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두환의 제안 수용하다!
저녁 만찬이 끝나고 노 대표는 연희동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집 앞에서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언론에서 하자는 대로 해야겠지. 그게 바로 국민들의 뜻일 테니까”라고 했다. 그러곤 박철언(朴哲彦) 안기부장 특보를 집으로 불렀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고 말했다. 독자적으로 직선제 결심을 내렸다는 것인데 전 대통령의 회고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전 대통령은 6월 19일에도 청와대에서 노 대표를 비밀리에 만나 직선제를 논의했다고 했다. 이날 노 대표는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면서 “그런데 제가 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민주화 조치를 건의 드리면 각하께서는 크게 노해서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효과가 있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 대통령은 6월 22일 노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고 썼다. “세상에 비밀이 없는데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그 선언의 진정성과 가치가 훼손될 수 있으며 나는 민주화 조치를 끝까지 반대한 사람으로 영원히 낙인찍히는 결과가 될 것 아닌가”라고 했다. 노 대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6월 24일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당의 신뢰도나 노 대표가 쌓아 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라며 직선제에 대한 의중을 떠봤다고 했다. 그는 선뜻 수긍하지 않은 채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왔으므로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게 되면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전 대통령의 결심을 굳히게끔 하기 위해 반어법을 썼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박철언 특보가 6월 18일부터 이미 직선제 수용 관련 선언문 기초 작업에 들어갔고 자신으로부터 두 차례 보완 지시를 받은 상황이었다고 했다. 즉 직선제를 직접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철언 특보는 5공과 6공의 비사(秘史)를 담은 책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2005년에 냈다. 이 책에 따르면 노 대표는 6월 23일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를 집으로 불러 전 대통령이 먼저 직선제를 제의했다는 얘기를 꺼내놨다. 노 대표는 “사태 수습을 위해 그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난국 타개에 자신감을 잃은 듯하더라. 처음에는 반대 의견을 얘기했으나 결심이 강한 듯해서 오늘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김대중은 사면·복권하고 구속자도 석방해야 한다고 내가 주장했다”고 했다. 박철언 특보는 이날 이후부터 직선제 등 종합 시국 수습 방안을 마련하는 세부 작업에 들어갔다고 했다.
6월 27일 全-盧 회동의 진실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은 계속된다. 6월 29일을 앞두고 노 대표가 선언문 내용을 청와대와 미리 공유했는지 여부이다.
우선 전 대통령은 6월 27일 노 대표가 직접 청와대를 찾아와 6·29선언 보고서 내용을 전달했다고 했다. “극적인 발표 직전의 만남이어서 이날의 회동은 청와대 본관과 떨어진 별관에서 오후 2시에 이뤄졌고 노 대표는 중앙청 서문에서 내가 보낸 청와대 차량으로 바꿔 타고 왔다”고 했다. 이 자리엔 아들 재국씨가 동석했다. 전 대통령은 “최종 결론이 났으니 최대한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청와대나 안가에도 일절 오지 말고 예상치 못한 급한 일이 생기면 우리 큰애를 통해 서면으로 상호 연락을 하도록 하라”고 했다. 또한 이날 “노 대표는 자필로 써서 준비해온 발표문을 낭독한 뒤 공식 발표 이후 자신이 취할 일련의 행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했다.
김성익 비서관 역시 6·29선언의 실무작업은 노 대표팀에 의해 약 2주일에 걸쳐 이뤄졌다고 했다. “이 2주일간 전 대통령과 노 대표와의 비밀회동은 6월 17일 청와대 대식당, 6월 19일 오후 5시 청와대 별관, 6월 24일 오후 7시 청와대 별관, 6월 27일 오후 2시 청와대 별관 등에서 네 차례 있었고 서면 연락과 전화 통화가 수시로 있었다. 막바지 회동에는 전 대통령의 장남이 배석해 기록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일부 보도에는 내가 발표 문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6월 24일 이후 6·29선언 때까지 나는 청와대에 올라간 일이 없었다”고 했다. “선언 직전 주말인 6월 27일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어도 올라가지 않았다. 중대 선언이 금명간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선언 내용을 청와대에 보낸 일도 없다”고 했다.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
전두환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6월 28일 김성익 비서관에게 노태우 대표가 보고한 내용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 비서관은 “선언 발표 주체가 전 대통령이 돼야지 왜 공(功)을 모두 노 대표에게 넘기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발표는 노 대표를 부각시키고 중단 없는 국가 중흥을 위해 내 신념을 담보로 택한 나의 마지막 카드이자 선택이다. 나는 이 민주 발전을 위한 선택이 얽히고설킨 모든 것을 풀고 국가의 밝은 미래를 열고 올림픽을 성공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빌 뿐이다. 내가 역사에 남고 안 남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노 대표를 띄워서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도록 하자. 나는 국민으로부터 칭송받지 못하더라도 노 대표가 부각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전 대통령은 “다음 정권을 힘으로 만들면 올림픽도 못 치르고 그러면 역사의 큰 호기를 놓친다”고 했다. “공천을 놓고 파벌끼리 싸우는 게 야당 생리 아니냐”며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라고 했다. 김성익씨는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으며 직선제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역사의 시나리오를 짜는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큰 힘과 역할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과 흥분으로 잠시 멍멍해졌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청와대의 몇몇 비서관이 ‘어떻게 이것을 노 대표 단독으로 하게 합니까? 합작품 내지는 전 대통령 각하의 작품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건의했다고 한다”며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청와대에 오라는) 전 대통령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박철언 특보는 “누가 먼저 직선제 수용을 주장했든 또는 어떤 참모가 직선제 얘기를 먼저 꺼내었든 그것은 ‘6·29선언의 주역’ 다툼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기존의 제도에 따른 손쉬운 방법의 집권 기회가 보장돼 있는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국민의 뜻에 따라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떳떳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선 데 있다”며 “당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사람은 바로 노태우 대표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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