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셴이(張憲義) 일가족 대만 탈출 후 美 대만에 ‘핵 폐기’ 최후통첩

대만의 핵개발 秘史 (4) – 하오보춘 “치욕을 삼킬 수밖에…” vs 장셴이 “난 祖國을 배신한 게 아니라 전쟁을 막으려 한 것”

장징궈(蔣經國) 병세 악화

1987년에 들어 미국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생겼다. 우선 하나는 대만이 비밀 재처리 시설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대만의 정치 상황이었다. 장징궈 총통의 병세는 계속 악화돼 갔다.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아들이나 형제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리덩후이(李登輝) 당시 부총통이 권력을 승계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미국에게는 이 역시 고민거리였다.

미국은 리덩후이가 장개석이나 장징궈와 비교해 덜 강경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문제는 리덩후이가 대만의 핵 프로그램을 총괄해왔던 하오보춘 참모총장을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리덩후이는 대만 핵 프로그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적도 없었다. 미 정보당국은 하오보춘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 비핵화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장징궈의 사후(死後) 핵무기 프로그램을 누가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리고 재처리 시설을 비롯한 대만의 핵 프로그램 진전. 미국은 대만의 핵 프로그램의 뿌리를 뽑아버리기로 결정했다.

장셴이(張憲義) 미국으로 망명

미국 CIA는 장셴이(張憲義)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을 통해 대만의 비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계속 확인했다. 비밀 재처리 시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대만 정부에 사찰하겠다는 요청을 하지 못한 이유는 장셴이의 꼬리가 잡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대만 핵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기 전에 장셴이를 우선 미국으로 탈출시키기로 결정했다.

미 CIA는 1987년 중반, 다시 한 번 장셴이에 대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실시했다. 그가 이중 간첩이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즈음 장셴이를 관리하던 ‘마크’라는 이름의 CIA 요원은 장셴이에게 미국에 있는 회사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어떤 회사인지,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장셴이는 자신의 아내와 두 명의 아들, 그리고 한 명의 딸 모두 함께 갈 수 있다면 미국으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마크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장셴이의 부인은 미국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들떴다. 그녀는 그의 남편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대만 軍 관계자들은 사전 허가 없이 해외로 떠나지 못했다. 장셴이는 우선 그의 가족들에게 휴가를 떠나자고 말한 뒤 1988년 1월 8일 먼저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로 보냈다. 이후 그는 원자력연구소에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며 1월 12일에 돌아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날 장셴이는 마크 요원과 함께 안가(安家)에서 머물렀고 다음날 가오슝 공항에서 홍콩을 경유해 미국 시애틀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도쿄에 도착한 장셴이의 부인과 가족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미쓰 리’라고 불린 여성은 남편으로부터의 편지라며 이를 張의 부인에게 전달했다. 훗날 공개된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 대만에 있고 회사에서는 가오슝에서 홍콩으로 떠나는 비행기편을 마련했습니다. 홍콩에서 유나이티드 항공을 타고 시애틀로 갈 것이니 시애틀에서 만납시다. 미쓰 리의 지시를 잘 따라줘요.” 미쓰 리는 중국 본토 사람이었다. 張의 가족은 일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이틀 뒤 시애틀로 떠났다.

장셴이는 1월 9일 시애틀에 도착했고 다음날 가족과 재회(再會)했다. 張의 가족은 1988년 1월 12일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최종 도착했다. 다음날인 1988년 1월 13일, 장징궈 총통이 토혈(吐血)한 뒤 숨을 거뒀다. 어떤 이는 장셴이의 탈출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같은 날 리덩후이 부총통이 총통 대리직을 맡는 선서를 했다.

충격에 빠진 대만, 최후통첩에 나선 미국

하오보춘 참모총장은 장셴이의 미국 망명 소식을 듣게 됐으나 그가 처음부터 포섭돼 있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1988년 1월 17일에 쓴 일기 내용이다.

<장셴이 원자력연구소 부소장과 그의 가족이 미국으로 도망쳤다. 美 CIA에 이용당해 원자력연구소가 핵 연구 활동을 재개했다는 정보를 넘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대만의 정책은 핵무기를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만들 역량을 보유하는 것이다. 중산과학연구원 부원장 예창둥(葉昌桐)에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다룰 것을 지시했다.>

하오보춘은 장셴이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CIA 공작의 일원이었고 미국이 대만을 비핵화하는 행동에 나서기 직전에 이런 망명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됐다.

장셴이는 1월 16일 워싱턴에서 단교 이후 설립된 비공식 외교기구 미재대협회(美在臺協會, AIT) 데이비드 딘 대표를 비롯한 레이건 행정부 관료들과 만났다. 딘 대표는 이날 장셴이에게 하오보춘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리덩후이 총통이 실권을 잡지 못할 가능성과 하오보춘의 핵 개발 욕심을 우려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장셴이는 하오보춘을 축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며 핵무기 프로그램과 ‘노하우’ 이전을 막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셴이는 또한 하오보춘이 이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라면서도 미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을 넘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치욕을 삼킬 수밖에…”

딘 대표는 1월 20일 하오보춘을 만나 최후통첩을 했다. 하오보춘의 일기에 따르면 딘 대표는 “원자력연구소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모든 기기들을 파괴하고 대만연구용원자로에 있는 모든 중수로를 빼내 이 원자로가 다시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은 대만의 평화로운 원자력 사업에 협조할 마음이 있지만 이런 협력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딘 대표는 이날 하오보춘에 비밀 핵 관련 시설들에 대한 위성 사진 등 증거도 들이밀었다.

하오보춘은 이날 일기에서 미국이 협상이 불가능한 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이 사건은 대만과 미국의 관계에 중대한 사안이다.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모든 기기를 완전하게 파괴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동의한다. 이런 의사를 리덩후이 총통에게 전달할 계획이다”고 기록했다. 대만에게 주어진 서명 시한은 7일이었지만 최종시한 이전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2월 24일 하오보춘은 장셴이가 CIA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을 드디어 알게 됐다. 하오보춘의 그날 일기다.

<장셴이의 탈출은 CIA가 계획한 불법적인 행동이다. 이는 대만에 수치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대만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런 치욕을 삼키고 지나간 일로 할 수밖에 없다.>

비핵화에 나서게 된 정확한 의사 결정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우선 미국 정부는 리덩후이 총통 측에 대만의 민주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군부에 쏠려 있던 힘을 민간으로 돌리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설명이다. 또한 1988년 당시 원자력 발전이 전체 대만의 전기 생산에 차지하는 비율은 45%에 달했다. 대만은 미국을 비롯한 외부로부터 농축 우라늄 등을 공급받아야 하는 등 외부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미국이 이를 모두 막기로 결정했다면 타격이 매우 컸을 것이다.

비핵화에 나선 대만

대만은 1988년 1월에 바로 대만연구용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 또한 3월에는 20톤 넘는 중수로를 빼내 미국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미국은 이런 중수로를 100개의 드럼통에 담도록 했다. 또한 각 드럼통의 무게를 철저히 측정하고 미국 에너지부의 도장을 받도록 했다. 6월 9일 100개의 드럼통이 대만을 떠나 7월 11일 미국 사바나강(사우스 캐롤라이나주州에 위치한 미국 핵 시설)에 도착했다. 사용 후 핵연료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대만은 과거 1970년대 미국의 비핵화 압박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철저하게 협조했다. 대만 정부는 원자로 폐기의 이유는 경제적 문제 때문이라고 연구원과 과학자들을 설득했다. 중산과학연구원과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은 과거와 다른 폐기 절차 진행 속도에 매우 놀랐다. 이들 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일생의 사업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미국은 비핵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확인했고 대만이 정말 선을 넘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미국은 더욱 더 비핵화에 박차를 가했고 대만은 과거처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미국은 대만의 핵 시설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모든 핵심 부품과 기기들을 시설의 지하로 이동시켰다. 그런 뒤 콘크리트로 지하를 덮어버리기로 했다. 지하를 콘크리트로 덮는 데는 콘크리트 트럭 50대가 동원됐다. 당시 대만의 콘크리트 생산량 거의 전부가 사용됐다고 한다.

IAEA도 동원돼 사찰과 비핵화 검증 과정을 거쳤다. 당시 IAEA는 이라크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핵 확산 문제가 불거지자 검증 체계를 더욱 강화했다. 대만은 IAEA가 요구하는 내용을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과거처럼 IAEA와 미국 모르게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장셴이는 배신자인가 애국자인가?

하오보춘은 장셴이를 민족 반역자라 칭했다. 또한 지명수배를 내렸으며 시효는 2000년에서야 종료됐다. 대만 일각에서는 그를 아직도 배신자로 보고 있다.

장셴이는 자신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중국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전쟁이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핵무기가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장셴이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과 일하기로 한 나의 결정은 대만을 배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의 의도는 이와 반대이며 대만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고 평화와 안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내가 배반한 유일한 사람들은 위험한 군사행동을 감행하고 대만 주민들의 이익을 무시한 군부 강경파들이다.>

장셴이는 CIA가 마련한 워싱턴 DC 인근 버지니아州에 있는 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망명 직후인 1988년 3월 23일 뉴욕타임즈가 장셴이라는 인물을 실명(實名)으로 다루는 특종 보도를 했다. 대만 기자들도 장셴이의 위치를 찾아내 끊임 없이 인터뷰 신청을 했다. CIA는 1990년 그를 아이다호州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대만 정보요원들이 암살에 나설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만 군부 인사들은 대만에 거주하고 있는 張과 부인쪽 친척들을 계속 찾아 다녔다. 장셴이에 따르면 이들은 가족들을 만나 정보원 활동이나 탈출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캐물었다. 딘 대표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하오보춘을 만나 대만이나 대만 외부에 있는 장셴이의 가족에 접근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만약 접촉할 시에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딘 대표는 하오보춘에게 장셴이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흘려도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장셴이 가족들에 대한 대만 군부의 방문은 이후 없어졌다. 하오보춘은 이듬해 행정원 국방부장, 이후 행정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으며 사실상 군부의 통제권을 잃게 됐다.

장셴이는 1989년부터 2013년까지 아이다호 국립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원래 사용하던 이름을 유지했지만 시민권을 받은 1989년에 영어 이름 ‘Gray’를 추가했다. 그레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회색(灰色)이라는 뜻도 있다. 장셴이는 탈출 이후 한 번도 대만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공소시효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불안하다고 한다.

장셴이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미국에 오게 됐는지, 무엇을 한 사람인지를 뒤늦게야 알았다. 장셴이는 2016년 12월 회고록을 통해 대만 비핵화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소개했다. 이런 책이 나온 뒤에야 자식들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2017년 1월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번역 소개한다.

<아버지께,

저는 우리가 어떻게 미국에 왔는지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책이 나오고 언론 보도가 이어지자 어떤 일이 생겼는지에 눈을 뜨게 됐고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오랜 세월 정말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뎌내셨네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는 저의 영웅이라는 점이에요.

많은 부정적인 반응들을 접하는 게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압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족뿐만 아니라 대만을 위한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평안을 찾기를 바라며 후회 없이 인생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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