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설득에 돌아서는 중립국들-박근 대사 “北은 몽상에서 깨어나라”

30년 만에 공개된 외교문서, KAL858 폭파사건 막후 외교 血戰 비화(4)
⊙ 미국이 한 발 빼는 사이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사국 설득, 안보리 회의 개최토록 돕다
  ⊙ 《레이건 일기》에 등장하는 김현희
  ⊙ 결의안 채택 대신에 폭로 전략으로 전환
  ⊙ 중국과 소련도 북한 편들지 않아
  ‌⊙ 朴槿 유엔대사의 감동적 연설, ‘대한민국은 괴물(北)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았다’
  ⊙ 미국, 北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 일본에선 납치자 문제 등장
  
  韓日 설득에 찬성으로 돌아서는 중립국들
  
  일본은 중립적인 국가들과 계속 접촉해 입장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계속해서 정보를 공유했는데, 2월 9일 의제 채택 찬성국이 9개국이 됐다는 분석을 한국에 전달했다. 일본은 소련과 중국·잠비아는 반대입장을, 브라질은 반대 혹은 기권 가능성이 높은 국가, 알제리는 반대 가능성이 큰 국가로 분석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 우호적인 6개국에 아르헨티나와 네팔, 세네갈이 포함돼 9개국이 동의할 수 있고 유고 역시 찬성표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을 한국에 전했다. 2월 10일 일본 정부는 브라질과 유고의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며 10개국의 찬성을 확보한 것 같다는 내용을 한국에 전한다. 이규호 주일대사는 최광수 장관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1. 2.10. 11:00 외무성 모찌쯔기 과장이 이규형 서기관에게 연락해온바 보고함.
  
  가. 브라질(2.9. 브라질 외무성이 현지 일본대사관에 통보)
  
  브라질은 KAL기 사건을 안보리에서 토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으나, 일본 정부의 요청을 고려,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 의제 채택 여부에 관한 투표 시 찬성하겠음.
  
  - 의제 내용 자체가 안보리 토의내용을 PREJUDGE(예단)하지 않아야 함.
  - 본 건이 국련헌장 제34조 및 제35조에 따라 안보리의 권한 범위 내에서 토의돼야 함.
  - 안보리 토의 내용은 상호 정보교환의 차원이어야 하며, 결의안이나 의장성명 등이 채택되지 않아야 함.
  
  나. 유고(2.9. 자가얏치 외무성 아주국장이 일본대사 대리에게 표명한 입장)
  
  - 유고는 본 건이 안보리에서 토의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며(NOT BE AGAINST), 안보리 토의 시에는 유고도 동 토의에 참가 예정임.
  - 다만, 동 문제를 토의함으로써 동 사건에 따른 현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에는 반대함.
  - (의제 채택 여부에 관한 투표 시 찬성할 것인가라는 일측 질문에 대하여) 타국의 태도를 포함, 전체적으로 검토하여 금후 결정할 것인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임. 입장이 결정되면 일측에 연락하겠음.
  
  2. 모찌쯔기 과장은 브라질이 의제 채택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결정함으로써, 투표 시 10국의 찬성은 확보된 것으로 보이며, 유고의 경우는 찬성할 가능성은 없는 것은 아니나, 기권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한다고 언급하였음.〉
  
  이 보고가 전달된 것은 2월 10일 오전 11시41분이었다. 한국 정부는 10개국이 찬성할 것이라는 일본의 분석을 접하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 장관은 이날 오후 3시 이규호 일본대사에게 전보를 보내 뉴욕시각으로 2월 10일 안보리 소집 요청 공한을 제출할 것이며 일본도 거의 동시나 직후에 제출할 것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한국과 일본은 안보리 회의 소집 요청 서한을 서로 협의해 제출했으며, 유엔 안보리는 2월 16일부터 17일까지 양일간 관련 회의를 개최하게 됐다.
 


이규호 주일한국대사가 1988년 2월 9일 “일본의 분석에 따르면 안보리 이사국 중 9개국이 회의 소집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내용을 최광수 외무장관에게 보고하는 문서.

최광수 외무장관이 1988년 2월 10일 이규호 주일한국대사에게 안보리 회의 소집 서한 제출 계획을 알리며 “일본도 같은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할 것”을 지시하는 문서.
  
  박근 대사 “北은 몽상에서 깨어나라”
  
박근 전 주유엔대사.
  2월 16일 오전 11시부터 유엔 안보리 1차 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투표 없이 채택됐다. 소련 측은 “이 사건이 안보리 토의에 적절치 않으며 한반도를 긴장시키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으나, 이런 입장을 회의기록에 남겨둘 것만 요청하고 의제 채택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한국과 일본·북한·서독 순으로 연설이 있었고, 미국과 북한의 답변 발언이 진행됐다. 박근(朴槿) 유엔대사(지난 3월 15일 작고)는 2월 16일 회의에서 독일의 철학가 니체의 명언을 언급하며 한국과 북한의 상황을 비교했고, “한국에 와서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는 김현희의 증언을 소개하며 북한에 압박을 가했다.
  
  “한국은 북한의 지독하고 오랫동안 지속돼온 적대행위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독일 철학가의 충고에 담긴 지혜를 한 번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신식 경제체제를 확장하는 열린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반면 북한에는 속임수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통제와 억압이라는 괴물과 같은 국가기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국가가 직접 지휘하는 북한의 테러행위는 이런 괴물과 같은 정권의 천성(天性)이다. (중략) 그녀(김현희)의 발언들은 대한민국의 궁극적인 강력함과 북한의 근본적인 취약함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발언들은 북한 당국에 대한 마지막 경고가 돼야 한다. 우리는 북한이 너무 늦기 전에 깨어날 것을, 이 오랜 몽상(nightmare·악몽)에서 지금 깨어날 것을 촉구하고 싶다.”
  
  
  北, “미국이 테러국가”
  
  2월 17일 외무부가 작성한 토의 결과 보고서에는 “소련을 제외한 중공과 잠비아 등 친(親)북한 공산국가조차 중립적 발언을 하거나 북한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알제리와 브라질이 발언하지 않은 점은 북괴 만행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서도 파나마와 쿠바, 인디아 항공 등 추락사건이 미국 정부 테러에 의한 사건이라는 등 미국을 테러국가라고 주장함으로써 안보리 의장인 미국대사가 그러한 쓰레기 같은 소리(SUCH RUBBISH)를 안보리가 참고 들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고 했다.
  
  북한은 이날 회의에서 KAL기 사건은 모두 한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며 일본과 미국, 그리고 바레인까지 공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은 김현희를 서울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한국이 바레인 측에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줬다는 주장을 했다. 바레인은 “북한과 외교 관계가 있었다면 단교(斷交) 조치까지 검토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최광수 외무장관은 2월 17일 안보리 회의가 끝난 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안보리 토의 내용을 보고했다. 최 장관은 “미국 유엔대표부 측은, 아국이 온건하나 침착하고 외교적인 연설을 통해 전체 안보리 이사국을 확신시키는 데 성공한 데 반해, 북한은 비논리적이고 저속한 발언으로 궁경(窮境)에 몰려 아측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평가했다”고 했다. 일부 보고 내용을 소개한다.
  
  〈3. 북한은 오늘 발언에서 바레인을 자극, 비난함으로써 바레인은 두 번 발언을 통하여 북한이 바레인의 범죄인 인도에 한국이 위협하고 뇌물을 제공하였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일본 대표는 한국과 일본의 합의하에 범인을 한국으로 인도시켰다고 하는 북한 대표의 발언이 근거가 없다고 반박하였는바, 이에 대하여 북한은 답변권을 행사, 일본은 군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시아 국가를 재침하려고 하고 있으며 한-미-일이 공동으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는 등 억지 주장을 하였습니다.
  
  4. 소련·중공·잠비아 등 북한에 동정적인 발언을 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국가들도 모두 테러행위는 어떠한 국가에 의하여 저질러졌느냐를 막론하고 규탄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만 금번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진상이 더 밝혀져야 한다고 하여 금번 사건이 한국 조작이라는 북한의 주장을 옹호하는 발언은 하지 않는 것이 주목되었습니다.〉
  
  2월 24일 주일대사관의 박련 공사는 무라타 외무사무차관과의 면담 내용을 최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무라타 차관과 만난 자리에서 KAL기 사건의 안보리 토의 관련 일본 측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지에 사의(謝意)를 표하였는바 무라타 차관은 일측도 금번 안보리 토의 결과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박근 주유엔한국대사가 1988년 2월 17일 안보리 회의가 끝난 뒤 결과를 최광수 외무장관에게 보고하는 문서.
  
  김현희 “진실이 싫고 북한을 옹호하고 싶은가 봅니다”
  
1989년 3월 7일 첫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에 출두한 김현희. 일부 세력은 아직까지도 KAL858기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 한국은 안기부 수사 발표 직전부터 미국, 일본과 공조해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전략을 취했다. 한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채택은 거부권이 있는 소련과 중국으로 인해 사실상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한 다음 일단 회의를 소집, 세계 앞에서 북한 정권을 고발하는 전략에 주력, 성공하였다.
  
  그런데도 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사람들은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결의안이 채택되지 않았고 이는 한국의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이 사건을 추적해왔다는 한 신부는 201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관련 기사를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안보리에서 한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나라는 미국뿐이었습니다. 7개국의 나라는 한국 입장을 비판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북한이 테러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했지만 증거물과 객관적 사실들을 제시하지 못한 부분이 참가국들에는 설득력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한국이 강력하게 주장한 UN 안보리의 ‘대북규탄 결의안’ 채택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주장이 담긴 기사는 사건 발생 30년이 되던 해인 2017년에 게재됐다. 냉전(冷戰)시대인 30년 전 소련과 중국조차도 안보리 회의에서 하지 않던 주장들이 30년이 흐른 지금도 피해국 언론의 지면에 소개되고 있는 판이다. 김현희씨는 사건 발생 30주년이던 2017년 11월, 김영남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가짜로 모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글쎄요. 제가 유일하게 살아 있고 그 수많은 증언과 증거가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아무리 진짜라고, 아무리 진실이라고 말해도 그들은 진실이 싫은 것 같습니다. 북한이 했다는 이 테러의 진실이 싫고, 북한을 이념적으로 옹호하고 싶은가 봅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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