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우리를 폭격이 없는 길로 인도하소서』
고향 영동을 가려면 보문산서 대전시 대동시장을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길을 물어보니 보문산 뒤 도라지 고개라고 하는 높은 고개만 올라가면 바로 세천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고개의 옆 골짜기는 수천명의 보도연맹 사람들 시체가 꽉 찼다는 것이다.
썩는 냄새가 너무 많이 나고 무덤도 못 만들 정도로 시체가 많아 도저히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시내를 거쳐 세천고개를 향해 갔다.
인동시장 옆 굴다리쯤 지나는데 인민군이 장총을 메고 앞으로 지나갔다. 우리는 무서움도 두려움도 마음에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큰 비극에 마음이 마비된 모양인지 나는 아이들을 재촉하여 걸어갔다. 그때 비행기가 날아왔다. 나는 폭격맞은 함석조각을 머리 위에 얹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큰 아이가 말렸다.
『엄마, 비행기에서 망원경으로 다 보고 있으니 함석조각을 버려요. 차라리 여자인 것을 보여요』
우리는 무방비 상태 그대로 폭격에 부서진 길에 우뚝 서 있었다. 반면 인민군은 육교 밑에 바짝 붙어 있었다. 비행기는 빙빙 돌아보더니 떠나갔다. 하느님의 도우심이다.
그리하여, 세천길로 달음박질치는데 세천길 앞에는 아직도 폭격이 계속된다고 들어 우리는 신작로 길을 가면서 기도했다.
『주여, 우리를 폭격이 없는 길로 인도하소서』
국군의 후퇴를 도우려는지 그 수많은 비행기의 폭격은 참으로 어마어마하였다. 우리는 피난을 간 것이 아니라 전투를 따라 간 것이다. 후방은 조용하였지만 치안대라는 무서운 조직이 있어 도저히 숨어 살 곳이라고는 없었으니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아기를 업고 가고 있었는데 아기가 갑자기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아기를 길에 내려놓고 보니 숨을 헐떡거렸다. 나는 당황하여 먹는 물을 찾아보니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논의물을 젖병에 넣어서 아기의 입에 대주니 마구 빨아 먹는다. 목이 말라 아기가 숨이 가빠서 그런 동작을 한 것이다. 아기는 숨을 돌렸다.
또다시 우리 가족은 걷기 시작하였다. 길 옆의 작은 초가집에는 인민군이 그 술집 색시들과 같이 누운 것이 보였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세천고개를 올라갔다. 그 아래는 기차 터널인데 인민군이 장총을 『탕탕』 쏘아댔다. 우리는 그저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서 그 굴을 지나니 신작로 길이 나왔다. 다행히 폭격은 맞지 않았다. 우리는 한숨을 돌렸다. 옥천읍으로 들어가는 동네가 텅 비었고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우리는 무서워 이원으로 가는 길로 그대로 달음박질쳤다.
십 리쯤 갔는데 중년쯤 되는 남자 한 분이 책상보에다 무엇인지 싸서 둘러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음박질쳤다.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지나가 마음이 좀 놓였다. 길 양쪽에 큼직하고 번쩍번쩍한 대포알이 수없이 버려져 있었다. 미군이 후퇴시 버린 것 같았다. 큰아이가 그것을 만져보려고 했다. 나는 깜짝놀라 소리쳤다.
『위험하다.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아라』
전투만 따라다닌 내 아들
대전서 아침부터 굶고 아이들을 재촉하여 이원까지 60리 길을 왔는데 하늘을 보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시고모님댁은 산으로 피난가시고 아무도 없었다. 그때는 피난이라면 산으로 가는 것만이 최선인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었지만 우리는 그 산으로 악을 쓰며 올라갔었다.
멍석으로 텐트를 치고 옹기종기 앉았다가 『고모님』 하고 부르는 통에 고모님은 놀라서 말을 못 이으셨다. 그래도 살붙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좋았고, 십여일을 무서움에 떨다가 친척의 얼굴을 보니 우리는 긴장이 풀리고 한숨을 돌렸다. 영동으로 가는 길이라고 설명하였다.
공습이 없는 때를 틈타 보리밥을 지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오랜만에 먹는 밥이라 먹기에 정신이 없었다. 아기는 젖이 안 나와 숭늉물을 먹였다. 이틀을 지내고 나니 고모님은 우리들더러 떠나라고 하셨다.
『공산당이 산에 올라오면 피난민은 그 자리에서 죽인다고 하니 빨리 떠나거라』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 식구를 몰아내는 것이다. 참으로 막막하였다.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엄마, 오늘만 여기에 계세요. 제가 林山 할머니댁에 가보고 올게요』
高2인 큰애가 시집책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산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못 가게 막으려고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가슴을 조이며 그날을 그 산에서 큰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엄마-!』
큰아이가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반가움과 그 기쁨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임산까지 왕복 200리길을 다녀왔어요. 관터동리 할머니댁까진 못 가고 장터에 할아버지 계시던 집만 가보았는데 피난 가시고 아무도 없었어요』
큰애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가던 길에 황간 철교 밑에서 폭격에 맞아 죽은 사람들 모두가 팔다리가 하나둘씩 떨어져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 무서워 마구 달렸어요. 얼마 후 또 비행기가 날아와 아카시아 숲속에 숨었더니 가버렸어요』
후일에 들었는데 황간에서 큰 전투가 있었고 국군이 후퇴한 날이라고 한다. 내 아들은 전투만 따라다닌 셈이었다. 200리를 하루 만에 다녀왔으니 그건 필시 겁에 질려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마구 달리기만 했겠지.
『돌아오는 길에 길가 주막집 마루에 사람이 누워 있어서 쉴 수 있나 가보았더니 미군병사가 꼼짝도 않은 채 누워 있었어요. 죽은 것 같아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무서워서 돌아나오는데 발 밑에 카드가 한 장 있길래 주워왔어요』
큰아이는 성경구절이 인쇄된 카드를 나에게 보였다.
「시편 23편, 하느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네…」 라고 번역해 주며 『엄마에게 보이려고 주워왔어』 했다.
그 다음날 아침 고모님 말씀대로 떠나기로 하고 아이들을 들쳐 업고 산을 내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고모님은 통곡을 하고 계셨다. 우리는 산길로 논길로 걸었다. 고모님 말씀대로 큰고모님이 십 리쯤 되는 덜역동네서 피난한다는 곳을 찾아갔다. 그 동네는 집집마다 피난민으로 가득찼다. 이원서 대서하는 아무개라고 묻고 물어서 찾았다.
큰고모님은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우리를 마당 한구석에 앉히시고는 저녁밥을 자기들 먹는 중에서 몇 숟갈 되게 주셨다. 아이들에게 먹이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웠다. 하늘에 별은 총총하고 여름밤인데도 이슬이 내려 습기 때문에 아이들의 옷들이 젖어, 나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그 밤을 새웠다. 아침에 큰고모님은 어디를 가던지 듣는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감동의 手記/전장과 남편과 여인(3)
- 임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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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0-31, 1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