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평화적 핵폭발(PNE)’ 기술 개발에 나선 남아공은 우선 포신형(砲身形) 방식을 사용하는 핵무기를 만들기로 했다. 핵분열 기폭장치 종류는 크게 포신형 방식과 내폭형 방식으로 나뉜다. 포신형 방식은 포신 내부에 고농축우라늄을 분리시킨 후 필요할 때 결합시켜 폭발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내폭형 방식은 핵물질 주위에 고폭 장약을 설치해 핵물질을 압축한 뒤 핵폭발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내폭형 방식은 포신형 방식보다 폭발 효율이 우수하지만 구조가 복잡해 높은 수준의 기술과 여러 차례의 핵실험이 필요하다. 실제로 포신형의 경우는 큰 규모의 폭발 실험이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남아공은 보다 간단한 포신형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남아공 정부는 포신형 폭발 방식을 터득하기 위해 공개된 논문과 기밀 해제된 문서들을 연구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미국의 핵 과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에는 이와 관련한 고급 정보가 많이 실려 있었다. 남아공 기술진들은 미국에서 열리는 핵 관련 세미나 등에도 참석해 전문가들에게 직접 정보를 얻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 남아공은 다시 한 번 우라늄 농축에 도전했다. 남아공은 우라늄 농축은 평화적 사용 목적뿐이라고 강조했고 이를 해외에 수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당시 남아공 정부는 非공산주의국가 관계자들을 초청해 우라늄 농축이 평화적 목적이라는 점을 홍보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남아공에 있는 농축시설에서는 무기화가 가능한 우라늄을 생산할 수 없을 것으로 분석했다. 당시 미국 행정부는 의회에 전달한 보고서에서 “남아공에 있는 농축 시설은 아주 적은 양의 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고 했다.
1970년 11월 남아공은 국책기관인 남아공우라늄농축회사(UCOR)를 설립했다. 이후 펠란다바 지역 옆에 있는 지역에 ‘Y 시설’이라고 불린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이름은 ‘발린다바(Valindaba)’로 지어졌다. ‘발라’는 ‘닫다’라는 뜻이고 ‘다바’는 ‘위원회’라는 뜻이 있다. 합치면 ‘위원회 문은 닫았다’이며 “이곳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Y 시설은 연간 100kg의 무기화 가능한 우라늄을 생산하도록 설계됐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여러 문제가 생겨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Y 시설은 약 1년 반 동안 가동한 뒤인 1979년 8월말 기준 80% 농축된 우라늄 64kg을 만들어냈다. 설계 목표에는 크게 못 미쳤지만 첫 번째 핵폭발 물질을 만들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남아공은 이런 핵폭발 물질을 1979년 11월 즈음에 완성했다.
왜 핵무기를 만들었을까?
남아공이 핵개발에 나설 때부터 핵무기를 만들 계획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는 군사용도의 핵무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1977년 7월 P.W. 보다 당시 국방장관은 핵무기를 위한 국가 차원의 전략 가이드라인을 만들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전년도에는 남아공에 전술 무기가 필요하다는 발언도 했다. 남아공 공군은 1976년에 폭격기를 통해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능력을 실험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한 바 있다.
남아공 군부(軍部)와 백인 엘리트 층을 중심으로 핵무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남아공은 소련이 지원하고 있는 앙골라와 모잠비크로부터 위협을 느꼈다. 또한 남아공이 관할하던 나미비아 지역에서 남아공에 대한 흑인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의 적대감도 거세졌다.
남아공의 안보 위협은 1974년부터 1975년에 들어 크게 증가했다. 당시 모잠비크와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나 포르투갈은 식민 통치를 멈추고 철수 결정을 내렸다. 1975년 소련과 쿠바 군대는 앙골라에 개입해 사회주의 정권을 들어서게 했으며 모잠비크와 잠비아 등 국가와 결속하게 했다.
남아공은 南아프리카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서방세계와 같은 편에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비밀리에 앙골라 등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군사 관련 지원을 금지하도록 했다. 남아공의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꼈다. 또한 흑인 단체들의 부상(浮上), 그리고 소련과 동맹들이 지원하는 흑인 극단주의 정권들 사이에서 홀로 남게 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에 발각된 핵실험 계획
1970년 남아공의 PNE 프로그램 개발자들은 작동 여부를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큰 규모의 실험이 한 차례 필요하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지하 폭발 실험을 통해 핵 폭발 규모 등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남아공 정부는 충분한 농축우라늄이 확보될 것으로 보이는 1977년까지 지하 핵실험을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
남아공 원자력위원회는 1974년 군대에서 관리하는 시설에 지하 핵 실험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1976년 남아공은 385m 깊이에 0.9m 지름 규모의 수직 갱도를 팠다. 이후 1977년에 216m 깊이의 갱도를 또 하나 완성했다. 남아공은 당시 이런 갱도가 핵실험 용도가 아니라 탄약고처럼 보이게 위장하려 했다. 원자력위원회는 1977년대 중반에 기폭형 장치를 만들어냈다. 당시 장치는 4.4m 길이에 0.61m 지름으로 제작됐으며 무게는 3450kg에 달했다. 남아공은 1977년 8월 고농축우라늄이 아닌 일반 우라늄 등을 사용한 간이 실험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 실험의 목적은 실제 핵무기 폭발로 이어졌을 시 어떤 상황으로 이어질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남아공은 이 실험을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남아공의 핵 역량을 계속 감시해오던 소련에 발각됐기 때문이다. 소련은 당시 남아공 시몬스타운 해군기지 사령관이던 디에터 게르하르트를 포섭해 스파이로 활용하고 있었다. 게르하르트는 1982년 소련 스파이로 체포돼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는 출옥 이후 진행한 인터뷰에서 소련은 이미 계획된 실험 1년 전 이를 파악했고 미국에 이런 사실을 알렸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소련과 미국 당국자들은 1976년에 이미 남아공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논의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 당시 회담에서 소련은 남아공 핵 프로그램에 대한 증거를 미국에 보여주며 미국이 이를 멈추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게르하르트는 러시아가 Y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언급했으나 미국이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소련 정보당국은 1977년에 지하 핵실험 준비 정황을 포착해 미국에 관련 정보를 다시 넘겼다. 남아공은 해당 갱도가 핵실험 용도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이즈음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이런 공사 작업은 원자폭탄 실험용이라는 것을 99% 확신한다”는 정부 관료의 말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세계는 남아공에 증거를 들이밀며 실험을 중단하라고 압박했다. 실험을 강행하면 외교와 무역 관계, 기술 교류 등에 큰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코너로 몰았다.
남아공 정부는 자신들의 핵실험이 이 정도로 큰 국제사회의 반발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1974년 일어난 인도의 핵폭발 실험 때처럼 국제사회가 묵인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남아공은 더 이상 PNE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계속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남아공 과학자들은 PNE 프로그램이 이미 충분히 개발돼 큰 규모의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1970년만 해도 실험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미 실험이 필요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