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만은 국민투표를 통해 탈원전 계획 폐기 결정을 내렸다. 이후 대만의 원자력 기술과 관련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만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핵무기 보유 문턱까지 갔던 국가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미국에서 발간된 ‘대만의 과거 핵무기 프로그램(Taiwan's Former Nuclear Weapons Program: Nuclear Weapons On-Demand)’이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됐다. 책의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핵 전문가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씨 등이다. 올브라이트 씨는 대만 핵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장셴이(張憲義) 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과의 인터뷰, 그리고 최근 공개된 과거 기밀 문서들을 토대로 책을 집필했다. 대만이 왜 핵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어떤 이유로 핵을 포기하게 됐는지가 자세히 설명된 책이다.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대만의 핵개발 역사를 소개한다.
대만에 배치된 첫 핵무기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은 1949년 모택동이 이끈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뒤 탈출해 대만에 자리잡았다. 이후 미국은 중국과의 갈등 확대를 우려해 중국과 대만간 정쟁(政爭)에 직접적인 개입은 피하려 했다. 1950대에 들어 중국의 도발이 늘어나게 됐고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중국 본토에 핵무기를 투하하는 방안까지 고려했다. 이후 미국은 대만을 공산당과의 싸움의 최전선으로 보게 됐고 1960년 미국의 핵무기를 대만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십여 개의 핵무기를 대만에 배치했다. 이후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에도 핵무기 수는 계속 늘어나 1967년 린든 B. 존슨 대통령 임기 중에는 200개까지 증가했다. 그런 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의 외교 관계 개선에 중점을 뒀으며 1974년 미국은 대만에 있던 모든 핵무기를 철수시켰다.
1950년대부터 핵을 원한 대만
1958년 대만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이라는 기조 하에 원자력 발전소 개발에 관심을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 대만의 정책을 평화를 위한 원자력 개발로 봐왔지만 비밀리에 핵무기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대만이 본격적으로 핵무기에 나선 이유는 중국의 핵 개발 때문이다. 1964년 10월 중국은 첫 번째 핵무기 실험을 실시했고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1960년부터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핵 관련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핵 개발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은 중국의 침략을 막고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대만에 하며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하지만 장개석 등 대만 지도자들은 미국의 이런 약속만을 믿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공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장개석은 중국의 핵무기 한 발이면 대만이 사라져버릴 수 있고, 미국이 보복을 한다고 해도 이는 너무 늦은 일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핵개발 7주년 계획
장개석 총통은 1966년 국방부 산하의 중산과학연구원에 핵무기 개발 계획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신주(新竹) 계획’이라고 불린 이 계획에는 5~7년 이내에 중수로 원자로와 중수로 생산 시설, 그리고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조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당시 계획된 시설 중 일부는 이스라엘의 핵무기 시설과 거의 비슷했다는 점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갓 핵무기 개발에 나섰고 첫 번째 핵무기 생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대만은 비밀리이기는 하지만 국가 사업 차원에서 국내외 핵 전문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다른 국가에서 유학하는 대만인들을 국내로 불러들이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많은 핵 전문가들 역시 정부의 핵 개발 계획에 동의하지 못했다.
원자로(原子爐) 조달의 어려움
대만은 당시 원자력 개발을 평화로운 목적이라고 강조했으나 미국을 중심으로 핵 확산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대만이 핵개발에 나서게 되면 중국과의 갈등이 고조돼 자칫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만은 독일 등 다른 국가로부터 원자로와 핵심 기술을 수입하려 시도했다. 1966년 중반 대만은 당시 서독(西獨)의 지멘스社와 50mw 중수로 구입 계약을 거의 마무리까지 진행했다. 당시 대만주재(駐在) 미국 대사관은 본국(本國)에 “대만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기로 결정했을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후 1965년 3월 미국은 지멘스와 대만의 계약에 대해 알게 됐고 서독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멘스가 원자로를 대만에 판매하게 되더라도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중국이 괜히 의심을 하게 돼 불필요한 갈등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서독은 이 거래를 계속 진행할지 여부에 대한 미국의 최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원자로를 구입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반발이 심하며 무리하게 추진했을 시 군사목적의 핵 개발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 계약을 포기했다. 그 후 캐나다로부터 원자로를 구입하는 대안을 강구해냈으며 1969년에 들어 캐나다에서 만든 40mw 중수로 원자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해당 원자로의 이름은 ‘대만연구용원자로’였다.
혼란의 1970년대
대만은 원자로 도입 이후 무기화를 위한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찾기 시작했다. 방법은 해외로부터 완전한 재처리시설을 수입하거나 외부로부터 배워온 기술을 통해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자체적으로 재처리에 나서는 방안 등 크게 두 가지였다.
당시 대만은 미국과 독일, 프랑스, 벨기에의 회사들로부터 제대로 된 재처리기술을 수입하려 하는 등 더욱 공격적으로 핵개발에 나섰다. 미국 정부는 대만이 대규모 재처리기술 수입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했지만 자체적으로 키워간 소규모 재처리 기술 관련 움직임을 놓쳤다. 실제로 1971년 4월 국무부 문서는 “대만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갖고는 있지만 인력과 재원 낭비”라고 평가했다.
1971년 10월 25일, 대만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중국에 뺏겼다. 장개석은 이런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고 중국에 대한 핵 억제력을 갖는 것만이 대만이 가진 최선의 선택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후 장개석은 5~7년 안에 핵개발에 나선다는 과거 신주계획보다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타오위안(桃園) 계획’을 추진했다. 핵무기에 사용될 수 있는 핵물질을 7~15년 이내에 만들겠다는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대만 핵 전문가들은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에 핵 기술을 보유한 회사들을 찾아 다니며 기술을 수입하고 배우는 데 총력을 다했다.
이후 대만은 캐나다로부터 원자로 기술을 들여왔고 중산과학연구소 기술을 이용해 플루토늄으로 알려진 방사성동위원소-239 추출에 성공했다. 이후 1973~1974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마침내 100t 규모의 우라늄을 구입하게 된다. 놀랍게도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대만에 들어가는 우라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규제를 두지 않고 있었다. 대만은 독일 한 회사로부터도 소량의 우라늄을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늘어나는 미국의 압박
미국은 계속 대만의 핵개발이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점차 대만의 핵 기술이 늘어나고 있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미국은 압박 수위를 늘렸다. 강격책 없이는 대만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핵심 군수물자 배송을 지연하거나 취소하고 군사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대만은 겉으로는 미국에 따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뒤에서는 계속 기술 개발에 나섰다.
미국 정보당국은 점점 더 대만의 핵 역량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1976년 당시 “대만이 전술 비행기 외부에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핵무기를 2년이면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미 정보당국과 의회를 중심으로 대만의 핵 개발 우려가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자신들의 대만 핵 확산 방지 정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점점 인정하기 시작했다.
핵개발의 핵심 역할 맡은 유학파들
대만 핵개발의 핵심 역할을 맡은 사람은 1988년 미국으로 망명한 장셴이(張憲義)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다. 그는 대만 핵개발의 책임자이자 육군 대령 출신이며 훗날 CIA에 포섭된 사람이다. 장셴이는 대만 국립칭화대학에서 수학한 뒤 중산과학연구원 연구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의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고 플루토늄 연구에 집중했다. 원자력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대만 과학자들은 핵무기 프로그램과 민감한 기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야 한다는 임무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만약 이런 행동으로 붙잡히게 된다면 대만 정부는 이들의 존재를 모른 척할 것이라는 내용도 사전에 숙지했다. 장셴이는 대만 정부가 교환학생을 보낼 때 짝으로 보냈으며 서로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장셴이는 1972년부터 1976년까지 테네시 대학교에서 원자력 공학 박사 학위를 마친 뒤 귀국했다.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984년부터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행동에 나선 IAEA와 미국
1970년대에 들어 대만의 비밀 핵 프로그램에 대한 IAEA와 미국의 우려가 계속 커지기 시작했다. 재처리시설을 비롯한 큰 규모의 핵심 기술을 조달할 경우에는 사전에 쉽게 찾아내 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작은 규모의 기술들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 IAEA는 대만에 대한 사찰 빈도를 늘리고 새로운 폐쇄회로(CC) TV를 설치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였다. IAEA는 대만에 알려지지 않은 핵 관련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거듭 알게 돼 이를 대만에 추궁했다. 대만은 핵 프로그램 신고 과정에서 실수가 생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재처리 과정을 거친 핵물질들이 다른 곳으로 비밀리에 옮겨졌을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IAEA는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핵무기 개발을 위한 핵물질 재처리를 실시한 것은 확인됐지만 어느 시설에서 진행했는지,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핵 기술 보유 국가가 모든 핵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정직하게 신고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정직한 핵 신고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비핵화를 완벽하게 시행하거나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핵화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딜레마
1976년에 들어 미국은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대만이 비밀리에 핵 프로그램 개발을 한다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핵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 개발하고 있는 국가에 있어 최고의 핵심 기밀이다. 미국이 자신들이 수집한 증거를 대만에 들이밀고 추궁을 했을 시 대만은 미국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느냐고 반발할 수 있는 문제이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피하려 했다.
미국이 선택한 방법은 언론에 흘리는 것이었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를 통해 대만의 비밀 재처리 시설과 사라진 핵 물질에 대한 정보를 흘려 이를 대중에 알린 것이다. 미국은 이런 보도가 나온 다음 대만에 공개적으로 추궁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미국 사찰단이 직접 대만을 방문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1977년 초 미국 정부 사찰단은 대만을 방문해 비밀 핵 시설의 실태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사찰단의 핵심 목표는 재처리 된 핵물질이 어떻게 원자로 외부로 옮겨졌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대만은 노르웨이 기술을 접목한 재처리 시설을 사찰단 방문 이전에 폐기시키는 등 샘플 채취를 비롯한 조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대만 정부는 미국 사찰단 접대에 큰 공을 들였다. 남성으로만 구성된 미국 사찰단 침실에 여성 접대부를 보내기까지 했다. 미국 사찰단 누구도 이런 접대에는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찰단은 새로운 사실을 계속 찾아내지 못했으며 걱정은 계속 늘어만 갔다.
당시 미국 사찰단은 실시간으로 대만 당국자들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충격적인 정보도 접했다. 대만 당국자들이 미국 사찰단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야만인들(barbarians who would never find anything)’이라고 불렀으며 ‘공손하게 행동하고 와인과 음식만 대접하면 된다’는 식의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다. 미국 사찰단은 더욱 의욕을 갖고 조사에 나섰고 재처리 된 핵물질이 어디론가 옮겨졌다는 추가 증거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사라진 핵 물질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느 시설에서 재처리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지는 못했다.
깊어지는 미국의 고민
미국은 대만의 비밀 핵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비밀에 부쳤고 이런 문제를 공개적으로는 대단치 않은 사안인 것처럼 다뤘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대만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었고 미국에 대한 의존도 역시 매우 컸다. 미국에게 대만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 수호를 위한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은 대만의 핵 프로그램을 공론화함에 따라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중국의 군사행동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만은 미국의 원자로 기술과 농축우라늄의 주요 수입국이었다. 만약 대만이 합의에 위반되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미 의회가 대만에 대한 지원을 바로 끊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 미 의회는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을 하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늘리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많은 미국 사람들은 동맹인 대만을 제재한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는 중국에게만 도움이 될 뿐이었다. 이 문제를 비밀에 부침으로써 미국 정부는 여러 곤란한 상황을 피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의회와 대중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돼 핵 확산을 막아내는 데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지미 카터의 등장, 6개 조항의 ‘비밀 합의’
1977년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는 대만에 대한 압박 수위를 크게 늘리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1977년 4월, 6개 조항이 담긴 ‘비밀 합의’에 서명할 것을 촉구했다. 핵심은 대만이 모든 핵 프로그램 시설을 우선 중단하고 미국의 주기적인 사찰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만은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만의 일부 핵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이런 정책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며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대만은 핵심 원자로와 연구소 가동을 중단하는 등 이 비밀 합의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미국이 원자력 및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대만은 이를 이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에 따라 사찰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과거의 재처리 현황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대만의 과거 실험 내역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개발할 능력을 멈추는 데 있었다.
대만의 저항, 장징궈(蔣經國)의 항변
1978년 3월, 미국은 대만이 또 다시 핵 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증거를 포착했다. 레이저동위원소분리(laser-isotope) 방식을 통해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당시 미국은 이런 활동이 열성적인 핵 과학자들 일부의 개인적인 행동인지, 더욱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행동인지 확신을 갖지 못했다.
1978년 여름 미국은 동위원소분리와 관련한 추가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만이 우라늄을 농축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또한 1977년 이뤄진 ‘비밀 합의’에서 레이저동위원소분리와 관련된 내용을 명확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명백한 합의 위반이라고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만은 1978년 여름 미국 사찰단이 방문했을 때 중대한 합의 위반 행위를 하기도 했다. 사찰단 방문에 앞서 중수로 관련 기기(器機)를 숨긴 것이다. 같은 해 9월 미국은 레이저동위원소분리 활동과 관련한 추가 증거를 입수했다. 만약 대만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에 나섰다면 미국으로써는 원자력 협력을 계속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비밀 합의’에 담긴 “(핵) 역량 개발로 이어지는 모든 활동을 중단한다”는 문구를 제시하며 대만이 동위원소분리 활동 역시 멈춰야 한다고 압박했다.
1978년 9월, 레오나드 엉거 당시 대만주재(駐在) 미국 대사는 장징궈 총통을 만나 워싱턴의 이 같은 우려를 전했다. 장징궈는 이날 만남에서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그는 “대만은 핵무기를 만들 의도도 없으며 대만의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고 맞서 싸웠다. 그는 대만은 미국이 모든 시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미국의 정책은 대만의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비판했다. 이어 미국의 이런 강압적인 행동과 태도를 자국민(自國民)들에게 알리지 않아왔다며 만약 알렸으면 반미(反美) 감정이 늘어났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엉거 대사는 카터 대통령이 재처리나 농축에 나선 국가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강화하고 핵 관련 수출을 제한하는 정책을 펼 것이라며 거듭 설득에 나섰다. 이에 장징궈는 “대통령 각하 말씀대로 할 수밖에”라고 대답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엉거 대사는 “장징궈 총통이 여태까지 자신이 봐왔던 것 중 가장 화가나 있었다”고 본국(本國)에 보고했다.
벼랑 끝에 몰린 대만
카터 대통령은 1978년 12월 정치적 폭탄 선언을 했다. 미국과 대만의 상호방위조약을 1년 안에 폐기하고 중국과 관계정상화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대만은 이런 발표 내용을 24시간 전에야 알게 됐다.
대만은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핵무기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신문(新聞)에 공개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대만 내 매파들은 방위조약이 폐기됐으니 대만도 핵무기 개발에 나설 정당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대만은 당시 작은 규모의 핵무기 몇 개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의 플루토늄을 생산한 상황이었다. 미국 전문가들은 대만이 2년 안에 첫 번째 핵무기를 비밀리에 만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당국자들은 이런 결정으로 인해 대만이 비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하는 미국의 지렛대가 약화됐다는 점을 훗날 인정했다.
CIA의 포섭 작전
대만 핵개발에 핵심 역할을 한 장셴이(張憲義)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은, CIA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 국립칭화대학에서 학부 생활을 했을 때부터였다고 증언했다. 이후 그가 1972년부터 1976년 사이 미국 테네시 대학에서 원자력공학 박사 학위를 받는 과정을 CIA가 계속 지켜봤다고 주장했다. 장셴이는 CIA가 처음 자신에게 접촉한 것은 1975년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CIA의 정보 제공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이듬해 귀국해 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장셴이는 귀국 후 전화 연락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한다. 상대 측은 채용을 하고 싶다며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접근했다고 한다. 이런 연락은 장셴이의 동료들에게도 여러 차례 이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대만 과학자들은 이런 연락의 의도를 의심했고 대부분은 만남 자체를 거절했다.
장셴이가 CIA에 포섭되기 시작한 것은 1981~1982년 사이다. 당시 CIA 요원은 張에게 “미국은 北아시아의 안정을 유지하고 싶고 핵무기는 대만 주민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CIA는 포섭 과정에서 협박을 하거나 돈을 제공하지는 않았으나 안전 보장은 약속했다. 당시에는 미국 시민권을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 씨의 증언에 따르면 “CIA는 임무를 부여하면서도 포섭된 사람들이 이중간첩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중대한 임무를 맡기지는 않았으며 임무의 목적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셴이가 CIA에 완벽하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이다. 그는 “핵 개발이 대만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 이후 장 씨는 CIA의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한 조사를 받으며 정보원이 되는 과정을 밟았다. 1984년 장셴이는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장 씨는 그 때부터 미국으로 망명한 1988년까지 4년간 CIA의 핵심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장셴이는 이후 대만의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프로그램이나 수퍼컴퓨터 기술을 비롯한 핵무기 프로그램 전반에 대한 정보를 미국에 넘겼다. 당시 장셴이는 핵 개발에 있어 강경파로 분류됐기 때문에 그의 상관들도 그를 믿고 얘기를 나눴다. 장 씨는 자신의 행동이 조국을 위한 배반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대만의 추가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나의 인생과 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을 감수했다”고 회고했다. CIA는 장셴이를 최고이자 완벽한 정보원으로 평가했다.
美-中 수교 후 兩國이 대만 핵개발 정보 공유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1970년대 미-중 관계정상화 이후 양국이 대만 핵개발과 관련해 정보를 공유한 사실이다. 당시 미국 정보당국은 중국이 대만 핵개발과 관련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중국은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고 미국의 정보 수집 작전을 도왔다.
미국 정보요원들은 1975년부터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에게 대만 핵 개발에 대응하는 데 있어 중국과 협력하는 게 좋을 수 있다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과 미국 요원들은 오페라 공연이 열리는 곳에서 만나 대만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고 한다.
군부 강경파의 부상(浮上)
중국과 대만 사이의 갈등은 핵 문제로 인해 1980년대에도 계속 고조(高潮)돼 갔다. 대만 국방부는 1980년 12월에 들어 대만은 절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미국 정보당국은 이런 선언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다 1982년 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이 작성한 보고서가 유출됐다. 당시 보고서는 대만이 작은 규모의 핵무기들을 6개월 이내에 만들 수 있다고 평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6개월이라는 시간은 과장된 면이 있지만 대만이 단기간 내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1980년대에 들어 장징궈 총통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러자 장징궈는 1981년 12월 그의 측근이자 강경파로 분류되는 하오보춘(郝柏村)을 군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인 참모총장직에 오르게 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핵무기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임무까지 부여했다.
대만 군부의 강경파는 1977년 미국과의 비밀 합의 이후, 어떻게 하면 해당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핵 개발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당시 군부는 대만의 원자력 연구가 민간용이라는 사실만 정당화하면 계속 핵 기술 개발에 나서도 합의 위반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의 생각은 ‘핵무기만 만들지 않는다면 핵무기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오보춘은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참모총장을 지내면서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는 방안을 계속 강구했다.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계속 키워나간 것이다. 미국은 하오보춘의 이런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하오보춘은 1980년대 초 여러 나라와 직접 접촉하며 미국에 대한 대만의 핵 의존도를 낮추려고 노력했다. 미국은 이런 상황이 담긴 문서들을 아직 기밀 해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하오보춘의 일기장과 장셴이의 증언, 그리고 공개된 정보를 통해 일부 알려졌다.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하오보춘은 우선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우라늄을 구입하려 했다. 이에 대한 조건으로 대만의 핵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대만의 핵 기술자들이 파견됐다는 정보가 있는 등 두 나라가 일종의 협업(協業)에 나섰다는 심증은 꽤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거래가 이뤄졌는지, 구체화된 것이 있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그는 프랑스로부터 큰 규모의 원자로를 구입하려 했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핵 기술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국가였으며 처음에는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역시 미국의 눈치와 핵 확산 우려 등을 이유로 대만에 결국 판매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은 당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접촉하며 핵 기술을 개발하려 했다. 하지만 1977년 비밀 합의가 계속 대만의 발목을 잡았고 이런 노력은 큰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3~6개월 안에 핵무기 제작 역량을 확보하라”
1985년에 접어들어 장징궈 총통은 미국의 눈치를 더욱 더 많이 보게 됐다. 장징궈는 하오보춘 참모총장을 불러들여 “대만은 핵무기를 만들 어떤 계획도 없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오보춘은 핵무기를 만들어 미국의 반발을 사는 것은 좋지 않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장징궈 총통이 핵 역량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하오보춘이 공격적으로 핵 역량 개발에 몰두한 이유는 그가 중국의 침략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만 군부는 중국의 침략이 있을 경우 대만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3개월에서 6개월 이내일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라 하오보춘은 원자력연구소 임원들도 참석한 1986년 4월에 열린 군부 고위급 회의에서 3개월에서 6개월 이내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추라고 지시했다. 당시 하오보춘이 작성한 일기에 따르면 그는 이날 “이런 정책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대만의 정책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총통은 대만이 핵무기를 만들 역량은 있지만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왔다. 핵무기를 만들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 원자력연구소의 임무 그 자체이다”라고 말했다. 장셴이의 증언에 따르면 1986년 당시 대만은 이미 3~5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핵실험 대신 컴퓨터 시뮬레이션
완전한 핵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핵 물질 확보뿐만 아니라 이를 운반할 체계, 기폭 장치 등 갖춰야 할 관련 기술이 많다.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전문가들은 대만이 1989~1991년 사이에 관련 기술을 모두 갖춘 것으로 보고 있다.
대만의 핵개발에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대만이 실제로 핵무기 실험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만과 같이 인구 밀도가 높고 작은 나라에서 지하 핵 실험은 사실상 어려운 부분이며 이를 감행했을 시 국제사회에 적발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만은 실제 핵무기 실험 없이 핵무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정확도를 높여나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명령 하달 이후 3~6개월 이내에 핵무기 제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학자와 연구진이 이런 역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실전 제작, 즉 플루토늄을 분리해 폭탄으로 만드는 작업에 돌입한 후부터 잦은 실수를 거치고, 이런 실수를 수정해가며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만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중(二重) 용도’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하나의 예로는 핵무기가 아닌 핵의학 영상진단에 사용되는 원료 몰리브덴-99의 핵분열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이를 통해 실제 핵무기 폭탄 제작 명령이 떨어지면 관련 핵 물질을 무기화할 준비를 갖춘 것이다.
1988년 비밀리에 재처리 시설 완공
대만은 이즈음 우라늄 농축 기술을 일부 확보하기는 했지만 진전이 없자 플루토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대만은 플루토늄을 무기화에 최적화한 농도로 만드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장셴이의 증언에 따르면 대만은 이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적의 플루토늄이 아닐 경우 폭발 강도나 탄두 성능의 안정성이 낮아질 수는 있지만 대만의 주 목적은 억제용 핵무기였다는 설명이다. 대만은 파괴력이 약하기는 하지만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억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1988년 대만은 비밀리에 재처리 시설을 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프로젝트는 1983년부터 시작했으며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한 뒤 무기화하기 위한 시설이다. 한 미국 전직 당국자는 이 시설은 연간 10~20kg 상당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대만은 이 시설을 IAEA에 신고하지 않았다.
대만의 이 재처리 시설은 유럽에서 사용되는 모델과 매우 비슷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가장 비슷한 시설로 독일의 ‘WAK’ 재처리 시설을 꼽았다. 대만은 결국 실패하기는 했지만 1960~70년대 독일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려 했었다. 계약 체결에는 실패했지만 재처리 시설 설계도나 작동 방법 등을 비밀리에 얻었을 가능성은 있다. 또한 대만 핵 과학자들은 1960~70년대에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의 재처리 기술 전문가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이런 관계를 통해 비공식적인 기술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무기화의 마지막 단계
핵무기를 무기화하는 데 필요한 수퍼컴퓨터 확보도 하나의 문제였다. 당시 대만은 美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유학하던 대만 전문가를 통해 수퍼컴퓨터 조달에 나섰다.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은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만은 핵 프로그램에 자문을 해온 ‘C’ 박사의 도움을 받아 수퍼컴퓨터 확보에 나섰다. 대만은 C 박사를 통해 핵무기 무기화에 필요한 코드 작업 방법을 배웠다. C 박사는 대만이 일본 후지쯔를 통해 수퍼컴퓨터를 구입하는 것 역시 도왔다. 대만은 비슷한 방식으로 핵무기에 필요한 X레이와 용광로 등도 해외 곳곳에서 구해왔다. 대만은 기폭장치용 스위치인 크라이트론을 미국 회사로부터 구입했다. 당시 대만은 이 부품을 비행기 조종사의 긴급 탈출 장치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거짓 신고했다.
장셴이는 1987년 대만은 핵탄두 설계를 거의 마무리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핵탄두의 지름은 약 60~70cm였으며 무게는 900kg에 달했다. 그러나 비행기 등을 통해 폭탄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지름을 약 50cm까지 줄여야 해 ‘소형화’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대만은 당시 소형화와 운반체계 확보 작업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대만은 한 번의 지하 핵실험도 없이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으로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이다.
核 운반 위해 國産 전투기 사업 시작
당시 군부의 거의 마지막 걱정거리는 핵무기를 1000km 가량 운반할 수 있는 운반체계 확보였다. 중국 본토를 타격하기 위해 필요한 거리이다. 당시 대만은 구식 미군(美軍) 전투기 몇 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탄도미사일 개발은 미국의 반발로 인해 무산된 상황이었다.
또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82년에 들어 대만에 고성능 미군 전투기를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면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대만은 이에 따라 대만국산전투기(IDF) 사업을 시작해 자체적으로 전투기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대만이 F-16과 같은 전투기를 구입하는 것은 막았지만 미국 회사들이 기술을 지원하거나 대만이 자체적으로 개발에 나서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대만은 당시 미 군수회사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IDF의 첫 시제품은 1988년 12월에 공개됐다. 대만은 이 비행기를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이름을 따 징궈(經國) 전투기로 불렀다. 이 비행기는 1992년에 들어 실질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1994년부터 운용됐다.
문제는 핵무기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1000km를 비행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장셴이에 따르면 대만은 해당 비행 거리를 갖추기 위해 만들어진 비행기 중 최소 한 대 이상의 성능을 크게 저하시켰다. 엔진 성능을 조절함에 따라 최대 비행거리를 1000km 이상으로 늘리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장셴이는 비행거리를 늘렸다고 하더라도 본국(本國)으로 돌아올 연료는 부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당 비행기로 자살임무를 수행할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만은 징궈 전투기를 통한 핵무기 운반 역량을 1989년 중반에는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만은 1970년대부터 탄도미사일 개발에 나섰으나 미국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했다. 하오보춘은 1984년 9월 30일자 일기에서 이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미국은 우리의 미사일 개발이 핵무기 개발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을 수 있다. 미국은 대만의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적었다. 하오보춘은 미사일이 1977년 비밀 합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오보춘은 매사추세츠 공대 출신 과학자들과 접촉해 자체적인 미사일 개발을 계속해 나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사업은 1980년대에 들어와 모두 중단됐다.
한편 대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 자신들은 비핵화를 했기 때문에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나설 정당성을 얻게 됐다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대만은 지금도 계속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
장징궈(蔣經國) 병세 악화
1987년에 들어 미국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생겼다. 우선 하나는 대만이 비밀 재처리 시설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대만의 정치 상황이었다. 장징궈 총통의 병세는 계속 악화돼 갔다.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아들이나 형제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리덩후이(李登輝) 당시 부총통이 권력을 승계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미국에게는 이 역시 고민거리였다.
미국은 리덩후이가 장개석이나 장징궈와 비교해 덜 강경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문제는 리덩후이가 대만의 핵 프로그램을 총괄해왔던 하오보춘 참모총장을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리덩후이는 대만 핵 프로그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적도 없었다. 미 정보당국은 하오보춘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 비핵화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장징궈의 사후(死後) 핵무기 프로그램을 누가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리고 재처리 시설을 비롯한 대만의 핵 프로그램 진전. 미국은 대만의 핵 프로그램의 뿌리를 뽑아버리기로 결정했다.
장셴이(張憲義) 미국으로 망명
미국 CIA는 장셴이(張憲義)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을 통해 대만의 비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계속 확인했다. 비밀 재처리 시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대만 정부에 사찰하겠다는 요청을 하지 못한 이유는 장셴이의 꼬리가 잡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대만 핵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기 전에 장셴이를 우선 미국으로 탈출시키기로 결정했다.
미 CIA는 1987년 중반, 다시 한 번 장셴이에 대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실시했다. 그가 이중 간첩이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즈음 장셴이를 관리하던 ‘마크’라는 이름의 CIA 요원은 장셴이에게 미국에 있는 회사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어떤 회사인지,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장셴이는 자신의 아내와 두 명의 아들, 그리고 한 명의 딸 모두 함께 갈 수 있다면 미국으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마크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장셴이의 부인은 미국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들떴다. 그녀는 그의 남편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대만 軍 관계자들은 사전 허가 없이 해외로 떠나지 못했다. 장셴이는 우선 그의 가족들에게 휴가를 떠나자고 말한 뒤 1988년 1월 8일 먼저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로 보냈다. 이후 그는 원자력연구소에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며 1월 12일에 돌아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날 장셴이는 마크 요원과 함께 안가(安家)에서 머물렀고 다음날 가오슝 공항에서 홍콩을 경유해 미국 시애틀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도쿄에 도착한 장셴이의 부인과 가족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미쓰 리’라고 불린 여성은 남편으로부터의 편지라며 이를 張의 부인에게 전달했다. 훗날 공개된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 대만에 있고 회사에서는 가오슝에서 홍콩으로 떠나는 비행기편을 마련했습니다. 홍콩에서 유나이티드 항공을 타고 시애틀로 갈 것이니 시애틀에서 만납시다. 미쓰 리의 지시를 잘 따라줘요.” 미쓰 리는 중국 본토 사람이었다. 張의 가족은 일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이틀 뒤 시애틀로 떠났다.
장셴이는 1월 9일 시애틀에 도착했고 다음날 가족과 재회(再會)했다. 張의 가족은 1988년 1월 12일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최종 도착했다. 다음날인 1988년 1월 13일, 장징궈 총통이 토혈(吐血)한 뒤 숨을 거뒀다. 어떤 이는 장셴이의 탈출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같은 날 리덩후이 부총통이 총통 대리직을 맡는 선서를 했다.
충격에 빠진 대만, 최후통첩에 나선 미국
하오보춘 참모총장은 장셴이의 미국 망명 소식을 듣게 됐으나 그가 처음부터 포섭돼 있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1988년 1월 17일에 쓴 일기 내용이다.
<장셴이 원자력연구소 부소장과 그의 가족이 미국으로 도망쳤다. 美 CIA에 이용당해 원자력연구소가 핵 연구 활동을 재개했다는 정보를 넘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대만의 정책은 핵무기를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만들 역량을 보유하는 것이다. 중산과학연구원 부원장 예창둥(葉昌桐)에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다룰 것을 지시했다.>
하오보춘은 장셴이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CIA 공작의 일원이었고 미국이 대만을 비핵화하는 행동에 나서기 직전에 이런 망명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됐다.
장셴이는 1월 16일 워싱턴에서 단교 이후 설립된 비공식 외교기구 미재대협회(美在臺協會, AIT) 데이비드 딘 대표를 비롯한 레이건 행정부 관료들과 만났다. 딘 대표는 이날 장셴이에게 하오보춘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리덩후이 총통이 실권을 잡지 못할 가능성과 하오보춘의 핵 개발 욕심을 우려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장셴이는 하오보춘을 축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며 핵무기 프로그램과 ‘노하우’ 이전을 막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셴이는 또한 하오보춘이 이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라면서도 미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을 넘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치욕을 삼킬 수밖에…”
딘 대표는 1월 20일 하오보춘을 만나 최후통첩을 했다. 하오보춘의 일기에 따르면 딘 대표는 “원자력연구소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모든 기기들을 파괴하고 대만연구용원자로에 있는 모든 중수로를 빼내 이 원자로가 다시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은 대만의 평화로운 원자력 사업에 협조할 마음이 있지만 이런 협력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딘 대표는 이날 하오보춘에 비밀 핵 관련 시설들에 대한 위성 사진 등 증거도 들이밀었다.
하오보춘은 이날 일기에서 미국이 협상이 불가능한 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이 사건은 대만과 미국의 관계에 중대한 사안이다.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모든 기기를 완전하게 파괴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동의한다. 이런 의사를 리덩후이 총통에게 전달할 계획이다”고 기록했다. 대만에게 주어진 서명 시한은 7일이었지만 최종시한 이전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2월 24일 하오보춘은 장셴이가 CIA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을 드디어 알게 됐다. 하오보춘의 그날 일기다.
<장셴이의 탈출은 CIA가 계획한 불법적인 행동이다. 이는 대만에 수치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대만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런 치욕을 삼키고 지나간 일로 할 수밖에 없다.>
비핵화에 나서게 된 정확한 의사 결정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우선 미국 정부는 리덩후이 총통 측에 대만의 민주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군부에 쏠려 있던 힘을 민간으로 돌리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설명이다. 또한 1988년 당시 원자력 발전이 전체 대만의 전기 생산에 차지하는 비율은 45%에 달했다. 대만은 미국을 비롯한 외부로부터 농축 우라늄 등을 공급받아야 하는 등 외부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미국이 이를 모두 막기로 결정했다면 타격이 매우 컸을 것이다.
비핵화에 나선 대만
대만은 1988년 1월에 바로 대만연구용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 또한 3월에는 20톤 넘는 중수로를 빼내 미국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미국은 이런 중수로를 100개의 드럼통에 담도록 했다. 또한 각 드럼통의 무게를 철저히 측정하고 미국 에너지부의 도장을 받도록 했다. 6월 9일 100개의 드럼통이 대만을 떠나 7월 11일 미국 사바나강(사우스 캐롤라이나주州에 위치한 미국 핵 시설)에 도착했다. 사용 후 핵연료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대만은 과거 1970년대 미국의 비핵화 압박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철저하게 협조했다. 대만 정부는 원자로 폐기의 이유는 경제적 문제 때문이라고 연구원과 과학자들을 설득했다. 중산과학연구원과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은 과거와 다른 폐기 절차 진행 속도에 매우 놀랐다. 이들 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일생의 사업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미국은 비핵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확인했고 대만이 정말 선을 넘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미국은 더욱 더 비핵화에 박차를 가했고 대만은 과거처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미국은 대만의 핵 시설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모든 핵심 부품과 기기들을 시설의 지하로 이동시켰다. 그런 뒤 콘크리트로 지하를 덮어버리기로 했다. 지하를 콘크리트로 덮는 데는 콘크리트 트럭 50대가 동원됐다. 당시 대만의 콘크리트 생산량 거의 전부가 사용됐다고 한다.
IAEA도 동원돼 사찰과 비핵화 검증 과정을 거쳤다. 당시 IAEA는 이라크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핵 확산 문제가 불거지자 검증 체계를 더욱 강화했다. 대만은 IAEA가 요구하는 내용을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과거처럼 IAEA와 미국 모르게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장셴이는 배신자인가 애국자인가?
하오보춘은 장셴이를 민족 반역자라 칭했다. 또한 지명수배를 내렸으며 시효는 2000년에서야 종료됐다. 대만 일각에서는 그를 아직도 배신자로 보고 있다.
장셴이는 자신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중국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전쟁이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핵무기가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장셴이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과 일하기로 한 나의 결정은 대만을 배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의 의도는 이와 반대이며 대만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고 평화와 안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내가 배반한 유일한 사람들은 위험한 군사행동을 감행하고 대만 주민들의 이익을 무시한 군부 강경파들이다.>
장셴이는 CIA가 마련한 워싱턴 DC 인근 버지니아州에 있는 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망명 직후인 1988년 3월 23일 뉴욕타임즈가 장셴이라는 인물을 실명(實名)으로 다루는 특종 보도를 했다. 대만 기자들도 장셴이의 위치를 찾아내 끊임 없이 인터뷰 신청을 했다. CIA는 1990년 그를 아이다호州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대만 정보요원들이 암살에 나설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만 군부 인사들은 대만에 거주하고 있는 張과 부인쪽 친척들을 계속 찾아 다녔다. 장셴이에 따르면 이들은 가족들을 만나 정보원 활동이나 탈출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캐물었다. 딘 대표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하오보춘을 만나 대만이나 대만 외부에 있는 장셴이의 가족에 접근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만약 접촉할 시에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딘 대표는 하오보춘에게 장셴이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흘려도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장셴이 가족들에 대한 대만 군부의 방문은 이후 없어졌다. 하오보춘은 이듬해 행정원 국방부장, 이후 행정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으며 사실상 군부의 통제권을 잃게 됐다.
장셴이는 1989년부터 2013년까지 아이다호 국립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원래 사용하던 이름을 유지했지만 시민권을 받은 1989년에 영어 이름 ‘Gray’를 추가했다. 그레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회색(灰色)이라는 뜻도 있다. 장셴이는 탈출 이후 한 번도 대만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공소시효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불안하다고 한다.
장셴이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미국에 오게 됐는지, 무엇을 한 사람인지를 뒤늦게야 알았다. 장셴이는 2016년 12월 회고록을 통해 대만 비핵화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소개했다. 이런 책이 나온 뒤에야 자식들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2017년 1월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번역 소개한다.
<아버지께,
저는 우리가 어떻게 미국에 왔는지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책이 나오고 언론 보도가 이어지자 어떤 일이 생겼는지에 눈을 뜨게 됐고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오랜 세월 정말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뎌내셨네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는 저의 영웅이라는 점이에요.
많은 부정적인 반응들을 접하는 게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압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족뿐만 아니라 대만을 위한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평안을 찾기를 바라며 후회 없이 인생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대만의 비핵화는 미국의 대표적인 비확산 성공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대만을 최종적으로 설득, 혹은 협박하는 과정, 대만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 많은 정보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미국 정부는 당시 기록을 아직 기밀 해제하지 않고 있다. 앞서 소개된 바와 같이 미국은 대만 문제에 있어서는 비밀 유지에 특히 신경을 썼다.
비밀 유지에는 장단점이 뒤따랐다. 우선 장점은 대만과 미국 모두 서로의 체면을 살릴 수 있었던 점이다. 미국은 동맹국이 핵무장 직전까지 가도록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공개됐을 시 따라오는 국제사회의 질타를 피할 수 있었다. 대만 역시 미국에 일방적으로 굴복하는 모습을 외부에 알리지 않아도 됐다. 아울러 극소수만 알고 있었던 비핵화 합의였기 때문에 외부세계의 눈치를 비교적 덜 받으면서 비핵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반면 여러 부작용도 있었다. 미국은 대만 핵 프로그램 관련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역시 숨기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 ‘미국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대만에 경고하고 공론화를 위해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일까지 해야 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대만의 핵 프로그램 관련 위반 사항을 제때 공개하지 않고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 핵 프로그램 진전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한다.
대만은 지금도 핵무기를 만들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핵과 중국의 계속된 위협이 있기는 하지만 대만이 다시 핵무장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하지만 핵개발 역량이 있는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장셴이(張憲義)는 이와 관련해 “대만이 원자력 연구와 개발 노력, 그리고 인재 양성을 계속해왔고, 또 핵무기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원자로 없이도 다시 예전 역량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필요한 물질과 사람, 그리고 기기만 있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 전문가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씨는 대만이 예전 역량을 따라잡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수 년은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미스터리가 있다. IAEA를 비롯한 사찰단은 대만 비핵화 당시 약 10개의 핵연료 요소(注 연료판이나 연료봉의 묶음)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이들이 재처리되지 않은 채 핵 폐기물로 처분됐을지, 재처리 과정을 거친 플루토늄이 됐다면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실제로 대만이 핵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있다는 의심은 2000년대에도 계속 제기돼 왔다. 물론 1980년대처럼 큰 규모의 움직임은 없었지만 아직 일부 핵 프로그램이 존재할 수는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대만 지도자들은 핵 역량을 마음만 먹으면 다시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을 주는 발언을 몇 차례 해왔다.
지난 1995년 7월, 중국이 대만 인근 해상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만 여론은 크게 들끓었고 리덩후이(李登輝) 당시 총통은 국회 연설에서 핵무기를 다시 개발할 수 있다는 위협적 발언을 했다. 그는 “우리는 (핵무기 보유) 문제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며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우리는 이런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리덩후이는 논란이 거세지자 며칠 뒤 수위 조절을 했다. 그는 “대만은 핵무기를 개발할 역량은 있지만 절대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정했다. 리덩후이가 핵무기를 재개발할 계획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만 정치권에서 핵무기 개발은 계속 논란이 돼 왔다.
이런 논란은 2004년에 다시 일어났다. 유시쿤(游錫堃) 당시 대만 행정원장은 2004년 9월, 중국이 타이페이와 같은 대만의 인구 밀집 지역에 미사일 100발을 발사하면 대만은 중국 본토에 있는 최소 10곳의 목표 지점을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유시쿤 행정원장은 핵무기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야당이었던 친민당(親民黨) 의원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났다. 당시 친민당 의원들은 유시쿤에게 공개 질의를 보내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이 있느냐고 추궁했다. 유시쿤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대만의 입법부나 대중들 대다수는 현재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 정부로 하여금 핵개발 의혹이 생길 때마다 강력하게 부인하도록 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또한 여전히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는 IAEA의 사찰 절차 역시 대만이 다시 핵개발에 나서게 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대만과 북한의 차이
대만은 중국이라는 안보 위협이 해결되지 않았고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을 대만이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비핵화했다. 대만 비핵화의 핵심은 미국의 압박이었다. 대만은 미국에 의지할지, 아니면 혼자서 원자력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물질을 구입하고 안보를 책임질지 결정해야 했다. 만약 후자(後者)를 선택했다면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이고 민간용 원자력 산업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현재 미국은 이란과 북한에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통해 비핵화에 나서도록 하고 있다. 핵을 포기하도록 한 뒤 경제 개발을 실현시키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대만과 달리 북한과 이란은 미국의 적대국이며 상대적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다는 점이 대만 때와 다르다. 그나마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중국이라는 궁극적인 안보 위협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경우 비핵화를 했다는 점 정도이다.
올브라이트 씨는 북한이 비핵화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대만 때처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원자로를 민간용이라고 주장하며 계속 보유하겠다고 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미국은 앞으로의 협상 과정에서 이런 식의 빠져나갈 구멍을 줘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만 사례와 마찬가지로 민간용이라고 주장한 뒤 비밀리에 다시 핵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북한의 경우는 외부에서 농축 우라늄을 구입하는 것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북한의 주장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고 했다. 대만 사례에서 봤듯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동결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끝내는 것만이 북한 비핵화 달성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올브라이트 씨는 강조했다.
한편 북한이 핵 관련 일부 기술을 대만 내 회사들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달해왔다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대만은 2017년 9월에 들어서야 북한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했다. 대만은 정식적인 국가 지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유엔의 회원국도 아니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대만이 핵 관련 수출 통제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