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의 內戰과 통일이 주는 교훈

박홍미

★예멘의 통일일지★
-1989년 남-북예멘 정상 회담
-1990년 합의 통일
-1994년 내전과 북예멘의 무력 통일
-1997년 사회당 불참 속에 살레 대통령 총선 승리와 안정

예멘의 통일과 교훈

1. 통일과정: 1981년 아덴 협정으로 교류와 협력을 시작하여 1990년 5월 정치적 통합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나 내전으로 다시 분단되었다.

2. 통일: 1994년 북예멘에 의해 무력으로 통일되었다.

3. 특징: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치적 통일이며 무력 통일이다.

4. 교훈: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정치적 통합은 민족 정서와 계층. 지역 간 갈등이 발생하여 불안정한 통일을 가져 온다.


-1. 비례대표 통일

군사력에 있어서는 북예멘이 우위에 있었다. 북예멘은 3만 8천 5백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1988년 현재 5억6천6백만 달러의 국방예산을 쓰고 있으며, 남예멘은 2만 7천 5백명의 병력에 2억 2천만 달러의 국방예산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북예멘은 1989년 11월 30일 통일헌법초안에 조인하였고 1년후에 통일준비단계를 거쳐 완전 통합에 이르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양국 국회는 6개월을 앞당겨 90년 5월 22일 통일헌법을 승인하고 통합을 최종적으로 선언하였다.

권력구조는 대통령, 대통령평의회, 내각, 의회 등으로 구성되었다. 통일예멘 공화국은 완전통일까지 2년 반을 설정하고 이 시기를 통일이행기간으로 삼기로 하였다. 통일이행기간 동안에는 최고의사결정기관으 로 5인으로 구성된 대통령평의회를 두기로 하였다.

5명의 평의회 위원은 북예멘 3인과 남예멘 2인으로 구성되었다.북예멘이 과반수의 결정권을 확보한 셈이 다. 5명의 대통령평의회 의장은 대통령이 맡도록 되었고, 통일예멘의 대통령 또한 '알리 압둘과 살레' 북예멘대통령으로 낙착되었다. 평의회 부의장은 부통령으로 보하기로 하였고 이 부통령은 남예멘 출신 이다.

대통령평의회는 총리를 비롯 39명의 내각 각료를 지명하였다. 수상은 남예멘의 대통령이 맡게 되었고 각료 39명중 20명은 북예멘 사람이었고 19명은 남예멘으로부터 충원되었다.

통일 예멘의회는 북예멘의원 1백 59명과 남예멘의원 1백 11명을 모두 흡수하였고, 거기에 대통령이 31명을 추가로 임명, 3백 1명으로 하였다. 1992년 가을 새로이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된다.

통일 예멘의 수도는 북예멘의 수도인 '사나'로 삼았다. 남예멘의 아덴에 외교공관을 두고 있었던 나라들 은 서둘러 사나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을 새삼 겪어야 했다.

이같은 남북예멘의 통합은 1990년 5월 22일 갑자기 실현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적지않은 충돌과 우여 곡절이 따라야 했다.

남북예멘은 1972년 국경충돌을 일으킨 바 있었고, 1979년에도 국경분쟁에 휘말려야 했다. 이들은 1972년 충돌을 계기로 리비아의 중재하에 통합운동에 나섰고, 1979년 분쟁이 휴전으로 끝나자 통일을 목표로한 '아덴협정'을 체결, 통일작업에 구체적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1986년 남예멘에서 개혁조치를 둘러싸고 지도부 내에서 유헐사태가 발생하자 예멘의 통일작업은 뒷전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그렇지만 양국은 1988년 국경지대의 유전을 공동으로 개발키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남북예멘은 같은 해 여행자유화조치를 취함으로써 통일의 길로 접어들었다.

-2. 통일 과정

1990년 5월 남북예멘의 무장이 통일에 앞서 기술적으로 해제되었고, 1990년 5월 22일 '예멘공화국'(The Republic of Yemen)이 전격적으로 선포되었다. 북예멘의 지도자 살레 대통령은 대통령의 직책을 맡았고, 부통령은 남예멘의 지도자 바이드가 맡게 되었다. 또한 북예멘의 수도 싸나(Sana'a)는 모든 각료와 정부위원회를 불러들여 새 정부의 '행정수도'로 명명되었다. 지리적으로는 훨씬 크지만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남예멘의 수도 아덴(Aden)은 보상을 위하여 '자유무역지대'(free zone)의 약속과 함께 '경제수도'로 명명되었다. 1993년 4월 선거에서 바이드가 패배한 이후, 살레와 바이드 관계는 악화되었고 바이드는 동년 9월 싸나를 떠나 아덴으로 되돌아갔다. 오만과 요르단의 중재 노력을 포함한 수많은 화해 시도에도 불구하고 양 지도자는 잘래 공화국의 정치기구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해결의 열쇠인 제도 통합에 대한 실패는 남 북예멘간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1994연초 산발적인 무력 충돌을 가져왔다. 결국 남예멘이 통일된 공화국에서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1994년 5월 5일 전면적인 내전(civil war)이 발발하였다. 남측 공군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남측 군대는 아덴으로 후퇴하였고 드디어 동년 7월 7일 항복하였다. 북예멘은 남예멘 분리주의자들에 대해 '군의 통일'을 위한 승리를 선언하였고, 남예멘 지도자들은 인접 국가로 피신하였다. 그후 바이드는 오만에서 정치로부터 은퇴를 하였고 북예멘의 '재통일' 형식으로 예멘은 통일을 이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대중정권이 지난 5년동안 꾸준히 추진 해왔고 노무현정권이 계승하고 있는 대북정책은 정치적인 합의에 의한 통일의 모색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완전히 이질화한 남과 북이 동질화하는 작업을 먼저 한 뒤에 상호의 경제를 적응시켜 같은 생활권이 되었을 때 제도를 통합해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것에 앞서 정치적인 합의를 이루자는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정중하게 말씀드립니다. 대한민국의 지금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에 있어서는 저 개인적으로 지금의 나라 운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지금보다 훨씬 못살고 더 가난했을때도 우리는 참아왔고, 앞으로도 경제의 문제에 있어서 더 가난해도 얼마든지 참을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정체성 문제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결코 양보할수 없다. 이것은 국가와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특별히 본인은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써 혹시라도 이 나라가 좌경화로 말미암아 공산정권이라도 들어선다고 한다면, 우리는 생명을 걸고 싸울것이다. 공산정권이 신앙생활을 허락지 않을뿐 아니라 특별히 기독교에 있어서는 유난히 박해 정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 박해정책은 중국과 북한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통해서 얼마나 참혹하고, 얼마나 잔인한지 속속들이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결코 공존할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공산주의가 들어선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를 다니는 신실한 신자들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인이 천만을 넘는다고 합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거의 다수가 이러한 저의 의견을 동감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 나라가 급하게 좌경화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더 이상 숨길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정말 나라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다른것은 몰라도 이 나라의 좌경화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국가 보안법 철폐가 아니라, 더욱 강력하게 하여, 공공연하게 친북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이 무리들을 일벌백개로 다스려야 합니다. 서부른 남북 통일은 이 민족에게 다시 한번 피의 역사를 가져오게 할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통일이며,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게 고민하여서 지금의 좌경화로 말미암은 혼란을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책임감 있는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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