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헬기 위협사격 지시 모두 따르지 않았다”
-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준현 준장이 광주천에 위협사격을 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대대장께서는 서면 명령이 없는 이상 이를 따를 수 없다고 말했는데, 대대장은 안 했어도 밑에 있는 다른 사람은 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지휘관이니까 전교사 상황실에 가서 제가 보고하고 명령받은 것은 저밖에 없습니다. 제 밑에 있는 다른 사람이 가서 명령 달라고 해서 줍니까? 지휘계통이 있는데. 지휘관에게 명령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후 저는 광주 시내 정찰 임무를 맡았습니다. 11공수부대 가는 길을 엄호하라는 명을 받아 엄호를 했습니다. 보통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이내에 연료가 떨어지기 때문에 다시 광주비행장에 내려왔습니다. 내렸는데 전교사 사령부에서 긴급히 11 공수여단 있잖습니까, 공격을 받고 있다고 지원사격을 하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내려가서 사격 지시를 두 번 받았습니다. 도저히 못하겠다, 역사적인 거잖아요. 굉장히 위험하니까. 만일 사격해 부상자가 있으면 모든 책임은 제게 100%…그게 문제가 아니라…시민들이 전부 불바다가 되잖아요. 제가 11공수여단 이동의 엄호지시를 받았는데 전교사에서부터 긴급히 출동해 지원사격을 하라고 했는데요. 헬기에 비상 FM 무전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전교사 상황실하고 바로 교신이 됩니다. 그것이 저하고만 하는 겁니다. 제가 지휘관이니까. 교신을 하니까 11 공수여단장이 무선주파수로 들어왔습니다. 큰일 났다고. 빨리 오라고. 제가 출동했습니다. 출동했는데 11공수대대 맨 앞에 APC 있잖아요.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뒤 트럭도 불타고 있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내려가지고 전방에 있는 야산에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빨리 야산 쪽으로 지원 사격해달라고… 사격을 했으면 불바다가 됐을 겁니다. 거기에는 동네도 있었어요. 코브라에는…미사일을 쏘기 위해서 TSU, 망원조종경이 있습니다. 13배로 확대됩니다. 13배로 확대해 보니까 (어깨에) ‘나를 따르라’(라는 문구가), 바로 보병학교 사격교도대인 겁니다. 사격교도대가 거치해놓고 있는데 공수부대가 교대한다고 가니까 맨 앞에 APC이거든요, 사격교도대에서는 착각한 겁니다. 시민이 APC하고 군용차량을 탈취해서 오는 거다라고 말이죠.
- APC가 정확히 뭡니까?
“장갑차입니다. 장갑차가 맨 앞에 서서 가는 겁니다. 거기에서 무반동총, 굉장히 정확하거든요, 사격교도대에서 사격하니까 그 산에서 한 700~800m 거리가 될 거에요. 거기서 맞아가지고 불이나고 병사들 쓰러지고 하니까 11공수여단장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병학교 교도대가 자신들을 사격할 것으로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마 시민군이 공격한 것으로 착각한 겁니다. 제가 13배 확대해 보니까 보병학교인 겁니다. 그래서 바로 광주 전교사에 무전으로 ‘같은 우리 군인들이다. 사격 중지명령 내려라’라고 하니 안 된다는 겁니다. 통제 불능이라고. 공중에서 계속 돌면서 사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네도 있었는데 우리 아군끼리 피해가 있지 않았나…저는 공중에 있었으니 상세한 것은 몰랐습니다만. 저는 그 때 상황 판단을 해 사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총으로 피격된 헬기 직접 목격…운이 좋았다”
- 광주에는 5월 22일에 도착하신 거고 백승묵 당시 203 대대장은 21일에 도착해 피격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공비행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피격을 당했기 때문에 아마 (제가 탄) 코브라를 내려 보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APC, 경장갑차, 장갑차를 탈취하고 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코브라를 내려 보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 피격당한 헬기에 대해서도 직접 얘기를 들으신 적 있습니까?
“봤죠. (보셨다고요?) 왜냐하면 광주비행장에 같이 다 있습니다. 제가 광주비행장에 22일 내려가서 27일까지 있으면서 식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보급로 있잖습니까? 보급로에 군용차량이 못 다녔어요. 광주비행장에 있는 병사들 라면 사서 끓여먹었어요. 부식하고 식량이 들어오질 않아 어렵게 지냈습니다. 그 많은 병사들이. 군인이니까 얼마든지 견딜 수는 있죠.
- 피격된 헬기는 뭐에 맞았습니까?
“그때 제가 내려가니까 그 헬기가 계류장에 있었습니다. 꼬리부분에 여섯 발을 맞고. 제가 실탄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가 봤을 때는 소화기탄이에요. (소총?) 네 소총인 것 같아요. 기관총 같으면 ‘드르르륵’ 해가지고 헬기 끝(꼬리)에 작은 (프로펠러가) 있는데, 방향을 조종해줍니다. 여기에 맞았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추락하잖아요. 운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여섯 발 중에서 이 꼬리 (프로펠러)부분이나 조종사 부분에 맞았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제가 월남전에서 헬기 타고 조종했기 때문에…헬기 조종사들 수없이 많이 죽었거든요. 제 동기생들은 다 미군, 미 항공학교 조종사들인데, 다 전화로 조종사 누가 죽었고 누가 죽었고, 데이비드 죽었고…헬기 저공 비행을 하니까 제일 치명타가 조종사 있는데 맞으면 추락합니다. 그 다음이 블레이드 날개입니다. 그런데 코브라는 모든 게 방탄으로 돼 있습니다. 조종사 의자도 방탄, 다 방탄이 돼 있습니다. 소화기에 대해서는 안전했지만 (피격된) UH1은 다르거든요.'
“국가와 항공의 명예를 위해 조비오 신부를 고소”
- 약 40년이 흘렀습니다. 조비오 신부, 피터슨 목사 등 여전히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착각이죠. 저는 피터슨 목사하고 성녀 한 분하고 그 분에 대해서는 고소건에 안 넣었습니다. 한 번도 만나보지도 않았고 그 당시에 크게 부각되지도 않았고. 단지 그 때 제일 많이 부각되고 한 것은 조비오 신부님이었습니다. 저도 가톨릭 신자로서 신부님이 그렇게 하니까 너무 안타깝잖아요. 신부님 절대 아닙니다, 신부님에게는 얼마든 고해성사하듯 말씀드렸어요. 나중에 신부님이 착각했다는 게 역사로 증명됩니다. 헬기 사격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일인데, 이걸 사격했다고 하면 신부님 혼자만 봤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광주에 대학생들이 얼마나 많아요, 조선대학교, 전남대학교, 고등학생들, 어린애들 얼마나 많아요. 남녀노소 없이 다 나왔잖아요. 저도 광주에서 고등군사반이나 다 광주에서 (교육) 받았거든요. 광주사람들 아주 친절하고 좋아요. 조비오 신부님이 광주 본당 신부님이었으니까, 신부님이 착각이라고 판명됩니다,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항공 명예를 위해서, 국가 명예를 위해서, 항공 헬기가 사격을 했다면 역사에 얼마나 오점입니까. 그래서 저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항공의 명예를 위해서 신부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습니다.'
- 결과는 불기소 처분이었다고 하셨는데요.
“네 불기소 처분이었습니다. 이게 왜 불기소 처분이라고 했는지, 정치적인 판단을 한 것인지, 그것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이것은 진실인데, 대단히 간단하게 밝혀질 진실이다. 특히 헬기 사격은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보니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5·18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국방부, 그 사람들이 사격했다고 해서 역사가 이렇게 왜곡될 수도 있구나, 굉장히…제가 몸이 여러 군데가 많이 아픕니다. 치료를 받고 있는데 충격이 컸습니다. 마침 (조갑제닷컴이 작성한 헬기 사격 문제 관련 기사가) 월간조선 10월호에 나왔다고 해서 우리집 애들이 보더니 아버지 진실이 여기에 밝혀졌다면서 태국으로 보내줬습니다. 참 조갑제닷컴이라는 진실을 밝히는 언론도 있구나. 너무나 고맙다. 그리고 MBC나 KBC, SBS 지상파들 많이 있잖습니까. 그곳에서 왜 조종사들을 불러서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않는가, 전부 다 5·18 관계자, 광주사람들, 사격했다는 조비오 신부님이나 이런 사람들만 계속 방영을 하고 이러니까 진실이 왜곡되잖습니까. 아니 KBS에서, 공영방송이잖아요, 당시 헬기조종사들 불러 날카롭게 질문하면 다 대답할 수 있잖아요. 100여 명의 항공인들이 광주에 가있었는데 왜 한 사람도 ‘봤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도 없잖아요. 39년 동안 한 명도 안 나왔다, 사격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목격자는 있고, 이것은 잘못됐잖아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못 나오는데 잠깐 나왔다 이렇게 기회를…언론에서 제가 이렇게 밝히는 것은 ‘어머니의 노래’와 MBC 고소건 당시 편집해 잠깐만 했는데, 전체적으로 심정을 얘기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전두환 장군도 북한군도, 광주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 전두한 장군이 광주에 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못 들었습니다. 저는 광주비행장에 가 있었기 때문에, 광주비행장에서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려오면 우리 비행기가 뜨는 것을 통제했을 겁니다. VIP가 내리니까. VIP가 오면 비행장에 대통령이 내린다, 누가 내린다 하면 비행기 뜨는 것을 통제합니다. 전혀 그런 게 없었습니다. 그 많은 헬기가 뜨고 싶을 때 뜨는…기지는 다 광주비행장인데 그런 통제라든가 왔다 갔다는 소리라든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 더 첨부하고 싶은 것은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는 얘기도 있잖아요? 거기 가서 일주일가량 있으면서 북한군이라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그 뒤에 북한군이 왔다든가, 최근에는 전두환 사령관이 내려왔다든가, 저는 얘기 못 들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광주사태가 발생한 지 39년이 지났습니다. 직접 경험하신 대대장님에게 있어 광주사태는 무엇이고 어떻게 기억돼야 하는 일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민주화 과정이라는 것은 전세계에서 피비린내 나는 그런 역사를 가지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쟁취할 수 없거든요. 민주주의는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당시에 내려갔을 때는 민주주의라든가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든가 하는 개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계엄하에서 광주시민들이 투쟁한다는 얘기도 못 들었습니다. 저희가 얘기를 들은 것은 광주시민들이 폭동, 관공서 점령하고, 제가 그때 굉장히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은 것은 무기고 탈취해서 광주 사람들이, 칼빈도…경찰서고…우리는 경찰서가 탈취됐다고 하면 출동해서 돌고 다 했습니다. 시민들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탈취하고 이런 것을 들었을 때 우리 치안은 어떻게 되는가. 코브라가 이 위기에 지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북쪽이잖아요? 북한군이잖아요. 저는 실제적으로 감시비행을 뛰어야 하는 곳은 DMZ 근방 감시비행을 뛰어야 하는데, 내가 왜 여기에 내려왔는가. 저는 5.18에 대해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칼빈 소총이고 이렇게 다 빼앗겼는데, 헬기에 대해서 사격을 했고, 헬기는 사격을 안 했는데 했다고 말하거나, 이런 것들이 진실이 안 밝혀져 있잖아요. 이것은 분명히 밝혀야 됩니다. 역사를, 민족을 위해서,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을 위해서는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헬기로 시민들을 사격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것을 밝히면 대한민국이 위대한 국가 아닌가요? 제가 동남아에 현재 살면서, 일제 시대도 살았죠, 6·25도 겪었죠, 월남전도 참전했죠, 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느냐는 겁니다. 제가 1960년대에 미국 항공학교에 가 있으면 앞에 (한국은) 고아원들, 고아들 있잖아요, 헌금해달라고 이런 나라였는데, 필리핀이나 버마 우리나라보다 더 잘 살았잖아요. 태국도 훨씬 더 잘 살았잖아요. 태국은 6·25 때 육해공군 다 보냈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위상이 어때요? 소득 3만 불 시대인데 왜 이 진실을 못 밝힙니까 간단한 진실인데. 이를 밝히지 않는 것은 무능하지 않은가. 역사는 왜곡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저는 그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