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朴槿) 전 유엔대사가 3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1987년 KAL 858기 폭파 사건 당시 주유엔대사로 절제된 용어로 북한의 만행을 규탄했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1959년 외무부에 입부한 고인은 주스위스·태국·벨기에·유엔대사 등을 역임한 원로 외교관이다. 그가 외교관이 된 것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 때문이었다. 1958년 미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교수로 미국에 남을 수 있었지만 '나라를 위해 힘써 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에 따라 귀국,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인은 온화한 신사의 풍모를 갖추었지만, 지난 20년간 애국운동의 최일선을 지킨 강단 있는 애국자이자 보수주의자였다. 과거 고위직에 있었던 분들 중에는 편안하게 한 몸 보존하면서 곱게 늙어갈 생각만 하는 분들이 많지만, 고인은 달랐다. 한미우호협회 회장, 밝고 힘찬 나라운동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했고, ‘아스팔트 우파’들과 거리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정과 멋의 한국보수주의》 《한국의 보수여 일어나라》 《자유 민주 보수의 길》등의 책도 냈다.
기자는 김대중 정권 시절이던 2000년 박 전 대사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고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썼던 기사를 다시 읽어보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마치 19년 뒤 지금의 대한민국 모습을 예견 한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 중 몇 대목을 소개한다.
-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보수주의’는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며, 그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보수주의는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권력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권력은 필요하지만, 권력을 무한대로 확장하여 권력의 힘으로 모든 경제·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대신 보수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의 힘을 믿습니다.
반면에 진보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개인에게 맡겨서는 안 되고, 국가 권력의 힘으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가장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공산주의의 본질은 국가주의-권력주의입니다.”
―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앞에 ‘자유’라는 말을 덧붙여 ‘자유민주주의’라고 얘기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는 다른 것입니까?
“‘민주주의’는 흔히 ‘민(民)에 의한 지배’, ‘다수(多數)에 의한 지배’라고 합니다. 이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폐지하는 것도, 재산을 몰수하는 것도, 반대당을 해산하는 것도 가능한 절대적 통치로 흘러갈 우려가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란 바로 다수의 이름으로 ‘자유’라는 기본 가치를 희생시킬 수 없는 민주주의를 말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다수의 결정권이 제한되는 민주주의입니다.”
― 직선제 개헌, 문민정부 출범, 여·야 정권 교체를 겪었으면서 아직까지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건국 후 공산주의라는 괴물과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부는 물론 야당과 이른바 ‘진보세력’까지도 공산주의를 닮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문재인 정권 하에서 ‘촛불혁명’ ‘적폐청산’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가 삭제된 민주주의’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회주의’가 횡행하는 현실이 떠오른다.
당시는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으로 인해 한미동맹의 약화가 우려되는 한편으로,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북한 총정치국장 조명록이 백악관을 방문하면서 미·북 관계가 급진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가 나오던 때였다. 미·일과의 관계에 대해 묻자 박 전 대사는 “우리 국민·엘리트·위정자들이 대미·대일관계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해 걱정”이라며, “미·일과의 관계는 우리의 행복·번영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유대는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 위한 선린(善隣)의 필요성에 따른 것입니다. 반면에 미·일과의 관계는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가치 위에 기반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정보화 시대에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첨단 기술을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미·일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 앞으로 미국은 남·북한간의 등거리 외교를 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익만 보장된다면 북한과도 손잡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지금 극동에서 미국의 가장 큰 관심은 중국의 패권(覇權)을 억제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제휴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중국과의 충돌을 피하는 방법으로 미국은 궁극적으로 중국이 민주화, 자본주의화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즉 단순한 세력균형정책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장’이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인 것입니다. 미국이 이러한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은 남한이지, 김정일 1인 독재 하에 있는 북한은 아닙니다.”
박 전 대사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기자는 “거기에 어떤 변수(變數)는 없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박 전 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 가지 변수는 한국 정부와 국민의 선택입니다. 한국이 북한과 함께 친중(親中)정책으로 선회하거나,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고 미국을 배척하는 상황 아래서 티토가 그랬던 것처럼 북한이 내부적으로는 공산독재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패권에 반대하는 정책을 편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대한민국의 전략적·경제적 가치로 보아 우리가 먼저 미국에 등을 돌리지 않는 한, 미국이 먼저 대한민국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19년 전 박근 전 대사가 만약의 가능성으로 생각했던, 한국이 북한과 함께 친중(親中)정책으로 선회하거나,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고 미국을 배척하는, 우리가 먼저 미국에 등을 돌리는 상황이 현실화되어가고 있다. 돌아가신 고인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