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포함한 여론이 분노한 또 하나의 이유는 조국씨의 해명이었다. 그는 “우리 아이가 영어를 좀 잘하는 편”이라며 “연구 성과를 영어로 정리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자유한국당 주광덕 의원은 조모씨의 한영외고 재학 시절 생활기록부를 입수, 그의 영어 과목 성적이 4~8등급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성적이 중하위권이었다는 것이다. 주 의원은 “조 후보자가 딸이 하도 영어를 잘해 논문 제1 저자가 될 수 있었고 고려대에 입학했다고 해, 생활기록부를 제보받을 때 제보자에게 ‘성적은 어떠냐’고 물었다”고 한다. 제보자는 조모씨가 “영어를 잘한 것이 전혀 아니다”라고 했단다. 주 의원은 조모씨의 국어 등급은 “8~9등급이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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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논문. 조국 장관이 ‘영어를 좀 잘하는 편’이라는 딸은 논문 초록 첫 문장부터 오타를 냈다. |
기자도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 조국씨의 해명을 듣고 논문을 읽어봤는데 논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초록(abstract)의 첫 문장에서부터 오타가 나왔다. ‘일산화질소 합성효소’라는 영어 단어 ‘nitric oxide systhase(NOS)’가 첫 문장에 있었다. 그러나 ‘systhase’가 아니라 ‘synthase’이다. 초록에는 두세 개의 또 다른 문법적 오류도 있었다. 문법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도 매우 어렵다. 나의 경우 유학 중인 고등학교 때에 이런 글을 작문하거나 번역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내 영어 실력을 떠올리게 됐다.
버거킹에서
나는 약 10년간 미국에서 유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다. 한국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 영어를 공부했다. 영어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미국으로 갈 때 큰 두려움은 없었다. 오산이었다.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는데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 모두 알아듣지 못했다. 모든 소리가 소음으로 들렸다.
미국에 간 지 얼마 안 돼 집 근처에 있는 버거킹에 간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버거킹에 가봤고, 대표 메뉴가 와퍼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관심이 없었는지 영문 표기가 안 돼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와퍼의 영어 스펠링이 ‘whopper’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때는 혹시 ‘콩글리시’를 하면 어떻게 하나,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등의 걱정을 많이 할 때였다. 그러다 갑자기 와퍼가 콩글리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Who’는 ‘후’라고 발음을 하니 와퍼가 아니라 ‘후퍼’가 돼야 하는 것 아닌가 했다. 당당하게 주문대로 가서 ‘캔 아이 해브 후퍼’라고 말했다. 날 쳐다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던 여자 종업원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나의 좌충우돌 유학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미국 시골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의 수업시간은 모든 게 새로웠다. 한국에 있을 때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접하지 않아 더 그랬던 것 같다. 미국 학교 관련 영화에서나 보던 큰 로커가 나를 위해 제공됐다. 수업은 한 교실에서 똑같은 친구들과 듣는 게 아니라 수업마다 교실을 옮겨 가는 것도 신기했다. 모든 학생이 다 같은 과목을 듣는 게 아니라 대학교처럼 선택해 듣는 체계였다.
‘버슈, 버슈’
수업할 때 항상 궁금한 게 있었다. 누가 재채기를 하면 옆 사람들이 계속 “버슈, 버슈” 하는 것이었다. 재채기한 사람은 “땡큐”라고 답했다. 재채기한다고 핀잔을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는데, ‘땡큐’라고 답하니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됐다. 한국 학생들처럼 어떤 단어의 줄임말이나 속어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궁금한데 이를 누구한테 물어보는 게 부끄러웠다. 스펠링을 모르니 사전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 영화에서 좀 천천히 말하는 것을 듣고 ‘버슈’는 ‘블레스 유’(bless you·저런, 몸조심해요)를 빠르게 말한 것임을 알게 됐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사람들이 재채기 증상을 보이다 죽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어만 배워야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같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학길에 오를 당시 미국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은 하버드대학, 매사추세츠 공대 등 천재들이 모인 나라였다. 수학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스케치북에 ‘0.2’라고 적힌 숫자를 보여주자 학생들이 영어로 무언가를 외쳤다. 스케치북을 넘기자 ‘0.5’ ‘0.4’ ‘0.3’ 등 숫자가 계속 바뀌어 나왔다. 학생이 답을 하면 선생님은 계속 숫자를 바꿨다. 도대체 0.2나 0.5 같은 숫자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몰랐다. 뭔가 심오한 뜻이 있는 것만 같았다. 몇 분 지나자 학생들이 답하는 것은 0.2를 영어로 ‘10분의 2(two tenth, two out of ten)’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등학교 수업인데 0.2는 10분의 2라는 것을 배우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해 배려하는 차원에서 다른 과목 역시 가장 쉬운 반에 배정해준 것이었다. 이후에는 상급 수학 수업으로 바꾸게 됐다. 수학의 경우 한국에서는 중위권 실력이었으나 미국에서는 ‘천재’ 대접을 받았다. 다른 학생들은 다 계산기로 문제를 푸는데 암산으로 풀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단순 곱셈, 나눗셈 문제들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미국은 중고등학교, 대학교 수학 과정에서 계산기를 무조건 사용하고 이에 의존한다. 실수를 줄이고 항상 정답을 주는 계산기로 공부하는 것이 맞는지, 머리를 사용해 풀어나가는 것이 맞는지는 수학 전공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
‘詩 쓰기 0점’
고등학교 영어 수업은 어려웠다. 영문학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베오울프(Beowulf)〉, 중세 영국의 시인 초서가 지은 《캔터베리 이야기》를 읽어야 했다. 이 과목의 성적은 처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번은 직접 시를 써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나름 고심해서 시를 썼는데 ‘0점’을 받았다. 운율(韻律)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외국에서 와서 이 정도 하면 잘한 것 아닌가’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받은 0점을 통해 전환점을 갖게 됐다. 외국인 특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경험이었다.
발음도 항상 문제였다. ‘ship(배)’과 ‘sheep(양)’ ‘would(~것)’와 ‘wood(나무)’ ‘sheet(종이)’와 ‘shit(똥)’ 등을 구별 발음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날의 문제지를 뜻하는 ‘worksheet’라는 표현이 있다. 친구들은 내 sheet 발음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항상 내가 선생님한테 그날의 ‘워크시트’를 달라고 말하라고 했다. ‘worksheet’를 ‘work shit(그놈의 해야 할 것)’을 달라고 말하니 선생님은 당황해했다. 아이들은 이것이 그렇게 웃겼던 것 같다. 당시 친구들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sheet’ 발음을 해보라고 시킨다.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제2 외국어 수업을 들어야 한다. 영어에도 자신이 없는데 제2 외국어라니. 스페인어와 라틴어, 프랑스어 중 선택해야 하는데 스페인어를 선택했다. 다른 친구들이 제일 많이 듣는 과목이었는데 가장 쉬워서 그런 줄 알았다. 스페인 문화권에서 온 학생이 많아서 그렇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
스페인어 기초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숫자, 색깔, 동물 등을 표현하는 방법부터 배웠다. 그러다 학기 중반 정도부터는 문장을 만들고 간단한 대화를 배우게 됐다. 학기 말에는 학생들이 스페인어로 장난을 칠 수 있는 수준까지 됐다. 스페인어 수업시간에는 모든 학생들이 무조건 한 문장은 말해야 했다. 질문을 하든 답을 하든지 말이다. 나는 스페인어 시간이 항상 괴로웠는데, 매일 했던 말은 ‘Puedo ir al bano’였다. ‘화장실 갔다 와도 되나요’이다. 매 수업 약 10분간 스페인어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다.
언어에 자신이 없으니 성격도 소극적으로 변했다. 아주 쉬운 ‘하우 아 유(how are you)’ 같은 말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듣고 ‘익스큐즈 미(excuse me)’라고 하니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내 말을 이해하기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말을 트다
내가 말을 트게(?) 된 결정적 계기는 테니스였다. 한국에서부터 테니스를 친 나는 학교 테니스팀에 들어갔다. 운 좋게 선발로 출전하는 선수가 됐다. 하루에 몇 시간씩 같이 테니스를 치며 친구도 사귀게 됐다. 테니스 서브를 할 때는 반드시 현재 스코어를 반대쪽 코트의 상대방이 들리도록 크게 외쳐야 한다. 프로 경기처럼 누가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영어로 가장 크게 말해본 것이 스코어를 외치면서다. “러브 피프틴!”
테니스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진 동료끼리의 대화는 재미있었다. 서로의 테니스 라켓 자랑, 매일 소리만 지르는 코치 흉보기, 다른 학교 선수들 평가 등. 이때 미국 학생들이 쓰는 비속어도 많이 배웠다.
테니스 성적이 좋으니 학교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졌다. 점점 자신감이 붙었고, 수업시간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러다 테니스팀 주장으로 선출됐는데, 가장 기분 좋았던 날 중 하루다. 나는 가톨릭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 간 테니스 시합이 있기 전 우리 팀은 모두 둥글게 모여 기도하고 시작하는 전통이 있었다. 주장 역할은 이때 대표로 주기도문을 외는 것이다. 그러면 동료들은 끝날 때 “아멘” 하고 코트로 향한다. 신자(信者)도 아니고 영어도 잘하지 못했지만 경기 전 가장 중요한 의식인 만큼 주기도문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다. 주기도문만큼은 원어민 수준으로 욀 수 있다고 자부한다.
대학에 가기 위해 미국의 수학능력시험이라고 불리는 ‘SAT’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과목은 총 세 개였다. 영어 독해와 작문, 그리고 수학이었다. 각 800점씩, 만점 2400점의 시험이었다. 수학은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문제는 영어였다. 수학을 아무리 잘해도 영어 배점이 1600점이라 영어시험을 못 보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체계였다. 공부를 가장 많이 해야 하는 것은 영어 단어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이를 달달 외워야 했다. 한국어는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는데 어려운 영어 단어는 불가능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시험을 여러 번 칠 수 있다. 여러 차례 도전 끝에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정도의 점수를 받았다. 그때 외운 단어들은 시험 직후 거의 다 까먹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