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갔을 때(남한침투) 보니 먹고 사는 것은 일 없드라>

남한에 침투했던 작은아버지가 본 1960년대 남북 생활수준
세월이 흘렀다. 또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분이기에 쓰게 된다. 대남공작기관의 본산을 중앙당 3호청사라고 한다. 앞서 글에서 밝혔듯이 우리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남 출신이다. 6.25 전후 남로당 당수 박헌영을 미제 고용간첩으로 몰아 죽일 만큼 남 출신들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 속에서 중앙당 한 개 과 비서가 될 만큼 작은아버지의 출세 비결은 뭘까.

그 첫째가 남한에 침투했던 공작원 업적이다. 아마도 널리 알려진 비전향 장기수들과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잡혔고 작은아버지는 잡히지 않은 것이다. 서울 거리에서 잡힌 적이 있었지만 술 주정꾼으로 겨우 모면, 몇 날 며칠을 굶으며 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귀환, 위가 협착, 그 후유증 위병으로 고생하실 정도였다.

그 둘째는 인간성이 좋은 것이다. 누구도 싫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료들과 그 가족들을, 여기의 교회 목사가 성도들을 사랑하듯 보살폈다. 환갑 때 갔을 때도 작고한 동지의 아들이 작은아버지를 아버지로 모실 만큼 챙겨주고 있었다.

그 셋째는 물욕을 부리지 않은 것이다. 일본 출장이 잦았지만 기껏 가져온 것은 캐논 사진기 하나라고 작은엄마는 불평을 하곤 하였다. 진짜로 댁에 가보면 김일성 선물로 위에서 준 색테레비, 냉장고가 전부였다.

그 넷째는 과묵함이다.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카인 나에게는 짧고 굵게 말을 하셨다. 첫 대화는 1974년 내가 평양김책공대 반도체공학부 입학시험을 치러 갔을 때이다.

<내 아들보다 네가 부러울 정도로 잘한다. 공부해야 한다. 통일되어서 남조선 인민을 지도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가보니(남조선에 침투해보니) 사상적 준비는 몰라도 실력은 우리 애들보다 높아 보여.>

당시 수영 금메달 수상자였던 맏아들은 인민군 정찰국에, 둘째는 호위국에 복무하였다(참조* 맏아들 결혼식 기념사진).

작은아버지와 두 번째 대화는 1987년 나의 결혼식에 오셨을 때이다. 단 둘이 있을 때 진지하게 물었다. 실제로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인가고. 좀 뜸을 드리시더니 한마디로 말씀하신다. <내가 갔을 때(남한침투) 보니 먹고 사는 것은 일 없드라>.

언제 침투했는지는 밝히지 않아 연대를 모르겠으나 1960년 4.19 직후부터라고 짐작된다. 실제로 탈북하여 남한 친척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넷째 큰아버지 집 농짝에 숨어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불상사는 작은아버지 직계에서 일어났는데 신고하지 않아 전기고문으로 반신불수. 그 원한 때문인지 내가 남한에 온 지 2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만나보자는 연락이 없다. 나도 아픈 상처를 또 헤집는 것 같아 부디 만나려고 애쓰지 않는다.

1960년대에 까만 소련제 <볼가> 승용차는 중앙당 급만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1967년 작은아버지가 우리집에 이 차 타고 오셨는데 운전수가 차가 더러워진다며 조카인 나도 못 만지게 한 기억이 뚜렸하다. 그러니 4.19 후부터 1967년 이전 시기에 남한에 침투하였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실제 남북을 오가 본 작은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1960년대에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다는 통설을 뒤집는다. 개인적으로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여기에 와서 1960년대 대한뉴스 기록영화를 자세히 보고 북한과 비교하여 보았다.

분석과 실험이 습성인 과학자 출신으로서 평하건데 남한주민 50%는 북한 생활수준의 평균 이상, 30% 정도가 평균, 나머지가 북한의 평균 이하였다고 본다. 문제는 가난해서 생긴 비극적인 사건들을 공개된 언론하에 확대재생산되다 보니 북한보다 못 산다는 설이 굳어진 것이라고 본다. 구체적 논쟁은 좁은 여기서 다 말할 수 없어 약한다.

*다음호는 작은아버지가 말한 5.18 광주사건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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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중건 2019-09-19 오전 10:51

    조선일보 유용원군사세계 댓글 펌

    그 당시에는 월북자나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남한 출신들이 간첩으로 대거 남파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마을 건너에서 북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남파되어 숨어 있었으나 접선 공작원이 잡혀서 일망타진 되었던 기억이 나고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었던 오국진씨가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거절하는 바람에 전하지 못한 간첩이 잡혔고 거절한 바람에 화를 면하기도 했습니다. 고향 형님이지요.
    -
    잘 읽었습니다. 저 시절 시골에서 자랐고, 62년에 초등학교 들어 갔으니까. 나의 어린 시절입니다. 대부분 넉넉하지는 않았으나 노력하면 밥을 먹고 살정도는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배급( 옥수수나 우윳가)루를 주었고, 소사 아져씨는 가마 솥에 옥수수 가루 죽을 쑤어 먹였습니다. 또 점심에는 학생들에게 말 마차로 보급되는 밀가루, 옥수수빵을 주었습니다. 옥수수빵이 맛 있었습니다. 모두 미국에서 지원한 원조물자였습니다.

  • 이중건 2019-09-19 오전 9:26

    이댓글은 저의 글을 보고 미주교포가 보내온 글입니다.

    남한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난했고, 북한이 남한보다 2배 잘 살았다는 그 시기는 나의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인데, "등나무집"을 읽어보면, 1945년 해방 이후, 절대로, 단 한번도, 남한이 북한보다 더 못 산 때가 없읍니다.
    제가 만 1살 되기 22일 전에 6.25가 났고, 부산으로 피난 갔고, 피난민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게 살았었는데도, “등나무집”의 저자, 일류급에 속한 성혜랑씨도 겪은 가난과 고통의 1%도 안 겪었읍니다. 부산 피난민 시절에 배불리 먹어 본적은 없지만, 먹지 못해 허기가 져서 아이들 하고 뛰어 놀지 못하거나 학교 갈 힘이 없어 결석을 할 지경이 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읍니다. 그런 일을 가장 가난했던 피난민 촌에서도 본적이 없읍니다.
    그때 부산의 거지들은 보리가 10%~20% 섞인 쌀밥에 여러가지 반찬을 푸짐하게 받아 가고 (부산사람들은 부자들도 보리를 섞어 먹더라구요), 서울의 거지들은 100% 쌀밥이나, 더 고급인 콩이나 몇가지 잡곡 섞인 쌀밥에 부산보다 더 좋은 반찬들을 받아 갔읍니다 (서울에서는 아무리 못 살아도 보리밥 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읍니다).

    그러니까, 지금 탈북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그때의 남한 거지들의 주식은, 비록 얻어 먹는 것이지만, 지금 북한의 고위 간부급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한국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장 가난했다는 6.25전쟁 직후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이 남한보다 두배나 잘 살았던 때가 있다는 것이나, 남한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난 했다는 것은 단지, GNP에 그렇게 계산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유럽, 소련, 중국, 그리고 다른 북한보다 잘사는 그 많은 공산국가들에게서 천문학적인 원조를 받은 것을 계산해서 숫자상으로만 남한 보다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북한은 국제거지의 신분으로 숫자상으로는 남한보다 두배 잘 살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돈이라는 것은 쓰기에 나름이지요. 북한은 그 많은(ㅎㅎㅎ) 돈을 군사력에 다 쓰고, 쓸데없는 땅굴 파고, 군대 훈련 시키는데 귀한 시간 다 탕진해 버리고, 인민들은 쫄쫄 굶기고, 강제 노동이나 시키고, 모든 열정을 이웃 형제들 이간 시켜 강제수용소에 보내는데 생명을 걸고 싸울 때에, 남한은 그 작은돈을 쪼개고 쪼개서, 학교에 보내고, 땅팔아서 대학 보내고, 알뜰 살뜰 생활하고, 콩나물값 아껴서 계를 해서 저금해서 고등학교 등록금 내고, 집사는데 썼읍니다. 그러니, 북한의 반 밖에 안되는 GNP로도, 북한 보다 10배 풍족하게 먹고 살수가 있었읍니다.

    나의 인생은, 부산(피난), 서울(복귀), 미국(이민)에서만 살았기에, 한국의 농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만 13살 때에, 1962년?, 시골에 가서 한달 동안 있으면서 많고 많은 친외척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도시보다는 모든것이 못했지만, 단 한 가정도 식사시간에 음식이 없어서 못 먹는 집은 못 보았읍니다. 모두 약간의 콩을 섞은 쌀밥에다 반찬은 한 열가지 정도, 삼시 세끼, 먹고싶은 만큼, 모든 식구들이, 모든 가정에서 먹더군요.

    북한의 하는 모든, 소위 전투라고 불리는, 계획된 일들은 가난.압박.고통.노예의 삶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는 가장 위험한, 완벽한 고물, 공포의 급행열차일 뿐입니다.

    할 말도 많고 쓸말도 많은데 오늘은 이만. Jesus love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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