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남편 꿈을 꾸다
그날 밤이었다. 남편이 의사들이 사용하는 거울을 머리에 쓰고 환자의 입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집게로 내 입 안의 어금니를 쏙 빼는 것이다. 나는 『악』하고 놀라 깨었다. 악몽이었다. 그날 밤부터 남편의 生死(생사)가 걱정되고 불안하여 일손이 안 잡히고 좌불안석이었다.
좌우간 이 집을 떠나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신속히 알 수 있는 곳으로 갈 생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무조건 장터로 나왔다.
장터 면사무소 앞,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살던 큰 집이 있었다. 그 집은 부녀동맹사무소로 사용했는데 텅 비었고 방들은 하나같이 몸둘 곳이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우선 방을 청소하고 아이들을 놀게 했다. 먹을 것을 구해야 되겠는데 막연했다. 아랫방을 들여다 보니 인민군이 도망가면서 두고 간 모양인데 그동안 집집마다 보릿가루를 만들어 거둬 갔던 보릿가루가 몇 주머니 남아 있었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구세주 같았다. 그 가루로 죽을 쑤었다. 우리는 보리죽이나마 배를 채우고 처음으로 장판방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그 밤에 별안간 대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간다고 대답을 하고는 큰아이에게 뒷문으로 나가서 숨으라고 말하고 아기를 안고 대문을 열었다. 인민군 두 명이 들어오면서 호통을 친다.
『왜 빨리 문을 안 열었소?』
『저는 피난민인데 자느라고 몰랐어요』
『아랫방에 보릿가루 주머니가 있으니 가져오시오』
『네? 그런 게 있었어요?』
인민군은 아랫방에 그 보릿가루 주머니를 둘러메고 나와 나에게 먹으라고 한 주머니 꺼내주고는 가 버렸다. 그 몇분 안되는 시간에 꼭 죽을 것만 같아서 벌벌 떨었다.
그날밤부터 며칠 동안 어둡기만 하면 집 앞에 길이 꽉 차게 사람들이 지나갔다. 남자, 여자, 아기를 업은 여자, 인민군도 있고 평상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낮에는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태백산을 따라 이북으로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방 빨갱이들이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지나가다 면사무소 창고에 가서 부잣집, 반동분자의 살림을 압수한다는 명목으로 코트, 털옷, 겨울옷을 전부 짊어지고 갔다.
밤에는 인민군공화국
밤새도록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백 명인지 수천 명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식구는 무서워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지방 빨갱이들이 태백산 능선을 타고 이북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낮에는 경찰, 미군과 국군이 전차까지 끌고와서 산으로 대포를 쏘았다. 그러나 해가 지면 후퇴해 동네 민간인만 남았다. 밤이면 인민군이 지나가면서 태극기가 보이면 누가 달았냐고 욕을 하며 죽인다고 호통을 쳤다. 그러니 밤에는 인민군 공화국이었다. 음력 8월20일쯤인데 논에 벼이삭이 누르스름하게 익었다. 손으로 벼알을 눌러보면 액체가 아니고 쌀이었다. 시아버지가 심은 벼도 누렇게 됐다. 나는 논에 가서 손으로 벼를 훑어 불을 때고 솥에다 볶았다. 그것을 절구통에 넣고 찧으니 쌀동가리가 나와서 죽을 쑤어 먹었다.
미군이 전차로 처음 이 산골로 들어오는데 나는 반가워서 울었다. 자꾸 눈물이 났다. 미군은 나에게 양담배를 한 갑 던져 주며 『오케이?』 했다. 그 담배는 내 옆의 아랫방 남자가 낼름 주워갔다. 하루는 인민군 한 명이 도망쳐 동네로 내려왔다. 그 사람을 뒷방에 재워 주었다. 다음날 경찰이 데려갔다. 아마 포로수용소로 갔겠지. 신고 안했더라면 민간인이 됐을 텐데….
남편의 죽음
하루는 대전에서 왔다는 남자를 만났다.
『대전형무소는 빨갱이들이 후퇴시 우익 사람들을 죽여서 우물에 버려 우물에는 시체가 마치 김치나 단무지처럼 가득 찼어요. 성당 뒤에 있는 형무소 뒷산 골짜기는 사람들을 꿇어앉혀 죽여서 시체가 산같이 쌓였는데 모두들 상해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어 그대로 국군들이 묻어 버렸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요동을 쳤다. 이렇게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대전을 거쳐 홍성으로 가자고 결심했다.
그 다음날 신발이 없어서 거름 무더기에서 고무신 한 짝을 주워 흰 것과 검정을 짝짝이로 신고 아이들을 앞세워 황간으로 걸어나왔다. 매곡을 지나 안골쯤 오니 피난갔다 돌아오시는 시아버지를 길에서 만났다. 나는 경황이 없어 반가운 줄도 모르고 할 말이 없어 그저 쳐다보고는 홍성으로 간다고 말씀드렸다. 시아버지도 그것이 좋겠다고 어서 가라고 하셨다.
황간에 가보니 객차는 없고 군수물자를 실은 화물차만 가득했다. 역전에 가서 동정을 살펴보니 지프차만 실은 기차가 정차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 기차에 올라탔다. 빈 자리에 아이들을 앉히고 밖의 동정을 살필 때 기차가 떠났다. 하룻밤이 지난 후 대전에 도착했다. 우리는 재빨리 내렸다. 이렇게 타고 내리는 것이 그 시절의 교통수단이었다.
나는 무조건 대전재판소로 갔다. 아직 정돈이 안되었고 어수선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남편과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다.
『남편을 찾으러 왔어요』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우리들은 직장이 대전이라서 교통이 편해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대전이 9월25일에 탈환됐다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경찰관들과 함께 와서 형무소로 가보니 인민군이 수백 명을 죽였는데 성당 뒷산에 가보니 시체가 이루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형무소 사무실에서 수감자 명단서를 발견하여 살펴보니 홍성, 천안재판소 사람들 명단 중에 한형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형자 명단은 그 놈들이 아예 작성을 안했는지 없었습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도 엄청난 사실에 나는 정신이 없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짝짝이 고무신을 신고 지청장댁을 찾아가니 헌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는 말도 없이 현관에서 찾으니 부인이 내다보다 쑥 들어가고 만다. 나는 소리쳤다.
『내 남편은 죽었소. 당신들이 최후까지 직장을 死守(사수)하라는 무전을 친 덕분에 말이오. 당신네들은 닭까지 싣고 갔다지요』
악을 썼다. 보초 서는 헌병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큰아이가 가자고 했다. 뒤돌아서 기차역으로 가면서 『죽었다고, 죽었다고, 죽었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아이들이 있다. 이 무거운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울 시간도 없다. 뒷일 처리를 생각해야지…』
먹지도 못한 몸에 여름옷을 입은 그대로 9월에 군수물자를 실은 화물차에 올라탔다. 화물차는 뚜껑이 없었다. 머리는 마구 날리고 옷은 돌돌 말렸다. 아기는 울고 아이들은 눈에 까만 것이 멍하니 앉았다. 열한 살짜리 둘째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에 철든 형보다 먼저 통곡을 했다. 아무리 달래도 막무가내다.
『아버지- 아버지-』
둘째는 아버지와 뜻이 잘 맞아 아버지가 낚시를 갈 때는 꼭 같이 가서 다래끼를 메고 오며 신나서 좋아하던 아이였다. 둘째가 너무도 서럽게 우는 통에 나는 눈물보다 가슴이 답답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비수로 이 가슴을 찔러보면 피가 날까, 아플까….
남편의 집무실
군용기차는 천안으로 갔다. 나는 아이들을 재촉하여 천안에서 내렸다. 천안서 의사이신 金장로님댁을 찾아갔다. 친절히 대하는데 그 집도 빨갱이들에게 다 압수당하고 사람만 남았다고 했다. 몇 시간 쉬었다가 홍성으로 길을 떠났다. 그 길에는 군용차도 안 지나가 걸어가야만 했다. 예산까지 가서는 어떤 동네에 가니 사랑방에 피난민이 몇 사람 자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방 구석에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이들에게 밥알이 조금 둥둥 뜨는 숭늉 한 사발을 얻어주고는 또 걸었다. 40리길을 걸어서 신곡리까지 갔다. 10월1일 정도인데 무척 추웠다. 큰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가 여기 길가집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계시면 제가 혼자 홍성에 들어가서 정세를 살펴보고 올게요. 너무 외관이 초라하니까 집에 옷이 남아 있으면 가져올게요』
세 아이와 나는 길가 주막집 방에서 쉬고 큰애만 보냈다. 몇 시간 후 아이가 돌아왔는데 교회 金전도사님과 같이 왔다.
『우리집에는 꼬챙이 하나 없이 지방 빨갱이가 다 가져갔어』
金전도사님이 자기 솜바지와 치마 목도리를 가지고 오셨다. 그분 집도 비워두었던 사이에 옷 상자가 다 털렸다고 하셨다.
나는 그 옷을 얻어 입고 그 짝짝이 고무신을 신고는 홍성 우리 집에 갔다. 가보니 사택인데 임시 서기라는 사람이 살면서 비워줄 생각도 안했다. 할 수 없이 그 옆 적산집을 우리가 한 채 얻어가지고 들어갔다. 이웃과 재판소 직원들이 모두들 왔다갔다. 그러나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너무나 큰 일 뒤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홍성의 피난 못 간 지방유지와 관리들은 모조리 지방 빨갱이들에게 430명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알던 사람은 얼마 없었다. 또 국군이 이곳을 탈환할 때 좌익 중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은 죽고 식구들은 도망가 전부 빈집이라고 했다. 읍장이 인사차 왔다가 우리집에 이불은커녕 입을 옷도 없는 것을 보시고는 빨갱이가 도망간 집에서 주운 광목 홑이불 하나와 담요 하나를 보내주었다.
이틀쯤 되어서 강당골에서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오셨다. 우리 친정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사위가 죽은 줄도 모르시고 밭에 콩잎새도 따주시며 3개월을 계셨다고 하셨다. 하루는 그 장로님이 오셔서 『난리가 끝났으니 할머니께서는 홍성으로 가 보세요. 딸이 돌아왔을 거예요』라고 해서 빨리 오셨다고 하셨다. 어머니도 옷이 없으셨다. 담요는 아이들 윗도리를 만들어 입히고 광목 홑이불은 내 치마 저고리를 만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밤새도록 바느질을 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정신을 집중시켰다.
어머니께서 몸이 가려워 죽겠다고 하셔서 속옷을 벗겨보니 이게 웬일인가, 온몸에 이가 득실거렸다. 밤새도록 이를 잡았다.
11월에 재판소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죽은 네 사람들의 위령제를 지내주고 유가족에게 30만원씩 위로금을 주었다.
그때는 물가가 올라 화폐가치가 없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위령제 때 재판소에 갔다가 식이 끝나고 남편의 집무실을 보았다. 남편이 앉아서 일하던 그 의자와 책상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남편이 생각났다. 생전에 평상시에는 이곳에 한번도 못 와보고 이제 죽고 없는 이 빈 책상을 구경하는구나.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한 원통함과 분함과 부끄러움이 앞섰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밖에서 남편의 구둣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 같고 꼭 퇴근해서 들어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 죽음….
다시 기차 꼭대기에 올라 南行
미처 정신 차릴 새도 없이 1·4 후퇴를 해야 했다. 이번에는 남보다 먼저 떠난다고 서둘러서 12월26일에 떠났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홍성을 떠났다. 그때는 기차가 있어 천안을 가니 서울과 北에서 온 피난민이 너무 많아서 기차 꼭대기밖에는 자리가 없었다. 눈은 펑펑 오는데 어머니를 부축하여 꼭대기에 올라와 아이들을 헌담요 조각으로 감아 앉히고 우리는 南으로 향했다.
그 기차는 순순히 떠나는 것이 아니다. 역에 서기만 하면 석탄 싣고 물 넣고 천안에서 황간까지 4일 동안 그대로 기차 꼭대기에 앉아서 먹지도 못하고 추위와 싸웠다. 아이들은 그래도 졸고 있는데 내가 만일 잠이 들면…. 기차가 흔들리면 땅으로 떨어질 판이니 그야말로 몇 사람을 내가 붙들고 가는 꼴이었다.
부산까지 가는 모양인데 우리는 방한 준비도 너무 부족하고 또 황간서 내려 임산 시댁에 가서 행동을 같이 하려고 하차를 했다. 내리려고 보니 어머니께 둘러준 이불이 얼어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두고 우리는 하차했다. 황간역에 내리니 그 추운 때 피난민들이 이불을 몸에 두르고 그 광장에 주욱 누워 있었다. 오죽이나 피로하면 맨땅에 누웠을까. 상상도 못할 광경들이다.
우리는 임산까지 걸어갔다. 몇 시간을 갔는데 어머니는 지팡이를 잡고 숨을 쉬느라고 「쌕쌕」 소리가 났다. 그래도 셋째와 둘째는 큰댁에 간다니 생기가 나는 모양이었다. 큰아이는 네 살 된 동생을 업고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는 큰댁에 오니 시부모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방위대가 밥을 해주고 식구가 얻어 먹고 있었다.
시부 말씀이 인민군이 한강을 아직 건너지 못한 것 같으니 만약 오산까지 왔다면 돈 한푼 없더라도 부산으로 같이 떠나자고 하셨다.
우선 시모 사는 집 길가에 있는 골방을 비워달라고 하여 거기에 살기로 하였는데 너무 작아서 여섯 명은 무리여서 어머니는 관터 시모댁에 가서 사돈간에 함께 있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결정이 매우 잘못됐다.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오죽이나 불편하며 시장도 하셨을 것이다. 방이 작더라도 모시고 있었으면 옆구리도 아프지 않고 더 오래 사셨을는지….
나는 멍텅구리였다. 나이 서른아홉 살이나 되어도 부모님의 괴로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편한 것만 생각했으니 한이 된다.
다시 홍성으로
그 다음해 3월이 되어서 인민군과 중공군이 후퇴했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식구는 다시 홍성의 살던 집을 향하여 가기로 했다. 생활이 막연하고 아이들 학교 관계도 있고 해서….
그때는 피난민들이 北으로만 가는데 기차편은 새로 규칙이 생겨 화물차도 못 타게 됐다. 모두 다 걸어갔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데 어머니는 옆구리가 아프다고 하시며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걸음이 둔해지고 괴로워하셨다. 황간에서 대전까지 가는데 이원 못 가서 어떤 젊은 남녀가 서울을 간다며 따라왔다. 여자말이 대전인동교회 백목사님과도 잘 안다고 했다. 크리스천인데 잘 믿는 척했다. 가면서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 대전 가면 남자형님이 사는데 점심값을 빌려 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 몇 달 생활하고 난 후라 겨우 몇 푼밖에 없었다.
순진한 나는 내 마음 같은 줄 알고 그 사람에게 점심값을 빌려 주었다. 이 사람들은 계속 같이 갔는데 시고모댁에까지 따라 왔다. 윗방에서 같이 잤다.
60리를 종일 걸어서 대전까지 와서 어머니는 홍성에 안 가신다고 하시면서 너희들이나 가서 살길을 연구해 보라고 하시고 대전 사촌 오빠집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 남녀가 그때도 따라오면서 신발이 없으니 돈을 좀 꾸어 주면 저녁 때나 내일 아침에 형을 만나니 꼭 갚겠다고 사정을 했다.
나는 한푼 없이 남은 돈을 다 주었다. 신발을 사 신고 와서 우리가 자는 방에 같이 자는데 자다가 보니 남녀가 없었다. 도망간 것이다. 나는 그 돈을 한푼도 못 받고 공주, 예산을 거쳐 홍성까지 오면서 먹지 못하고 아이들을 고생시켰다.
일생을 두고 잊어버리지 못할 괘씸한 이북남녀. 그렇게 종교를 팔고 어린 자식이 있는 여인의 돈을 송두리째 털어 가다니…. 무서운 악질들이 괘씸하였다.(끝)
감동의 手記/전장과 남편과 여인(5)
- 임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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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06, 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