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항공단장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았는데 출동 목적이라든가 이런 사실은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광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일상적인 훈련이려니 하고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로 이동을 했습니다. 헬리콥터를 가지고 이동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전교사에서 첫 번째 받은 임무가 병력을 전남도청 앞에 있는 로터리에 공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병력을 공수하기 전에 착륙장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지역에 갔다가 피격을 당했습니다.”
백승묵 대대장은 착륙장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 전남도청 인근에서 고도를 낮췄다고 했다. 헬기에는 20사단 연대장인 김동진 대령을 비롯해 6명이 탑승했다. 그는 거의 착륙하는 단계까지 고도를 낮출 때 사격을 받았는데 사격받은 위치는 전남도청과 전일빌딩 사이로 기억했다. 백 대대장의 헬기는 동체 후미에 있는 프로펠러 부분에 여섯 발을 맞았다. 프로펠러를 돌리는 축인 드라이브 샤프트(축)가 맞아 절단되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축이 절단되면 조종불능 사태, 즉 추락하게 된다.
1980년 5월 22일 광주에 도착한 이정부 대대장도 광주비행장 계류장에서 피격된 UH 헬기를 봤다고 증언했다. 그는 “(UH가) 피격을 당하고 시민들이 장갑차를 탈취하고 했기 때문에 아마 (내가 타는) 코브라를 내려보내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했다. 그는 “피격된 헬기는 소총에 맞은 것 같았다. 헬기 꼬리에 있는 프로펠러에 맞으면 추락했을 텐데 운이 굉장히 좋았다”라고 말했다.
백 대대장은 월남전에서도 피격을 당해봤기 때문에 동체에서 발생한 충격을 감지하고, 바로 피격 사실을 파악했다고 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 전사자 가운데 상당한 비율이 헬기조종사들이며 대부분이 격추돼 전사(戰死)했다.
그는 광주에서 피격된 헬리콥터는 “밑에서 쏜 총이 아니라 옆에서 쏜 총에 맞았다”고 했다. 사격한 곳이 상당한 높이, 즉 건물 높이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비행하는 헬기를 맞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실제로 맞은 것은 여섯 발이지만 발사된 총탄은 더욱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군에서 대공(對空)사격 훈련을 할 때 합격 점수가 2%입니다. 100발 쏴 두 발 맞히면 합격으로 봅니다. 6발을 맞힐 정도로 사격을 했다면 대충 약 300발을 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백 대대장은 착륙을 포기하고 전교사로 복귀했다. 피격당한 부분을 군 관계자들에게 보여주고 수송 임무수행을 할 수 없다고 보고했으며, 이 임무는 취소됐다고 했다. 그는 피격 이후 27일까지 광주 외곽에서 군부대 보급품 공수 등의 임무는 계속 시행했으나 광주시내에는 들어간 적이 없다고 했다.
위협사격 명령 거부한 조종사
국방부 특조위가 헬기사격이 있었다고 단정한 논리는, “비상계엄하에서 헬기사격 명령을 받은 헬기조종사들이 헬기사격 명령을 무시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기 때문에,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헬기사격이 존재했다는 뚜렷한 증거”라는 것이다.
특조위는 “코브라 헬기(AH-1J)가 발칸포를 1500발 수령했으므로 코브라 헬기에서 발칸포를 사격했을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정부씨는 당시 코브라 헬기 부대인 103항공대대장이자 상부의 사격명령을 두 번이나 거절해 헬기사격이 이뤄지지 않도록 한 사람이다. 광주시민들에게는 의인(義人)과 같은 그는, 39년이 지난 지금 ‘학살범’이 돼 있었다. 그는 사격명령을 거부하게 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5월 22일 광주에 내려갔습니다. 전교사에 내려가자마자 신고를 했습니다. (전교사 김준현 준장으로부터) 광주공원 앞 광주천(川)에 위협사격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에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20mm 발칸포를 쏘면 유탄이 얼마나 센 겁니까. 전차를 부수고 장갑차를 때려 부수는 발칸포를 사용하면 바윗돌이 무너지고, 피탄(被彈)이 생기면 피해가 엄청 납니다. 20mm 탄피가 떨어지는 것에 맞으면 사람이 즉사합니다. 제가 항공여단장님께 전화로 보고를 드렸습니다. 서면명령을 받지 않으면 사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단장님께서 ‘네가 지휘관으로 내려가 있으니 상황 판단을 잘해 조치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잘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한 차례 헬기사격 지시를 받았지만 이번에도 거절했다. 그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이는 1980년 5월 24일 오후에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공수11여단 63대대는 광주 송정리비행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효천역 앞에 이르렀을 때,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이들을 무장시위대로 오인,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mm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는 등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에 63대대도 응사해 계엄군끼리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 주민들이 총상을 입었다(검찰 국방부 합동조사 보고서). 당시 출동했던 이정부 대대장의 증언이다.
11공수와 보병학교 교도대의 誤認 교전
“11공수부대가 가는 길을 엄호하라는 명을 받아 엄호를 했습니다. 보통 1시간30분에서 2시간 이내에 연료가 떨어지기 때문에 다시 광주비행장에 내려왔습니다. 내렸는데 전교사 사령부에서 긴급히 11공수여단 있잖습니까, 공격을 받고 있다고 지원사격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제가 헬기를 몰고 출동했습니다. 출동했는데 11공수대대 맨 앞에 APC(장갑차)가 있잖아요.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뒤 트럭도 불타고 있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내려가지고 전방에 있는 야산에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빨리 야산 쪽으로 지원사격해 달라고… 사격을 했으면 불바다가 됐을 겁니다. 거기에는 동네도 있었어요.
코브라에는… 미사일을 쏘기 위해서 TSU, 망원조종경이 있습니다. 13배로 확대됩니다. 13배로 확대해보니까 (어깨에) ‘나를 따르라’(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바로 보병학교 교도대인 겁니다. 사격교도대가 거치해놓고 있는데, 공수부대가 교대한다고 가니까… 맨 앞에 APC거든요, 사격교도대에서는 착각한 겁니다. 시민이 APC하고 군용차량을 탈취해서 오는 거라고 말이죠. (중략)
사격교도대에서 사격하니까, 그 산에서 한 700~800m 거리가 될 거예요. 거기서 맞아가지고 불이 나고 병사들 쓰러지고 하니까 11공수여단장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병학교 교도대가 자신들을 사격할 것으로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마 시민군이 공격한 것으로 착각한 겁니다.
제가 13배로 확대해보니까 보병학교인 겁니다. 그래서 바로 광주 전교사에 무전으로 ‘같은 우리 군인들이다. 사격중지 명령을 내려라’ 하니 안 된다는 겁니다. 통제 불능이라고. 공중에서 계속 돌면서 사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네도 있었는데 우리 아군끼리 피해가 있지 않았나… 저는 공중에 있었으니 상세한 것은 몰랐습니다만. 저는 그때 상황 판단을 해 사격하지 않았습니다.”
월남전에도 참전한 이정부 대대장은 한국군 내에서 자신이 코브라 헬기를 몬 최초의 조종사라고 했다. 그는 교관교육도 미국에서 받았다. 그런 그는 “월남전에서도 헬기 기총소사를 하지 않았다”며 “민간인도 있고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인데 (광주의 경우는) 같은 동포인데 폭도인지 아닌지 눈으로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쏘느냐”고 했다.
“몸이 두 동강 나고 불바다 됐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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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피를 쏟아내며 불을 뿜는 발칸포. 당시 발칸포 탄피를 주웠다거나 전일빌딩에서 발칸포 탄흔을 발견했다는 보고는 없다. 사진=조선DB |
광주지방검찰청은 1980년 5월 26일부터 6월 19일까지 5·18 관련 사망자 193명 중 민간인 165명에 대한 ‘검시(檢屍)내용’을 조사한 뒤 이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165명의 사인(死因) 중 총상은 전체의 79.4%인 131명이다. 이 중 M16에 의한 사망자 수가 96명,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가 26명, 기타 총상이 9명이었다. 나머지는 타박사와 차량사, 자상(刺傷) 등으로 인해 숨졌다. 이 검시 보고서에는 어떤 과정에서 총상을 입었는지 설명이 담겨 있는데 ‘헬기’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 발칸포를 탑재한 코브라 헬기를 몰고 광주에 들어갔던 이정부씨는 “발칸포에 사람이 맞으면 한 발만 맞아도 두 동강이 난다”고 했다. 그는 “20mm 발칸을 쏘면 10발마다 한 발씩 예광탄이 날아간다”며 “이것은 불인데, 그러면 광주시내가 불바다 되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는 “헬기에서 발사된 20mm 발칸의 탄피가 떨어지는 것을 밑에서 맞아도 죽는다”며 떨어지는 탄피로 건물 지붕이 무너질 정도의 피해를 본다고 설명했다. 백승묵 대대장은 발칸포 사격 가능성과 관련해, “발칸포는 총알 하나가 수류탄 하나가 날아가 폭발하는 것과 같다”며 “아마 상상할 수 없는 인명피해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이정부·백승묵씨는 헬기사격이 있었다면 목격자는 10여 명이 아니라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목격자가 이렇게 적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수천, 수만 발의 헬기사격이 있었다면 어떻게 탄피를 주웠다는 사람도, 헬기사격의 증거로 수집된 탄피도 하나도 없을 수 있느냐고 했다. 백승묵씨는 “탄피는 공중에서 지상으로 떨어집니다. 광주시내 어딘가에는 탄피들이 수도 없이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과거 1995년 진행된 검찰 조사 과정에서 검찰은 헬기조종사들을 불러 어깨에 관통상을 당한 여중생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해 이정부씨는 “헬기에서 사격했다면 총알이 위에서 대각선으로 박히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며 “그 여중생도 총알이 옆으로 관통해서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헬기에 맞았다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직접 입원했다는 병원도 찾아갔다고 한다. 병원엔 그런 진료 기록이 없었다.
“상식 없는 사람들의 상상”
국과수는 전일빌딩에 생긴 탄흔은 UH-1H의 마운트에 장착된 M60이나 이 헬기에 탑승했던 승무원 또는 공수부대원이 M16을 사용해 발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헬기 기총사격으로는 전일빌딩에 남아 있는 것 같은 탄착군(群)이 나올 수 없다는 조종사들의 반박이 이어졌음에도 5·18특조위는 “헬기에 탑승한 승무원이나 공수부대원이 슬라이딩 도어 또는 창문을 개방하고 M16으로 전일빌딩에 사격을 했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UH-1H를 몰고 광주에 출동했던 백승묵 대대장은 M60 기관총을 장착하지 않은 상태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했다. 그는 “우리 헬기 모두 (M60을) 달지 않고 떴다”며 “기관총이 달려 있으면 보급품이나 인원이 타고 내리고 하는 데 불편하다. 그래서 꼭 필요할 때는 달고 일반적인 때는 안 달고 탄다”고 했다. 그는 “광주시내에서 찍힌 사진이 더러 있는데 외관상으로 봐도 기관총 달려 있는 게 없다”며 “기관총을 쏘려면 문이 열려 있고 승무원이 보여야 하지만 그런 사진도 없고 그렇게 비행한 적도 없다”고 했다.
그는 전일빌딩에 있는 탄흔 밀집도, 특히 천장의 탄흔 등은 M60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의 설명이다.
“헬리콥터에 있는 M60은 어느 목표를 조준해서 쏘는 것이 아니라 적(敵) 지역에 병력을 공수하면서 착륙 단계에서 착륙 지역에 적이 있든 없든, 위협사격을 하는 용도입니다. 탄착이 형성되면 모름지기 축구장 넓이 정도로 산탄이 생깁니다. 헬기가 또 움직이니까, 그리고 비행기 자체에 바이브레이션이 있으니까요. 전일빌딩처럼 밀집된 탄흔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자리 비행인 호버링을 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리고 헬리콥터는 위(천장)를 향해 쏠 수 없습니다.”
이정부 대대장도 헬기에서는 천장을 향해 사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UH1이든 500MD든 호버링을 하면 (헬기 위에서 회전하는) 블레이드가 돌고 있지 않겠느냐”며 “블레이드를 맞히면 비행기가 추락하니까 총구를 위로 올리지는 못한다. 탄흔이 지붕에 찍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라고 했다.
백승묵 대대장은 UH-1H 뒤에 탑승한 승무원이 M16을 사용해 사격했을 가능성과 관련해, “그럴 이유가 없다”며 “거기에 뭐가 있다고 쏘느냐”고 했다. 그는 “문 여는 것은 조종사 지시 없이는 못 연다. 병사들이 총 쏘겠다고 문 열어달라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문을 열면 위험하고 뒤집히지는 않지만 문짝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특조위 결과와 관련한 질문이 이어지자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상상을 한 것”이라며 일축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