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비교/1류와 3류의 박정희 평가

일류 교수는 박정희의 성공 모델을 세계사의 원리에 비추어 설명하고, 3류 교수는 박정희의 성공모델을 공격하기 위해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기수를 '파시스트'에 비교했다. 盧정권이 굴종하고 있는 김정일이 파시즘이나 나치즘보다 더한 전체주의이고, 朴대통령식 통치는 권위주의식이라고 불린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사생활도 지배하지만 권위주의 정부는 인간의 정치적 자유만 제한할 뿐이다. 파시즘과 박정희를 비슷하게 보는 무식한 학자가 이 정권의 핵심 브레인이었는데도 이 정도밖에 망가지지 않은 것은 박정희 시절에 토대를 놓은 한국의 관료제도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 이정우씨의 발언에서 하나 진실에 가까운 부분이 있다. 그는 독일에서는 파시즘을 찬양하면 처벌한다고 했는데 독일은 통일후에도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그는 이런 독일이 그리운 모양인데, 나는 그의 말을, 파시즘보다 더 악독한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해온 盧정권의 핵심멤버들도 처벌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면서 위안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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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1: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보에 실린 성균관대학교 김일영 교수의 기고문

산업화-민주화 양립은 가능한가 -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朴正熙 대통령은 죽어서도 영향력을 잃지 않은 채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그는 전현직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인기도 조사에서 항상 50%를 훨씬 넘는 수치로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을 통해 그와 직간접적으로 대결한 경험을 지닌 대통령들(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은 아직도 내심으로 그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다. 그(의 모델)를 극복하지 않고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김일영(金一榮)·성균관대학교 정외과 교수 ]


서거한 지 25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朴正熙 대통령(이하 직명 생략)은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각종 논쟁의 중심에 있다. 친일파, 한국 현대사에서 군부의 역할, 경제발전의 공과 과, 한일국교정상화(징용 및 위안부 문제 관련), 베트남 파병(고엽제 및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 문제 관련), 각종 인권탄압, 지역감정 같은 해묵은 쟁점에서 그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그가 없으면 논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이다.

朴正熙는 현재 진행중인 정치 및 경제적 사안에서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찾을 때도, 금융부실의 문제를 거론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를 소환하고 있다.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과거사 관련 법안의 상당 부분도 그를 겨냥한 측면이 있고, 향후 대권구도와 관련해서도 그는 여전히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죽었으되 죽지 않은 朴正熙 . 모든 논쟁의 중심에 있는 朴正熙 . 여기서는 그를 평가함에 있어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인 산업화(경제발전)와 민주화(정치발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산업화와 민주화 사이의 관계 : 세 가지 입장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 세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가능하며, 따라서 민주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 단기적으로는 개발독재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방식이 가시적인 경제발전의 성과를 낳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개발방식이 남기는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다소 더디더라도 정치적 민주주의 및 경제적 분배개선과 함께 가는 발전노선을 추구해야 한다.

둘째,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양립은 이론적으로는 주장 가능하다. 하지만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양자를 성공적으로 병행추진한 예를 찾기 어렵다. 이 점에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ies)’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 논리를 산업화가 성숙단계에 들어선 현재에까지 연장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정략적이다.

셋째, 朴正熙 식의 개발독재는 그 당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으며, 그 유효성과 필요성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균형발전은 모든 나라들이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소망하는 것이 ‘항상’ 실현가능한 것은 아니다. 경제발전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행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병행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병행발전이 ‘항상’ 가능한가는, 다시 말해 산업화 초기 단계에도 이러한 병행발전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김대중 정권은 출범하면서 좪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좫을 모토로 내걸었고, 노무현 정권 역시 이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간에 이루어진 경제발전의 성과와 수준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극히 타당하며 현실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산업화 초기 단계인 朴正熙 정권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한국에만 두지 말고 좀 더 넓힐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비교사적 관점에서 朴正熙 시대의 발전경험을 다른 나라의 그것과 견주어볼 때 그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대화되면서 좀 더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영국은 병행발전의 모델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의 병행발전이 보편적 과제로 제시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추적해 가보면 우리는 ‘모델로서의 영국’의 경험과 만나게 된다. 흔히 영국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획기적(epochal) 사건을 순차적으로 겪으면서 양자를 조화 있게 발전시켜온 대표적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영국의 예는 근대화론자들에 의해 많은 후발국들을 가위처럼 짓눌러 왔다.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한 많은 후발국들은 영국모델을 척도로 한 정치적 항의와 도덕적 심문(審問)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영국의 경험이 과연 여타 국가들의 발전경험을 잴만한 보편적 척도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영국의 발전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후발산업화 국가나 후후발산업화 국가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이 과연 타당한가?

이런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영국의 경험은 근대화를 이루는 다양한 길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되풀이되기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서구민주주의라는 것은 단지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타난 하나의 귀결에 불과”하며 “20세기의 70년대에 서서 되돌아본다면 비민주적이거나 심지어 반민주적인 근대화도 있었다는 부분적 진리가 제기”된다고 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상대화시키는 무어(B. Moore)의 주장이나 “근대화문제에 대한 자본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해결책은 되풀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슈바이니쯔(K. de Schweinitz)와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체제는 법칙이라기보다는 예외”였다는 벨러(H. U. Wehler)의 예외론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렇게 영국의 경험을 근대화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들 중 하나로 상대화시켰으면서도 이들은 여타의 경로, 특히 위로부터의 혁명의 길을 설명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국의 경험을 다시 모델로 끌어들이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무어의 경우 그것은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는 맑스주의의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데에서 잘 드러나며, 이런 무어의 입장은 독일의 경험을 ‘특수한 길’(Sonderweg)로 이해하려는 벨러나 코카(J. Kocka), 빙클러(H. A. Winkler) 같은 학자들의 입장과 그대로 연결되고 있다.

무어가 국가(Crown), 지주귀족, 그리고 부르주아 사이의 세력관계 및 동맹관계의 내용, 지주귀족의 농업경영방식, 그리고 농민층의 결집가능성 등 여러 요인을 동원해 근대화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를 나누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부르주아혁명의 유무를 가지고 앵글로 아메리카적 길과 여타의 길 - 위로부터의 혁명과 농민혁명 - 을 구분함으로써 상대화시켰던 영국의 경험을 다시 모델로 도입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과연 부르주아혁명이 민주주의를 가져왔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경우 민주주의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 때의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후자의 경우라면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로의 대명사인 영국을 과연 민주화와 산업화를 순차적 내지는 병행적으로 추진한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후자의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도대체 누가 가져오는가?

영국에서 부르주아화한 지주귀족과 부르주아의 힘이 강력했으며, 그들이 전쟁을 통해 절대왕권을 제어하고 영국을 대륙의 여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국가로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경우 수립된 민주주의는 결코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제도와 절차를 갖춘 ‘보통민주주의’(mass democracy)는 아니었다. 그것은 ‘유산자(有産者)민주주의’(bourgeois democracy)였다. 19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참정권은 토지귀족에게만 허용되었으며, 1832년 선거법개정을 통해서도 그 허용범위가 산업자본가에게 국한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후 선거법 개정은 노동운동의 주요과제였으며 그러한 노동운동에 대해 당시 영국정부가 심한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노력과 투쟁 끝에 영국에서 노동자가 선거권을 얻는 것은 1918년이고 부녀자까지 획득하여 일반국민 전체가 선거권을 갖게 되는 것은 1928년이었다. 1928년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990년 미국 달러 기준으로 환산하면 5,115 달러였다. 이 모든 점들을 상기한다면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명제는 성립하기 어려우며, 영국을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적으로 추진한 모델로 보기 힘듦을 알 수 있다.


“영국, 민주화 과대평가 억압성 과소평가”

이 점에서 독일을 ‘특수한 길’로 보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영국이 결코 모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일리(G. Eley)나 블랙번(D. Blackbourn)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일리는 ‘특수한 길’론자들이 19세기 영국에 대해 민주화의 정도는 과장하고 국가의 억압성 정도는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흔히 영국의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조화로운 동시성’은 구체적인 역사지식에 반대되는 도그마일 뿐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강화된 것은 통상 부르주아혁명으로 불리는 정치적 변혁이 발생한 한참 뒤이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던 것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산업프롤레타리아를 위시하여 도시수공업자, 쁘띠부르주아지, 독립자영농 등이었다. 따라서 일리는 부르주아지를 항상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산업자본주의를 자유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법적·제도적 틀의 마련이지 정치적 자유주의는 아니다. 만약 부르주아혁명 개념을 이렇게 법적·제도적 틀의 마련이라는 의미로 재(再)정의한다면 독일도 그것을 조용하게 겪었으며, 그 점에서 독일은 결코 예외, 즉 특수한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국의 경험은 모델도 예외도 아니다.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이 증명된 이상 그것은 더 이상 다른 나라들에게 정치와 경제의 병행발전을 강요할 수 있는 모델이 되기도 어렵고, 또 되풀이되기 어려운 예가 될 수도 없다. 실제 영국의 경험은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그 후의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영국은 그것을 가장 먼저 겪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영국은 병행발전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선구적 예’(prototype)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경험적 예를 찾기 어려운 병행발전론

이렇게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한 것이 아니라 그 역의 경우의 선구적 사례라면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정말 어려워진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후발산업화 국가들 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방식의 산업화를 추진한 구(舊)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 그리고 최근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NICs)에 이르기까지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병행시킨 나라는 없었다. 그리고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오늘에 와서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방식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만이 비교적 순탄하게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과거 제3세계 권위주의국가를 이론적으로 합리화시켜 주는 도구라고 비난받던 헌팅톤(S. Huntington)의 이론이 오히려 경험적으로 증명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서 朴正熙 정부 하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은 영국을 ‘선구적 예’로 하는 일반적 경험에서 보아 크게 일탈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울러 실존하지도 않았던 영국 모델을 근거로 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론을 가지고 朴正熙 시대를 비판하는 일도 이제는 그쳐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예가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양립시킨 사례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점이 경험론적 주장의 취약점인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을 보편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개연성 면에서 현재까지는 양립불가능성의 명제가 절대적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권위주의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경제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동인(動因)을 권위주의체제로만 환원시킬 수는 없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단순히 권위주의체제가 아니라 그것이 ‘발전국가’(the developmental state)의 모습을 지닐 때 경제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 다시 말해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선택적 친화성’이 있는 것은 단순한 권위주의체제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발전국가’라는 것이다. 朴正熙 시대의 대한민국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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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2: 박정희 찬양´은 처벌해야 한다?

이정우, '독일에선 파시즘 찬양 처벌'


이정우 前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現 경북대 교수)이 26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성장 업적을 폄하하며, ´박정희 찬양´은 처벌되어야 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예상된다.

이 교수는 이날 ‘대한민국을 위한 3대 논쟁’에서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었나―박정희 체제의 공과’라는 제목의 주제 발표에서, 박 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밝혔다.

그는 “국민의 피땀 위에 이룩한 60∼70년대의 경제 성장을 박정희 개인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며 “개발독재가 경제 성장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학설은 최근 그 허구성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아울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이란 관점을 취한다면”이란 전제로 박 전 대통령 시대를 평가했다. 그는 “도저히 발전이라 부를 수가 없다”며 “(박정희 시대에)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가 말살되었으므로 그것은 발전이 아니고 후퇴의 역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지금 독일에서는 파시즘을 찬양하는 것이 처벌을 받는데 한국에서는 박정희 찬양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다”며 “박정희 신화의 극복 없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요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도 “온순하고 순박했던 우리 민족이 지금처럼 이기적이고 성급하고 포악한 성질을 갖게 된 것은 식민 지배와 해방 후 폭정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independent@independen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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