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수풀에 똬리 튼 부정의 독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 긍정적으로 보라, 긍정하라, 긍정하라. 예, 라고 대답하라. 아니오, 라고 하지 말고. 긍정적인 사람이 스트레스도 안 받고 대인 관계도 좋고 크게 성공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늘 긍정적이란 말을 긍정적으로 쓰는 데 익숙하다. 긍정적인 사람이 성공한 경우도 우리는 주변에서 숱하게 보고 듣는다.

한국이 긍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말은 경제개발 시대의 '할 수 있다'가 아닐까 한다. 자기 나라에 대해 거의 절망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한국에서, 세계 최빈국에서 자본도 자원도 기술자도 기업가도 학자도 거의 없던 시절에 한국인은 무의식적으로 '엽전론'을 입에 담으며 스스로를 비하하고 멸시했었다. 아주 부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우리는 할 수 있다.' '일본을 따라갈 수 있다.'라고 긍정적인 사고를 전국민에게 심어 준 일은 대단한 일이었다.

[봉건주의의 긍정, 공산주의의 긍정, 자본주의의 긍정]

긍정은 흔히 힘있는 자가 강요하는 바를 힘없는 자가 살아남기 위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온다. 봉건주의 시대에 주군은 신하에게 충성이란 말로 무조건적인 긍정을 요구했고, 부모는 효도란 말로 또한 그리했다. 힘의 우위를 뒤집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지배자의 논리가 피지배자의 논리로 체화(體化)되어 나중에는 스스로 충효를 다 바쳤다. 다만, 자연과 역사의 영향을 받아 서양과 일본은 충성, 한국에서는 효도, 중국에서는 의리가 상대적으로 더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히 역모와 불효, 배신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악덕이었다.

공산주의의 긍정은 공산당의 지시에 무조건 따르고 이를 반복해서 의식화하여 무의식으로 만드는 데 있다. 마르크시즘은 인류 최후의 완벽한 이론이기 때문에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무조건 시대착오적인 지주거나 썩어 빠진 자본가로 매도되었다.

당의 지침 나아가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외우고 따라야 하는 법 위의 법이다. 봉건주의에서의 충효의 대상인 왕과 부모를 공산당, 또는 수령으로 뒤바꿔 놓았다.
'당이 하라면 우리는 한다.'
'우리는 행복해요.'

재미있는 것은 공산국가의 언론이다. 공산당은 무오류이므로 어떤 정책을 실행해도 그것을 긍정적으로만 보도해야 한다. 나라에 일어나는 온갖 나쁜 일은 보도할 수가 없다.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흘러가는 폐수를 뻔히 보면서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해야 했다.

반면에 공산국가의 언론이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보도할 때는 오로지 부정적인 것밖에 없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일본이건 독일이건 상관없다. 그건 다 엉터리이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지금도 국내 동정은 긍정 일색이다. 대신 남조선과 미국은 온통 썩어빠진 인간과 사건으로 얼룩져 있다. 최대한 잘 써도 '수령님'과 '장군님'의 위대한 감화를 받아서 그렇다는 식이다.

자본주의의 긍정은 누구도 강제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자본주의 국가도 독재 정권에서는 봉건 국가 또는 공산 국가나 마찬가지이지만, 원칙적으로 자본주의의 긍정은 상대를 유혹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광고이다.

광고만 들여다보면 오로지 신나는 것밖에 없다. 콜라 한 잔 마셔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고 운동화 한 벌 신어도 하늘을 휙휙 날아간다. 담배 한 대 피워도 천국에 곧장 들어가고 껌 하나 씹어도 황홀경에 빠진다. 에덴 동산도 광고의 세상만큼 행복할 수가 없다. 광고의 세상에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금지 조항조차 없으니까.

[한국 현대사에서의 긍정의 문제]

한국에서 군사 정부가 들어서서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은 처음에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봉건주의도 무너졌고 식민지배도 끝났지만, 자본주의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를 혼합하여 정부 주도로 국내 뿐 아니라 전세계가 코웃음치던 목표를 착착 달성했을 때, 그것은 엄청난 자신감으로 다가왔었다.

문제는 중산층이 급격히 대두되면서 발생했다. 그것은 '먹는' 입은 채워 주었지만, '말할' 입은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정부 말만 듣고 그 말을 무조건 긍정하고 따라야만 했다. 입은 먹는 데 쓰이는 신체기관이요, 귀는 듣는 데 쓰이는 신체기관이었다. 설혹 입이 말하는 데에 쓰이더라도 그것은 '예!'만 되풀이해야 했다. 배가 고플 때는 몰랐는데, 배가 부르자 '예!'하고 돌아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니오!'라고 할 걸 거꾸로 말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입은 먹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라 말하는 데도 쓰임을 알게 되었다.
'내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민주화는 긍정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집권층에 대한 반기]

집권층으로 보아서는 어이가 없었다. '물에 빠진 놈 살려 놓으니 보따리 내놓아라.'는 격이었다.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신민(臣民) 아닌 시민(市民)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나이 스무 살이 넘었는데, 시시콜콜 잔소리하고 통금도 없는데 매일 저녁 8시면 칼같이 들어오라고 윽박지르는 격이었다.
개구리는 올챙이 적 일을 기억할 리가 없다는 격이다. 개구리가 되었으면 폴짝폴짝 뛰어다니기도 하고 물 속을 유유히 헤엄치기도 하는 것이지, 왜 맨 날 올챙이처럼 물 속에서 우르르 모여 바글바글거려야 하느냐는 식이었다. 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애완용 동물이 아니다. 어린애도 아니다. 나는 인간이다. 성인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긍정은 다시 부정을 잉태하다]

민주화 이후의 긍정의 수풀에도 또 다른 부정의 독이 똬리 틀고 있었다. 이른바 민주화한다고 앞장선 사람이 사실은 그 정신이 봉건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독재에 맞서려면 똘똘 뭉쳐야 한다면서 언제나 충성과 효도를 강요했다. 비밀을 지켜야 한다며 모든 걸 밀실에서 처리했다. 뒷골목의 의리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문화는 끈질겨서 기성 세대만 그런 게 아니라 운동권 학생들도 그러했다. 조직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초인적인 용기가 없는 한 나갈 수 없다. 나가더라도 비밀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80년대 '강철 서신'으로 운동권의 머리 역할을 한 저 유명한 김영환도 북의 실체를 경험하고 양심을 따르는 순간, 배신자로 낙인 찍혀 부모형제보다 더 가깝던 어제의 동지들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고 사회에서 생매장되었다. '회장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조직'에 대한 강철같은 의리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회의(懷疑)가 들면 활동을 안 할 수는 있지만, 비밀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게 바로 봉건주의적 충성이요, 의리인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민주주의와 전혀 관계없다.

이런 무의식화된 의식이 집권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자기들은 민주화 세력이니까 무조건 옳다는 식이다. 모든 국민들로부터 무조건적인 긍정을 바랐다. 이미 그 자체가 반민주적이요 봉건적임을 모르고 있었다. 자기들 당이 아니면 모조리 나쁜 자들이었다. 여당은 무조건 긍정해야 하고, 야당은 무조건 부정해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훌륭한 민주시민으로 생각한다.

긍정을 긍정함이 긍정이요, 부정을 긍정함은 부정이다. 부정은 부정해야 긍정이 된다. 결국 이전의 약자도 강자가 되면, 자신을 바로 긍정 자체로 받아들여 주길 바란다.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누구든 교만하면 즉시 부정적인 인간이 된다.

긍정적인 사고는 좋다. 부정적인 사고도 때로는 좋다. 부정을 부정할 때는 부정적인 사고가 더 낫다. 독재를 긍정하는 것보다 독재를 부정하는 것이 훌륭한 일이다. 불의를 긍정함은 불의를 묵인함이요, 그를 부정함은 정의의 비롯됨이다.

[긍정, 부정이 아니라 비판 의식이 문제]

결국 문제는 긍정이냐 부정이냐는 이분법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림이다. 비판이다. 지혜다. 맹자는 이를 일러 옳은 것은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是是非非)함이 곧 지혜라고 하였다. 부정적으로 너무 치우쳤을 때는 오히려 그를 부정하는 것이 올바르다. 긍정으로 너무 치우치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 긍정 속의 부정적인 요소이다. 이를 지적하여 다양성을 받아들이게 함이 올바르다.

인간은 인간인 이상 누구도 완전할 수가 없다. 따라서 누구도 진리를, 긍정을 독점할 수가 없다. 독점을 주장하면 이미 그는 부정적인 인물이 된다. 그 때는 그를 부정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는 결국 긍정과 부정을 확률로 계산하여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되 끊임없이 견제하면서 갈등을 극복하며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삶터라고 할 수 있다.
'저번에는 당신이 60% 옳았고 제가 40% 옳았지만, 이번에는 제가 60% 옳고 당신이 40% 옳은 듯합니다.'

개인으로서는 긍정적인 사고로 따뜻한 희망을 갖되 날카로운 지혜를 늘 간직해야 할 것이다. 가슴속에는 늘 희망을 갖고 있되, 머리 속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갖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가 온정주의와 결합할 때]

긍정적인 사고는 '좋은 게 좋다'는 한국의 전통적인 온정주의와 결합하여 현대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독을 품게 된다. 지연, 학연, 혈연 등이 작은 단위의 농업 사회에서는 곧 교류가 거의 없는 사회에서는 이 온정주의가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늘 얼굴을 맞대고 사는 사람끼리 옳고 그름을 칼같이 밝히고 인척이라도 조금만 잘못하면 아예 상대조차 않으면, 그 사회는 유지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사회가 복잡해지고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만날 기회가 많아지면서,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최상급의 수식어를 주고받으면서 맛있는 것을 독차지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다른 지역, 다른 학교 출신의 능력 있는 사람들 편에서 볼 때, 고압선이 둘러싸인 철조망 안에서 화려한 성을 쌓아 놓고 멍청한 인간들이 저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가는 짓거리로 비치게 되었다.

'좋은 게 좋다'는 이 긍정적 사고는 정부 부처의 산더미 같은 서류에서 그 폐해가 여실히 드러난다. 얼마나 아름답게 꾸미는지 모른다. 금융업과 기업의 서류와 회계장부도 마찬가지다. 자기 집단 안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다 알지만, 대외용으로는 긍정적으로 쓴다며 온갖 미사여구와 '붉은 색' 아닌 '검은 색' 일색으로 멋있게 꾸며 놓는다. 서류나 회계장부상으로 보면 한국은 이상 사회이다. 흑자 기업이 넘친다.

(최고경영자가 이런 사실을 최초로 폭로한 사람이 바로 국민은행장 김정태다. 똑똑한 강남 아줌마들의 오빠가 될 수밖에 없었고 회계장부의 투명성 곧 정직을 생명으로 여기는 외국의 기관투자가들의 우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속은 썩어 있기 때문에 '유비'통신이 발달한다. 이중장부란 게 생긴다. 사실대로 써 놓으면 세금을 왕창 걷어 하루아침에 회사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정부도 회사를 못 믿고 회사도 정부를 못 믿는다. 정직과 투명성이 서양의 원론적인 긍정과 한국의 전통적인 온정주의 때문에 발을 못 붙인다. 겉만 번지르르하면 된다. 그러나 정적을 공격할 때는 정도의 차이뿐 누구나 갖고 있는 이런 비리는 최상의 표적이 된다. 이래서 나온 말이 표적 수사이다. 정권을 잡지 못했을 때도 무기는 있다. 그것은 바로 '아니면 말고'식의 무차별 흑색선전이다. 정부의 표적 수사든, 야당 또는 소수 여당의 흑색선전이든 여론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쪽이 이긴다. '사실'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오로지 '이미지'다. 적군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우고 아군에게는 긍정적 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하면 된다. 지나고 나면 끝이니까.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긍정이 '거짓'과 동의어가 되었다. 온통 좋은 말만 늘어놓았는데, 회사가 무너지고(동방금고와 열린금고만 해도 BIS 비율이 무려 14%, 18%였었다나. 기아와 대우가 무너지고 실사를 하자 숨겨둔 부채가 4조원, 5조원씩 쏟아져 나왔다나.)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자, 이제는 외국인들은 누구도 한국의 서류나 회계장부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정보화와 더불어 급격히 집채만한 아니 거대한 산맥 만한 세계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한국의 정부도 기업도 은행도 온통 허둥대기 시작했다. 부실의 밑은 얼마나 깊은지 가면 갈수록 더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를 대비하는 학교 교육이나마 제대로 되면 희망이 생기겠는데, 정반대로 가고 있다. 긍정적인 사고라는 서양의 심리학 용어가 한국의 온정주의와 동일시되어, 과거에 비해 학업성적이 형편없이 저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생활기록부의 점수는 화려하다 못해 황홀하다. 최소한의 공중도덕도 안 지키고 입만 열만 욕을 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학생들의 행동발달상황은 '긍정적인 말' 일색이다.

대학에 보내는 추천서만 보면 어떤 학생도 지상의 아이가 아니다. 어쩌다 실수하여 옥황상제에게 미움받아 잠시 지상에 내려온 선녀이다. 천사이다. 이걸 교육부는 최신 서양 이론이라며 지엄하게 공문서로 지시한다.
--긍정적으로 쓰시오.

정말 조직적으로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초기 3년간 가난한 학생을 위하고 과외를 없애고 학교 수업을 정상화한다며, 평가의 기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강요한 '물수능'도 실은 조직적인 거짓말 가르치기였다. 온정주의를 학력에까지 뻗친 것이다. 유급 제도도 온정주의 때문에 폐지된 지 까마득한 옛날이다. 고3 과정을 마친 학생들에게 대부분 고1 수준의 문제를 내고는 '참 잘 했어요.'를 연발했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정상화한다면서 입시 공부를 내팽개치다시피 하니까, 사교육은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고 시험 자체의 변별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지만, 정부는 과도기라서 그렇다며 언론과 여론을 개탄하고 수능은 상위권 학생만을 위한 게 아니라고 친절하게 주석까지 달아 주었다. 제발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며 혀를 찼다.

내신도 심각하다. 절대 평가라는 잣대를 교육부에서 허용하는 순간, 일선학교는 점수 올려 주기에 혈안이 되었다. 사전에 시험 내용을 거의 알려 주다시피 한다. 평균 점수가 썩 낮으면 난리가 난다. 그런 출제자는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교사는커녕 인간 대접도 못 받는다. 현실을 모르는 아주 부정적인 인간이라고. 시험 시간에 안 알려 주었다 뿐이지, 사실은 조직적인 부정행위에 다 함께 가담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본고사 있을 때는 명문고에서는 평균 60점이면 서울대에 합격했지만, 지금은 3개 학년 전과목이 '올 수'가 되어도(평균으로 따지면, 이럴 경우 98점은 되어야 함), 최근에 다시 어려워졌다고 해 봐야 왕년의 서울대 본고사에 대면 문제도 아닌 수능에서 100점 환산 평균 70점도 못 맞는 학생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서울대 신입생도 수학과 영어를 특별히 학교 차원에서 과외를 안 시킬 수가 없는 실정이다. 내신 위주로 뽑는 수시모집 합격생들의 학력은 심각한 수준에 있다. 다 그런 건 물론 아니지만, 그들 중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머리를 거의 쓰지 않고 기계처럼 반복하는 인내력만 강하면 환상적으로 잘 볼 수 있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행평가의 득점기계이다.

정직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모두가 바보가 된다. 긍정적이란 말속에 들어있는 부정적이란 말의 독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서양에서 쓰는 의미와 전혀 다르다. 이제라도 긍정이 정직과 결합되지 못하면, 한 사회나 국가에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과 정직으로 나라 안팎에서 신용을 쌓아가야만 하는데, 미래 신용사회의 주역이 될 학생들에게 거꾸로 가르치고 있으니, 장차 이 나라가 어찌될지 눈앞이 캄캄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긍정과 온정주의를 구별 못하고, 긍정과 정직을 구별 못하여 곳곳에서 위선과 거짓을 조장하고 있다. 전혀 국제 사회에서 살아가지 못할 나라로 만들고 있다.

[투명성과 가장 거리가 먼 집단은 정당]

외환위기 이후 기업은 회계장부가 획기적으로 투명해지고 있지만, 서양의 긍정과 한국의 온정주의가 결별하고 나날이 정직해지고 있지만, 정치 집단은 전혀 그렇지 않다. 투명성과 가장 거리가 먼 집단이 정치 집단이다. 정책 결정 과정이든 정치자금 모금 과정이든 그 사용이든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정당은 단 한 치도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엉망인 회사의 회계장부도 정당의 회계장부에 비하면, 아침이슬처럼 영롱하다.

그러나 권력의 정상에 선 정치인들(야당 의원도 막강하여 국제적인 대기업도 은밀히 사과 상자를 안 보낼 수 없다)은 입만 열면 경제계를 통타하고 노동자를 질타하고 금융계를 난타한다. 뒷거래는 자기들이 다해놓고.
애국과 애족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투명성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다. 더하여 이제 조국통일까지 독점하려고 한다.
한국의 정당이 조직 폭력단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그보다 못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조폭은 그나마 의리 하나는 끝내 주는데, 한국의 정당은 이제 의리마저 쓰레기통에 처박았으니. 조폭 영화가 뜨는 이유가 있다.

전에는 최소한 집권하면, 월등한 정보력으로 야당을 얼마든지 궁지에 몰아 넣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뒤가 구린 것도 있고 하여 정치인끼리의 '의리'를 지켜 주었지만, 이제 그런 최소한의 '의리'도 없다. '떡밥 이론', '닭서리 이론', '10분의 1 이론'을 앞세우고 '검찰 독립'을 뒤세워 야당만이 아니라 여당도 조사한다면서 상대적인 긍정적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으려고 전력을 기울인다. 90%의 부정(야당)과 10%의 부정(여당) 대 10%의 긍정(야당)과 90%의 긍정(여당)이란 이미지를 주도면밀하게 만들어간다.

여야 없이, 한국인의 원형질이라 할 수 있는 흑백론에 입각하여 자기편은 긍정 일색으로 상대편은 부정 일색으로 몰아붙여 국민들의 건전한 상식을 조롱하고 서늘한 비판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다. 사회가 불안할 수밖에 없고 싸늘한 웃음이 방방곡곡 가가호호 넘쳐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불황이라도 술이 잘 안 팔릴 리가 없다.

공멸의 시기가 다가오는지 모른다.
희망의 태양은 아무래도 그 후에 떠오를 것 같다.

(2000.12.19.) (2004.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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