통령이 직접 담당해야 할 과제인데, 청와대 비서진이 보좌하게 된다. 朴대통령은 임기 18년 동안, 도출된 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래서 국민도 믿고 따라간 것이다. 원리가 통하는 세대였다는 뜻이다.

원리(原理)나 국시(國是)라는 것은 잘못 사용하다 보면, 정치 구호화(口號化)되기 쉽다. 어떤 정치가가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수출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 보았자, 이것은 정치구호의 역할밖에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피하려면 비전(Vision) 형태로 제시해야 하는데, 비전이 좋으냐, 나쁘냐에 다라 성패가 좌우된다. 그래서 비전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원수의 중요한 책임사항이 되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수치화(數値化)하는 방식을 썼다. 수치로 표시하면, 국민들은 알아듣기 쉽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의 수준을, 현재와 비교할 수 있고, 진행 과정도 수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朴대통령은 「수출 제1주의시대(1964~1970년)」에는 10억$의 수출목표를 제시하면서, 연간 40%의 수출증가율을 요구했다. 이 목표가 달성되면 보리밥을 먹을지언정 국민의 생활고(生活苦)는 해결된다고 했다. 경제자립의 기초가 마련된다고 했다. 「전 산업의 수출화시대(1973~1980)」에는 100억$의 수출목표와, 년간 40%의 수출증가율을 지시했다. 이 목표달성으로 국민1인당 GNP는 1,000달러가 돼서 국민의 의식주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고,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국가가 된다고 했다. 북한과의 경제전에서는 완승(完勝)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며 정부를 독려하고, 국민을 격려했다. 이것이 朴대통령의 국가경제건설 전략이었다. 그 결과 연간수출증가율은 1964~1970에는 41.9%, 1971~1979에는 39.8%를 달성했다. 16년간 평균 40%의 성장이라면, 기적과도 같은 성과이다. 朴대통령의 성품 즉, 신념, 집념 그리고 고집을 잘 나타내는 결과이다. 수출이 증대하다 보니, 그 효과는 全산업에 파급되고 고용도 급격히 늘어났다. 국민의 생계도 좋아졌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정신면에서는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을 심어주기 위한, 산 교육장 역할도 했는데, 이 정신은 지금까지도 살아 남아서,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고 있다.

② 두번째, 「원리」가 정해지면, 다음 단계는 원칙(原則)의 작성이다.

행정면에서는 정책수립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으나, 우리나라 현실로서, 가장 합리적이고 실행 가능한 방안을 수립하는 단계이다. 석유화학, 종합제철 건설 계획, 자동차공업육성방안, 전자공업육성방안, 장기수출계획, 농어촌 전기공급 방안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각 담당부처에서 작성되는데 국가원수인 朴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확정된다. 이때, ‘브리핑’하는 방식이 활용됐다.

이 자리에는 국무총리 이하 각부장관, 관계기관장 등이 배석하는데, ‘브리핑’은 해당과제에 대해서, 가장 지식이 많은 공무원이 담당한다. 보통은 국장급이 했지만, 과장급도 국가大事에 대해 정책을 수립해서, 대통령 이하 정부 최고간부 앞에서 설명하고, 질문에 대해서 답변한다는 뜻이다. 실무에 밝은 朴正熙 대통령은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는데, 이때 장차관이 답변을 못하는 경우가 나오기 때문에 생겨난 제도이다. 국장이든 과장이든 간에,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실무공무원 즉, 테크노크라트가 우대되던 시대였던 것이다.

두 부처에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 두 부처간에 의견이 다를 때에는, 같은 장소에서 두 부처가 제각기 브리핑을 할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브리핑을 담당하는 두 부처의 공무원간에, 격론이 벌어질 때가 있는, 朴대통령은 모든 의견을 다 듣고 최종결단을 내렸다. 이럴 때는 어느 쪽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 양 부처 장관은 사전에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 책임이 있어, 대통령에게 송구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예는 장관이 최종결정을 못한 채 브리핑할 때가 있다. 즉 결론에서 A안과 B안을 내놓고, 서로간의 장단점만 설명할 때이다. 이럴 때 朴대통령은 「장관! 당신은 A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B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하고 호통을 친다. 장관은 책임행정을 하라는 뜻이다. 각 해당부처에서 작성하는 경제개발 계획은, 장관 이하 全 공무원이 머리를 맞대고 합심해서 수립하는 것이지, 대통령의 눈치나 보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질책이기도 하다.

각 부처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브리핑할 때에는, 마지막 페이지에 꼭 건의사항이 나온다. 보통은 「자금요구」 사항이 된다. 1969년 6월 상공부에서는 전자공업육성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골자는 「1976년에 4억$의 수출을 해내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2000만$정도를 수출하던 당시 입장에서, 이런 약속을 들은 朴대통령은 만족을 했다.

그래서 옆자리에 배석하고 있던 金鶴烈 부총리에게 “부총리, 낼 수 있소.” 했다. 김부총리는 “예, 상공부 안대로 조치하겠습니다.”라고 명쾌한 답을 했다. 朴대통령은 “그럼, 상공부 안대로 추진하시오”라고 결정을 내렸다.

전자공업육성방안은(1969년부터 1976년까지) 8년간에 걸치는 장기계획인데, 여기에 소요되는 8년 간의 사업추진자금(140억원 약 5,000만$)이 일시에 확보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국고 사정은 미약해서, 예산 얻기란 아주 힘들었다. 그것도 매해 사업별로 1년도분씩 배정받게 된다. 그래서 각 부처에서는 갖가지 노력을 다하게 되는데, 실패할 경우 새로운 사업을 착수할 수가 없다. 진행되던 사업도 중단되기 쉽상이다. 그러나 대통령 재가만 얻으면,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의 예산이 확보되는 것이다(註: 이런 자금을 ‘목돈’이라고 했고, 이런 자금을 확보하는 계획을 「목돈작전」 이라고 칭했다).

요약 정리하면, 정책사업은 ① 각 부처의 국장이나 과장급에서 성안을 하고 ② 장관의 결제를 얻은 후 ③ 관계장관이 배석한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브리핑하게 된다. ④ 이 회의에서 검토를 거친 후 사업이 확정되는데, ⑤ 소요예산도 이때 확보된다. 이런 절차에 따라 결정된 사업을 「대통령 관심사업」 이라 칭했다.
「대통령 관심사업」 이라는 말은, 국민이나 사업가에게는, 대통령이 적극 지원해주는 사업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후 전자공업은 급신장하고 수출은 늘어만 갔다(註: 한 예로 삼성전자(주)는 이 회의 1주일 후인 1969년 6월26일, 李秉喆 회장 명의로 「전자공업의 오늘과 내일」 이라는 글을 일간지에 게재했고, 9월22일 합작투자신청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1970년 1월20일에 회사를 설립한다).
1968년도의 전자제품 수출액은 1944만 $였는데, 8년 후의 목표년도인 1976년에는 10억 3,600만 $를 수출했다. 8년만에 53배의 증가율이며, 목표량(4억 $)대비는 250%의 성과였다(註: 필자 著 한국형경제건설 3권 p327참조).

③ 세번째, 원칙이 정해진 후, 세부계획 작성에 들어가는 단계이다.
세부 계획은 각 부처에서 수립하는데, 중요한 안건은 서류로 작성해서 대통령의 결제를 받기도 하지만, 장관 책임하에 확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결정된 계획은 장관책임하에 집행하게 되는데, 성공하면 그 부처의 공이 되고, 실패하면 책임을 지게 된다. 전적으로 각 부처의 책임행정사항에 속한다.

원리와 원칙이 제대로 확정되었다면, 세부계획 단계에서의 작업은 수월해진다. 또한 자유재량의 폭이 적어져서, 비리의 발생 소지가 줄어든다. 세부계획 작성 단계에서는 공장 설립과 관계가 많다. 전자공업에서 예를 들기도 한다. 전항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전자공업육성정책은 대통령의 관심사업이 됐고, 소요자금도 확보됐으니, 육성정책에 따라 육성업종을 공고하고, 기준에 따라 업체를 확정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공장을 건설하자면 내자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기계설비를 도입해야 하기 때문에 「외자도입」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외자도입을 하자면, 정부에서 지불보증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 외자도입은 국회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 된다. 국회는 정치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여당과 야당과 부총리간에, 공장건설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업을 직접 담당하는 상공부 직원은 반대 의견을 갖고 있는 국회의원(주로 야당의원)을 찾아가서, 필요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설득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반대하던 국회의원도 합의하게 된다. 당시는 국가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협력하던 시대였다.

이렇게 어렵게 건설된 공장인데도, 부실 기업체가 발생했다. 이자나 분활 상환금을 못 물어-정부를 대신해서 지불 보증을 해준 은행이- 대신 갚아주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회사측에서는 자금이 바닥났으니, 부실 공장의 운영도 은행에서 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부실 회사의 기업주는 고급차량을 타고 호화생활을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드디어 朴대통령은 철퇴를 내렸다. 청와대내에 임시로 「부실 기업 정리기구」를 설치하고, 무려 30여개 업체를 정리했는데, 이때 기업도 빼앗기고, 재산도 날린 업주가 많았다. 이후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라는 풍조는 자취를 감추었다. 국민들의 평도 좋았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의 기풍」이 서 있을 때이다.

「시행계획 작성」 단계에서의 한 특별한 예를 든다.
국군 현대화 사업(율곡사업)의 사업추진 과정이다. 朴대통령은 이 사업의 추진과정에서, 무기의 선정은 무관(武官)에게 담당시키되, 이에 대한 검토는 문관(文官)에게 맡겼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무상원조(MAP)에서 유상원조(FMS)로 바뀌어지자 朴대통령은 외무부 직원 崔洸洙 국장(후에 청와대 수석 비서관, 외무부 장관 역임)을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임명했다. 현역군인이 아닌 문관(文官)출신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1974. 3.15 「율곡사업」을 발족시켰다(초기 재원은 방위성금, 1975. 7.16이후는 방위세). 이 사업의 의결기구로 「국방부 5인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국방차관(위원장), 합동참모본부장, 군수차관보,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경제 제2수석이 그 위원이다(註: 5명중 3명 즉, 군수차관보, ADD소장, 경제 제2수석은 文官행정가이다).

또한 朴대통령은 「방위성금은 국민의 성금이니, 절대로 부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했다. 그 후 방위세가 신설되자, 「국방부에서 올라오는 율곡사업을 안건마다 다시 한번 심의하기 위해 청와대에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국회의 심의과정을 대신하는 제도를 만들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돼서 「청와대 5인 위원회」가 생겨났다(註: 안보담당특보는 퇴역장군, 경제담당특보, 정무, 경제1, 경제2수석비서관은 문관출신). 이 회의 때 국방부에서는 각군 차장이 배석하지만 심의권은 없다.

여기에서 통과된 안건의 뒤처리는, 경제2수석이 담당하게 되는데, 수백 건이 되는 안건을 안건마다 서류로 작성해서,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고역이다. 방위세가 공표된 것은 1975년 7월16일인데 바로 2일 후인 7월18일 「국방부 5인 위원회」 위원으로 경제기획원 차관을 추가토록 지시했다(이후 5인 위원회는 국방부 6인 위원회가 됐다). 즉, 예산당국인 경제기획원에서, 무기선정 때부터 검토하라는 뜻이다(註: 방위세는 부가세(附價稅) 개념으로 징수되어 예산심의 없이 국방부에 배정되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더욱이 76년 5월14일 朴대통령은 국방부에 율곡사업에 대한 특명검열단을 신설해서, 율곡사업에 대한 감사를 실시토록 했다.

朴대통령의 의도는 명확했다. 율곡사업과 같은 국가 기밀사업일지라도, 일반예산과 똑같이 ① 경제기획원의 예산당국에서 검토를 해야 하고, ② 국회의 심의과정 같은 절차를 받아야 하고, ③ 청와대 비서실에서 검토 후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집행해야 하고, ④ 감사원과 같은 기구에서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고수하겠다는 朴대통령의 강한 의지의 표출이라고 보여진다. 아울러 대통령이 안건마다 결재하는 것은, 비리발생에 대한 사전 방지대책이었다(註: 1975년~1980년까지 거출된 방위세액은 51억 4,800만$, GNP에 대한 국방비의 비중은 약 6%이다).

④ 네번째, 사업추진 과정이다.

朴대통령은 큰 사업에 착수 할 때에는, 꼭 기공식에 참석해서 축사를 통해 격려를 했다. 공사 중에도 현지 방문을 자주함으로써 작업진도를 확인했는데, 주로 공장장이나 현장책임자로부터 기술적인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준공식에도 꼭 참석해서 노고를 치하하고 훈장을 수여했는데, 주로 기술자의 몫이었다.

朴대통령은 행사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에는 차량을 이용할 때가 많았다. 지방에 산재해 있는 수출품 제조 공장이나, 새마을 농촌 등 관심사업 몇 군데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때로는 통고 없이 갈 때도 있으니, 아무런 사전준비도 못한 상황이 되거나, 사장이 부재중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떤 작은 공장이나, 시골의 새마을 농촌에서도, 브리핑 차트는 준비되어 있었고, 웬만한 간부는 브리핑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朴대통령은 현장을 둘러보면서, 현장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떠나기에 앞서 “애로사항은 없느냐”고 물어본다. 새마을 농촌에서는 “숙원사업은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애로사항’이나 ‘숙원사업’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비서실장에게 지시해서 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이런 일들은 큰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에 「일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게 된다.

한반도의 남단 「여천」에는 중화학공업건설(6개업종)의 하나인 화학공업 Complex가 위치해 있다. 朴대통령은 이 공업지구를 건설함으로써, 북한의 공업을 완전히 압도하려고 했다.

현재 여기에서 대규모의 정유공장이 가동하고 있다. 화학공업에 필요한 에너지와 원료를 공급한다. LG정유인데, 하루 70만 배럴(Bbl)의 처리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수십개의 각종 석유화학공장이 있는데, 총 규모는 에틸렌(etylene) 기준으로 약 300만톤이다. 세계 최대 규모 수준의 석유화학 Complex이다.
「남해화학」 이라는 거대한 비료공장도 있다. 이 비료공장에서는 비료의 3대요소인 질소, 인산, 가리를 모두 생산한다. 총생산량은 남북한이 쓰고도 남는 양이며, 이에 따라 수출도 하고 북한에 원조 해주기도 한다.

북한의 비료생산 시설은 1930년대의 아주 구식공장이다. 우선 전기소모량이 많은 공법(工法)을 쓰고 있으므로, 전기가 부족하게 되면 생산을 중단한다. 생산되는 비료는 질소질 비료가 대부분인데, 그것도 ‘유산암모늄’이라는 단일품목이다.

오래 사용하면 토질이 ‘산성화’되어서, 곡식의 수획이 급감(急減)한다. 북한에서는 석유화학은 존재할 수 없다. 외화가 없으니 원유수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은 ‘여천 Complex를 수 차례 방문했다. 여천 Complex에는 물동량이 많은데, 수송비를 싸게 하기 위해서 대형선박을 사용한다. 그래서 20만톤급의 선박도 상하역(上下役)할 수 있도록 대형부두를 건설했다. 부두가 완성되자, 朴대통령은 이곳을 시찰했다. 그리고는 항만 관리소를 찾아가서, “여기는 외국선박이 자주 드나드니, 외국선원들도 많이 찾아올 것이다. 부두가 더러우면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미화(美化)작업도 하고, 늘 깨끗이 하시오.”라고 했다. 그 후 朴대통령은 또 한번 찾아갔다. 아마도 미화작업 확인차 들렀을 것이다. 부두는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각 공단에서는, 미화작업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화작업 우수업체 콘테스트」를 열고 표창도 했다.

朴대통령은 조경, 미화작업, 정리정돈 등에 관심이 컸다. 朴대통령은 청와대(경제수석실)에 조경담당 비서관을 두었다. 전 국토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고, 그는 조경에 관해서 본대로 느낀대로 수시로 보고를 했다. 조경담당 특별 보좌관 역할을 할 것이다.
(후일담: 필자는 대통령 서거 후 10여 년 만에, 여천 Complex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때 옛날 생각이 나서 부둣가를 거닐었는데, 거기에는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 같았다. 경비원이 있기에 연유를 물어보았다. “높은 사람이라곤 10여년간 한 사람도 찾아온 적이 없어요. 그러니 누가 관심이나 갖겠소.”라고 했다.
미화작업 분야에서 朴대통령이 가장 힘썼던 과제는 「전국의 녹화사업(綠化事業))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산림은 현재 나무들로 울창하다. 앞으로 50년, 100년 후, 이들 나무는 거목이 되고, 산림은 원시림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⑤ 다섯번째, 朴대통령은 매달마다 상공부에서 개최되는 「수출확대회의」와 경제기획원에서 개최하는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에 꼭 참석해서 브리핑을 청취하고, 업계나 학계의 의견을 듣는다.

이렇게 해서 수출 동향과 경제동향에 대해서 최신 최고의 정보를 얻는다. 일종의 확인행정인데, 문제점들은 이 회의에서 모두 해결된다. 다른 한 가지 면은, 이 자리가 실무경제학 강의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회의는 오전 10시에 시작하여 오후 2시에 끝난다. 그렇다면 한달에 4시간, 1년이면 48시간인데,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약 15년간 계속되었으니, 朴대통령은 「총 700여시간의 긴 실무경제학 강의」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 이쯤되면 朴대통령이나 배석자는 경제실무에 밝아질 수밖에 없다.

언론에서도 이를 자세히 보도했다. 「수출목표, 수출액, 수출증가율, 경제성장률, 국민1인당 GNP, 통화량, 물가지수, 전국의 미곡생산량 및 면적당 생산량」 등은, 국민들에게 상식화되어, 이런 것을 모르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그리고 한국의 성장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될 때 국민들은 대단히 기뻐하며, 장래에 대해 큰 희망을 갖게 된다. 전 국민을 경제건설에 동참시키는데도 공이 컸다.

朴대통령의 실물 행정에 대한 강한 성향

수출확대회의가 끝나면, 朴대통령은 회의장 내에 마련된, 수출 상품 전시장을 시찰한다. 전시물은 새로 수출하기 시작한 상품위주로 매달 교체된다. 1972년 5월30일이다. 이날 전시장에는 자동차부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朴대통령은 기계제품이 수출된다는 데 관심이 컸다. 이 전시품 중 피스톤 핀(Piston Pin)이 눈에 띄었는데 “그 정밀도는 얼마나 되나”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답변을 못했는데 자동차공업 중소기업협동조합 이사장이 “1/100mm 정도가 되는, 아주 정밀한 부분품입니다” 라고 답변했다. 朴대통령은 “M16 총열의 정밀도와 비슷하구만” 이라고 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이날 오후 필자는 朴대통령에게 불려갔다. 이때 朴대통령은 “임자, 100억 달러를 수출하자면 어떤 공업을 육성하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건설의 출발점이 되는 질문이었다.

경제동향 보고회의 때는, 보고사항이 끝나면, 새마을사업의 추진현황을 보고 받는다. 그리고는 전국에서 선발된 두 명의 「새마을지도자」로부터 제각기 자기가 이룩한 업적에 대한 브리핑을 받게 된다. 한명은 「새마을 농촌」, 또 한명은 「새마을 직장」 지도자이다.
「새마을사업」이란 자생적(自生的) 조직이어야 한다. 조직원 스스로가 발언(發言)해야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작은 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 보통 수십명 단위이다.

이보다 커지면 뜻이 맞는 사람끼리 따로 조직을 만들면 된다. 큰 공장에서는, 직장마다 있고, 남녀가 따로 조직을 갖는다. 농촌에서조차 남녀가 따로 따로 조직을 갖는다. 새마을 사업의 본질은 「잘살아보자」의 운동이다. 합리적인 생활개선과 소득증대사업이 주가 된다.

자생적 조직이니 회원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 열심히 일해야 하고, 협동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이 「새마을 정신」이다. 朴대통령의 창안이니,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무슨 사업을 하라는 지시는 없다. 지원을 요청해 오면 보조해 주는데, 시멘트, 철근 등 자재만 공급해 준다.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성과가 좋으면 더 많은 지원을 해주되, 의욕이 없는 곳에 대한 지원은 없다.

이런 상태가 몇 년 계속되다 보니, 성공하는 곳과 실패하는 데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성패 여부는 지도력인데, 그래서 새마을지도자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를 순번대로 돌아가며 교육을 시켰는데, 이때 공무원도 1주일씩, 새마을지도자와 숙식을 함께하며 교육을 받았다(註: 필자는 제1회 장차관반 새마을교육수료생이다. 국무총리와 청와대비서실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무원이 수강했다. 朴대통령의 지시였다).

사회 각분야 즉 종교계, 학계, 언론계, 기업체 등의 간부급도 새마을 교육을 받게 된다. 모두 큰 감명을 받았는데, 특히 기업체의 사장들의 반응이 좋았다. 기업체의 사장들은 교육 수료 후, 자기 회사 안에 새마을 교육장을 만들고, 전 직원에게 「자기가 받은 새마을 교육과 똑 같은 과정」을 교육시켰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직장의 각 그룹(Group)마다 새마을 조직이 구성되고, 지도자가 선출됐다. 그리고 회원들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토의했다.

처음에는 환경정화사업과 폐품정리사업을 했다. 정리된 폐품은 처분을 했는데, 그 판매대금은 새마을 기금으로 편입했다. 이렇게 되자 새마을 회원들은 이제 「어떻게 하면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승인이 나면 실행에 옮겨갔고, 생산성 향상에 의한 대가는 새마을 기금에 편입됐다.
이런 일이 진행되자, 회사원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자조(自助), 근면, 협동의 새마을 정신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직장새마을 사업의 본질이다. 직장새마을 운동은 급격히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렇게 되자 직장새마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수십만명에 달했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새마을 사업의 추진현황을 수시로 체크했다. 그 중 하나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경제동향보고 후의 행사이다. 브리핑 내용은 새마을 사업의 성공담이다. 문제점 하나 하나를 해결하느라고 고생했던 이야기 및 사업이 완성됐을 때의 효과가 설명 요지이다. 그리고 숙원사업의 순서가 되는데 여기에 대한 자금지원은 즉석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장면들은 모두 TV로 전국에 방영된다. 사기를 높이고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이다.

⑥ 여섯번째, 朴대통령은 매해 정초가 되면 각 부처와 지방관서를 시찰한다.(註: 초도순시라고 하는데 20여 개소나 된다.)

이때, 각 부처 및 지방관서에서는 지난해의 실적과 금년도의 사업계획에 대해 보고하게 된다. 보고양식은 각 담당국장이 자기 소관에 대해서 브리핑한다. 각 국 별로 하게 되니, 朴대통령으로서는 상세한 내용까지 파악하고 점검할 수 있고, 각 부서의 능력까지도 평가하게 된다. 이 브리핑 때 국장으로서는 자기소신을 밝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한 예로서 당시 상공부 공업국장이었던 내가 한 브리핑을 들 수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시초의 「석유화학 탄생」의 계기이다. 또한 朴대통령은 지방관서 순시 때를 이용해서, 그 지방에 있는 공장이나 기술자 양성기관을 시찰했다. 그리고 점심 때는 지방유지를 불러 식사를 함께 했는데, 이때 지방유지들은 지방경제발전을 위해(공업단지건설 등) 여러 방면의 건의를 했다. 朴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전국(全國)과 전 분야를 모두 커버하는 철저한 「실무확인 행정식」 이었다.

초도순시 때를 이용한 대통령과 국회의장간의 협조

朴대통령이 농민을 위해서 실시한 사업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은 전국의 모든 농가에 전기를 가설해준 것이다. 朴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사업으로 만 15년간 계속됐다. 이를 위해 투입된 자금은 926억원인데,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인 약400억원의 2배가 넘는 금액이다.

朴대통령은 1964년말 서독을 방문했을 때, 서독의 농민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크게 자극을 받았다. 우선 우리나라 농가에 전기라도 가설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보았다. 朴대통령은 서독에서 돌아오자마자, 「농어촌전화(電化)사업」 즉 전기가설사업을 전개했다. 1964년 당시 우리나라 농촌의 전화율은 고작 12%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농민 8가구 중 한가구만이 전기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사업 첫 해인 1965년에 5만3천호에 전기를 가설하기로 했는데, 3만8천호에 그쳤다. 그 이유는 당시의 농민이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전기를 가설할 때 옥내공사비(屋內工事費)는 당연히 수혜자가 부담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금 수입이 거의 없는 당시 농촌 실정으로서는, 가구당 약 80달러밖에 되지 않는 전기공사비 조차도,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朴대통령은 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965년 12월30일 농어촌 전화촉진법(電化促進法)이 제정된다. 그 골자는 「수혜자가 부담하는 옥내공사비는 정부에서 싼 금리로 융자해준다. 1년 거치 후 19년에 걸쳐 분할상환하면 된다」 라는 아주 후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법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시행 후 1년 만에 수정하게 된다. 문제점은 아주 간단했다. 이 법에 의하면 전기가설 후 1년이 지나면, 융자금과 이자를 갚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의 농가 처지로서는 이것조차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67년 3월에 이 법을 개정하게 된다. 35년에 걸쳐 갚으라는 것이니, 물가상승률을 생각하면 보조하는 것과 다름없는 특혜였다.

(1968년초 상공부 초도순시때이다) 朴대통령은 농어촌 전화사업이 지지부진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부진한 이유는 명백했다. 정부에서 충분한 예산조치를 못해주었기 때문이었다. 朴대통령은 옆자리에 배석하고 있던 (이효상)국회의장에게 “농어촌電化사업 촉진을 위해 국회에서 적극 힘써줄 것”을 부탁했다(아마도 두 분은 이 자리에서 전화 사업에 대한 설명을 함께 듣기로 사전에 약속한 것이 아닐까?). 그 결과, 동년 5월에 -석유류세로 징수되는 세입액은 전액 농어촌 電化사업비에 전입되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이로서 석유 판매액의 30%라는 막대한 자금을 전화사업비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조치 후 자금문제는 잘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석유류세법을 제정할 당시(1968년) 석유값은 1㎘당(과세전) 7,210원이었는데, 71년에는 1만5,078원으로 2배로 뛴것이다. 더욱이 1973년에 불어 닥친 석유위기는, 석유가격을 또 다시 급등시켰다. 석유값이 올라가면 석유류세도 비례적으로 많아지는데, 이 세금은 고스란히 電化자금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매해 100억 원대가 훨씬 넘었다.

(이때쯤부터 전화사업에 일대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새마을농촌에서 소득증대 사업이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자, 전국의 농촌이 모두 동참하고자 하는데, 전기 없이는 사업을 추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부락에서는 옥내 전기가설비는 사전에 전액 지불하겠으니, 하루라도 빨리 송배전 시설만 해 달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돼서 수납된 자금이 75년부터는 정부융자금 대비 15%까지 점하게 됐다.) 붐이 일게 된 또 한 가지 이유는 농촌출신 여공들의 공이다. 수출이 늘어나면서, 농촌 아가씨들은 도시의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열심이 일해서 받은 돈을 시골사는 부모에게 송금하면서, 전기라도 놓고 살라고 권했다. 전기값은 보내줄 테니 걱정 말라고도 했다. 그리고 휴가때에는 꼭 라디오 등 전기기구를 선물로 사갔다. 이런 일들은 유행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돼서 電化사업은 급진전하게 된다. 당초계획에서는 1979년까지 253만호(戶)를 완전히 전화한다는 목표하에 추진됐는데 1976년도에 조기완성되었다. 당초계획에서 빠져있던 도서(島嶼)지방까지 가설완료된 것은 1978년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농어촌전화사업은 완결을 보았다.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전기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농어촌 전화사업의 효과) (1) 우리나라의 경우 전기없는 농촌에서 산다는 것은, 조상대대로부터 이어오는 전통문화속에서 산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전기가 가설된 곳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은 현대 문화권속으로 진입하는 일대 개혁이 일어났다는 뜻이 된다. (2) 경제면- 1968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 가난을 몰아내는 운동이다. 소득증대사업 등 새마을사업의 추진은 전기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3) 교육/사회/ 문화면에서나 복지 생활면에서도 전기가설은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정보에서 완전히 격리된 시골 마을에서 -라디오나 TV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마치 소경이 눈뜨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전등(電燈) 덕택에 노동시간은 배로 늘어났다. 밤에 책을 볼 수 있게 되어, 학생들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다리미나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등의 전기기구는 주부의 노력을 덜어주었으며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 (4) 도시민과 농민간의 격차를 좁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끝으로 자랑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우리나라는 농어촌 전화사업을 추진하면서, 가정용 전기의 전압(電壓)을 110볼트에서 220볼트로 승압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농어촌전화사업은 역사적인 농촌개혁사업인데, 1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룩한 놀랄 만한 성과였다. 이런 형태의 개혁이야말로 테크노크라트형(型) 개혁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⑦ 일곱번째, 朴대통령의 인사정책

1960~1970년대의 우리나라는 근대산업국가 건설이 지상목표였다. 산업이라는 것은 기술을 기초로 하는 분야이며, 국가건설은 행정가의 소관업무이다. 따라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朴대통령 자신은, 위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은 여러 과정을 통해서 “테크노크라트적 OJT(On Job Training)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아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프로급인 테크노크라트형 대통령」이 되어갔던 것이다.

군사혁명 초기에는 모든 부처의 장관은 장성급 군인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군복을 입고, 군용지프차를 타고 출근을 했다. 심지어 집무실에 ‘붉은 색깔의 대형 장군깃발’을 꽂고 있는 장관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군사정권의 실감이 났다. 그러나 이런 풍습은 곧 사라졌다. 국가행정, 특히 경제분야는 프로격인 전문 행정가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경제기획원 예를 든다.

경제기획원 창설(1961. 7.22) 이후 제7대 장관이 퇴임하는 1964년 5월까지 2년 10개월 동안 -즉 34개월 만에- 7명의 장관이 바뀌었으니 평균재임기간은 5개월도 못 된다. 상공부도 사정은 똑같았다. 혁명 후의 첫번째 장관은 정래혁 육군중장이었다(1961. 5.20 부임). 그 후 1964년 5월11일까지 만 3년 동안에 5명의 장관이 경질됐으니, 평균 6개월마다 장관을 바꿨다는 뜻이 된다.

朴대통령은 경제정책에 대해 일대 개혁을 하게 된다. 1964년 5월에 「수출제일주의」를 우리나라의 국시로 삼는다. 그리고 부총리에 장기영, 상공부장관에 박충훈씨를 기용한다. 장기영 부총리에게는 우리나라 경제전반, 박충훈 상공장관에게는 수출진흥에 대해 총지휘를 맡겼다. 동시에 그 결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게 했다. 이후 두 장관은 1964년 5월부터 1967년 10월까지, 3년 5개월이라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기 근무를 하게 된다.

두 장관 모두 과장급을 직접 상대했다. 한 예로 물가(物價)를 책임지고 있는 장기영 부총리는, 거의 매일 밤 상공부의 석탄과장에 전화를 걸어 석탄 생산량을 확인하는 동시에 생산 독려를 했다. 수시로 상공부 담당과장을 부총리실로 불러 시멘트 생산량이나 섬유 생산량 등을 체크했다. 두 장관 모두 실물 경제를 중시하고 기술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행정가이다. 테크노크라트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이때부터 朴대통령은 “① 우수한 인재를 신중히 발탁한 후 ② 신임하고 일을 맡기며 ③ 장기 복무시킨다.”라는 인사정책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책임을 완수한 인사는 승진을 시켜가며 계속 활용하게 된다.

朴대통령은 1967년 10월, 정치에 깊숙히 관여한 장기영씨를 퇴진시키고, 수출에 공이 큰 박충훈 상공부장관을 부총리로 승진 발령한다. 상공부 장관에는 김정렴 전 상공차관을 임명하는데, 2년 후인 1969년 10월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탁한다. 경제관료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공부 출신이 청와대로 진출하게 된다.

60~70년대의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간 경제들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총사령관이다. 그 밑에 있는 부총리겸 경제장관이 실무를 담당한 경제총수이다. 장기영, 박충훈, 김학열, 태완선, 남덕우, 신현확 순서이다. 그런데 1969년 10월에 부임하고, 1978년 12월에 이임한, 김정렴 비서실장은 특별한 경우이다. 김실장이 부임할 때, 朴대통령은 「경제는 나 대신 임자가 맡아서 챙겨주시오. 나는 대미, 대북관계 등 국가 안보문제가 바삐 돌아가서 거기에 몰두할 수 밖에 없소」라고 지시해서 무려 9년 2개월간 김실장이 경제총수 역할을 겸한다. 여하간 이들을 합해 보아도 8명이다. 소수 정예주의로 운영되었다는 뜻이다. 이 중 朴대통령을 제외하면 모두 문관 출신이고, 부과된 임무는 기어코 달성하는 책임완수형 행정관료들이다. 그리고 자유경제시장(Free World Open Market System) 신봉자들이다. 이들이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을 주도한 중추적 인물이다. 이들의 성품이 바로 「우리나라 경제의 성품」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경제총수의 상층부에 위치하는 박대통령, 김정렴, 장기영, 박충훈은 테크노크라트의 범주에 속한다. 박대통령 시대에는 테크노크라트의 조직이 가동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註: 현재 중국은 강력한 테크노크라트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청와대 조직은 두 분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대통령 특별 보좌관들로서 국방, 경제, 외교, 사회, 교육, 정신문화, 새마을 담당 등 필요에 따라 증감된다. 학자나 장관 출신으로 구성되는데, 정치계 출신은 없고 장차 정치에 참여할 생각도 없는 분들이었다. 예외적으로 사정(司正) 담당 특별 보좌관이 있다. 대통령의 귀(耳)와 채찍 역할을 담당하는 곳으로서, 사정 특보실이라는 직속 기구도 갖추고 있고 예하조직도 있다. 국가 기관의 어떠한 고위층도 취조 가능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혁명 주체인 홍종철씨가 담당했는데, 그는 아주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가끔 대통령에게 직언을 했는데, 이럴 때에는 대통령과 단 둘이서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는 술기운을 빌리는 척 하면서 말하기 힘든 충언(忠言)을 했다.

또 하나의 조직이 비서실 기구이다. 비서실장은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수석비서관 회의를 개최한다. 비서실장은 대통령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각 수석 비서관은 업무 추진사항을 보고한다. 더욱이 각 수석 비서관은 아무 때나 대통령을 면담해서 서류 결재를 받기 때문에,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보고하게 된다. 그 후 제각기 소관 업무에 대한 여러가지 동향과 의견을 나눈다. 그래서 수석 비서관들은 국정이 돌아가는 전반적인 상황을 함께 공유하게 된다. 그 회의가 끝난 후 각 수석 비서관은 사무실로 돌아와서 비서관 회의를 개최한다. 수석 비서관 회의의 결과를 통보하고, 소관 업무에 대해 함께 논의한다. 이들 비서관은 원래는 각 부처 소속의 공무원이다. 우수하다고 인정 받아 청와대로 파견되어 일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2~3년 근무하다가 원위치로 돌아가고, 다음 파견자와 교체한다. 이런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청와대에 각 부처간의 의사소통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또한 상하(上下) 기관 사이에서 일어나기 쉬운, 인간적인 위화감(違和感)이 발생하지 않아, 마찰의 소지가 없어진다.

경제 제2수석 비서관실은 좀 특이한 존재이다. 일종의 태스크 포스팀(TASK FORCE TEAM)인데, 대통령의 특별관심사업만 취급한다. 방위산업, 율곡사업, 중화학공업 건설, 행정수도 건설 계획, 기술인력 양성 등이다. 박대통령은 이들 사업 중에서 손수 챙기고자 하는 특별관심 사업에 대해서는, 이를 위한 별도의 사업추진 기구를, 총리 직속 하에 두게 했다.

그 예가 중화학공업기획단인데, 경제 제2수석 비서관이 단장직을 겸임해서 사업을 주관하게 된다. 그리고 박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고 직접 지시를 받게 된다. 수석 비서관에는 정치계 출신은 없고, 정치 지망생도 없었다. 지역 안배 원칙이 적용되지도 않았다. 한 예로 70년대 중반 수석비서관이 7명일 때, 이중 4명이 이북 피난민출신으로, 우연히도 모두 황해도 태생이었다(註: 이북 피난민에게는 선거구가 없다. 그러니 정치적 기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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