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는 사례이다. 우선 남아공은 핵무기를 실제로 보유했었고 이런 국가가 비핵화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더욱 시사점이 많다.
차이점은 남아공(南阿共)의 경우는 보유했던 핵무기의 수가 6개 정도에 불과했다. 한국 통일부는 북한의 핵무기 수가 최대 60개에 달한다고 최근 밝힌 바 있다. 남아공의 경우, 국제사회가 직접 핵무기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남아공이 자체적으로 폐기한 것을 국제사회가 나중에 검증했다는 점이 북한 비핵화와는 다른 점이다. 남아공 사례의 특징은 미국의 우방국이었던 남아공조차도 처음부터 핵 신고에 투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대만 핵개발 당시에도 볼 수 있었다. 남아공이나 대만이 투명한 핵 신고에 나서고 국제사회가 이를 신뢰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북한과 같은 나라가 진심으로 핵 신고에 나설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들 나라의 사례를 예로 든다. 실제로 핵무기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한 국가가 갖고 있는 최고급 기밀 사안이며 제재와 압박, 혹은 협박으로 이를 쉽게 포기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미국의 저명한 핵 과학자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씨는 남아공의 핵개발부터 비핵화까지의 과정을 소개한 책(Revisiting South Africa’s Nuclear Weapons Program)을 지난 2016년에 출간했다. 그는 남아공과 미국의 당국자 및 과학자, 그리고 기밀 해제된 문서 등을 토대로 당시 사례를 추적했다. 북한이 비핵화에 나선다면 참고가 될 수 있는 남아공의 비핵화 이야기를 소개한다.
英-美의 우라늄 보고(寶庫), 父子의 숙명(宿命)
남아공의 핵 관련 역사는 세계 열강들이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찾아 나섰던 2차 세계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4년 영국은 한때 식민지였던 남아공 정부에 매장된 우라늄이 있는지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남아공은 조사를 거친 뒤 자국(自國) 내 금광 여러 곳에서 우라늄이 발견됐다고 보고했다. 남아공 핵 프로그램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런 우라늄 판매 과정은 시작 당시에는 총리실에서 직접 관리했으나 1948년에 원자력위원회(AEB) 설립 이후 공식적인 국가사업이 됐다. 1952년 남아공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규모의 우라늄 추출 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건설됐다. 이곳에서 추출된 우라늄은 핵무기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던 미국과 영국에 판매됐다.
1950년대에 들어 남아공 정부는 우라늄을 단순히 판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아공만의 원자력 개발에 나서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56년 11월, 원자력위원회는 앰피 루(Ampie Roux)라는 과학연구소위원회의 고위 당국자를 영입해 핵 프로그램 연구와 개발 계획 초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들은 중수로 생산 과정 등 원자력 개발을 위한 필요한 과정 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루는 약 1년 반 동안 초안 작성에 나섰고 1958년 6월, 해당 초안을 원자력위원회에 전달했다. 이 계획의 목표는 “남아공이 핵 원자력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역내(域內) 현안에서 해외의 영향으로부터 최대한 독립적인 국가가 되자”였다. 1959년 1월 당시 광공업부 장관인 요한 데 클레르크(Jan de Klerk)가 이런 계획이 내각 회의에서 최종 통과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해당 계획을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요한 데 클레르크 장관은 1989년 대통령에 당선돼 남아공 비핵화를 이끈 프레드리크 데 클레르크 前 대통령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핵 개발 계획 발표를, 아들은 훗날 완성된 핵 프로그램의 폐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논의는 끝났다. 이제는 행동에 나설 때”
원자력위원회는 사무실이 있는 행정수도 프리토리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원자로 시설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안전하면서도 인구 밀집 지역, 즉 대학이나 산업시설과 멀지 않은 장소를 물색했다. 또한 수도와 전기 공급이 안정적인 지역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프리토리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펠린다바(Pelindaba)’라는 지역을 원자력 개발의 시작 지점으로 선택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펠린다바라는 이름의 어원(語源)까지 찾아볼 정도로 장소 선택에 신중했다. 확인 결과 펠린다바는 ‘끝났다’라는 뜻의 ‘펠리’와 ‘위원회’라는 뜻의 ‘인다바’라는 아프리카語의 조합이었다. 연구 개발의 총책을 맡은 앰피 루는 이보다 좋은 지명은 없다고 판단했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논의는 끝났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루는 이 지역을 최종 선택한 뒤 “논의는 충분히 했으니 이제 행동에 나설 때”라고 말했다.
핵 기술 개발에 나선 남아공은 기초 기술 확보 부분에 있어 미국과 영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또한 과학자들을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에 유학을 보내는 등 기술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캐나다와 프랑스, 네덜란드, 서독 등 국가에도 과학자들을 보내 교육시켰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실질적인 원자로 부품과 관련 기술, 중수로 생산 기술을 얻게 됐다.
1960년대 초에 들어 남아공은 우라늄 농축에 나서기 시작했다. 남아공은 자체적인 우라늄 농축까지 나서게 되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비밀리에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 가격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 당시 우라늄 농축 프로젝트는 실패했으나 남아공은 이 경험을 통해 원자로 기술 전반을 비롯해 훗날 남아공 핵기술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되는 플루토늄과 삼중수소 등의 원리를 터득했다.
남아공은 1969년에 들어 우라늄 농축이 아닌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운하 건설 등 비(非)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이른바 ‘평화적 핵폭발(PNE)’ 기술 개발을 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 등이 이런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으며 핵확산금지조약(NPT) 역시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라고 하더라도 폭발 규모와 관리 등 까다로운 규정을 따르면 PNE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