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4일에 있었던 엔테베 인질 구출 작전을 총괄적으로 지휘하였던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무엇보다도 지도부의 창의성과 신속성에 놀라게 된다.
공군사령관 펠레드 소장의 다소 거친 發想을 무시하지 않고 作戰계획으로 발전시켜 집행하는 데 걸린 시간은 6일이었다. 이 사이 105명의 인질이 잡혀 있던 엔테베 공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훈련을 하고, 내각의 의결을 거쳤다.
라빈 수상이 내각을 소집, 공식적으로 허가 여부를 토의하기 시작하였을 때는 네 대의 비행기가 이미 이륙한 뒤였다. 내각이 부결하면 비행기를 귀환시킬 작정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풀려난 非유태系 인질들로부터 납치범들과 공항의 내부 구조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얻었다. 우간다 군의 훈련을 도운 인연으로 독재자 이디 아민과 친하였던 퇴역 장교 발 레브는 수시로 아민과 통화, 정보를 수집하고, 인질을 죽이지 않도록 설득하였다.
이스라엘 군은 엔테베 공항의 모형을 急造, 훈련을 시켰다. 허큘리스 수송기 석 대가 엔테베 공항에 내려 구출작전을 벌이는 동안 이스라엘 공군사령관과 총참모부의 작전사령관이 다른 비행기에 타고 상공에서 지휘하였다. 이스라엘군의 장교들은 늘 앞장 선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엔테베 공항에 착륙하자 마자 벤츠를 내렸다. 마치 이디 아민이 외국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인질구출 작전에 걸린 시간은 30분이었다. 100명의 이스라엘 특공대 가운데 전투에 투입된 인원은 29명이었다. 이들은 일곱 명의 납치범들, 30명 이상의 우간다 군인들을 사살하였다. 비행장에 있던 11대의 미그 17기를 파괴하고 이륙하였다.
이스라엘측 戰死者는 1명인데, 그가 특공대장 요나탄 네탄야후 중령이었다. 105명의 인질 가운데 세 명이 죽었다.
이스라엘 특공대를 태운 군용기는 8000km를 왕복하였다. 돌아올 때 케냐에 잠시 기착하였다. 우간다는 유엔 안보리에 항의하였으나 안보리는 이스라엘의 특공작전을 자위권 행사로 인정, 규탄 결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납치된 여객기엔 248명의 승객과 12명의 승무원들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프랑스인 기장을 풀어주었으나 機長은 인질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면서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남았다가 구조되었다.
엔테베 작전은 기획부터 실행까지가 電光石火였다. 이스라엘의 군부와 국가 지도부는 위기 때 결정을 빨리 내릴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라빈 전 총리는 "이스라엘 군대의 가장 큰 敵은 관료주의이다"고 말한 바 있다.
엔테베 작전의 지휘관인 요나탄 네탄야후의 父母는 미국 코넬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다. 남동생이 둘이었다. 벤자민 네탄야후는 현재 이스라엘 총리이고, 이도 네탄야후는 작가이다. 세 형제는 모두 이스라엘 군의 엘리트 부대인 사이예레트 마트칼 특공대에서 근무하였다.
네탄야후는 1964년에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공수부대에서 근무하고 싶어하여 장교 과정을 밟고 중대장이 되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시나이 사막과 골란 高原에서 싸웠다. 敵陣에 남겨진 동료 병사를 구하려다가 팔꿈치에 총상을 입었다.
6일 전쟁 후 그는 미국에 가서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년 뒤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그는 1972년에 특공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시리아 고관들을 납치해 와서 시리아에 억류된 이스라엘 조종사와 바꾸도록 했다. 이듬해엔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을 죽인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검은 9월단’의 단원들을 암살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지자 요나탄 네탄야후는 골란고원에서 40명의 시리아 특공부대원들을 사살하였다. 시리아 戰線에서 부상당한 채 남겨진 한 중령을 구조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세 번째 등급인 ‘무공수훈 메달’을 받았다. 네탄야후는 기갑부대에 근무를 자원하였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 때 기갑부대 장교들을 많이 잃었다. 그는 기갑부대 장교로서도 부대를 잘 이끌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5년 6월 네탄야후는 특공부대장으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7월4일 우간다 엔테베 공항을 기습,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우간다 군인들이 억류중인 100여 명의 유태인들을 구출하는 특공작전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건물 바깥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30세였다. 특공대원 100여 명이 참여한 전투에서 그가 유일한 戰死者였다. 엔테베 작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요나탄 작전’이라고 불린다. 죽을 때 요나탄 네탄야후는 이혼한 상태에서 애인과 동거중이었다.
7월6일 거행된 장례식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국방장관 페레스는 弔辭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총탄은 이스라엘의 가장 좋은 아들, 가장 용감한 戰士, 가장 유망한 지휘관의 심장을 찢어놓고 말았다.”
1980년에 네탄야후의 편지 모음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글이었다. 戰線의 급박한 상황에서 쓰여진 글이라 이스라엘의 현대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평하였다.
<그는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이였지만 전쟁 기술을 연마하는 데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항상 그러하였듯이 아무리 善한 것이라도 자신을 물리적으로 지킬 힘이 없으면 惡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요나탄 네탄야후의 생애를 그린 영화의 제목은 ‘나를 따르라’(Follow Me)이다. 이스라엘 장교들에겐 ‘돌격’이란 명령이 없다고 한다. ‘나를 따르라’뿐이다. 그래서 장교들의 戰死率이 매우 높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代價를 치르기 위하여’라는 연극이 작년에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
‘요나탄 연구소’는 테러 연구를 전문으로 한다. 네탄야후 총리가 테러에 강경한 것도 형의 죽음으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네탄야후 총리도 특공대원으로 근무중, 납치된 벨기에 여객기 승객을 구출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我軍이 쏜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는 대위로 제대하였다.
‘요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젊은 군인은 죽어서 神話가 되었다. 조국이 자신을 이렇게 기억해주리라는 것을 믿었을 그는 죽을 때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군인을 경멸하는 게 지식인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풍토와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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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특공작전 약사(略史) - 아이히만 납치에서 엔테베 작전까지
● 1960년 5월 이스라엘 해외담당 첩보기관 모사드는 하렐 부장의 현지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 국영항공회사 엘 알(EL AL)편으로 데리고 왔다. 유태인 학살의 한 주역(主役)인 前 나치 비밀경찰 간부 아이히만은 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5월3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형법은 다른 범죄에 대해선 사형을 금지하고 있으나 유태인 학살 범죄만은 예외이다. 아이히만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에서 사형된 유일한 인간이다.
●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우호·협력관계는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알제리아 독립운동 조직에 대한 정보를 프랑스에 제공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核무기의 비밀개발에도 두 나라는 협력했다. 이집트의 나세르에 대한 공동전선도 형성했다. 그러나 드골의 재집권 이후 알제리아가 독립해 버린 뒤 협력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1967년 6월 전쟁 전야 드골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으로 대승하자 드골은 對이스라엘 무기 금수조치를 취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합동공작을 벌여 스위스가 만들고 있던 프랑스의 미라즈 전투기 설계도를 훔쳤다. 이것을 바탕으로 만든 전투기가 케피어(Kfir)이다. 1967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이스라엘군의 무기조달처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의 쉘부르그 항구에 있던 미사일 발사함 5척을 공해상으로 빼돌려 1970년 새해 첫날에 이스라엘 하이파 항으로 몰고 왔다. 이 배들은 對이스라엘 금수조치에 의하여 주문국인 이스라엘로의 인도가 거부돼 있었다. 이스라엘은 노르웨이 석유회사가 구입하는 식으로 위장한 다음 특공대를 선원으로 변장시켜 승선시킨 뒤 배 5척을 소매치기한 것이다.
● 1969년 12월 이스라엘 공수부대의 특공대 66명은 세 대의 헬기에 나눠타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영토 내로 약 60km쯤 진입했다. 사막에 착륙한 그들은 소련제 P-12 레이다 기지를 습격, 2.5t 레이다를 해체하여 헬기에 싣고 돌아왔다. 소련정부는 최신무기가 이스라엘 손에 넘어간 데 화가 나서 이집트에 대한 최신 고급무기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
● 1976년 7월 이스라엘 특공대는 네 대의 허큐리스 수송기에 나눠 타고 아프리카 깊숙이 날아갔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납치한 에어프랑스 여객기엔 2백4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고 그 중 77명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다.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6일째 억류돼 있던 이들 인질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은 기발한 착상(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으로 변장한 이스라엘군인이 수송기에서 지프차를 타고 내리는 바람에 공항경비병들은 외국 순방중이던 아민이 귀국한 것으로 착각했다)과 대담한 공격, 그리고 최소의 인명손실로 하여 그 뒤에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완벽한 드라마였다.
●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은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용으로 건설중이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했다. F-16, F-15 편대는 사우디 아라비아 상공으로 우회하여 이란쪽으로부터 공습을 단행하였다. 이라크 측에선 한동안 이란 공군기의 공습을 받은 것으로 착각했다.
● 1985년 10월1일 이스라엘 공군 F-15 편대는 튜니시아에 있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본부 건물을 폭격, 75명이 죽었다. 공중급유를 받아 가면서 1천9백km를 날아와 폭격한 이스라엘 편대는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귀환했다. 이 폭격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사이프러스에서 세 명의 이스라엘人을 죽인 데 대한 보복이었다.
● 1986년 10월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는 이스라엘의 비밀核개발에 참여했던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의 증언을 게재하여 이스라엘이 이미 核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모사드는 미인계를 써 바누누를 로마로 유인한 뒤 선박편으로 데리고 왔다. 바누누는 반역혐의로 재판에 넘어가 징역 18년을 선고받아 복역한 뒤 풀려났다. 변호인들은 바누누의 폭로를 反核양심선언으로 몰고가려고 했으나 이스라엘 언론이 납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유력 일간지 하아레츠의 칼럼은 「민주국가라 하더라도 그런 폭로를 한 인물은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바누누가 아직도 송환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정부에 대해서 왜 그를 내버려 두고 있느냐고 추궁해야 한다」고 했다.
● 1988년 4월16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튜니시아의 해안에 상륙,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주요인물인 아부지하드를 그의 집에서 암살한 뒤 철수했다. 이스라엘 군은 이 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전자전 통제기를 지중해 상공에 띄웠다. 당시 이스라엘군 참모차장 에후드바락(뒤에 총장)이 이 비행기에 타고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자 정보기는 특공대가 침투한 지역의 전화 및 무전시설을 마비시켜 특공대의 탈출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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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公認암살단을 만들어 뮌헨올림픽 테러 관련자들을 20년간 추적, 모조리 처단하다!
1972년 西獨의 뮌헨에서 열린 여름 올림픽의 선수촌으로 침입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테러단이 이스라엘 선수 및 코치들을 인질로 잡아 경찰과 대치한 끝에 11명을 죽였다. 서독 경찰관 1명도 사망하였다. 테러단 5명이 총격전으로 죽었고 세 명이 잡혔다. "검은 9월단"은 그 뒤 서독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여 西獨 정부를 위협한 끝에 잡혀 있던 세 명의 동료를 구해냈다.
골다 메이어(여성) 이스라엘 총리는 이 테러를 기획하고 가담한 범인들을 암살하는 조직을 만들게 하였다. 정보기관 모사드와 이스라엘 군대가 합동으로 특수조직을 만들었다. 이 팀의 첫 작전은 1973년 4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침투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보책임자 모하메드 유수프 알 나자르 등 세 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 特攻(특공)작전의 지휘관은 나중에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 그리고 수상이 된 에후드 바락(현재 국방장관)이었다. 이 국가公認(공인) 암살단은 주로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니면서 팔레스타인 테러단을 추적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였다. 1973년 6월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한 모로코인을 뮌헨사건 관련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誤認(오인)하여 암살하였다가 요원 다섯 명이 붙들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외교를 통하여 2년 뒤 옥살이하던 요원(여성 2명, 남성 3명)을 전원 송환받았다. 이스라엘 암살팀은 살라메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1979년 1월22일 그를 베이루트에서 발견, 원격조종 폭탄으로 죽였다.
이 보복작전은 "신의 분노"라는 암호명을 가졌다. 1992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테러관련자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뮌헨 사건 관련자 중 생존자는 두 명이라고 한다. 이 보복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수년 전 개봉되었던 "뮌헨"이란 작품이다. 스필버그가 제작하였다.
한국이 이스라엘 같이 보복하였더라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 관련자,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관련자, 아웅산 폭파사건 관련자, KAL기 폭파사건 관련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거기에 김일성, 김정일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엔테베 특공작전 이야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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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7, 17: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