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武천황의 親신라 정책
親신라 정권 天武천황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한다. 주모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황극)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효덕)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이 政變(정변)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도운 동지가 있었으니 백제 王族으로 추정되는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였다.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대화)의 改新(개신)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공지)와 公民(공민)으로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연호)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다.
연호를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전토)에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大化改新(대회개신)의 주도세력은 親百濟(친백제) 정책을 썼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부흥운동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 3만 명의 병정과 수백 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백촌강)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서기 663년의 일이다.
나카노오오에는 羅唐(나당) 연합군이 일본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수도를 오오츠(大津)로 옮기고, 대마도, 규슈 등 곳곳에 성을 쌓게 하고 스스로 천황(天智)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아들이 弘文(홍문)천황으로 등극한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 皇子(황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오아마 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도래인)들이 붙었다. 신라의 문무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叛軍(반군)을 지원하였다는 설도 있다. 천황 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반군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무)천황으로 추대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이다. 이 반란을 ‘壬申(임신)의 亂’이라 부른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신라는 對唐(대당)결전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일본이 唐과 손을 잡지 않도록 하는 데 외교의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 왜는 唐과 국교를 끊고 신라 하고만 교류함으로써 ‘우호적 중립’을 지켰다. 韓日수교 이후 韓日관계를 제외하면 이때 두 나라 사이가 가장 좋았다.
*本家와 分家의 상호 존중
일본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율령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평가하였다.
천무천황은 역사 편찬을 지시하였으나, 日本書紀가 완성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인 서기 720년이었다. 日本書紀를 편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백제 왕족 출신으로 나카노오오에의 쿠데타를 도왔던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의 아들 후지와라후히토(藤原不比等)였다. 후히토는 親신라 정권이던 천무천황 시절엔 숙청을 면하는 데 급급하였으나 그 후 文武천황 옹립에 성공하여 政界(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가 편찬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日本書紀가 신라를 매도하는 편향적인 기술방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백제 왕족의 후손이란 說, 親신라적인 천무천황 시절 핍박을 받았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해가 된다.
후히토의 아버지 中臣鎌足은 죽기 직전 天智(천지)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란 姓(성)을 받아 후지와라노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된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백제계 후지와라 집안이 천황의 황후들을 배출하는 外戚(외척)으로서 일본의 정권을 장악, 反신라 정책과 反신라적 시각을 일본인의 역사와 유전자 속에 심었던 것이다. 이런 反신라 감정은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 傳承(전승)되어 反韓(반한)감정으로 일본인의 무의식 속에서 고착된 것이 아닐까?
新羅(신라)에 패배한 백제와 倭人(왜인)이 흘린 피와 원한의 呪術(주술)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일본인들은 古代史(고대사)의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는 것은, 이 주술에 걸린 일본인들이 스스로 이 주술을 깨는 일이다. 일본 보수층을 대표하는 앵커우먼 출신의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는 책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본가)이고 일본인은 分家(분가)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일본에 親신라 정권이 있었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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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2, 23: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