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手記/戰場과 남편과 여인(1)


네 아이를 데리고 戰線을 누빈 한 여인의 남편 찾기

大田형무소 대학살… 수감자 명단에서 발견한 남편 이름
나는 지청장댁을 찾아가 소리쳤다. 『내 남편은 죽었소. 당신들이 최후까지 직장을 死守하라는 무전을 친 덕분에 말이오. 당신네들은 닭까지 싣고 갔다지요』

임 성 연 충남 공주시 금흥동

꿈

나는 남북으로 길게 뻗친 길에 서서 북쪽을 바라본다. 갑자기 황소 한 마리가 뛰어 나와서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온다. 나는 무섭고 다급하여 남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황소가 뛰는 것이 빨랐다. 나는 당황하여 길 옆의 문 대신 가마니로 막은 방으로 들어가서 숨었다. 밖을 내다보니 황소는 이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부릅뜨고 숨을 헐떡거리며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다른 곳으로 숨을 곳을 찾으려고 둘러보니 방 아랫목에 어떤 여인이 흰 옷을 입고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는데 나는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놀라서 소리쳤다.

『엄마-!』
가위에 눌려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때가 「6월25일 새벽 4시」께다. 영원히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그 악몽, 그때부터 이 국가와 이 민족 그리고 내 가정에 비극이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오전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왠지 안색이 변한 남편이 방 한가운데 서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여보,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는데, 오늘 새벽에 38선에서 인민군이 국군 쪽으로 쳐내려와 지금 전투를 하는 모양이야!』
남편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쉬며 『전쟁이 터진 것같아…』하며 말 끝을 맺지 못하고 방을 왔다갔다 했다. 꿈에서의 무서움이 삼팔선이 터진 것과 똑같이 놀랍고 초조하여 나는 그 밤을 잠 못 이루고 그이와 함께 앞으로 닥칠 무서운 일들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우리 부부는 그날 밤 라디오만 쳐다보며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 하고 귀를 기울이고 밤을 지새웠다. 방송은 간단히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시켰다는 말뿐이었다. 방송을 들으면 안심이 되는 때도 있었으나 그래도 불안한 밤이었다.

패전한 순경들의 행군

다음날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도 등교하여 어린아기와 셋째, 그리고 78세이신 친정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는데 행길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궁금하여 나는 길가로 나왔다.

평상시 입는 양복차림의 남자들이 70명쯤 줄을 지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양복은 때가 묻고 얼굴들이 기가 팍 죽어 보이며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축 늘어진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보니 전방에 있는 순경들인데 인민군에 패전하여 여기까지 후퇴하여 다시 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벌벌 떨리는 발길로 집으로 뛰어오는 길에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새 소식이라도 있는지 궁금하여 그리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젊은 청년 4~5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셔츠바람으로 신도 짝짝이를 신고 있어 이유가 궁금하였다. 누구이며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울을 인민군이 점령하여 다급하게 뛰어나와 한강을 건너 고향 서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들은 말을 잘 받아주지도 않고 무엇인가 두려워했다. 순경들의 행군이나 그 청년들의 말을 듣고 방송과 실제는 다르다고 느꼈다.

나는 아이들을 보내달라고 학교에 전화를 했다. 전화받은 여선생이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그냥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시국에는 누가 빨갱이인지 알 수 없는 때라 모두가 의심이 나서 변변히 마음에 있는 말을 못하고 서로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었다.

식구들이 다 모였다. 나는 무조건 직장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남편은 내 생각과 달랐다.

『대전 본청에서 최후까지 직장을 死守(사수)하라는 무전이 왔구료. 만약 사수하지 않으면 총살이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송에서는 인민군이 후퇴했다고 하는데, 서울이 점령당했다고 하니 좌우간 정부를 믿고 기다려 봅시다』

순진한 공무원들이 이런 방송과 명령으로 인하여 피난을 못 떠나고, 남아 있던 병사들과 공무원들이 충남 홍성에서만 사백하고 수십 명이 공산당에게 붙잡혀서 학살당했다.

그 비극이 역사의 한토막이요, 30만 과부와 수백만의 고아들을 전국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대전본청 지청장님은 부산으로 피난갔는데 자동차에 닭까지 가지고 갔다고 한다. 후일 소문으로 들었지만…, 사실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해 봄에 일본인 후지가와데이 여사의 글을 읽었다. 2차대전 종전을 남편과 만주에서 맞이하고 북한을 지나서 달구지를 타고 오다가 걸어서 삼팔선을 넘는 도중 남편은 죽고 구사일생으로 자기 나라로 가서 공산당에게 그 무서운 고초를 당한 것을 글로 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산당이 무서웠다. 남편은 말했다.

『어린것들을 데리고 걸어갈 것이 막연하기도 하고 또 공산당과 그 이데올로기가 무섭다지만 그 사람들도 다 같은 민족인데 무조건 죽이진 않을 거요』

남편은 말을 계속했다.
『공산당을 취조할 때도 한 번도 억울하게 해본 일이 없고, 사형을 내린 일도 없었으니 화를 받을 일은 한 번도 안했소. 또 정부방송을 믿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국민이 정부를 믿고 각 부서를 지켜야 질서가 무너지지 않지, 공무원된 가정이 서둘러서 피난길을 먼저 떠나면 남은 일반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소』
남편의 이런 생각과 말들이 나의 초조한 마음을 늦추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부터는 서울서 오는 피난민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피난길

결국, 우리 가정은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시내에서 떨어진 서기과장댁으로 가기로 하고 남편은 그 다음날 그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기저귀 보따리만 들고 집을 떠나 큰 길에 나오니 피난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모두들 뭉쳐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서기과장댁에 찾아가서 그집 사랑방에서 밤을 새우는데 먼 곳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잠을 못 이루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남편이 뛰어왔다. 물병을 둘러멘 것을 빼고는 빈 손 그대로였다.

남편은 인민군이 예산 오가까지 왔으니(오리쯤 되는 곳) 빨리 떠나자고 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을 재촉하여 청양 방면으로 길을 정하고 떠났다. 그 길은 부여·논산을 거쳐 대전으로 갈 수 있다고 해서 그 길을 택했다.

오후쯤 되어서 어떤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남편은 이 동네에 사는 분의 자제가 서울본청 검사인데 친분이 있으니 요기 좀 하고 가자고 했다. 그 집을 찾아가니 서울서 아들이 아직 오지 않아 걱정을 하고 계셨다. 음식을 정성껏 차려주셔서 아이들도 잘 먹고 어머니께서는 처음 그렇게 많이 먹었다고 하셨다. 남편과 나는 초조해 밥이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 집을 하직하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자고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그때 길에서 배낭을 짊어진 남자 한 분이 다가왔다.
『아니! 한형 아니오?』
남편이 반가워했다.
『서울에서 왔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보안관계로 할 수 없고 한형은 나와 같이 정부가 대전인지 대구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좌우간 정부가 있는 데로 찾아갑시다』
『여보, 그 길이 최선인 것 같아요. 우리 부녀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은 별탈 없을 것이니 저분과 같이 가세요』
나는 이렇게 남편에게 권했다. 그러나 남편은 우리 식구들과 그분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가족들을 길가에 두고 떠나기가 무엇하니 형씨나 먼저 떠나시오. 나도 곧 갈 수 있겠지요』
그분도 인정하시고는 가던 길을 재촉하며 우리와 멀어졌다. 나는 왠지 마음에 아쉬움과 무엇인가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참 원통한 기회였다. 남편이 그분과 동행했더라면 전라도로 해서 부산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들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자기의 피난을 용기 있게 강행 못 하셨다. 가셨더라면 살아서 만났겠지….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남편의 불길한 육감

그날 밤은 얼마 못 가 어두워졌다. 우리는 공산당이 무서워, 어떤 동네에서 떨어진 창고 추녀 밑에 앉아 밤을 새웠다. 모기는 손에 칭칭 감길 정도로 많아서 남편은 네 살짜리 셋째아들을 안고 기저귀로 모기를 쫓고 나는 백일된 막내를 안고 모기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에선 어머니와 두 아들이 수건을 덮고 자고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있다가 조용하게 말문을 열었다.
『여보, 내 짐작이랄까? 내 육감에 공산당이 나를 죽일 것 같소. 공산당이 인텔리는 싫어한다니 큰아이와 당신은 노동을 해야 될 거요. 밭에 김도 매고 말이야. 내가 죽은 후에도 낯선 곳에 가서는 남편 경력을 이야기하지 말고 살아요』
나는 깜짝 놀라 핀잔을 주었다.
『그런 불길한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이런 대화를 들으셨는지 주무시던 어머니께서 일어나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가 늙어서 너희들에게 짐만 되는구나. 이젠 기력이 없어 너희들을 따라갈 수가 없구나. 또 방해만 되고 하니 여기 남아 있겠다. 세상이 평정이 되면 만나자꾸나. 나는 강당골 老장로님 댁이 여기에서 가까우니 그 집에 가서 피난을 하겠다. 너희들은 걱정 말고 떠나가라』

우리는 안된다고 말렸지만 어머니께서 깊이 생각하신 결론이라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老장로님께 보내는 간단한 메모를 남편이 피우던 담배갑 종이에 몇자 적어서 어머니께 드리고 작별하였다.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서서 어서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가슴이 막히고 샘 솟는 눈물을 닦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정오쯤 되어서 우리는 장곡면까지 왔다. 그곳 村民(촌민)들은 전쟁이 걱정도 안되는 듯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인지 주고받으며 웃고들 있었다. 우리 가족은 무서웠다. 남편도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우리는 장곡면에 남편과 친분이 있는 지방 유지집을 찾아갔다. 그 집주인이 우리에게 정중한 식사대접을 해주어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後聞(후문)에 의하면 그 집주인도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산을 넘으니 청양면이었다. 임씨라는 분이 그곳에 사는데 당시 국회의원이었다. 남편은 그 집을 찾아볼까 했지만 나는 반대하고 빨리 부여로 향하여 가자고 했다.

청양면 앞에는 젊은 청년들이 꽤 많이 모여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들은 해방이 되면 면 창고 곡식도 모두 나누어 준다는데 왜 인민군을 피하여 피난을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고향이 부여라서 그리로 가는 것이라고 하며 그곳을 재빨리 떠났다. 그때는 인민군만 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삼중의 고생이 있었다. 첫째가 인민군, 둘째가 지방 빨갱이, 셋째가 공습이다.

고개를 넘어 부여로 가는데 논길에서 뱀 한 마리가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갔다. 나는 마음이 섬뜩했다. 마귀의 상징인 뱀이 왜 우리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갔는가. 무슨 화근이 될 징조인지…. 초조했다.

무량사 주지 스님의 도움

우리는 온종일 걸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부여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물으니 그곳 사람은 턱으로 저기라고 했다. 그렇게 간단히 가르쳐주는 곳이 왜 그다지도 멀고도 먼지….

둘째가 열한 살인데 아버지의 물병을 받아서 둘러메고 불평 없이 따라왔다. 천성이 순하고 말이 없으며 아버지를 좋아해서 같이 가는 것이 신이 났는지 그대로 따라왔다. 아버지는 셋째를 업었고 나는 아기를 업고 있었다. 장남은 기저귀 보따리를 둘러메고 따라온다.

우리는 그날 밤을 부여 무량사에 가서 쉬기로 했다. 무량사 주지가 내 사촌동생과 우리 집에 왔던 것을 생각하고 그리로 결정했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었다. 그때야 무량사로 올라가는 입구가 보였다. 그길에는 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사람들 말이 옆바위 나루턱으로 가는 버스라고 했다. 상사 계급장을 단 군인이 동네사람과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저 군인에게 부탁하여 옆바위로 가자고 했다. 남편도 갈까말까하고 망설이는데 어떤 사람이 옆바위는 지금 건너편 국군과 이쪽 인민군의 전투가 터져서 나룻배 같은 건 없다고 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무량사로 올라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은 빨갱이가 보낸 선동자였던 것 같다. 그때 건너갔으면 부산까지 갈 수 있었겠지. 아니 고생이 되더라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자꾸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 가는 모양이다.

대포 소리는 이산 골짜기까지 간간이 들려왔다. 무량사를 찾아가니 주지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방을 하나 치워 주어서 우리는 오랜만에 쉬게 되었다. 식사는 적은 양의 꽁보리밥에 반찬은 콩알 같은 감자를 소금에 삶아서 주는데 그것도 감사했다.
3일이 지났는데 홍성에서 같이 근무하던 李검사가 찾아왔다. 남편이 이곳을 가르쳐 준 것이다. 갈 곳이 없으면 오라고…. 주지께 사정을 말하니 쾌히 승낙했다. 이 산중에는 스님 행세를 하는 사람이 몇명 있는데 진짜 스님 같지는 않았다. 모두가 우리와 같은 처지였다.

며칠 지나서 李검사는 홍성에 가서 가족의 소식을 알아보고 오겠다고 떠났다.
그 다음날 주지는 남편에게 이곳도 치안대가 조직돼 곧 조사가 있을 것 같으니 상좌아이를 데리고 논산을 지나서 고향길로 가고 우리 가족들은 차차 자기가 선처하겠다고 했다. 그 말대로 우리는 준비했다. 나는 남편에게 『여보, 만약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신을 찾으세요』 이렇게 당부하니 남편도 『응!』하고 대답했다. 주지스님이 치안대에 가서 가짜 증명서를 한 장 얻어 남편에게 주었다.

남편은 열일곱 살인 상좌와 같이 떠났다. 조금 있으니 홍성에 갔던 李검사가 되돌아왔다. 모든 유지들도 다 붙들려가고 치안대가 날뛰어서 할 수 없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이곳도 조사가 심하여 남편이 떠났고 李검사의 고향이 논산이라고 하니 그리로 떠나라고 말했다.

그때 내 마음도 불안해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먼저 떠났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였다. 그래서 李검사는 주지스님께 부탁하여 머리를 깎고 장삼을 한 벌 얻어서 입고 우리와 같이 절을 떠났다. 물론 李검사는 가짜증명서를 가지고 떠났다.
그분은 우리 가족 덕분에 화를 면했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훗날 우리 유가족은 그분에게 멸시를 많이 받았다. 이것이 세상 인심이지만….

무량사 주지스님은 내 사촌동생의 친구인지라 모든 편의를 도와주셨다. 지금도 건재하신지….
우리 가족은 李검사와 같이 무량사를 떠나 십 리쯤 되어 냇물을 끼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곳까지 나왔다. 동네에서 꽤 떨어진 곳인데도 치안대 완장을 두른 그 동네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피난민을 조사하고 괴롭혀 말 한 마디라도 수상하면 무조건 잡아갔다. 우리들은 겁에 질려서 그 후미진 곳까지 왔는데 먼 곳에서 남편이 그 상좌와 돌아오고 있지 않은가. 나는 놀랍고 안타까웠다. 무사히 떠났다는 남편이 돌아오니 말이다. 치안대가 알까봐 큰 소리도 못 내고 손짓으로 불렀다.

『왜? 돌아오세요』
『논산치안대에 끌려가서 조사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서울서 왔다고 하니까 도로 서울로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나루를 건너서 오는 길이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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