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검찰 국방부 합동조사 진술 조서
* 이정부 전 육군1항공여단 31항공단 103항공대대장의 진술
「문 : 진술인이 있던 103항공대대의 지휘계통과 부대편제는 어떠하였는가요.
답 : 저희 103항공대대의 경우 지휘체계는 육군본부-1항공여단(항공여단은 1항공여단 1개였음)-31항공단-103항공대로 이루어졌으며, 참고로 육군항공 전체를 말씀드리자면 크게 2가지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먼저 첫 번째가 육군에 1개 밖에 없는 항공여단인 1항공여단(단장은 준장이었음)이 있었는데 여단은 전체가 육군참모총장 휘하의 직할부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1항공여단은 다시 무장헬기로 분류되는 500MD, AH-1J 등을 보유하고 있던 31항공단(단장은 대령)과 수송용 헬기인 UH-1H와 고정익 비행기인 U-6을 보유하고 있던 61항공단 2개의 단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다시 각 31단은 103(당시 코브라로 불리던 AH-1J 7대를 보유하고 있었음) 대대와 501~506(이는 500MD만을 보유하고 있는 대대라는 뜻임) 항공대대로 구성이 되어 있었으나 그 모두가 31단장의 지휘 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103과 501을 제외한 나머지 대대는 평소에 소속은 1항공여단 소속이지만 그 대대가 위치하고 있었던 각 군사령부에 작전배속이 되어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502는 수경사령관, 503, 505는 3군사령관, 504는 1군사령관, 506은 2군사령관에게 작전배속이 되어 있었으며, 61항공단 201~205 (당시 헬기 분류상 100은 코브라, 200은 UH-1H를, 500은 500MD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었음) 항공대대가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일부는 단장이 직접 지휘를 하고 일부는 각 군에 작전배속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며 총장과 항공여단장 사이에 총장의 참모로 소장인 항공감이 있었으며 대대 이하의 편성은 103대대의 경우에는 예하에 각 4대와 3대의 헬기를 가지고 있던 1, 2중대로 편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항공여단과는 별도로 당시 군사령부, 군단, 사단 등 사단급 이상의 부대에는 전부 항공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부대들은 각각 소속부대장의 지휘를 받았는데 그러한 부대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관측용 헬기(OBSERVATION)인 0-1과 OH-23기종 밖에 없었습니다. 저가 당시 지휘계통 등을 정리한 자료를 제출하겠습니다.
(중략)
문 : 육군항공에서 광주에 헬기를 지원하게 된 경위와 내역은 어떠한가요.
답 : 제일 먼저 지원된 헬기는 506항공대대에서 항시 전주에 500엠디 1개 중대(4대임)가 파견 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사태가 나기 전에 그곳에서 지원을 나갔던 것 같으며 저희 단에서 지원을 나간 것은 5.21 새벽에 502대대에서 가스 살포기가 부착된 500MD 4대가 광주로 지원을 나간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후 5.22 정확한 시간은 기억에 없고 점심 무렵 코브라 2대와 500엠디 4대를 인솔하고 초일리를 출발하여 1시간 20분 정도 지나 광주에 도착한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시간은 기억에 없지만 저가 점심 무렵에 식사를 못하고 출발하여 도착 후 시장기를 느끼고 라면을 먹은 기억이 있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중략)
문 : 당시 어떠한 명령을 받고 어떠한 장비를 갖추고 내려갔는가요.
답 : 저가 단장으로부터 5.21에 광주로 출동할지도 모른다는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되며 그 후 5.22 점심경 출동명령을 받았는데 당시 단장 말씀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무기고도 탈취당하고 사격도 벌어지는 등 상황이 심각하여 무장헬기를 인솔하여 광주로 출동하라고 하며 모든 지시는 전교사령부의 지시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 저희 502대대에서 7.62밀리 기관총과 총알 2,000발을 적재한 500엠디 4대를 저의 지휘 하에 작전배속받고, 저희 대대에서는 20밀리 발칸포와 실탄 500발(최대적재량은 750발이나 500발이 비상대기시 적재하는 분량임)을 적재한 코브라 2대를 차출하여 저의 인솔하에 내려갔습니다.
문 : 그렇다면 진술인의 헬기 출동시 이미 무장을 하여 내려 보낸 것으로 보아 상부에서는 무장헬기에 의한 공중화력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 하에 조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답 : 그렇습니다. 저가 당시 들은 상황도 광주의 상황이 심각한 것으로 들었으며 따라서 무장헬기를 내려 보낸 것으로 판단을 하였지만 단장으로부터 말씀드린 내용 외에는 더 이상 들은 바가 없어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는 곤란합니다.
(중략)
문 : 광주에 진술인이 말하는 무장헬기가 처음으로 지원된 것은 언제인가요.
답 : 저가 인솔해 간 헬기가 처음으로 지원된 무장헬기였습니다.
문 : 그런데 전교사 전투상보에 보면 5.21.19:20 2군에 배속되어 있던 506대대에서 무장헬기 4대가 지원된 것으로 기재가 되어 있는데 어떤가요.
답 : 저는 광주비행장에 있는 동안 저희 헬기와 무장 500엠디가 있는 것을 본 사실이 없으며 저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저희 헬기가 최초로 광주에 지원된 무장헬기인데 그러한 기록이 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문 : 사실은 5.21 오후에도 이미 무장한 500엠디를 지원하여 사용하였는데 사후에 기총소사가 문제가 되니 그 부분을 다른 기록에서 없애 버린 것이 아닌가요.
답 : 저는 그렇게 보지를 않고 만약 그러한 기록이 있다면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며 만약 지원이 있었다면 당시 전주에 전투헬기 1개 중대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곳에 지원 지시를 하여 사후에 광주에 지원을 하였거나 아니면 저희 헬기가 가니 취소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생각이며 광주에 실제로 506에서 왔다면 저희가 있던 광주비행장이 아닌 전교사령부나 다른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저는 본 사실이 없고 지원시간이 19:20으로 되어 있는데 그 시간은 착륙하기가 곤란한 시간으로 믿기 어렵습니다.
문 : 진술인이 인솔한 헬기들은 도착 이후 누구의 지휘를 받았는가요.
답 : 저희가 도착하여 바로 전교사로 작전통제 되었으며 5.22 비행장 도착 직후 연료보급을 받고 바로 전교사로 가 당시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에게 신고를 하였으며 이후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상황실의 명령에 따라 활동을 하였습니다.
문 : 전교사에 있는 동안 출동 상황의 개요는 어떠한가요.
답 : 저가 당시 상황을 정리한 자료들을 지참하고 왔는데 그 자료를 보니 저가 상부에 보고한 내용은 우선 5.22 신고하는 자리에서 김순현 장군이, 지금 시내에 탈취당한 장갑차가 돌아다니고 시위대가 무장하고 있는 등 상황이 엉망이라고 하면서 저에게 코브라로 광주천을 따라 천에다가 위협사격을 하라고 지시하여, 저가 코브라의 경우 20밀리 발칸으로 사격을 하면 그 위력이 엄청나 천에다가 사격을 하여도 파편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긴다며 불가함을 진언하자 김 장군이 배속이 되었으면 시키는 대로 하지 무슨 말이 많으냐고 힐난하여, 저가 그러면 서면으로 지시를 해달라고 하였으며, 그 후 단장과 여단장에게 보고를 하자 저에게 잘했다고 하며 사격을 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결국은 서면지시가 없어 그날을 사격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24 (자료에는 5.23로 되어 있음) 공수부대가 비행단으로 철수하는 것을 엄호하라고 하여 코브라 2대를 인솔하고 공수부대 이동로를 엄호하다가 2시간 정도가 지나 연료재보급을 위해 광주비행장에서 급유를 하고 있는데 헬기의 무전으로 11여단장이 자기 병력이 이동 중 산쪽에 있는 폭도로부터 공격을 받아 난리가 났으니 폭도들에게 무차별 제압사격을 해달라고 요청하여 저가 즉각 출동하여 현장으로 갔는데 막상 공중에서 7.5배 망원경을 사용하여 지상에 있는 병력들을 정확히 확인하니 산위에 있는 병력이 아군 보병학교 교도대로 확인되어 (그 망원경으로는 병력들의 상의 마크까지 확인이 가능하였음) 저가 아군이라고 보고하니 여단장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격을 하라고 하여 저가 다시 확인 후 재차 보고를 하였으며, 저가 그 상황을 전교사에도 보고를 하니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결국은 저의 말을 믿고 조치를 하여 그날도 결국은 사격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류상에는 나오지는 않지만 날짜는 기억에 없고 저희 500엠디가 교도소를 습격하는 폭도들을 공격하기 위해 전교사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사실이 있으며, 저가 당시 정찰활동중에 있었던 처지라 직접 지시를 하지는 않고 출동한다는 보고만을 무선으로 받았는데, 저가 광주에 가서 밑의 조종사에게 사격을 할 때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저의 명령을 받아 사격을 하라고 하였는데 그날 저에게 사격품신이 들어온 사실이 없으며, 그날 활동이 끝난 후의 보고시에도 상세한 경위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사격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격지시를 받은 사실 자체가 없으며 사격을 한 사실도 없었습니다.
문 : 김순현 장군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날이 5.22이 아닌 5.21이 아닌가요.
답 : 아닙니다. 저가 날짜를 혼동할 리가 없고 또 상황일지상도 5.22로 되어 있는데 착오가 있을 리 없고, 또 한 가지 5.21 UH-1H가 대공사격을 당하여 상처를 입은 일이 있는데 저가 가니 그 조종사들이 전날 대공사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저에게 저공비행을 하지 말라고 하여 저가 500피트 이하의 비행을 금지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문 : 당시 광주에 있던 피터슨 목사는 그의 책과 검찰 진술에서 “오후 3시 15분쯤에는 광주 영공에 몇 대의 전투헬리콥터가 나타났다. 그들은 거리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사상자들은 병원에 매우 급작스럽게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원에 접수된 첫 사망자는 오후 3시 30분쯤에 들어온 중학교 여학생이었다. 헬리콥터들은 계속해서 도시 영공을 날아다니면서 오후 내내 총을 쐈다” 고 기술한 바 있으며 당시 기총소사 장면을 촬영한 것이라는 사진까지 제출한 사실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조비오 신부도 자신의 눈으로 명백히 광주 불로천변을 향해 헬기에서 드르럭 하는 소리를 내며 기총소사를 하는 장면을 분명히 보았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이때 검사는 피터슨이 제출한 사진을 제시한 바
답 : 우선 피터슨 목사의 말은 거짓임이 확실한 것이 첫째로, 저가 그 목사님이 기총소사 장면을 촬영하였다는 500엠디 사진을 보면 헬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축 위에 직각으로 올라가 있는 축이 있는데 그러한 축이 있는 기종은 500엠디 중에서도 MMS(master mounted sight)가 장착된 기종이며 그 당시는, 지금까지도 한국군에서는 그러한 기종의 헬기가 도입된 사실이 없습니다. 둘째, 피터슨 목사가 제시한 헬기 하단의 불빛은 충돌방지등의 불빛이지 화염이 결코 아닙니다. 저가 항공사령부의 협조를 받아 500엠디의 사격장면과 충돌방지등의 위치 및 충돌방지등이 켜져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보면 피터슨 목사의 사진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명확히 충돌방지등의 불빛임이 확연히 확인되고 있습니다. 셋째, 피터슨 목사의 사진을 보면 그 목사는 기관총이 있는 쪽이 아니라 로켓이 부착되는 위치에서 헬기를 찍었는데 저희가 실제 사격을 하며 양쪽 각도에서 찍어본 결과 기관총의 위치가 항공기의 밑쪽이 아니라 상당히 위쪽에 붙어 있어 피터슨 목사가 촬영하였다는 쪽에서는 반대쪽에서 발생하는 사격시의 화염이 아예 보이지가 않으므로 사진상의 헬기 불빛이 사격섬광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이 말대로 5.21 오후 내내 사격을 하였다면 엄청난 희생이 생겼을 것이며 엄청난 수의 목격자가 있을 것인데 지금 그러한 목격자나 피해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조비오 신부님은 90.2.23 방영된 엠비씨의 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에서 인터뷰를 통해 “1미터 정도의 불꽃을 내뿜으면서 드르럭 드르럭 드르럭 3번이나 지축을 뒤흔드는 기총소라를 직접 목격하였다” 고 말씀하셨는데 저가 그러한 근거 없는 말을 근거로 하여 방송을 제작 방영한 문화방송을 상대로 서울지검에 고소장을 내고 진술서를 낸 사실이 있는데 거기에도 자세히 언급을 하였지만 그 분 말씀은 첫째로, 그분 말씀대로 지축이 흔들리는 정도의 사격 소리가 날려면 500엠디의 기관총 소리보다는 코브라의 발칸포여야 하는데 당시에는 코브라가 광주에 없었으며 둘째, 당시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는 취지를 말씀을 하셨는데 왜 한명의 부상자도 직접 증언이 없는지, 또 공중사격의 경우와 지상사격의 경우는 사격각도가 달라서 확인이 되는데 그러한 자료에 대해 일체 제출을 하지 않는지 셋째, 발칸포는 쏘면 아스팔트라도 커다란 구멍이 생길 정도이며 500엠디의 7.62밀리 기관총으로 사격을 하여도 길 위에 탄흔이 명확하게 표시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일체의 증거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합리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부연하게 말씀드리자면 당시 참가한 조종사나 정비사들이 수없이 많은데 지금까지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이런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면 신부님이 충돌방지등을 착각하여 섬광으로 오인한 것이며 지상에서의 총소리를 오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가 이번에 촬영한 사진과 90년에 저희 항공단 장교들이 문화방송 사장과 담당 피디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저가 수임자로 작성하여 검찰에 제출한 진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이때 검사는 진술인이 제출하는 사진과 진술서를 기록말미에 첨부하다.
문 : 지금 이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 촬영한 것인가요.
답 : 저가 피터슨 목사의 사진이 신문에 난 것을 보고 31단에 협조를 구하여 그들이 촬영하여 저에게 준 것인데 촬영일시는 95.4. 하순이고 장소는 양평에 있는 사격장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중략)
문 : 또한 소준열 장군은 자신이 사후에 확인한 결과 조선대 뒷산에서 헬기에 의해 위협사격이 행해진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저가 소 장군에게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도대체 어디서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는가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가 청문회와 문화방송의 “어머니의 노래” 방송이 있기 전 중앙일보 기사를 보고 하도 어이가 없어 광주로 가 윤공회 대주교 및 순천의 조비오 신부를 만나 군에서 사격장면을 보여줄 터이니 한번 보고 말씀을 하라고 한 사실도 있는데 저가 자신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말을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조비오 신부 등이 당시나 지금 언론에 5.22 이후에 사격지시가 있었다고 양심선언하였다고 밝히고 있는 관계자는 다름아닌 저이며 저가 당시 그들을 찾아가 사격지시는 받았지만 사격을 한 사실은 없다고 한 것을 그와 같이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문 : 진술인의 말에 따르면 초일리에서 간 헬기들이 사격을 한 적이 없으니 그렇다면 당연히 탄약을 재보급받은 일도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답 : 그렇습니다. 저희는 일체 실탄을 사용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다시 보급을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문 : 그러나 당시 전교사에서 작성한 탄약보급에 관한 서류를 보면 5. 23 항공대에 20밀리 발칸탄약 1,500발을 항공대에서 수령해 간 것으로 확인되며 진술인의 설명에 따르더라도 20밀리 발칸포는 코브라에 장착된 무기이며 코브라가 무장하는 탄약적재량이 1대당 750발인 것으로 보아 이는 진술인이 인솔하고 간 코브라 2대의 적재량인 것으로 보아 진술인이 가져간 코브라의 탄약은 5.23 이전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추가로 받아간 것이 아닌가요.
이때 검사는 해당 자료를 보여준 바
답 : 저가 사격을 한 사실 자체가 없기 때문에 탄약을 다시 받은 사실은 일체 없으며 그 탄약이 103항공대대나 31항공단 앞이 아니라 항공대로 불출된 것을 보면 그 가능성은 첫째, 전교사 항공대에 배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대공용 발칸(20밀리로 구경은 같으나 항공기와 상호 전용이 불가능함)의 실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두 번째로 가능한 것은 전교사 사령부에서 혹시 추가로 실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저희에게 통보를 하지 않고 미리 항공대에서 수령해서 보관해 놓으라고 지시한 생각이 드는데 저로서는 단언을 할 수 없으며 하여간 저희는 사격을 한 사실이 없어 다시 보급을 받은 사실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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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를 팩트로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이 상상속에서 과대한 소설을 쓰는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