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패잔병의 삼척市 습격
태극기 흔들며 國軍으로 위장
우리쪽 전투기가 선회할 때마다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었고 주민들은 『저놈들을 그냥 살려 보내다니…』하면서 발을 굴렸다
鄭 一 南 경기도 광명시 광명2동
형과의 마지막 작별
『이 돈은 네가 갖고 있다가 나중에 요긴하게 쓰거라』
형이 지폐 몇 장을 내게 주면서 한 말이다. 인민군 수중에 들어간 땅에서 사용 가치가 없음을 안 형은 대한민국 화폐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며 내 손을 잡았다. 형의 파리했던 그 얼굴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어쩌면 형은 끌려가면서도 국군이 나중에 北進(북진)해 오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용가치가 없게 된 돈을 내게 건넬 까닭이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네가 잘 모셔라』
그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형의 나이 겨우 열일곱,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이지만 나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는다.
하루는 따발총을 멘 인민군 두 사람과 지방 빨갱이 한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형을 불러냈다.
『소년동무. 우리 영웅적 인민군은 지금 낙동강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싸우고 있소. 이제 통일은 눈앞에 다가왔소. 동무도 戰線(전선)에 나가 싸워야 하오』
인민군 하나가 매서운 눈으로 형을 노려보았다. 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총을 멘 그들 앞에서 감히 거부 의사를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형을 앞세운 그들은 어느 집합장소로 끌고 갔고 다음날에는 낙동강 전선으로 내몰았다. 그것이 형과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그리고는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전쟁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라디오도 없었으므로 답답하기만 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애당리, 국도변에 우리 집은 있었다. 여름 더위도 한물 가고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9월도 늦어가는 어느 날 밤, 자다가 요란한 자동차 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달도 없는 어두운 밤에 인민군들이 차에 가득 탄 채 北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차의 행렬이 불을 끈 채로 퇴각했다. 아군의 비행기 공습이 두려워 밤을 이용해 후퇴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여보. 인민군이 전쟁에 진 거야』
『그럼 우리 주남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태백산맥을 걸어서 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 아버지는 큰길 가에 있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집을 비워두고 안전한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 화전민의 토방에서 감자를 삶아 먹으며 지냈다. 아침이 밝아오자 아군의 전투기가 편대를 이루고 北으로 날아갔다. 폭격의 굉음소리가 진동했다. 그날 낮에는 남쪽으로부터 포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우리 마을 곁에까지 울렸다.
『여보. 국군이 들어온 게 틀림없소』
『그럼 우리 이렇게 숨어 있을 게 아니라 나가서 국군을 환영합시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마을로 내려왔다. 국군이 태극기를 흔들며 군용차에 실려 꼬리를 이어 北進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가를 불렀고 마을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길가에 서서 환영했다. 꿈만 같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비워둔 우리 집이 타버렸다. 인민군이 후퇴하며 곡식을 털어가고 불을 지른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넋을 잃었다. 타향에 와서 소작으로 거둔 양식을 다 잃고 집마저 타버렸으니 앞으로의 살길이 막막했다. 우리들의 고향은 강원도 삼척이었다. 그곳의 친척들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 고향으로 갑시다. 형제들의 生死를 알고 싶소』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잿더미가 된 집터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물고 무언가 결심을 굳히는 듯했다. 전쟁은 아버지에게 아들 하나를 잃게 했으며 생활의 근거지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죽든 살든 고향에 가서 형제들을 만나자고 했다.
춘양면 애당리서 고향 삼척까지 도착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아버지 어머니와 나 셋의 일행은 태백산맥을 걸어서 넘었다. 다행히 고향 친척들은 무사했다. 우리는 백부님의 방 한 칸을 빌려서 짐을 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갈 대책을 궁리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읍민들의 입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태백산으로 몰려든 인민군 패잔병들이 약탈과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가 하면 패잔병들이 도계를 습격해서 지서를 불태우고 양식을 털어 갔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도계에서 걸어 왔다는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다. 읍민들은 모두 불안에 떨었다.
『놈들이 오늘 밤에 읍내로 습격해 올 게 틀림없어. 죽일 놈들』
『맞대결해 싸울 국군이 다 北進했으니 어쩌노』
백부님과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은 한숨뿐이었다. 죄없는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집 벽을 뚫고 들어온 총알
타향에서 겪은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고향에서 다시 패잔병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젠 피할 수 없는 한 판의 전쟁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런데 국군은 北進해서 함경도로 진격하고 있다고 했다. 국군은 파죽지세로 北進에만 매진했을 뿐 후방에 남은 인민군의 세력을 등한시했던 것이다.
후방인 삼척 시내에는 국군 1개 소대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경찰병력이 치안을 맡고 있었다. 결전의 날이 왔다. 1950년 10월15일. 관공서의 방송은 읍민들이 동요하지 말 것과 우리 軍과 경찰이 방어하고 있으니 읍내로 敵이 침입하지는 못한다고 몇 차례나 되풀이하고 있었다. 읍민들은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백부네 집은 오십천 강둑 위에 있었고 앞에는 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남산이 있고 거기엔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 저녁 일개 소대의 국군이 다리를 건너 남산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무기는 개인 소총과 1문의 로켓포뿐이었다.
국군은 진지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읍민들은 국군들만 믿었다. 바람도 없는 조용한 밤이었다. 무언가 터질 것 같은 긴장의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던가. 난데없는 총소리가 밤의 정적을 울렸다. 그 총소리는 아군의 총소리가 아니라 적의 총소리였다. 그러자 아군의 총소리도 들렸다. 彼我간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적의 총소리가 차차 우리 집 가까이 다가왔다.
적이 시내로 진격하려면 유일한 나무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다. 적은 이미 저쪽 강변에 와서 이쪽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경찰특공대가 적의 渡河(도하)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격을 가했는데 우리 집 담에 기대어 사격했으므로 공교롭게도 적의 탄환이 우리 집을 향해 날아왔다. 우리는 방에 누워 있었는데 탄환이 벽을 뚫고 지나갔다.
『안되겠다. 부엌으로 나가자』
백부님이 다그쳤다. 숨막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부엌으로 나가 낮게 몸을 움츠리고 서로 몸을 얼싸안았다. 부엌은 방보다 낮아서 좀 마음이 놓였다. 갑자기 부뚜막에 총알이 날아와 흙이 튀어 눈에 들어갔다. 나는 죽는 줄 알았다. 경찰과 적이 강을 두고 싸웠으나 수적 열세에 놓인 아군이 희생되고 敵은 물밀듯이 다리를 건너 시내로 진격해 갔다.
彼我간의 대결은 끝나고 놈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시내를 점령했다. 악몽 같은 밤이 가고 바깥이 훤하게 밝아왔다. 우리는 집을 빠져나와 나무다리를 건너 성남 쪽으로 피해 갔는데 적과 싸우다 희생된 경찰의 屍身 세 구를 강변에서 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참을 수 없는 적개심이 치밀어 올랐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시내는 불바다가 되었다. 경찰서 군청 전매서 등 공공기관에 불을 지른 것이다. 시내의 하늘은 연기로 자욱했다. 이때 아군의 전투기 두 대가 날아와 시내를 떠돌았는데 수천명의 인민군 패잔병들이 시내를 물밀듯이 행군해 갔다. 그때 나는 왜 아군 전투기가 놈들을 공격하지 않는지 원통하기만 했다. 적군들은 태극기를 총 끝에 달고 있어서 아군의 전투기가 적의 패잔병으로 단정하지 못한 것 같다. 전투기가 선회할 때마다 놈들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後方 치안 등한시한 비극
『저놈들을 그냥 살려 보내다니』
『폭탄을 떨구지 않고 왜 돌기만 하노』
『아이고 답답해라』
모두들 발을 동동거렸다. 전투기는 기관총 한 발 쏘지 못하고 돌아갔다. 패잔병들은 시내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고 양민들을 동원, 약탈한 쌀을 지우고 동해를 거쳐 백봉령을 넘었다. 10월16일에는 강릉을 습격하고 19일에는 주문진을 습격하여 약탈 방화 살인을 일삼았다. 이처럼 태백산맥을 따라 北上한 패잔병은 약 2만에 이르렀으며 놈들은 속초 통천 고성을 거쳐 내금강에 집결하여 국군의 北進으로 저항세력이 없는 철원·평강을 거쳐 양구와 화천을 지나고 춘천을 점령했다. 이 패잔병들의 습격사건은 北進에만 들떠 후방 치안을 등한시한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한편 삼척시의 습격사건으로 희생된 경찰용사들의 屍身 12구를 남산묘지에 묻었는데 아버지가 거기에 참석해 용사들의 屍身을 손수 염을 했다. 평소 궂은일이 있으면 찾아다니던 아버지는 경찰용사들의 마지막 屍身을 하나하나 돌보아 수족을 가누고 조국의 땅에 묻어주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기의 큰아들이 인민군에 끌려가 행방불명된 恨을 이들 용사들의 죽음을 장례지내 줌으로써 애달픈 매듭을 풀어보려고 했음일까. 아버지가 상갓집을 찾아다니며 염을 베풀던 삶을 이제 조금은 알 듯하다. 이 일이 있은 후 아버지의 천식과 가슴앓이는 더 심해졌다.
지난 동족상쟁의 비극도 49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끌려간 형은 낙동강 전선 어느 이름 모를 계곡에서 숨져 갔다고 나는 단정하고 살아왔다. 해마다 명절 때면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애비야. 젯상에 메 한 그릇 더 올리도록 해라』
그 간절한 염원은 큰아들의 방황하는 영혼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한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내는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다. 北에 가서 혹 살아 있는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제 명절이면 며느리가 메를 올린다. 6·25는 우리 세대 모두의 악몽이었다. 이젠 그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나눌 부모 모두가 애솔밭에 가 묻혔다. 1·4 후퇴로 함경도 온성에서 월남한 아내도 몇년 전에 내 곁을 떠났다. 아내의 영혼만은 그가 어릴 때 물장구치며 놀았다는 두만강가로 갔을 것이다. 거기서 내가 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
6.25手記/인민군 패잔병의 삼척市 습격
- 鄭 一 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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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14, 17: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