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재/趙甲濟의 김대중 연구(1)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趙甲濟의 金大中 연구①
(월간조선 2002년3월호)

●駐日 한국대사관 보고서-「韓民統 일본본부와 金大中」
●金大中 자필 진술서-해방 직후 및 6·25 중 나의 활동

「韓民統은 표면상으로는 反民團 투쟁 단체인 양 위장하고 있으나 金大中의 구상에 의하여 결성되어 조총련의 배후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음. 韓民統을 주도하는 郭東儀는 북괴에서 간첩교육을 받은 간첩임. 朝總聯은 한민통에 자금 지원을 하고 있음」(駐日대사관 보고서)

金大中 진술서: 『한국 反共의식의 최대 앙양자는 金日成. 裵東湖 등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상을 의심하지 않았고 韓民統 조직시 대한민국 지지를 주장했다』


善惡구분의 마비?

金大中 대통령의 과거 행적과 대통령으로서 편 정책에는 민족의 원수인 金日成·金正日에 대한 분노나 정의감 또는 비판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金日成 父子와 대결했던 한국의 건국·근대화·反共 애국세력 및 자유를 찾아온 黃長燁씨에 대한 그의 태도에선 비판과 反感이 느껴진다. 북한 정권을 대할 때는 金大中 대통령의 善惡 구분 능력이 마비되는 것인가?
일본인을 납치한 북한 간첩 辛光洙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북한으로 돌려보내면서도 그가 납치해간 일본인의 生死 확인도 하지 않은 「너그러운」 자세와 가족 수십명을 死地에 보내고 死線을 넘어온 黃長燁씨에 대한 「가혹한」 조치―이 대조를 좌익에 대한 관용과 대한민국 수호 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金大中 대통령의 사상, 세계관, 즉 그의 신념체계와 그의 정책은 직결된다. 신념은 감정이고 감정은 체험이라고 한다. 인간의 체험은 과거이다. 그의 과거가 反共자유를 신념으로 살아온 한국의 主流와 상당히 다를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 金大中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볼 필요가 비로소 提起된다.

金大中 시절에 金大中을 밝혀야 할 이유

金大中 대통령의 임기가 이제 꼭 1년 남았다. 이 1년은 그의 진실이 밝혀지는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神話와 권력에 의해서 진상이 상당 부분 가려져 있는 사람이다. 예컨대 청와대 사이트에는 그의 출생연월일이 1926년 1월6일로 되어 있다. 그의 진짜 生年은 1923년이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金씨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과 소문들이 있으나 이것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의 출생 비밀을 추적하던 사람은 형사고소를 당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정권의 통제력이 약화되어가는 임기末에 이르러 비로소 많은 증언과 사실들이 발굴되어 한국 현대사의 한 시대를 주도했던 그의 빛과 그림자가 제대로 그려질 수 있게 되었다. 지난 4년 간 그가 권력을 잡고 한 일들은 이제까지 점들로 산재해 있던 그에 대한 정보와 추론들을 線으로 연결시켜주어 윤곽을 드러내게 했다. 그 윤곽을 보고서 아, 金大中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실감과 자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통령은 公人 중의 1등 公人으로서 그의 사생활은 민주사회에서는 聖域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국민들은 그에 관한 모든 신상 정보를 낱낱이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남북 무장 대치 상황에서는 대통령과 집권당의 이념이 국민과 국가에 死活的인 중요성을 지니므로 국민들은 대통령을 감시할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다. 최근 李度珩씨 관련 명예훼손 민사소송에서 대법원은 「공적 존재의 이념에 대한 의혹제기에 있어서는 폭 넓은 언론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판시를 했다.
대통령의 신상 정보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생년월일과 姓氏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확신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는 것은 한국 언론의 비굴함과 나태함을 고발한다. 알고서 안 썼다면 비겁한 일이고 몰라서 안 썼다면 게으른 것이다. 언론이 그의 在任 기간중에 분발하여 그에 관한 진실과 사실들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그가 權座에서 물러난 뒤에 언론이 그런 추적작업을 벌이면 보복이니 비겁하다느니 하이에나 언론이니 하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金大中 시절에 金大中을 밝히는 일은 그래서 언론의 의무 이전에 한국 언론의 贖罪(속죄)이기도 하다.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2000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金大中 대통령은 1981년 1월23일 우리나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전원합의에 의하여 反國家 단체의 수괴란 죄로써 사형선고가 확정되었던 사람이다. 이 확정형은 그 직후 무기로 감형되었지만 金大中씨 측으로부터 재심 신청이 없어 지금도 살아 있는 前過이다. 1988년 가을 광주사태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온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관 출신 鄭基用 변호사는 이런 요지로 증언했다. 그는 1980년에 金大中피고인을 신문, 기소, 구형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루는 文益煥 목사님 조사가 완전히 끝나고 검찰관이 왔습니다. 이제 조사가 끝났으니까 만나시지요, 그래서 제가 文益煥 목사님하고 담당 검찰관하고 이렇게 셋이서 만났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文益煥 목사님이 저한테 아주 간곡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金大中 선생의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은 좀 빼주라, 그것을 아주 간곡하게 당부를 하시더군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韓民統 관계가 국가보안법 1조 1항인가 그런데요, 反國家단체의 수괴의 법정형은 사형밖에 없습니다. 내란음모는 10년 이하인가 15년 이하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金大中 총재 범죄사실 중에서는 오히려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이 主입니다. 그리고 법정형이 사형인 그런 범죄를 검찰관 임의로 기소유예할 수는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며칠 후에 金총재님이 저한테 말씀하시기를 「나한테 적용되는 法條를 한번 보자」 이렇게 말씀하시더만요. 제가 법조문을 찾아서 보여드렸습니다. 이 양반이 그때 모시로 아래 위를 입고 계셨는데 여기 주머니가 양쪽에 달렸습니다. 이 주머니 쪽에서 까만 테 돋보기를 꺼내시더니 그것을 가지고 법조문을 읽어보시더라구요. 보나마나 국가보안법 1조 1항은 사형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탁 보시더니 안색이 창백해지셔요. 그 다음에 내란죄 이것을 탁 보시더니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나는 목숨만 살아 있으면 再起할 수 있다. 그러나 죽고는 再起할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이 사형만 면하게 해달라」 애원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위로해드린다는 것이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말씀 드렸지요. 그랬더니 그 후에도 한 두세 번 저한테 「나, 제발 사형만 면하게 해달라」 그래서 그때마다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그랬더니 아마 金총재님께서 그것을 국가… 韓民統을 빼 준다 이렇게 오해를 하신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지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鄭基用 변호사의 증언에 한 가지 착오가 있다. 국가보안법 1조 1항은 사형만 규정한 것은 아니고 「首魁(수괴)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로 되어 있다.

駐日 한국 대사관의 보고서-韓民統 일본본부와 金大中의 관계

金大中 내란 음모 사건이란 말은 정확한 사건 명칭이 아니다. 金大中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도록 만든 것은 韓民統 일본본부 결성이므로 이 사건은 「金大中의 韓民統 조직 및 내란 음모 사건」이라고 부르는 게 보다 나을 것 같다.
韓民統 사건의 핵심은 1973년 해외 망명중이던 金大中씨가 북한정권의 조종을 받는 在日 조총련의 對南공작 요원 및 친북인사들과 손잡고 韓民統 일본본부를 조직했고 이 조직은 그 뒤 朝總聯의 자금과 사주를 받아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韓民統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된 金大中씨는 취임하기 전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서 도쿄에서 납치되어 강제 귀국당했었다. 1981년 우리 대법원은 金大中씨의 역할을 국가보안법상의 「反國家단체 구성 및 수괴」로 확정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韓民統-편집자 注)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反國家단체인 북괴 및 反國家단체인 재일조선인 총연합회(편집자 注 - 약칭 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 지원을 받아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활동하는 反國家단체라 함이 本院의 견해로 하는 바이오(하략)」라고 했다.
月刊朝鮮은 1998년에 「金大中의 韓民統 조직 및 내란 음모 사건」 수사·재판기록을 구할 수 있었다. 金泳三 정부 때 이뤄졌던 12·12사건 및 5·18사건 재판 때의 참고 자료로서 金大中 사건 기록이 법정에 제출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이 미공개 자료가 우리 손에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자료가 駐日한국 대사관에서 1980년 여름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보낸, 영사증명서가 붙은 「조총련·한민통 일본 본부·金大中 관계」에 대한 심층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보낸 梁一根(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소속 육군준위)작성 보고서에 의하면 1980년 7월3일에 합동수사본부가 駐日 한국 대사관에 한민통 일본본부, 同 기관지 民族時報, 同 중요구성 간부들의 성격과 활동상황에 대하여 조회를 했고 그 回報로서 온 것이 이 보고서란 것이다. 영사증명서가 붙은 것은 법정에 제출될 때 이 문서의 공신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 韓民統 일본본부 보고서는 200자 원고지로 약 400장이나 된다. 駐日대사관에 근무하는 정보부 요원들이 그동안 축적했던 정보철을 근거로 하여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駐日대사관의 보고서가 중요한 것은 이 자료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어 金大中 피고인에게 유죄를 확정짓는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郭東儀는 북한 간첩』이라 단정

이 보고서는 金大中씨와 함께 한민통 일본본부(이하 韓民統으로 약칭)를 만든 郭東儀(곽동의), 裵東湖(배동호), 金載華(김재화) 등 핵심 요원들이 본인들은 민단 비판 세력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실은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북한 간첩·친북인사들이라고 단정하는 한편 그들의 조직적, 사상적 뿌리를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裵東湖, 郭東儀 등은 한민통 조직 전부터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反민단 세력을 규합하여 민단유지간담회를 조직, 주한미군 철수 등 북괴활동에 동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1970년 4월경 곽동의는 민단유지간담회 회원 중 북괴 간첩인 尹孝同의 안내로 북해도 하코다데 해안에서 북괴 공작선편으로 入北하여 對南공작 지령을 받고 同年 5월경 歸日하여 民團 파괴활동에 박차를 가했다」고 주장했다. 郭東儀는 나중에 金大中이 의장으로 추대된 한민통에서 조직국장이 된다. 이 보고서는 이들이 金大中씨에게 접근하여 한민통을 결성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이렇게 썼다.
쪾「1971년 1월경 배동호, 곽동의 등은 북괴 지령에 의거하여, 한국 과학기술처에서 교토대학에 유학중인 李東一에게 3000만 엔의 자금 제공을 전제로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교양하는 등 포섭공작을 진행했다」
쪾「동년 7월 民團 조직을 근본적으로 와해하기 위해 베트콩파를 주축으로 한 反민단 청년 학생을 동원, 민단 東京 본부를 습격하여 유혈 난동의 참극을 연출하는 등 그 정체가 탄로되어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정재준, 김종충, 조활준, 김은택, 김군부 등 주동 분자들이 民團에서 제명 또는 축출당하자 노골적으로 親북괴세력으로 표출되어 非합법 투쟁으로 급선회하였음」
쪾「이와 같은 과정에서 1971년 1월경 新民黨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金大中이 일본에 오자 배동호는 고양일 등을 통해 金大中에게 접근하여 同人의 체류비, 여비를 지원하는 등 인연을 맺어 그 후 金大中이 일본에 올 때마다 접촉, 교분을 다졌음」
쪾「1972년 10월11일 지병 치료차 일본에 온 金大中은 同年 10월17일 유신을 맞이하자 귀국을 단념하고 해외에서 전체동포들을 총집결시켜 정부 타도를 목표로 한 조직적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여 배동호, 곽동의, 김재화, 정재준, 조활준, 김종충 등 베트콩파 중심 인물들의 호응을 얻는 한편 7월6일경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회 미국본부를 결성한 데 이어 同年 7월10일경 일본에 돌아와 배동호 등 베트콩파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여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에 착수하였음」

베트콩派 人士들과 韓民統 조직

駐日한국대사관의 보고서는 金大中씨가 배동호, 곽동의, 김재화 등이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인사들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특히 1973년 3월경 당시 민단 가나가와 현본부 의장 박성준이 金大中에게 배동호, 곽동의는 조총련과 합작하여 베트콩파와 한 패거리가 되어 反韓 활동을 하면서 民團을 망치고 있다는 경고를 한 바 있으므로 同 배동호, 곽동의를 비롯한 베트콩파들은 북괴 또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민단을 와해하고 반국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보며(下略)」
이 보고서는 「1973년 8월4일경 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金大中 주재하에 위 배동호, 김재화, 정재준, 조활준, 김종충, 양상기 등이 회합하여 한민통 일본본부의 정강정책 및 임원구성을 확정함에 있어」 5항으로 「한반도를 중립화하고 남북 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이 보고서는 또 「임원 구성은 의장에 金大中, 부의장에 김재화 정재준 김용원, 상임고문에 배동호, 고문에 양상기 김재술 유석준, 조직국장에 곽동의, 사무국장에 조활준, 국제국장에 김종충 등으로 결정했다」고 썼다.
이 보고서는 한민통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민통은 표면상으로는 反민단 투쟁 단체인 양 위장하고 있으나 金大中의 구상에 의하여 결성되어 조총련의 배후 조종을 받고 있음. 한민통을 주도하는 곽동의는 북괴에서 간첩교육을 받은 간첩이고, 배동호 역시 곽동의와 사상적으로 밀착한 용공분자로서 조총련과 연대 투쟁체제를 구축하고 북괴의 목적 사항 실행을 위해 각종 행사를 공동 개최하는 등 대한민국 전복과 적화통일을 위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하고 있음」

한민통 자금 내역

이 보고서는 조총련이 韓民統에 대해서 지원한 자금의 내역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쪾「조총련은 한민통에 反韓 데모 동원, 反韓 집회 개최, 북괴 및 조총련 선전 활동 등 비용으로 활동 高潮期(고조기)인 1973년 8월~1975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최성황기인 1976년 1월~1977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퇴조기인 1978년1월~1979년 7월은 매월 500~1000만 엔, 再고조기인 1979년 8월~1980년 2월은 매월 1000만 엔 등을 지원하여 왔음」
쪾「1971년 3월25일 곽동의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김병식으로부터 민단 와해 공작 및 대남공작 사업 자금 5000만 엔을 받았다는 확실한 첩보가 있음」
쪾「金大中에 대하여는 1972년 10월~1973년 8월 베트콩파인 김종충이 金大中의 한민통 조직 등 활동비조로 10여 차례에 걸쳐서 약 1000만 엔, 배동호가 金大中의 滯日 호텔비 및 한민통 조직 자금 보조비 명목으로 5차례에 걸쳐 500만 엔, 渡美 여비 1회 2000달러, 정재준 등 베트콩파 사업가들이 金大中의 체류비, 활동비, 여비 등 명목으로 4차에 걸쳐 약 2000만 엔 등을 제공하여 金大中은 同자금으로 일본 한민통 및 미국 한민통 조직 자금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그 중 김종충 및 배동호가 金大中에게 제공한 자금은 同人 등이 특별한 사업이나 수입원이 없는 자들인 것으로 보아 조총련에서 지원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
駐日대사관의 영사 증명 보고서는 金大中씨와 협력하여 韓民統 일본본부를 조직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郭東儀, 裵東湖, 金載華는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북한 간첩이나 하수인들이라고 기록하고 이들의 신상 정보를 자세하게 실었다.
郭東儀는 광복 직후 「남로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1948년 12월 남해군 인민위원장 박종환의 지령에 의해 밀항 渡日」했다고 한다. 그는 리츠메이칸 대학에 재학중이던 1950년 9월경 조총련 요원에게 포섭되어 「재일 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작전 방해 공작 후 월북하라」는 지령에 의해 입대했다고 한다. 그는 부평 미군 탄약 중대에 복무중 기회를 잡지 못해 同 부대에서 탈영하여 再밀항 渡日했다고 이 보고서는 기록했다.
곽동의는 1960년경부터는 조총련으로부터 月 10만 엔의 보수를 받으며 民團 조직 와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70년 4월경 북한 간첩 윤효동에게 포섭되어 북괴 공작선편으로 입북, 간첩 교육과 민단 파괴, 대남 공작 지령을 받은 후 同年 5월에 귀환한 그는 조총련 부의장 김병식으로부터 민단 와해 및 대남공작 자금으로 5000만 엔을 받았다는 것이다.
「郭東儀는 1973년 7월13일부터 8월4일 사이 배동호, 조활준, 김종충 등을 조종하여 金大中과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하도록 하고 자신이 同 조직국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8월13일 조총련 중앙본부로부터 그간 한민통이 조총련의 의도대로 효과적인 反韓 활동을 전개하여 왔고 북괴가 의도하는 민주·민족통일 해외 한국인 연합을 결성하여 연대 투쟁 체제를 구축하는 데 공헌한 대가로 특별자금 5000만 엔을 받아 개인 주택 구입에 사용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사실이 있음」

밀항한 남로당 간부 裵東湖, 金大中에 접근

쪾배동호는 8·15 해방 후 경남 진주에서 남로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9년 初경 밀항, 渡日하여 조총련과 연계하여 反韓활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도 郭東儀와 마찬가지로 1971년 1월 조총련 중앙부의장 김병식으로부터 민단 와해공작 자금 5000만 엔을 받았다고 駐日대사관의 영사증명서 보고는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金大中과 배동호의 관계를 자세히 적고 있다.
쪾「1971년 1월 하순경 일본 동경 소재 데이고쿠 호텔에서 당시 渡日중에 있던 고양일 등의 소개로 金大中과 접촉하여 同 김대중 미국 여비조로 미화 3000달러를 조달, 제공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金大中이 渡日時마다 접촉. 1971년 11월 도쿄 신주쿠 소재 옥호 미상 통닭집에서 베트콩파 정재준, 조활준, 곽동의 등과 같이 滯日중이던 金大中을 초청하여 대통령 낙선을 위로하고 同人의 反정부 투쟁을 격려. 1972년 10월~1973년 8월간 金大中의 일본 체류비 및 한민통 조직 자금 보조비 명목으로 5차에 걸쳐 500만 엔 제공(同자금은 조총련에서 지원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하는 등으로 金大中과 친숙한 처지임」
쪾한민통 사람들 가운데 최연장자인 金載華는 다채로운 前歷을 가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남 밀양군에서 1903년에 출생한 그는 1925년에 일본 上智대학을 1년 중퇴했다. 그는 1950년부터 3년 간은 한국 측인 在日 거류민단 단장으로 있었다. 駐日 대사관 보고서는 「金載華는 1945년 10월경 조총련의 前身인 재일 조선인 연맹 중앙위원 겸 아키다 현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10월경 조선인 거류민단으로 위장침투하였다」고 적고 있다. 1967년 김재화는 「조총련 중앙부의장 이심철, 同 중앙위원 서종실, 同 사무국장 김병식 및 배동호, 곽동의, 윤혁효 등과 수차에 걸친 모의 끝에 북괴 對南전략에 따라 대한민국 국회에 침투하기로 모의, 新民黨 전국구 후보에 출마할 것을 결정하고 同人들이 모금한 3500만 엔을 국내에 반입함으로써 국내에서 구속, 입건되었다」.
金載華는 「同 사건 판결에서 무죄 선고되었으나 同 판결시 (재판부가) 동 자금을 배동호, 곽동의 등이 모금하여 제공한 것을 인정하면서 同人 등이 조총련과 연계 활동한다는 점을 입증할 수 없다는 취지로 그 이유를 들었으나 同人들의 정체가 확인된 지금은 同 자금이 조총련의 자금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이 보고서는 기록했다.

郭東儀는 金載華의 사위, 김종충은 金大中의 국민학교 동창

金載華는 또 「1971년 5월 제7대 국회시 新民黨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부터 金大中을 알게 된 이래 한민통 일본본부 발족 후에는 金大中 의장의 不在 기간중 의장대리직에 취임했다」. 그는 「1980년 3월1일 金大中이 복권되어 정치활동을 재개함에 따라 同人의 한민통과 관련된 취약점을 은폐하려는 수단으로 同年 3월24일 임시중앙대회를 개최하고 金大中을 한민통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의장직에 취임하였다」. 한민통의 조직 책임자인 郭東儀는 金載華의 사위이다.
쪾한민통 일본본부 사무국장 趙活俊은 경남 남해 출신으로서 1948년에 밀항, 渡日한 인물. 와세다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1969년 5월경 당시 일본 교토 대학에 재학중이던 경향신문사 기자 양준용의 소개로 金大中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金大中을 裵東湖의 활동조직에 연계시키고자 연락 역할을 담당하면서 金大中의 滯日중 매주 1~2회 회합을 주선하는 등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971년 11월경에는 도쿄 신주쿠 소재 통닭집에서 배동호, 곽동의, 정재준 등과 金大中의 대통령 낙선 위로연을 주선하는 등 金大中과 친숙한 처지」라고 駐日 대사관 보고서는 주장했다.
쪾한민통 일본본부 부의장 鄭在俊은 경북 경산 사람. 그는 「1961년 5월경 당시 조총련 산하 통일평론사 사장이던 서종실의 배후 조종하에 배동호, 곽동의 등과 같이 당시 소속하고 있던 민단內 소위 유지간담회를 조직, 민단 와해 활동을 전개했고, 1972년 10월~1973년 8월 베트콩파 사업가들과 야합하여 金大中의 일본 체류비, 한민통 조직 활동비, 여비 등 명목으로 4차에 걸쳐 약 2000만 엔을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쪾韓民統 일본본부 국제국장 김종충은 金大中씨보다 두 살이 많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출신이다. 그는 명치대학 상학부를 졸업한 뒤 인쇄업을 경영하였다.
駐日한국대사관 보고서는 「(김종충은) 1972년 10월~1973년 8월까지 金大中이 滯日(체일)중에 同人의 체제 경비 및 한민통 경비조로 日貨 1000만 엔을 조총련으로부터 조달하여 제공하였고 나고야 거주 前示 베트콩파 박병채 등 친지 4~5명으로 하여금 日貨 400만 엔을 제공하도록 주선하여 한민통의 활동자금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駐日 대사관 정보부팀이 작성한 문건

이 보고서의 끝에는 駐日 대사관의 일등 서기관 鄭樂衆(영사) 명의로 「위의 사실을 증명함」이라는 영사증명이 붙어 있다. 당시 駐日대사는 金正濂씨(朴 대통령 시절의 비서실장)였다. 金씨는 『그런 종류의 문서는 정보부 공사가 정보부 본부와 직접 연락하여 처리하지 대사에게 보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駐日한국 대사관의 정보부 공사는 이상구씨. 그는 『그 문서를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대공수사관이던 鄭樂衆씨가 작성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鄭樂衆씨는 『내가 부하 직원들을 시켜서 함께 만든 보고서이다』고 말하고 『지금도 그 보고서의 정확성을 믿는다』고 했다.
上記 보고서는 駐日 대사관의 정보담당관들이 다년간 韓民統을 관찰하면서 축적한 정보를 정리한 것이지 갑자기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조총련의 자금이 한민통으로 지원된 부분에 대한 정보는 구체적인데 한민통 내부에 정보부의 정보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 국내의 實權은 국군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잡고서 정보부, 보안사, 헌병, 검찰, 경찰을 지휘하고 있었다. 1980년 5월17일 전국으로의 계엄확대를 계기로 하여 집권한 新군부가 金大中씨를 구속수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合搜部(합수부)가 조회한 건에 대하여 駐日대사관측에서 新군부측의 요구에 맞추어주는 방향으로 보고서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한민통 조직에 대한 金大中씨측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다.

金大中 진술조서

1980년 7월18일 피의자 金大中씨에 대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신문 내용 발췌이다. 진술조서에서 인용했다.
―피의자가 裵東湖를 알게 된 경위를 말하시오.
『제가 裵東湖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71년 1월 하순경입니다. 그 때 본인은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고 일본과 미국의 정계 시찰차 출국, 일본 東京 소재 데이고쿠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마침 故 柳珍山(유진산), 梁一東(양일동)씨도 그 호텔에 투숙하고 있어서 그들과 자주 만났는데, 裵東湖가 그들을 만났러 왔을 때 梁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도일時마다 만나 서로 이야기하고 친숙히 지내고 있습니다』
―피의자는 裵東湖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받았나요.
『裵東湖는 경상도 출신으로 金載華 밑에서 民團 사무총장을 지냈고 당시는 兪石濬(유석준)을 民團 중앙본부 단장으로 당선시키려 적극 협조했으나 실패, 民團 非주류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의자는 裵東湖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나요.
『梁一東씨의 소개로 알게 된 후 柳珍山, 梁一東씨와 만나는 자리에서 수차 만났는데, 제가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숙박비를 계산하려 했더니 당시 숙박비 30만 엔 정도를 裵東湖가 이미 계산했습니다. 저의 미국 여비에 보태쓰라고 하면서 梁一東씨의 동생 양삼영이 미화 1만 달러를 주기에 그 중 미화 3000달러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피의자가 韓民統 일본본부를 결성하기 이전에 裵東湖는 어떤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나요.
『그 사람은 前에 民團 중앙총본부 의장까지 지낸 사람이라고 들었으나 1971년 7월경 民團에서 제명된 후에는 民團에서 이탈한 교포들을 모아 民團 非주류파에 속하는 민족통일협의회를 구성했습니다. 그 의장직에 있으면서 기관지인 「민족시보」 편집에 관한 실무감독을 하는 등 주로 反民團, 反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裵東湖 사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 피의자는 朝總聯과 연계 등 裵東湖의 사상성분에 대해 의심해 본 일은 없나요.
『裵東湖는 民團에서 제명당했으며 1972년 2월경 民團 중앙위원이던 동향인 박성준으로부터 朝總聯 관련 인물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으며, 民團 사람들은 사상이 불순하다고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본인과 동향인이며 국민학교 동창생인 金鍾忠에게 사상성분에 관해 자세한 것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더니 金鍾忠의 말이 民團 세력 다툼에 문제가 있어 그를 불순하다고 밀어붙일 뿐이지 사상성분에는 의심할 데가 없다고 해 그런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1973년 7월13일 東京 소재 게이오 프라자 호텔에서 裵東湖를 만났을 때 「林昌榮(임창영) 때문에 혼나셨죠」 하기에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林昌榮으로부터 이북 간다는 전화가 와서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하기에 더욱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 3월21일 본인은 民團 非주류들에게 民團 복귀를 요청했는데, 결과는 실패했지만 裵東湖가 東京 상업은행 이사장 허필석씨의 주선으로 시도해 보았다고 본인에게 보고한 점 등으로 미루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가 경영하는 「민족시보」가 너무 反정부적이고 북한에 대해선 비판이 없다는 것이 본인의 불만이므로 趙活俊씨를 통해 충고한 사실이 있습니다. 통일정책에 있어서도 그는 본인의 공화국 연방제를 지지했으나 통일 후 중립을 주장해 그 점은 결론을 보류해 두었습니다』

『郭東儀가 의심스러운 인물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피의자는 金載華를 언제부터 알고 있나요.
『1967년 5월경 제7대 국회의원 선거時 新民黨 전국구 후보로 입후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만난 것은 그가 朝總聯 자금을 반입한 혐의로 구속되어 조사받고 풀려나온 1967년 8월경 安國洞 신민당 당사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함으로써 알게 되었습니다. 입후보를 사퇴하고 일본에 돌아간 후에는 한일회담 월남파병을 반대하는 등 民團의 非주류로 反정부, 反民團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회에 진술한 郭東儀의 장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피의자는 金載華의 사위 郭東儀에 대해 말하시오.
『제가 郭東儀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1971년 8월경 金相賢(김상현) 의원으로부터입니다. 당시 金의원은 일본을 자주 왕래하고 있었고 해외교포문제연구소라는 연구소를 운영, 「在日韓國人」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民團 非주류파인 소위 베트콩파에서는 郭東儀가 朝總聯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했습니다. 1971년 11월경 신병 치료차 渡日, 東京에 체류하고 있을 때 舊 民團 동경본부단장 鄭在俊이 저의 대통령 낙선 위로를 겸한 파티를 東京 신주쿠 소재 야키도리집(꼬챙이구이술집)에서 열어준 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鄭在俊, 裵東湖, 趙活俊, 梁相基, 兪石濬, 金恩澤, 金君夫 등 民團 非주류인 베트콩파들이 참석했으며 郭東儀가 참석해 처음 인사를 했습니다.
1972년 2월 중순경 경제 시찰차 일본 하네다 공항에 내리니 마중나온 성명미상의 駐日 한국 대사관 직원이 民團 이야기 끝에 郭東儀는 朝總聯과 내통해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이란 말을 해준 일이 있습니다. 그 후 1973년 3월21일경 베트콩파 단체 간부 연수회가 있었던 하코네의 여관에서 만났습니다. 1973년 7월25일 東京 다카라야 호텔에서 가진 韓民統 결성문제 논의 끝에 8·15 광복절 기념 행사는 朝總聯과 합동으로 하자고 주장해 본인과 의견이 충돌된 일도 있었습니다』
―피의자 진술에 의하면 郭東儀가 사상적으로 불순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는데 郭東儀를 사상적으로 의심해 보지는 않았는지요.
『1971년 11월 중순경 저녁 때 그 동안 자주 왕래하던 趙活俊의 주선으로 긴자에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金載華와 본인 셋이서 회식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본인이 「郭東儀에 대해서 사상을 의심하는 말이 많은데 사실이냐」고 했더니 金載華는 화를 내면서 「모략이다. 내 사위는 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고 북송 때는 니가타에 가서 철로를 베고 누워 이를 저지하려고 투쟁한 일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날 식사 후 趙活俊에게 물었더니 「郭東儀에 대해 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나의 의심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에 그 후부터는 郭東儀를 경계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韓民統 운영자금은?

―1972년 10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일본과 미국에 있을 때 생활비 및 활동 자금은 누가 지원했나요.
『일본에 있는 친지들이 도와줘서 생활했는데, 특히 金鍾忠은 친구로서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본인에게 자금을 지원해준 사람으로는 金鍾忠이 일화 500만 엔, 일본인 무사시 사장이 600만 엔을 도와주었는데, 이 사람은 재일교포 崔書勉(최서면)씨의 소개로 안 후 가깝게 지낸 친구로서 후쿠다 前 일본 수상의 후원자입니다.
또, 金鍾忠의 친구인 성명미상의 전남 여수 출신 사람이 金鍾忠의 부탁으로 100만 엔을 도와주었습니다. 교포 박병채는 경주 출신으로 8·15 해방 前 도일, 나고야에서 건축용 골재 채취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1972년 2월경 金鍾忠과 나고야에 여행 중 金鍾忠의 소개로 알게 되어 그 후 東京에 찾아와 200만 엔을 주고 갔습니다. 그 외에 裵東湖로부터 40만 엔을 받는 등 1700여만 엔을 지원받아 생활했습니다』
―1700만 엔을 어떻게 사용했나요.
『자세한 것은 기억할 수 없으나 약 150여 일을 일본에 머물면서 사용한 것이 880여만 엔 정도이며 미국에서 120여 일 있으면서 쓴 것이 900여만 엔이 되는데, 그 명세는 제가 별도로 작성해 수사관에게 제출했습니다』
―그러면 위 기간 중에 해외에서 지원받아 사용한 자금은 결과적으로 韓民統 결성을 위해 사용되었군요.
『본인은 1972년 10월 유신 후 귀국을 포기하고 유신체제 타도 투쟁을 시작했고, 이를 좀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 韓民統이었기 때문에 그 중 일부는 韓民統 결성에 사용된 셈입니다』
―韓民統을 결성한 후 그 운영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계획이었나요.
『韓民統의 운영자금 문제는 1973년 7월13일 게이오 프라자 호텔에서 가진 韓民統 결성준비 회의 때 논의된 바 있습니다. 그 때 참석했던 裵東湖, 趙活俊, 金鍾忠 등이 본인의 1973년 3월21일 하코네 入管法 연수회에서의 연설을 듣고 느낀 바 있어 본인에게 활동자금을 지원해 주겠다는 실업인이 여러 명 있고, 鄭在俊 등 民團 非주류파에서 재력 있는 인사들로부터 협력을 받을 수 있으니 자금문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박병채도 나고야 거주 교포 실업인들이 협력을 약속했다고 말해준 바 있고, 본인의 친구인 金鍾忠과 친분이 있는 교포 경제인들에게도 약간의 협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운영자금은 그런 식으로 해결할 계획이었습니다』

베트콩파와 韓民統 결성에 합의

―10월유신 후 해외 망명의사를 누구에게 밝혔나요.
『10월유신 선포 당시 일본 東京 소재 데이고쿠 호텔에 본인과 같이 투숙 중이던 梁一東(양일동), 鄭一亨(정일형), 宋元英(송원영) 의원 등에게 망명생활을 하며 反정부 투쟁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힌 바 있습니다』
―韓民統 일본본부 결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1973년 7월8일 미국에서 韓民統 미국본부 준비委를 결성하고 일본에 돌아와 金鍾忠의 주선으로 東京 신주쿠 도쓰카마치 2-105 소재 하라다 맨션 809호실에 사단법인 한국 민주제도 통일연구소 東京사무소라는 명칭으로 본인 개인 사무실을 마련한 후 韓民銃 일본본부 결성준비를 시작했습니다. 趙活俊, 金鍾忠 등에게 韓民統 결성 취지와 韓民統 미국본부 결성 사실 등을 이야기했더니 趙活俊이 同 취지의 결성 필요성 등을 裵東湖 등 베트콩파 대표들에게 이야기해 그들로부터 찬동을 받아 1973년 7월13일 14시경 당시 본인이 투숙하고 있던 게이오 프라자 호텔에 그들을 데리고 와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회합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석했나요.
『베트콩파 6개 단체를 대표해 裵東湖, 金載華, 趙活俊, 金君夫, 金鍾忠 등이 참석했습니다』
―그 회합에서 논의된 사항을 상세히 진술하시오.
『본인이 지난 7월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교포 安炳國 목사, 林昌榮 박사, 金相敦 선생 등과 같이 韓民統 미국본부 발기위원회를 결성했던 미국본부 결성 경위를 말하면서, 현재와 같은 民團 非주류의 분산된 조직으로서는 소정의 목적달성에 효과적이지 못하니 일본에도 韓民統을 만들어 독재정권을 타도,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고 韓民統 일본본부 결성의 필요성과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참석자 전원이 일본본부 결성을 요청해 韓民統 결성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고 본인이 미국 韓民統은 교포들의 모금으로 운영하기로 했다고 말했더니 일본에서는 본인의 1973년 3월21일 하코네 入管法 연수회 강연 이후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는 실업인들이 많이 나왔으니 자금문제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본인은 「독재와 나의 투쟁」 교정과 韓美日 3국 세미나 준비관계로 무척 바쁠 때라서 구체적인 결성문제는 후일로 미루고 연락관계를 趙活俊이 맡아 하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 회합은 언제, 어디서 가졌나요.
『1973년 7월25일 14시경 東京 소재 다카라야 호텔에서 가졌습니다』
―그 회합에서는 어떤 사람이 참석했나요.
『裵東湖, 金載華, 郭東儀, 鄭在俊, 金恩澤, 金君夫, 梁相基, 金允鍾, 金鍾忠 등 30여명인데 民團 非주류단체의 간부급은 거의 다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朝總聯과 공동행사 거부, 퇴장』

―그 회의에서의 논의된 사항은 무엇인가?
『우선 참석자에 대한 인사 및 소개가 있은 후 金載華가 위에서 말씀 드린 게이오 프라자 호텔에서의 회의 결과와 이들과 접촉해 韓民統 일본본부를 결성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했다는 그간의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본인이 韓民統 미국본부 결성 경위와 韓民統 일본본부 결성의 필요성, 취지 및 3大 원칙을 설명해 참석자 전원이 일본 韓民統 결성을 합의하고 구체적인 결성 일정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회합에 참석한 郭東儀와 지금은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본국에서는 南과 北이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같은 동포인 朝總聯과 3·1절이나 광복절 등 국경일 행사를 함께 하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8·15 광복절을 朝總聯과 공동집회로 열자고 제의했습니다.
본인은 韓民統의 기본 목적과 취지가 대한민국의 입장은 고수하되 본국의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데 있는 것이라며 現 단계에서 朝總聯과 행사를 같이 하자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회합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7·4 공동성명 이후 朝總聯과 공동으로 광복절, 3·1절 행사 등을 한 사람들이라서 郭東儀의 제의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려 본인은 「당신들과는 韓民統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퇴장했습니다』
―1973년 7월25일 다카라야 호텔 다음의 회합은 언제였나요.
『다카라야 호텔에서 회합을 가졌던 다음날 제가 투숙하고 있던 東京 소재 파레스 호텔에 趙活俊이 찾아와 전날 제가 그 회의장을 나온 후 다시 회합을 가졌는데 대체로 나의 주장에 따르겠다는 의사로 뜻을 모았으니 며칠 후 다시 회합을 갖자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1973년 8월4일 10시경 파레스 호텔에서 裵東湖, 金載華, 鄭在俊, 趙活俊, 金鍾忠 등과 회합을 가졌습니다』
―그 회합에서 논의·결정된 사항은 무엇인가요.
『그 날은 韓民統 일본본부의 발기대회를 8월13일에 열고 선언대회를 8월15일 東京 히비야 공회당에서 民團 非주류 6개 단체 주최로 광복절 경축행사를 겸해 개최할 것과, 본인이 이 대회에 참가해 경축연설을 하기로 했습니다』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 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 추진』

―韓民統 일본본부 발기선언문을 본 사실이 있나요.
(이 때 경찰관은 1973년 8월13일자 韓民統 일본본부 발기대회 선언문 복사판 일부를 제시하니 피의자는 열람·확인 후 아래와 같이 답하다)
『이 선언문을 받아본 적은 없으나 발기 취지 및 정강정책 등은 본인이 당초 구상했고 裵東湖, 金載華 등과 같이 韓民統 결성준비 회합時 논의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회합에서는 韓民統의 활동 진로에 관해 진지한 논의를 했으나 발기선언문이나 정강정책에 관해선 구체적으로 논의한 일은 없습니다.
발기선언문이나 정강정책을 보니 그 당시의 토의 내용과 하코네 入管法 연수회에서의 본인의 연설에 부합되는 점이 상당히 있습니다마는 완비된 문장으로 작성되기 前에 본인이 납치되었기 때문에 이 선언문의 미세한 부분은 본인의 의도와 약간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피의자의 의도와 다른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선언문 내용 중 「통일의 미명하에 분열을 추구하는 現 독재 타도 투쟁」은 「통일의 미명하에 영구 집권을 염원하는」으로, 「통일」 제하의 項 중 최초 6행은 삭제해야 하고, 정강정책엔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한다」는 항목을 삽입하고 그 9항에서 「한반도를 중립화하고 남북 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는 부분은 「유엔 동시가입과 완만한 남북 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의도입니다』
―위 선언문에 의하면 피의자가 발기인 72명 중에서 韓民統 일본본부 결성을 주도하고 활동한 것이 틀림없지 않나요.
『본인이 비록 발기대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본인의 구상에 따라 결성되었기 때문에 만일 본인이 참석했더라면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발기대회에서 의장으로 추대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본인은 韓民統 총본부의 의장이 되고 일본본부는 金載華를 의장으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본인을 일본본부 의장으로 추대한 것은 당시 본인에 대한 구출대책위원회 활동을 의식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본인은 미국에 총본부를 두고 그 의장을 하면서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신문에 보도된 裵東湖의 경과보고에 의하면 韓民統의 인사문제에 관한 한 피의자와 합의된 범주를 벗어날 수 없어 의장에 金大中, 부의장에 金載華 鄭在俊, 사무국장에 趙活俊, 고문에 梁相基, 吳宇泳, 金在述, 兪石濬, 安泳枓, 裵東湖(상임고문) 등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가요.
(이 때 검찰관은 302페이지에 편철되어 있는 1973년 8월21일자 「민족시보」 일부를 제시하니 피의자는 열람·확인 후 아래와 같이 대답하다)
『인사문제에 관해서 金載華를 일본 의장으로 하고 본인은 총본부 의장으로 활동할 생각이었으며 인사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합의본 바는 없습니다』
―피의자의 진술 내용과 裵東湖의 국민회의 경과보고 내용은 대부분 일치하나 유독 인사문제 부분에서는 다른데 이는 무슨 이유인가요.
『인사문제뿐만 아니라 위에서 말씀드린 정강정책 중 일부가 본인의 의도와 다른 바 있는데, 이는 裵東湖 등이 본인과 합의했다고 발표해야만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본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 같습니다』

韓民統 결성 과정에 대한 軍 검찰측 자료(駐日대사관 영사증명서)와 金大中씨 진술을 대조해서 읽으면 상황파악이 입체화 된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른 참고 자료를 읽어보자. 1980년 5월17일 심야 金大中씨는 자택에서 연행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는다. 관례에 따라 수사관은 金大中 피의자에게 자필 진술서를 먼저 쓰게 했다. 5월20일자와 5월25일자 자필 진술서는 짧은 「자필 회고록」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진술서는 韓民統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 주요 부분을 뽑았다.

金大中 피의자 자필 진술서
제1회(1980년 5월20일)

Ⅰ. 8·15 해방 이후 정치·사회단체에 가입·활동한 사실

1. 1945년 9월경 建國준비위원회(이하 「建準」) 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같은 해 11월경 建準이 人民委員會로 개편된 후 약 2개월 동안 참가했다 자진 그만두었음.
3. 1945년 9월경 결성된 木浦청년동맹에 가입했으나 建準 일을 주로 하고 청년동맹 일엔 간여하지 않았음.
4.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新民黨(당수 白南雲)에 동조하여 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아 합법적 정치 활동에 종사했음(약 5∼6개월간).
5. 해방 당시 일제 下의 철저한 皇民化정책으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형편이었으므로, 오직 해방의 기쁨과 독립의 희열에 들떠 활동하다 보니 좌익분자와도 같이 일하게 되고, 그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약간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
6. 그러나 당시 본인의 장인인 車寶輪(차보륜)씨는 철저한 右翼(우익) 지방유지로, 그는 당시 韓國民主黨 목포시 부위원장으로, 본인을 수차 호출해 공산주의의 反민족성, 즉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일제下 그들의 反민족적 행적들을 말하면서 그들과 손을 끊도록 명령했음.
7. 이런 관계로 차츰 좌익분자들과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소련을 조국이라 하는 자는 칼로 배를 갈라놓겠다』고 한 본인의 발언으로 그들과 결정적으로 다투고 갈라서게 되었음. 그 때가 1946년 7∼8월경으로 기억됨.
8. 한편 본인은 1944년 6∼7월경부터 목포 소재 日本人이 경영하는 全南汽船주식회사의 社員으로 있었으며 해방 후 일본인이 철수하자 사무직원은 본인 혼자만 남게 되어 일시 총무대표로 추대되었음. 그러다 본인은 회사의 해운건으로 1946년 2월경 상경, 軍政廳 운수부 海司局에 들렀더니 이미 서울거주 孫一○씨(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편집자 注)에게 회사 관리권이 넘어간 후였음.
본인이 孫씨를 만났더니 자기가 現 종업원을 그대로 고용, 경영하겠다는 계획을 표명하며 협력을 당부하기에 당시 회사의 곤경을 타개하는 한 방법이라 믿고 목포로 내려와 종업원들에게 그런 경위를 설득, 孫씨와의 제휴를 권했음. 그러나 종업원들이 반대하며 自退를 주장하는데 당시 좌익 海員同盟 가입 선원들이 본인을 孫씨계의 협력자로 몰아치므로 본인은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1946년 말까지 이름만 둔 채 간여하지 않다가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음.
9. 1946년 10월의 대구 좌익폭동사건이 발발한 당시 목포시에서 南橋洞 파출소 습격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목포에서 獨立促成會(촉성회) 청년대장으로 있던 洪益先(홍익선)씨라는 분이 본인과 같은 연배로서 서로 라이벌 관계로 있던 중 본인이 이에 가담했다고 고발, 본인을 促成會 창고로 납치해 마구 구타한 후 경찰에 넘겼음.
그러나 본인은 사건 당시 본인의 처가 출산 중인 처가에 있었기 때문에 산파, 기타 이웃 사람 등 많은 증인에 의해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을 뿐 아니라, 파출소를 습격했던 일당도 체포되어 본인이 전혀 관련되지 않았음이 판명되어 구속 10여 일 만에 아무 혐의 없이 석방되었던 것임.
10. 본인은 장인의 권고에 의해, 그리고 좌익과의 완전 결별을 명백히 하는 방법으로 韓民黨 목포지부에 입당하고 본격적으로 우익진영에 가담했는 바, 이 때가 1947년 중반기로 기억됨.
11. 한편 본인은 1947년경부터 연안 운행의 화물선을 1척 구입, 해운사업을 시작했으며 사업관계상 당시 목포에 있는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사령부 장교들과 접촉이 잦아 좌익계열로부터는 증오를 받게 되었음.
12. 1949년 어느 날, 친구(兪在植)의 형인 兪모씨가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 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혐의로 체포되어 본인이 여비를 준 사실을 진술, 본인은 좌익분자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음. 그러나 조사 결과 단순히 친구 형에 대한 여비보조라는 것이 판명되고, 또 海軍 목포경비소 정보대장 吳世東(軍검찰 신문기록엔 오세돈으로 되어 있음-편집자 注) 중위(6·25 때 전사), 헌병대장 朴成哲 소위 등이 신원을 보증해 체포 수일 만에 석방되었음.
13. 1949년 무렵 당시 좌익 또는 그런 혐의를 받던 자 중 대한민국에 적극 충성하기로 태도를 명백히 한 자들을 중심으로 輔導聯盟(보도연맹)이 결성된 사실이 있음. 그러나 본인은 여기 가입하거나 간부로 활동한 사실은 없고 다만 연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방유지들이 갹출할 때 이를 제공했는데 아마 운영위원 같은 직책이 있어서 이에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됨.
14. 1950년 초 청년들의 大韓靑年團 가입이 半의무적으로 되어, 당시 해상근무 선장들은 陸上지부에 가입하기가 직무 성격상 곤란하므로 大韓靑年團 목포해상단을 별도로 조직했는데, 같은 해운업자인 閔丙安씨(6·25 때 본인과 같이 체포되었다가 공산군에 의해 학살됨)가 단장이 되고 본인이 부단장이 되어 6·25 때까지 이름.
15. 이미 진술한 대로 본인은 1946년 가을경부터 좌익과는 일절 상종하지 않고 해운업에만 전념, 6·25 직전에는 배가 세 척으로 늘어났고 특히 당시 금융조합연합회(현재의 農協)가 정부 양곡 연안수송을 일괄 담당하던 서울 朝鮮商船주식회사의 목포지역 수송을 하청 담당하게 되어 사업이 크게 번영했음.
해상수송의 성격상 해군 목포경비소와도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어 본인과 해군과의 친밀 관계는 시민 共知의 사실이었음. 뿐만 아니라 본인은 사업상 필요에 의해 해군 경비대의 文官 신분증을 휴대하고 있었고, 본인의 친동생인 金大義는 해군 방첩대의 문관으로서 근무하는 실정이었음.

Ⅱ. 6·25 당시의 생활 상황

1. 본인은 6·25가 터지기 약 10여 일 前 上京했는데 그것은 朝鮮商船주식회사 목포지구 해운하청업자로서 수송이 끝난 운임을 수령하러 당시 이 회사 목포출장소장인 韓道源씨(일제下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현재 白凡 先生 기념사업회 이사로 있음)와 같이 上京하게 되었음. 그런데 운임을 미처 받지 못한 채 6·25가 터지고 공산군이 침입, 점령下의 서울에 있게 되었음. 당시 본인은 경기여고 뒤쪽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 중이었음.
2. 솔직히 말해 본인은 6·25 당시까지 공산주의에 흥미나 관심은 전혀 없었지만, 자신을 적극적인 반공투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으며, 그저 사업에나 열중하고 있었음. 그러나 일단 서울에 공산군이 침입하자 자기도 깨닫지 못하게 공산군이 싫어져서 자신의 마음가짐을 비로소 확실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생생한 기억이 있음.
본인의 반공의식을 확실하게 만든 계기는, 하루는 여관을 나와 부근 성당 마당에 산책을 나갔더니 갑자기 북괴군 병사 3명이 한 청년을 끌고 오며 옆에 그들의 동료 좌익분자들 10명이 같이 몰려왔음. 그러더니 주위에 있는 약 20∼30명에게 이 청년의 죄상을 설명하고 그 처벌을 묻자 공산분자들이 『총살이오!』 하고 끌고 가는 광경을 보았음.
이미 인민재판 이야기는 많이 듣고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의 이름 아래 저지르는 잔학상도 들었지만 실제 눈으로 목격하니 그 충격은 컸으며, 이는 결코 우리와 상통할 수 없다는 것을 1000여 권의 반공서적을 읽은 것보다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음. 지금도 그 끌려가던 청년의 겁에 질리고 넋이 빠진 모습이 생생할 정도로 인상이 컸음.
나의 판단으로는 많은 한국인이 6·25를 겪어 공산주의의 실태를 체험함으로써 오늘과 같은 반공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보며,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지만 한국 반공의식의 최대 앙양자는 金日成과 공산군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됨. 아무튼, 2차대전 후 일단 공산치하에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온 것은 우리나라뿐인데 이 점에 있어 우리는 그나마의 행운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으로 언제나 생각하고 있음(이상의 6·25 관계는 본인이 일본에서 출판한 「獨裁와 나의 鬪爭」 속에 나의 해방 후의 사상편력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음).
3. 괴뢰군이 서울에 침입한 후 본인은 당시 民主國民黨의 열성당원이며 본인의 처남인 車元軾(차원식)의 장인 裵仁植(배인식)씨의 신문로 집으로 가서 이불을 쓰고 유엔군의 방송을 들으며, 또한 앞서 말한 朝鮮商船 목포출장소장인 韓道源(한도원)씨, 그리고 충남 장항서 해운업을 하는 趙長遠(조장원)씨 등과 만나 정보교환을 하곤 했음.
7월 중순에 접어들 무렵 유엔방송에서 『대전 쪽의 금강 전투에서는 반드시 북괴군을 쳐부술 것이니 서울 시민은 기대하고 용기를 가져라』는 말을 들었음. 한편 당시는 식료품 사정이 어려워 돈 없는 본인들로서는 더 이상 서울서 버틸 수도 없는데다 본인 같은 청년은 언제 의용군에 끌려갈지도 모르는 형편에 있는지라 앞서 말한 韓道源, 趙長遠씨 부부, 처남 車元軾 등과 협의해 걸어 내려가기로 결정을 했음.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금강 전투서 유엔군이 이길 테니 공산군이 목포까지는 도저히 내려가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충남 온양에서 서해안을 타고 내려가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음.
4. 7월20일경 우리 일행 6∼7명은 서울을 출발하여 앞서 말한 코스를 밟아 내려가다 충남 보령군의 趙長遠씨 본가에서 2∼3일 묵고 다시 걸어서 군산까지 이르렀더니 이미 공산군은 목포까지 침입한 것이 판명되었음.
본인은 그 때 목포에서의 본인의 활동과 교제관계로 보아 목포로 가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으며, 그 점은 車元軾씨도 그의 우익활동에 비추어 마찬가지였음. 그러나 이 와중에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도 없고, 더욱이 내려가는 것은 소지한 住民證(주민증)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올라가는 것은 그들이 발행한 여행증명 없이는 불가능함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증명된 이상 어쨌든 죽든 살든 목포에 가고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다시 걸어 8월10일경 목포에 도착했음.
5. 목포에 도착하여 본인의 회사 사무실 앞에 이르니 모친이 의자를 놓고 길거리에 앉아 있는데 흡사 미라같이 야위고 혈기 없는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음. 본인을 보자 질겁을 하시면서 『빨리 숨어라』고 재촉하며, 목포에 괴뢰군이 들어오자 본인 집은 몰수되고 심지어 숟가락까지 가져갔으며 가족은 집으로부터 추방되어 아내는 일본군이 팠던 방공호 속에서 둘째아들 弘業이를 낳았다는 것이며, 본인의 친동생인 大義는 이미 공산군에 의해서 체포되고 본인이 왔는지 매일같이 공산군이 찾는다는 것이었음.
본인은 급히 모친과 같이 처가 숨어 있는 집을 찾아보고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朴東連(박동련)이라는 선장 집에 숨었던 바 2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6. 정치보위부에서는 본인의 海軍 文官 신분을 지적하면서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고 묻기에 『그런 일 없다』고 했더니 몇 대 치면서 『이 새끼가 아직도 반성 못했다』고 하며 유치장에 처넣었음. 그 후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자가 와서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협박했으며 그 이상의 조사 없이 8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갔음.
7.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죄수번호 202호) 약 1개월 간 극도의 영양실조와 굶주림에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는데 9월28일 갑자기 문을 열면서 『모두 밖으로 나오라』 해서 감방 복도에 나갔더니 두 사람씩 한 수갑에 채웠는데 나와 같이 묶인 사람은 韓日洙(한일수)씨로서 지금도 목포에 거주하고 있음.
인민군 간수를 따라 형무소 입구 쪽에 있는 강당에 들어갔는데 본인 등은 강당 입구에서 먼 안쪽에 앉게 되었음. 조금 후에 시내의 내무서에 있는 죄인들도 데리고 와서 그들은 입구 쪽에 자리잡게 되었음. 그 후 간수들은 입구 쪽, 즉 내무서에서 온 사람들을 몇 명씩 끌고 나갔는데 후일에 안 바로는 한 트럭씩 채워 싣고 나가 총살했던 것임.
이렇게 되자 강당 안은 울부짖는 자, 살려달라 애원하는 자들로 아비규환이 되었는데 간수들은 계속 총 개머리판으로 울고 외치는 사람들을 시끄럽다고 때리는 것이었음.
그렇게 해서 저녁 무렵이 되자 갑자기 괴뢰군이 서로 당황해서 부르면서 나가더니 행방을 감추게 되고 지방 출신의 간수들만 남게 되었음. 간수들은 미처 못 죽인 우익인사 약 80명(총 220명 가량 중)을 인도해서 다시 감방에 처넣었음. 그리고 그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괴뢰군 병사들이 지시한 대로 감방에 방화해서 죽이지 못하고 혹은 도망가고 혹은 망설이던 중 본인 등 몇 명이 주도가 되어 감방 문을 부수고 탈옥시켜 밖으로 빠져 나왔음.
8. 한편 본인의 목포 도착 前에 이미 체포된 본인의 친동생 大義는 같은 형무소 감방에 7명이 같이 있었는데, 먼저 불린 4명은 죽고 나머지 3명은 살아남았는 데 그 속에 끼어 살았음.
본인의 장인 車寶輪씨는 사형집행 현장까지 끌려가서 괴뢰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세워놓고 총을 쏘아 기절해서 넘어졌는데 총은 맞지 않았음. 그러자 檢屍하는 괴뢰군이 와서 『이 새끼가 아직도 안 죽었다』면서 또 두 발을 쏘았으나 그것도 귓가를 스칠 뿐 맞지 않고 사형장에서 살아서 돌아온 유일한 생환자가 되었음.
또 본인의 막내 동생 大賢(해군 소령 제대)은 당시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휴식 중 친구와 같이 언덕을 굴러 떨어져서 탈출, 집에 돌아왔음. 이와 같이 집안의 3형제와 장인, 합계 4인이 모두 기적적인 생환을 했다 해서 6·25 이후 목포지방에서는 命 긴 집안이라 화제가 된 바 있음.
9. 9월28일 생환 후 본인은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해운업에 종사했는데 6·25동란 중 한 척은 부두에서 폭격으로 유실되고, 한 척은 군경이 타고 나갔다 무사히 돌아왔으며 한 척은 목포부두에 있어서 다시 수리해 사용하였음. 한편 당시 목포 근방은 군경의 진주가 더디고, 특히 도서와 해안지방에는 공비가 그대로 출몰하여 양민을 마구 학살하는 실정이었음. 해군 목포경비소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해상방위대 전남지역본부를 만들게 되고, 그 대장에는 부산에 피난갔다 온 우익지도자 吳裁均(오재균)씨, 그리고 부대장에는 본인이 임명되어 본인 소유 기타 선박들을 취합하여 공비 토벌, 군경 수송, 收復도서의 경비, 정보수집 등 軍의 보조 지원역할을 했음.
본인도 직접 승선하여 출동 수행했는데, 이 해상방위대는 陸軍 방위군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海上 방위군이 되었을 것이며 본인은 해군방위대장에 임명될 것으로 通告받은 바 있음. 그 당시 이러한 근무에 관계하던 해군 목포경비소 작전과장이 文○字(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편집자 注) 중위인데 지금은 해병준장으로 예편하여 서울 거주 중임.
10. 한편 본인은 1945년 10월경 목포에서 유일한 일간지인 木浦日報를 당시의 계엄사령관인 해군 목포경비소 사령관의 승낙 아래 인수하여 시설을 보수하여 발간했는데 본인의 同社 社主 재직 기간은 약 1년 간이었음.
11. 본인은 1951년 초부터 회사를 새로이 창립하여 木浦商船주식회사라 하고 일본서 정부가 구입한 선박 3척을 은행융자로 사서 해운업을 확장시켰음. 한편 금융조합연합회와의 곡물 및 비료 등 수송을 직접 계약하게 되자 1952년부터 회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상호를 興國海運주식회사라 하며, 회장에는 당시 海南 출신 국회의원(2대) 尹泳善(윤영선)씨가 앉고 본인은 사장이었는데 사실상 본인 개인회사였음.
본인은 부산서 당시의 農工銀行 본점에서 1억환을 융자해서 사업을 확장했으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함. 결국 1954년경부터 당시 흥국해운의 군산출장소장인 ○成烈씨(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편집자 注)에게 회사를 인계하고 본인은 해운업에서 손을 뗌.(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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