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핵개발 秘史 – 미국의 딜레마, 대만의 딜레마 (2)

미국은 대만의 核 프로그램을 공론화함에 따라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악화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대만 역시 核 개발을 해야 했지만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행동에 나선 IAEA와 미국

1970년대에 들어 대만의 비밀 핵 프로그램에 대한 IAEA와 미국의 우려가 계속 커지기 시작했다. 재처리시설을 비롯한 큰 규모의 핵심 기술을 조달할 경우에는 사전에 쉽게 찾아내 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작은 규모의 기술들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 IAEA는 대만에 대한 사찰 빈도를 늘리고 새로운 폐쇄회로(CC) TV를 설치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였다. IAEA는 대만에 알려지지 않은 핵 관련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거듭 알게 돼 이를 대만에 추궁했다. 대만은 핵 프로그램 신고 과정에서 실수가 생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재처리 과정을 거친 핵물질들이 다른 곳으로 비밀리에 옮겨졌을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IAEA는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핵무기 개발을 위한 핵물질 재처리를 실시한 것은 확인됐지만 어느 시설에서 진행했는지,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핵 기술 보유 국가가 모든 핵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정직하게 신고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정직한 핵 신고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비핵화를 완벽하게 시행하거나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핵화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딜레마

1976년에 들어 미국은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대만이 비밀리에 핵 프로그램 개발을 한다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핵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 개발하고 있는 국가에 있어 최고의 핵심 기밀이다. 미국이 자신들이 수집한 증거를 대만에 들이밀고 추궁을 했을 시 대만은 미국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느냐고 반발할 수 있는 문제이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피하려 했다.

미국이 선택한 방법은 언론에 흘리는 것이었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를 통해 대만의 비밀 재처리 시설과 사라진 핵 물질에 대한 정보를 흘려 이를 대중에 알린 것이다. 미국은 이런 보도가 나온 다음 대만에 공개적으로 추궁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미국 사찰단이 직접 대만을 방문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1977년 초 미국 정부 사찰단은 대만을 방문해 비밀 핵 시설의 실태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사찰단의 핵심 목표는 재처리 된 핵물질이 어떻게 원자로 외부로 옮겨졌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대만은 노르웨이 기술을 접목한 재처리 시설을 사찰단 방문 이전에 폐기시키는 등 샘플 채취를 비롯한 조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대만 정부는 미국 사찰단 접대에 큰 공을 들였다. 남성으로만 구성된 미국 사찰단 침실에 여성 접대부를 보내기까지 했다. 미국 사찰단 누구도 이런 접대에는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찰단은 새로운 사실을 계속 찾아내지 못했으며 걱정은 계속 늘어만 갔다.

당시 미국 사찰단은 실시간으로 대만 당국자들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충격적인 정보도 접했다. 대만 당국자들이 미국 사찰단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야만인들(barbarians who would never find anything)’이라고 불렀으며 ‘공손하게 행동하고 와인과 음식만 대접하면 된다’는 식의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다. 미국 사찰단은 더욱 의욕을 갖고 조사에 나섰고 재처리 된 핵물질이 어디론가 옮겨졌다는 추가 증거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사라진 핵 물질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느 시설에서 재처리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지는 못했다. 

깊어지는 미국의 고민

미국은 대만의 비밀 핵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비밀에 부쳤고 이런 문제를 공개적으로는 대단치 않은 사안인 것처럼 다뤘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대만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었고 미국에 대한 의존도 역시 매우 컸다. 미국에게 대만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 수호를 위한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은 대만의 핵 프로그램을 공론화함에 따라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중국의 군사행동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만은 미국의 원자로 기술과 농축우라늄의 주요 수입국이었다. 만약 대만이 합의에 위반되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미 의회가 대만에 대한 지원을 바로 끊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 미 의회는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을 하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늘리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많은 미국 사람들은 동맹인 대만을 제재한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는 중국에게만 도움이 될 뿐이었다. 이 문제를 비밀에 부침으로써 미국 정부는 여러 곤란한 상황을 피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의회와 대중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돼 핵 확산을 막아내는 데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지미 카터의 등장, 6개 조항의 ‘비밀 합의’

1977년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는 대만에 대한 압박 수위를 크게 늘리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1977년 4월, 6개 조항이 담긴 ‘비밀 합의’에 서명할 것을 촉구했다. 핵심은 대만이 모든 핵 프로그램 시설을 우선 중단하고 미국의 주기적인 사찰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만은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만의 일부 핵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이런 정책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며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대만은 핵심 원자로와 연구소 가동을 중단하는 등 이 비밀 합의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미국이 원자력 및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대만은 이를 이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에 따라 사찰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과거의 재처리 현황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대만의 과거 실험 내역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개발할 능력을 멈추는 데 있었다.

대만의 저항, 장징궈(蔣經國)의 항변

1978년 3월, 미국은 대만이 또 다시 핵 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증거를 포착했다. 레이저동위원소분리(laser-isotope) 방식을 통해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당시 미국은 이런 활동이 열성적인 핵 과학자들 일부의 개인적인 행동인지, 더욱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행동인지 확신을 갖지 못했다.

1978년 여름 미국은 동위원소분리와 관련한 추가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만이 우라늄을 농축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또한 1977년 이뤄진 ‘비밀 합의’에서 레이저동위원소분리와 관련된 내용을 명확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명백한 합의 위반이라고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만은 1978년 여름 미국 사찰단이 방문했을 때 중대한 합의 위반 행위를 하기도 했다. 사찰단 방문에 앞서 중수로 관련 기기(器機)를 숨긴 것이다. 같은 해 9월 미국은 레이저동위원소분리 활동과 관련한 추가 증거를 입수했다. 만약 대만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에 나섰다면 미국으로써는 원자력 협력을 계속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비밀 합의’에 담긴 “(핵) 역량 개발로 이어지는 모든 활동을 중단한다”는 문구를 제시하며 대만이 동위원소분리 활동 역시 멈춰야 한다고 압박했다.

1978년 9월, 레오나드 엉거 당시 대만주재(駐在) 미국 대사는 장징궈 총통을 만나 워싱턴의 이 같은 우려를 전했다. 장징궈는 이날 만남에서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그는 “대만은 핵무기를 만들 의도도 없으며 대만의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고 맞서 싸웠다. 그는 대만은 미국이 모든 시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미국의 정책은 대만의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비판했다. 이어 미국의 이런 강압적인 행동과 태도를 자국민(自國民)들에게 알리지 않아왔다며 만약 알렸으면 반미(反美) 감정이 늘어났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엉거 대사는 카터 대통령이 재처리나 농축에 나선 국가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강화하고 핵 관련 수출을 제한하는 정책을 펼 것이라며 거듭 설득에 나섰다. 이에 장징궈는 “대통령 각하 말씀대로 할 수밖에”라고 대답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엉거 대사는 “장징궈 총통이 여태까지 자신이 봐왔던 것 중 가장 화가나 있었다”고 본국(本國)에 보고했다.

벼랑 끝에 몰린 대만

카터 대통령은 1978년 12월 정치적 폭탄 선언을 했다. 미국과 대만의 상호방위조약을 1년 안에 폐기하고 중국과 관계정상화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대만은 이런 발표 내용을 24시간 전에야 알게 됐다.

대만은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핵무기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신문(新聞)에 공개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대만 내 매파들은 방위조약이 폐기됐으니 대만도 핵무기 개발에 나설 정당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대만은 당시 작은 규모의 핵무기 몇 개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의 플루토늄을 생산한 상황이었다. 미국 전문가들은 대만이 2년 안에 첫 번째 핵무기를 비밀리에 만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당국자들은 이런 결정으로 인해 대만이 비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하는 미국의 지렛대가 약화됐다는 점을 훗날 인정했다.

(계속)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