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튼 저서(著書)에 담길 내용에 요동치는 美 정치권

대북정책에서도 계속 부딪친 볼튼과 트럼프의 운명은?

존 볼튼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신간(新刊)에 담길 내용이 일부 공개됐다.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상원의 탄핵 재판을 받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불리한 내용들이 포함돼 미국 정치권의 큰 이슈로 떠올랐다.

뉴욕타임스가 책의 초고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볼튼 전 보좌관의 책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4억 달러 규모의 원조를 보류한 대목이 담겼다. 우크라이나가 유력한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그의 아들을 포함한 민주당 인사들에 대한 조사를 도울 때까지 원조를 동결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볼튼측 변호인은 뉴욕타임스의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고 한다. 백악관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의 대가로 민주당측 인사들을 수사할 것을 요청했다는 미 상하원 민주당 의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왔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의 최고위직 출신이 이는 사실이라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볼튼의 변호인인 찰스 쿠퍼는 새로운 책의 내용을 12월 백악관 국가안전회의(NSC)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는 백악관이 볼튼이 출간할 내용 중 기밀사안에 대한 검토를 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고 한다. 쿠퍼는 백악관 국가안전회의에 전달할 당시 검토 담당자 이외에는 이를 열람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내용을 보면 (백악관의) 검토 절차가 더럽혀졌고 검토할 수 있는 인원 이외에도 공개됐다는 사실이 명확하다”고 했다.

볼튼 보좌관의 책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인 루디 줄리아니가 우크라이나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당시 각료들이 가졌던 우려도 담겼다고 한다. 볼튼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가 부패했다는 줄리아니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마이크 폼페오 국무장관이 사적인 자리에서 말했다고 했다. 또한 볼튼은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전화통화를 한 2019년 7월 25일 이후 윌리엄 바 법무장관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고 했다. 바 법무장관에게 줄리아니에 대해 갖고 있는 우려를 공유했다는 것이다. 한 법무부 관계자는 볼튼이 바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줄리아니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사적 외교를 펼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고 했다. 반면 법무부 대변인실은 바 법무장관이 볼튼으로부터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통화 내용을 들은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바 장관이 8월 중순에서야 두 나라 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전화통화 내용을 알게 됐다고 주장해왔다.

현재 민주당 상원은 볼튼을 포함한 추가 증인 소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선 민주당 의원 전원이 찬성표를 던지고 공화당 의원 중 4명이 민주당 편을 들어줘야 한다. 공화당의 경우는 하원의 탄핵 심리가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등의 이유로 추가 증인 신청에 반대해왔다. 그러나 이번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일부 의원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미트 롬니 공화당 상원의원은 “다른 공화당 의원들도 존 볼튼으로부터 증언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의견에 동참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공화당 의원들과 비공개 회동을 가졌으며 추가 증인을 출석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더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은 볼튼 보좌관의 증언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6일 트위터를 통해 “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가 바이든들(注: 父子)을 포함한 민주당에 대한 수사와 관련이 있다고 존 볼튼에게 말한 적이 절대 없다”며 “그는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에 대한 불만을 한 번도 표현하지 않았다. 만약 볼튼이 그런 말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순전히 책을 팔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했다. 마이클 퍼푸라 백악관 고문은 “트럼프 대통령과 얘기를 나눠본 모든 사람은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와 (민주당에 대한) 수사 사이에는 어떤 연관도 없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혔다고 말해왔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변호인도 반박에 나섰다. 1995년 미식축구 스타 출신의 OJ 심슨 사건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앨런 더쇼비츠 하버드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탄핵이 되기 위해서는 범죄와 같은 행동을 저질러야 한다는 내용이 헌법에 명시돼 있다고 했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권력 남용’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탄핵하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볼튼 보좌관 책에 담긴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탄핵에 해당될 범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볼튼이 폭로한 내용 중 그 어떤 것도 대통령이 권력 남용을 행사했다거나 탄핵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폭로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라고 했다.

볼튼 보좌관의 폭로가 트럼프의 탄핵 국면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한 볼튼 보좌관이 출간하는 책에 북한과의 협상 비화가 담겨 있을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볼튼은 2018년 4월 9일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취임해 2019년 9월 10일 경질됐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던 과정을 최전선에서 목격한 사람이다.

트럼프와 볼튼이 이렇게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신호는 볼튼이 해임될 때부터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튼 보좌관 해임을 트위터로 알린 사람이다. 그는 10일 트위터에 “나는 어젯밤(9일)에 존 볼튼에게 그가 더 이상 백악관에서 근무할 필요가 없다고 통보했다. 나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의 제안에 강하게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나는 존(볼튼)에게 사임을 요구했으며 그는 오늘 아침 이를 제출했다”고 했다. 당시 트럼프와 볼튼은 북한과 이란,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가벼운 언행에 볼튼으로서는 자존심에 타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는 국무부 고위 관료를 거쳐 유엔주재 미국대사까지 지낸 사람이다. 볼튼은 물론 강경파로 분류돼 많은 공격을 받는 인물이지만 정치 및 외교 경험이 거의 전무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다.

볼튼 보좌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퇴임 8일 후인 9월18일 뉴욕 게이트스톤 연구소가 주관한 비공개 모임에서 이란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북한과 이란과의 협상이 ‘결국 실패할 운명(doomed to failure)’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과 이란이 협상을 하는 이유는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제재 완화를 얻어내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볼튼 보좌관은 중동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욱 많은 발언을 했다. 그는 몇 개월 전 이란이 미국의 정찰 드론을 공격했을 때 (군사)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이란이 더욱 과격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때 미국이 보복을 했다면 이란이 사우디 석유 생산 시설을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을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으로 초청한 것은 끔찍한 신호를 보낸 것이고 9.11 테러 희생자를 모독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볼튼 보좌관의 발언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존은 어느 누구와도 같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그를 (보좌관으로) 데리고 왔을 때부터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북한과의 협상은 실패할 운명이라는 볼튼의 발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로만 하는 것은 쉽다. 그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지난 3년간 (북한의) 핵실험은 없었고 우리들은 인질들을 돌려받았다. 전사했던 위대한 군인들을 돌려받았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돌려받을 것이다. 우리들의 영웅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북한과의) 관계는 좋다. 나는 어디 돌아다니면서 ‘리비아 모델을 사용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은 것 같다. 볼튼은 리비아 모델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에 따라 일들이 나쁜 방향으로 역행하게 됐다. 나는 존이 과거의 그들이 얼마나 나쁘게 했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방법이 매우 좋을 수도 있다.>

존 볼튼 전 보좌관은 9월 30일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도 김정은이 핵무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퇴임 이후 20일 만에 공식석상에 나타난 자리였다. 그는 김정은이 국제사회의 제재를 완화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 양보할 수는 있지만 핵무기를 결코 자발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이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감행하지 않는 이유는 핵탄두와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생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실험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은 다행이 아니라 걱정해야 할 징후”라고 했다. 실험이 없어 안전해졌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도 했다. 그는 “특히 한국 등의 나라들이 북한의 미사일 실험을 지켜보면서 식량 지원을 하고 있다”며 “미사일을 발사할 여유는 있고 자국민을 위해 음식 살 돈은 없다는 북한의 주장에 굴복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의 핵 위협을 다루는 데 있어서 북한 정권을 교체하거나 군사력을 동원하는 방법도 진지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했다.

볼튼 전 보좌관은 12월 22일 미국 온라인매체 ‘악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핵 야욕을 막았다는 주장은 과장에 불과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말로 북한의 핵 위협을 막으려 했다면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대북정책을 취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북한이 공언한 대로 크리스마스 도발을 감행한다면 백악관은 매우 이례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며, 그것은 북한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해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최대압박 정책도 사실상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북한의 불법 선박간 석유 환적을 미 해군이 막을 수 있음에도 이를 막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다음날인 23일에는 트위터를 통해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미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현 시점에서 그것은 진짜 정책이 아닌 수사적인 것에 더 가깝다. 미국과 동맹국을 향한 북한의 위협은 임박했으며, 북한이 미 본토를 위협할 기술을 갖기 전에 좀더 효과적인 정책이 요구된다”고 했다. 볼튼은 미-북 비핵화 협상은 어려울 것이며, 북한의 도발 가능성은 크다고 전망했으며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지 3년이 다 됐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 중단과 같은 뚜렷한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고도 했다.

트럼프와 볼튼 등 미 행정부 관료들의 대북관을 분석한 월간조선 2019년 4월호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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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美北정상회담 결렬 그 후
조갑제 김영남
⊙ 어린 독재자를 하노이로 유인, 판을 깸으로써 한반도 核게임의 주도권을 되찾다
⊙ 트럼프는 ‘미치광이 전술’ 구사, 김정은의 혼을 빼다
⊙ ‘김정은-문재인 공동운명체’ 위기… 김정은의 약점, 문재인의 無能 드러나
⊙ 트럼프, 펜스, 폼페이오, 볼턴 등이 서로 다른 말을 쏟아내는 가운데 볼턴만이 일관되게 강경론 주장, 관철시켜


  김정은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 존 볼턴이 시나리오를 쓰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주연한 ‘미치광이 전술’에 말려 낭패를 당한 것 같다. ‘미치광이 이론(Madman Theory)’은 국가 지도자가 미친 척하면서 상대의 혼을 뺀 뒤 결정적 승부수를 던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전략이다. 김정은은 트럼프가 자신을 향하여 ‘위대한 지도자’ ‘사랑에 빠졌다’ ‘아름다운 편지’ 등 칭찬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감과 호감을 갖게 되었고, 하노이에서 만나 1대 1로 유리한 담판을 지을 수 있으리라 만만하게 보았을 것이다. 승리를 예감한 그는 왕복 일주일의 기차여행을 통하여 선전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도 들떴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 9일 전인 지난 2월 19일 밤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하노이 회담에서 큰 성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결과를 문 대통령과 공유(共有)할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새롭고 대담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 높이 평가하면서 “북한의 비핵화(非核化) 조치를 견인하기 위한 상응조치로서 한국의 역할을 활용해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는 “남북 사이의 철도·도로 연결부터 남북경제협력 사업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다면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고 그것이 미국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미국과 북한의 봉이 되겠다는 이야기’라고 비판받기도 했는데, 그는 ‘합의’를 확신하고 ‘신(新)한반도 체제 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도 회담 직전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돼지에게 립스틱을 발라주고 성공했다고 할 사람”이라고 했다. 그 또한 ‘합의’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들이민 카드는 과거 어느 미국 대통령도 던지지 않았던 초강경 제안이었다. ‘완전한 비핵화를 하든지 제재를 계속 받으라’는 양자택일(兩者擇一) 제안이었다. 김정은의 당황한 마음은 부하들이 허둥댄 모습을 통하여 짐작이 간다. 
 


  ‘미치광이 이론’의 元祖는 李承晩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전에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미치광이 이론’에 기반을 둔 ‘불예측성(unpredictability)’을 외교 전략의 기조로 삼겠다는 뜻을 비친 적이 있다. 그가 정의한 ‘미치광이 이론’이란, ‘적(敵)에는 우리가 미친 사람처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모습을 보이고, 동맹국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우방국을 쉽게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불예측성 이론’의 원조는 닉슨이 아니라 이승만(李承晩)이다. 1953년 가을 닉슨 미국 부통령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親書)를 갖고 있었다. 닉슨은 경무대로 대통령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이승만은 그 편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천천히, 계산된 행동을 하듯이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냈다.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위엄 있고 정확한 발음이었다. 이 친서에서 아이젠하워는 한국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뒤 이승만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닉슨을 향하여 몸을 숙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방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미리 알려드릴 것임을 약속합니다.”
 
  닉슨은 이 정도 약속으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합의하지 않고선 어떤 (도발적) 행동도 한국이 단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닉슨은 이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이 대통령은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두 페이지짜리 종이를 꺼내서 펼쳤다. 이 대통령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내가 직접 타이프를 쳤다”고 말했다.

 
 
  닉슨, 이승만에게서 배우다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은 이승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귀국(貴國)은 가장 중요한 협상력 하나를 잃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희망을 잃는 것이 됩니다.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솔직합시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평화를 갈망하므로 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미국이) 어떤 양보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자들은, 나는 미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가진 그런 불안감을 없애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하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인 내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 편지를 읽어보고 파기해주셨으면 합니다.”
 
  닉슨은 퇴임 후 쓴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닉슨은 냉전(冷戰)을 서방 세계의 승리로 이끈 3대 전략가 중 한 사람이다. 그들은 냉전 승리의 틀을 짠 해리 트루먼, 소련을 압박하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만든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중국과 화해하여 소련을 고립시킨 닉슨이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 후 물러난 뒤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함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강조했다. 이 깨달음은 그가 고백했듯이 이승만에게서 배운 ‘불예측성의 중요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닉슨의 ‘미치광이 이론’을 북한의 김정은에게 적용한 사람이 트럼프와 볼턴으로 추정된다.
 
 
  정세현, “볼턴은 재수없는 사람”
 
  정세현(丁世鉉) 전 통일부 장관은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민주당이 마련한 간담회에서 존 볼턴 NSC 보좌관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를 하노이회담 결렬의 주역으로 지목하고, ‘불 지르러 들어간 사람’ ‘재수없는 사람’ ‘인디언을 죽이는 백인 기병대장’으로 표현했다.
 
  “제가 통일부 장관이던 2002년 7월, 당시 미 국무부 차관인 볼턴은 북한이 별도의 장소에서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다’고 하더라. 당시는 케도(KEDO·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 사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인데, 이것을 중단시키려는 저의를 갖고 핑계를 만든 것이다. ‘이 사람 헛꿈 꾸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북한이) 저농축 연료봉을 만드는 것도 고농축이라고 (볼턴이) 우기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을 홀려서 ‘(북한은) 나쁜 놈들’이라는 이미지를 각인하려는 계산 같았다. 점잖지 못한 표현이지만,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매우 재수없는 사람이다.”(조선닷컴에 실린 요지)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12일, 2000년과 2007년 열린 평양회담 주역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원로자문단과 오찬간담회를 했다. 원로자문단 좌장(座長)을 맡은 임동원(林東源) 한반도평화포럼 명예 이사장은 현 정부의 대북(對北)정책 기조가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정책과 ‘같은 맥락’이라고 평가했다. 이 임동원씨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볼턴이다.
 
  볼턴은 미국 조지 부시 정부 시절 국무부의 군축담당 차관보 및 유엔대사를 지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하자 유엔안보리의 대북(對北)제재를 이끌어낸 사람이다. 북한에 대한 사치품 수출을 금지하면서 그가 한 말은 “김정일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였다. 그가 2007년 11월에 쓴 회고록 《항복은 선택이 아니다》에는 2002년 가을에 있은 사건의 비화가 실려 있다.
 
 
  볼턴, “임동원은 ‘진짜 북한 정권 변명가’”
 
  미국 정보기관은 그해 여름 북한이 파키스탄의 압둘 칸 박사에게 도움을 받아 우라늄 농축을 추진하고 있다는 확증을 잡았다. 2002년 10월 3일, 이 증거를 갖고 방북(訪北)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의 추궁에 북한의 외교부 부상(副相) 김계관은 “반북(反北)세력의 조작”이라고 반박했다. 다음 날 강석주 제1부상은 켈리 특사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그 요지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惡)의 축(軸)’이라 부른 데 대한 직접적인 조치라는 것이었다.
 
  강석주는 미리 정리한 내용을 읽어가면서 “이는 당(黨)과 정부의 입장에 의거한 것이다”고 몇 차례 강조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미국 관리 8명은 대화록의 정확성을 확인한 뒤 워싱턴에 보고했다. 나중에 한국과 미국에선 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불법활동을 인정할 리 없다면서 이는 통역의 잘못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 등장한다.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폭탄을 만드는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정한 북한은 제네바 합의가 금지한 불법활동을 자백한 것이 되어 법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른바 ‘햇볕정책’의 실무 책임자던 임동원씨는 회고록에서 “미국이 핵 의혹을 조작,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정권의 자백이 제네바 합의 파기로 이어진 역사적 사실을 부정한 것이다. 켈리 팀은 평양에서 서울로 와서 한국 측에 방북(訪北) 결과를 설명했다. 볼턴에 따르면, 임동원은 이들의 설명을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북한 사람들의 과장되고 격앙된 발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린들 핵무기를 가질 수 없느냐’는 식의 표현이 고농축 우라늄 계획을 시인하는 것인지,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북한은 최고당국자와의 회담을 통하여 일괄타결을 바라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임씨는 “미국의 네오콘 강경파들이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이 첩보를 과장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북한 측이 명백하게 우라늄 농축 추진 사실을 인정했는데도 그는 미국을 의심하고 김정일 정권을 감쌌다. 김정일도 원하지 않은 변호였다.
 
  이런 임동원씨에 대하여 존 볼턴은 회고록에서 ‘진짜 북한 정권 변명가’(real DPRK apologist)라는 경멸적 표현을 했다. ‘apologist’는 변명을 대신해주는 이를 가리킨다. ‘변호’와 ‘변명’은 어감(語感)이 다르다. 변호는 억울한 사람을 지키기 위하여 설명하는 것이고, 변명은 잘못에 대하여 구실을 대는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퇴임 후인 2007년까지도 북한의 우라늄 농축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랑스 신문 《르몽드》와 한 2007년 4월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난 제임스 켈리의 발언 내용에 매우 놀랐다. 그의 대화 상대였던 북한 대표들은,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북한에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존재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국군통수권자이기도 한 대통령이 이 정도 오판(誤判)을 해도 나라가 넘어가지 않은 것은 한미동맹 덕분이다. 볼턴이 김대중의 대북(對北)정책과 인맥을 계승한 문재인 정권을 불신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한반도 核게임 판이 바뀌었다
 
  하노이의 트럼프-김정은 회담 결렬 사태로 북핵(北核) 문제의 본질이 명료해졌다. 김정은은 패와 약점을 다 보여버렸다. 트럼프는 회담을 깸으로써 오히려 주도권을 잡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실패한 중재자’가 되어 입지가 너무 좁아졌다. 하노이 드라마는 한반도의 핵(核)게임 판을 바꾼 사건이었다. 누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인가? 우선 하노이회담으로 명쾌해진 입장과 조건들을 정리한다.
 
  1. 김정은의 의도 확인: 핵보유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군축회담을 통하여 한미동맹을 해체, 한국을 종속화시킨다. 첫 단계로 영변 핵시설을 포기하는 미끼를 던져 사실상 대북(對北)제재 무력화(無力化)를 달성한 뒤 한미동맹 해체로 나아간다.
 
  2. 김정은의 약점 노출: 제재로 인한 경제 악화. 종전선언이나 대표부 교환보다도 제재 해제에 매달린 것은 다급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3. 미국의 빅딜(big deal) 목표와 전략: 북한이 완전한 핵·미사일·생화학무기 폐기 및 인권개선을 이행하면 제재 해제 및 경제발전 지원으로 보상한다. 쪼개 팔기 식의 단계적 협상이 아닌 일괄 합의를 추진한다. 이는 북한의 핵보유국 전략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4. 문재인의 국민 기만(欺瞞)과 무능: 김정은이 핵을 폐기하고 경제발전에 치중하는 전략적 결심을 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전언(傳言)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비핵화 사기극’이란 뜻이다. 하노이회담 전후(前後), 미국과 북한으로부터 고급 정보를 받지 못하고, 회담 실패를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달라진 세상을 상대로 역주행(逆走行)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베의 승리
 

  5. 아베의 승리: 하노이 결렬은 트럼프가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아베는 미국이 본토를 위협하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ICBM) 개발을 동결시키는 수준에서 타협, 일본과 한국의 안전을 포기할까 걱정하여 끈질기게 완전한 비핵화와 모든 미사일의 폐기를 주장해왔다.
 
  6. 중국의 낭패: 러시아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어떤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이고, 중국은 김정은을 이용해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켜보겠다는 전략에 타격을 입었다.
 
  7. 문재인-김정은 공동운명체의 위기: 북한 카드를 잃게 되면 지지율이 떨어지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한미 갈등이 깊어지고, 보수층의 반발이 거세진다. 김정은과 이른바 민족공조 노선을 강화해, 반일(反日)·반미(反美)로 돌파구를 찾으려 할 경우 국론(國論)의 분열과 최악의 경우 내전적(內戰的) 사태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에 너무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표변하기도 쉽지 않다.
 
  8. 김정은과 문재인의 착각: 트럼프만 요리하면 된다는 생각은 민주국가의 다양성, 특히 언론·야당·정보기관의 견제 역할을 과소평가하여 벽에 부딪혔다.
 
  9. 미국은 북한의 핵보유국화와 한국의 탈미(脫美)를 방치하면 동북아에서 중국의 패권(覇權)을 인정하게 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10. 문재인 정권의 안보노선(脫美-反日-親中-通北)은 유지하기가 힘들다.
 
  11. 김정은의 실각 가능성: “수령의 권위 손상으로 자유통일이 10년 앞당겨졌다.”(태영호)
 
  12. 역설적으로 트럼프는 회담을 깸으로써 초당적(超黨的) 지지를 받게 되었다. 대북(對北) 강경론이 미국에서 대세(大勢)가 됨으로써 문재인의 ‘김정은 제일주의 노선’은 사면초가가 되었다. 오히려 아베 총리의 발언권이 커졌다.
 
 
  김정은-문재인 공동운명체론
 
  트럼프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완전한 북핵 폐기’ 카드를 들이대어 김정은을 당황하게 한 것은, 김정은-문재인-시진핑(習近平) 주도로 전개되던 북핵 장기판을 한 방에 역전(逆轉)시킨 묘수(妙手)였다. 김정은은 자신의 패와 약점을 노출시켰다. 문재인은 트럼프와 김정은에 대한 종속성과 무능을 드러냈다. 시진핑은 계산이 빗나갔다. 주도권이 미국 손으로 돌아갔고, 아베의 위상도 올라갔다.
 
  문제는 한국인의 득실(得失)인데, 문재인-김정은 공동운명체의 불행이 한민족(韓民族)의 행운이 되는 구도이다. 민족반역자 김정은과 공조하면 자동적으로 민족반역자가 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생일을 공식적으로 인멸한 문재인 대통령은 문명(文明)의 반격을 불러 자멸(自滅)의 길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대한민국 70년의 문명 건설, 즉 언론자유·법치·복수(複數)정당제·국군·한미동맹의 집합된 힘이 생존투쟁에 돌입하면,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끄집어 올린 시대 착오의 이념과 여기에 포로가 된 문재인 세력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 될 것이다.
 
  아베는 이민족(異民族)인데도 한국인에 유리한 정책을 펴고(북핵 완전 폐기, 북한인권 문제 해결 등), 문재인은 동족(同族)인데도 한민족에 불리한 정책을 펴는 것은 보편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의 위대성과 인종주의적 ‘민족공조론’의 야만성을 극적으로 폭로한다. 이념이 민족보다 중요한 것이다.
 
 
  북한을 혼란스럽게 한 미국 4인방의 多重방송
 
  ‘미치광이 이론’을 실천하려면 말을 미친 듯이 종잡을 수 없게 해야 한다. 미국 정부 관리들은 트럼프를 필두로 하여 지난 1년간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민주국가의 다양한 목소리에 익숙지 않은 북한의 전문가들이 혼란에 빠질 만했다. 지난 1년 동안 북한 문제에 관련된 발언을 가장 많이 한 미국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 존 볼턴 보좌관, 그리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다. 이들은 큰 틀에서는 모두 ‘북한의 비핵화’를 강조해왔지만 각자 중점을 둔 사안에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관계’를, 펜스는 ‘북한의 인권 문제’를, 볼턴은 ‘일괄 타결’을, 폼페이오는 ‘북한의 약속 이행’에 중점을 둔 발언을 해왔다.
 
  미북 관계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진행될 때에만 해도 개선 가능성이 적어 보였다. 평창을 찾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북한 관계자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대신 탈북자(脫北者)들을 만나고 천안함기념비 등을 방문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중인 2018년 2월 23일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며 “이는 매우 거칠고 세계에 매우 불행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그는 “북한은 정말로 불량 국가”라며 “협상을 이뤄낼 수 있다면 훌륭한 일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바꾼 사건은 정의용 청와대국가안보실장의 백악관 방문이었다. 그는 지난 3월 8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김정은의 메시지를 전한 뒤 기자회견을 열고 “트럼프 대통령이 ‘영구적인 비핵화’ 달성을 위해 5월 안에 김정은을 만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트럼프의 말이 달라진다.
 
 
  볼턴과 폼페이오
 
  이런 가운데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존 볼턴이 4월 9일부터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 일하게 되고,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국무장관으로 지명된 것이다. 볼턴은 그 두 달 전에도 ‘북한을 선제(先制)공격하는 것은 국제법상 문제가 없다’는 글을 쓴 강경파이다. 폼페이오도 CIA 국장 때 “북한의 정권 교체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次善)은 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한국 보수 인사들은 트럼프가 너무 쉽게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하는 게 불안했지만, 볼턴과 폼페이오가 보좌하니 속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폼페이오는 2018년 4월 12일 열린 상원 외교위원회 인준 청문회에서는 기존 강경한 입장과는 거리가 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누구도 이번 미북정상회담을 통해 포괄적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며 “북한이 핵무기로 미국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노력에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게’ 물러서도록 하는 합의가 회담의 목표”라고 말했다. 당시 일부 미국 전문가들은 “미국이 사실상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역량 제거로 목표를 낮춘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놨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 헤더 노어트는 정례 브리핑에서 이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미국 정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맹들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청문회 며칠 후 미국 정부는, 폼페이오 장관 지명자가 3월 말 CIA 국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사실을 공개했다. 폼페이오는 5월 8일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해 억류된 미국인 3명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5월 10일에 트럼프가 이들을 직접 맞이하기 위해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공항으로 가기도 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수년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며 “회담 이전에 억류자들을 풀어준 김정은 위원장에게 매우 감사하다”고 했다.
 
 
  리비아 모델? 한국 모델?
 

2018년 11월 15일 ‘동아시아 정상회의(EAS)’가 열리고 있는 센텍 회의장에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시스
  억류자 석방으로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을 때 견제구를 던진 이는 볼턴이었다. 북한의 협상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전한 ‘비핵화’가 ‘북한의 비핵화’를 뜻하는 게 아닌데 트럼프가 속아 넘어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뒤 볼턴의 행동을 보면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깨려는 의도를 갖고 움직인 것 같다. 5월 8일 백악관 정례 브리핑에서 볼턴은 북한의 아픈 점을 건드렸다.
 
  “북한 스스로가 동의했던 1992년 남북한 비핵화 선언에 기초하여 협상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북한 비핵화 과정에 ‘리비아 모델’이 적용될 수 있다”는 발언도 했다. 남북한 비핵화 선언과 리비아 모델 발언은 북한 정권이 싫어하는 말이다.
 
  북한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명의의 성명을 내고 “미국이 일방적 핵포기를 강요하면 조미(朝美)회담을 재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반발했다. 리비아식 핵포기 방식 등을 언급하며 “대화 상대방을 심히 자극하는 망발”이라고 주장했다.
 
  볼턴은 이 성명을 바로 반박했다. 그는 같은 날 ‘폭스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는 회담의 목표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의 핵포기 의지가 없으면 회담은 짧을 것”이라고 했다. ‘김계관이 자신의 실명을 언급하며 비판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이런 행동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며 “2003년 내가 당시 김정은의 아버지인 김정일을 ‘독재자’라고 부르자 북한은 나를 ‘인간쓰레기’ ‘흡혈귀’ 등으로 부른 사례가 있다”고 발언한 뒤 웃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는 5월 17일 북한에 사용하려는 모델은 ‘리비아 모델’이 아니라 ‘한국 모델’이라 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한국처럼 부유해지고 산업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이 북한과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리비아 모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며 “볼턴 보좌관이 리비아를 언급한 이유는 문제가 생겼을 때를 가정한 것이고, 이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경고했다.
 
 
  회담 취소 결정은 볼턴의 기획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이 무렵 언론에 등장해 또 다른 맥락의 발언을 했다. 그는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장난치려고 한다면 큰 실수가 될 것” “김정은이 합의를 이뤄내지 않으면 리비아가 끝난 것처럼 끝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펜스 발언에 북한 당국이 험담을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5월 24일 회담 취소를 발표한다. 그는 “슬프게도 최근 성명에서 나타난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을 볼 때, 오랫동안 계획됐던 만남을 갖는 게 부적절하다고 느껴진다”며 “김 위원장이 핵 역량을 얘기하는데 미국의 핵 역량은 매우 크고 강력하다. 이를 절대 사용할 일이 없기를 신(神)에 바란다”고 했다. 볼턴이 대통령을 설득해 회담을 취소시켰지만, 이 결정은 곧 뒤집힌다. 트럼프는 세기적 만남이 가져다줄 언론의 관심을 놓치는 것이 아쉬웠을 것이다. 노련한 김계관이 사과성 성명을 내자, 트럼프는 “북한과 다시 대화 중”이라며 “회담이 예정대로 열릴 수 있다”고 밝혔다.
 
  싱가포르회담 전날 폼페이오 장관은 기자회견을 연 자리에서 “수용 가능한 유일한 결과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고 했다. 다음 날 싱가포르회담 결과는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문구가 사용되는 등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당하였다는 평가가 나오게 된다.
 
  싱가포르회담 이후 말이 가장 크게 바뀐 사람은 트럼프와 폼페이오였다. 김정은을 ‘리틀 로켓 맨’이라 조롱하던 트럼프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폼페이오의 말은 종잡을 수 없었다. 폼페이오는 6월 13일 한국에서 기자들과 만나 “트럼프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나기 전에 북한의 중대한 비핵화(major disarmament) 성과를 달성하기 바란다”고 했다. 6월 25일에는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시간표를 설정할 계획이 없다”며 “2개월이 됐든 6개월이 됐든 시간표를 설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존 입장을 취소했다. 이즈음 볼턴 보좌관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1년 이내에 폐기될 수 있다”고 밝혔다. 국무부 대변인실은 즉각 “북한에 비핵화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런 혼선이 의도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 측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볼턴은 흔들림 없이 원칙 강조
 
  하노이회담이 볼턴의 포석에 따라 결렬된 이후 볼턴의 발언을 재점검해보니, 트럼프와 폼페이오와 달리 그의 발언이 가장 강경하면서도 일관성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 수도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트럼프의 용인하에 이뤄졌을 것이다. 북한은 싱가포르회담 이후 트럼프를 다루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볼턴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싱가포르회담 결과가 볼턴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오자 미국 언론도 볼턴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었다. 볼턴은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이 회담은 결국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싱가포르회담 직후인 2018년 6월 20일, 볼턴은 ‘폭스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와는 반대로 김정은을 압박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김정은이 수십 년 동안 개발해온 핵무기 프로그램과 생화학무기, 탄도미사일을 포기할지에 대해 결정적이고 극적인 선택을 마주하고 있다”고 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김정은에게 이 점을 매우 분명히 했고, 북한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며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이 북한 측과 만나 논의할 것이고, 북한이 이 같은 전략적 결정을 내렸는지 여부를 꽤 빨리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합의문에는 김정은의 비핵화 확약이 실려 있지 않은데도 볼턴은 줄기차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김정은의 약속이라고 밀어붙인다. 합의문의 ‘한반도 비핵화’를 ‘북한의 핵폐기’로 해석하는 것이다.
 
  볼턴은, 2018년 7월 1일 CBS 방송에 출연해 “미국은 북한 핵무기 등의 폐기를 신속하게 달성할 프로그램을 고안해왔다”며 “1년 안에 폐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전략적 결정을 내리고 협조적 태도를 보인다면 매우 빠른 진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2018년 8월 5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선 “1년 내 비핵화 가능성은 김정은이 직접 제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은이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비핵화 약속을 했고, 1년 이내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털어놓았다.
 
  2018년 9월 10일, 볼턴은 워싱턴에서 ‘VOA(Voice of America·미국의 소리)’ 기자와 만나 거듭 1년 내 비핵화의 근거를 밝혔다.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2년 내 비핵화할 수 있다’고 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1년 내에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되물었고, 김정은은 ‘1년 내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와 볼턴을 과소평가한 김정은, 기습당하다
 
  2018년 12월 4일 볼턴 보좌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싱가포르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2차 정상회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북한은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에서 한 약속에 부응하지 않았다”며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이 또 다른 정상회담이 생산적일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는 “나도 김 위원장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싱가포르에서 나눈 일화도 소개했다. 오찬에서 김 위원장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며 “북한으로 돌아가 ‘강경파’들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고 ‘당신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2018년 12월 6일 미국 ‘NPR(National Public Radio)’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은 2차 미북정상회담을 김정은에게 주는 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며 “북한으로부터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의지가 있다는 말을 수십 년 동안 들어왔다”고 했다. 이어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했다. 언론은 볼턴의 이 말을 무게 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결국 그 방향으로 결착이 되었다.
 
  지난 1월 25일 볼턴은 《워싱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또다시 못을 박는다.
 
  “우리가 북한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전략적 결정의 의미 있는 신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를 해제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비핵화를 얻었을 때이다.”
 
  돌이켜보면 이 발언은 2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한 제안의 가장 정확한 예언이었다. 당시는 김정은도 이 발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국내 스캔들로 궁지에 빠진 트럼프가 간절히 회담을 바라고 있으므로 1대 1 담판에서 싱가포르처럼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1월 31일, 협상 실무자인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스티븐 비건은 스탠퍼드대학 연설에서 묘한 표현을 했다. 그는 “‘완전한 비핵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제재를 해제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말한 뒤, “그러나 우리는 ‘상대편이 모든 것을 다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김정은은 이 애매한 말에 대하여 영변 폐쇄와 제재의 실질적 해제를 교환할 수 있다고 해석했을지 모른다.
 
  2월 27일 하노이회담 전야(前夜) 만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빅딜, 즉 북한의 완전한 핵폐기와 제재 해제 및 경제 원조를 제안한다. 여러 번 팔아먹었던 영변 핵시설 폐쇄 카드를 들고나와 실질적 제재 해제와 맞바꾸려던 김정은은 기습을 당한 셈이다. 모든 핵시설과 핵탄두뿐 아니라 세균무기와 독가스까지 폐기하라는 트럼프의 요구에 김정은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던 트럼프가 볼턴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고 느꼈을 때는 너무 늦었다.
 
 
  “지렛대는 김정은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다”
 
  지난 3월 3일 볼턴은 “김정은이 트럼프의 빅딜 제안을 수용하지 않아 합의가 결렬됐다”면서도 “실패로 규정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CBS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과거처럼 쪼개 파는 식의 거래는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3월 5일에는 ‘폭스 비즈니스’ 인터뷰에서 “북한의 비핵화 없이는 제재 해제도 없다”고 했다.  3월 10일에는 ABC 방송에 출연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는 비핵화의 개념으로서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 재처리 역량을 포함한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과 탄도미사일 폐기는 물론, 생화학무기도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제거 개념에 처음부터 포함했다. 이것은 주한미군과 한국, 일본에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이런 내용을 포함한 ‘문서’를 김 위원장에게 건넸다.”
 
  볼턴은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동시적 비핵화’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분명히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 대통령이 저지른 실수를 피하려고 하며, 그중 하나가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조치라는 술책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경제제재는 북한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면서, “지렛대는 북한이 아닌 미국에 있다”고 강조했다.
 
  볼턴의 ‘지렛대’ 발언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뜻인데, 이로써 김정은·문재인·시진핑이 이끌던 한반도의 핵게임 판이 바뀐 것이다. 볼턴은 상황을 작년의 평창 동계올림픽 이전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김정은은 약점과 패를 보임으로써 훨씬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김정은이 다음 수를 생각하는 동안 볼턴도 내심 ‘김정은 정권의 붕괴만이 북핵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란 평소 생각을 전략과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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