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경제관료를 꼽자면 김학렬(金鶴烈)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1923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나 부산상업학교와 원산상업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 주오 대학교를 졸업했다.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 시험에 응시,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등에서 근무했고 1963년 경제기획원 차관에 올랐다. 1966년에는 제21대 재무부장관, 이후 청와대 정무수석, 초대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1969년 46세의 나이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올라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한국개발연구원(KDI) 건립에 앞장섰다. 그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아버지’, ‘제3차 5개년 계획의 할아버지’로 불렸으며 솔직함과 촌철살인의 유머,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에게는 이름에 있는 학(鶴)의 일본어 발음인 ‘쓰루’라는 애칭이 붙어 다녔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를 ‘쓰루’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1972년 1월 지병인 췌장암 치료를 위해 부총리직에서 퇴임했으나 2개월 만인 3월에 사망했다. 향년 49세.

김학렬 전 부총리의 삶을 재조명한 책이 최근 출간됐다. 저자는 金 전 부총리의 아들인 김정수 씨다. 그는 1994년부터 18 년동안 중앙일보에서 경제전문기자로 활동했고 오랫동안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 경제 정책사를 강의했다. 책 제목은 ‘내 아버지의 꿈’이고 부제는 ‘칠순 기자 아들이 전하는 40대 부총리 김학렬 이야기’다. 이 책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김학렬 전 부총리가 공직을 물러날 무렵 일어난 이른바 ‘국민이 까불면 나라가 망한다’ 에피소드다.
1971년 4월에는 대선이, 5월에는 총선이 치러졌다. 선거 때에는 선거 인플레이션 심리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선거가 끝난 1971년 여름부터 물가 상승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부는 선거 전 대폭적인 달러 환율 인상과 유가 등을 인상하는 정책을 폈는데 선거가 끝나면서 물가상승으로 이어지게 됐다. 물가가 빠르게 오르고 국제수지 적자도 심해졌다. 언론은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정부가 언론에 다른 큰 뉴스를 흘리는 이른바 ‘물타기’ 전략, 혹은 정부 통계로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 됐다.
당시 김학렬은 물가상승 압력을 줄이기 위해서는 나라 전체, 특히 일반 국민이 소비를 절약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과소비에 대한 강박감으로 인해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실언(失言)’을 하게 됐다.
9월 18일 대구에서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 시장·군수회의가 열렸다. 3차 계획과 새마을운동 등에 관해 박정희와 김학렬이 직접 나서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물가가 올랐다고 하지만 국민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이 오른 것은 아니다. (시장 및 군수들이 국민에게) 물가 안정 시책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하고 참아줘야 할 것은 참아달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마이크를 잡은 '쓰루'는 정부에 대한 비판에 반박하는 말을 이어갔다. 그는 ‘3차 계획을 수정하라’는 지적과 관련,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세계 3위이며 수출증가율은 세계 1위다. 일부 인사들이 무식하여 이를 고의로 비난하고 있다. 3차 계획을 공부도 하지 않고 수정하라고 한다”고 했다.
그가 이후 뱉은 말이 문제가 됐다. 그는 국민소득과 씀씀이 등을 언급한 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틴베르헌 교수가 후진국의 경제개발에 필요한 5개 요건 중 하나로 국민의 인내를 강조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몰라도, 이제 국민소득이 200달러를 넘었다고 해서 국민들이 까불면 경제성장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언론과 야당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야당은 ‘오만한 박정희 정권의 생리가 그대로 드러난 망언’이라고 비판하며 쓰루에 대한 해임 건의안 제출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김 장관의 발언은 파탄적인 오늘의 경제위기를 조성한 직접적 책임 장관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중대 망언이며 전 국민과 야당에 대한 모독이다. 정부는 김 장관의 이 같은 망언을 즉각 취소하고 국민과 야당에 정중히 사과하라”고 했다. 여당 대변인도 “설령 국민이 틀린 이야기를 해도 이를 경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까불면 망한다’ 사건으로 인해 언론은 쓰루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 책의 저자인 김정수씨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바로 옆에서 직접 들은 박통은 그 망언을 그렇게 중대한 실언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는 평소 쓰루의 강한 성격과 입버릇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까불면 망한다’ 발언 이틀 후인 9월 20일 쓰루는 국회 본회의에 불려나갔다. 그는 “내가 말한 국민이란 말은 우리 국민을 특정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 국민이건 그렇다는 일반론을 이야기한 것”이라며 “다소 경제가 발전했다고 해서 국민이 사치하고 방심하면 안 된다는 틴베르헌 교수의 개발론을 인용한 것이 물의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한 나라의 부총리나 되는 사람이 까분다는 저속한 용어를 사용했다는 자체가 소양 부족의 소치다”라고 해명했다.
그가 이어서 한 발언 역시 유명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는 까분다는 단어는 안 쓰기로 결심했다.” 사과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로 답변을 한 것인데 여야(與野) 할 것 없이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한바탕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까분다’ 사건은 일단락된 듯 했지만 이후에도 만평이나 가십에 빈정거리는 소재로 계속 등장했다. 이 사건은 결국, 얼마 뒤 야당이 국회에 제출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권, 오치성 내무장관, 신직수 법무장관 등 세 명의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의 한 빌미가 됐다.
해임 건의안은 9월 말에 제출됐다. 쓰루에 대한 해임 건의의 핵심 명분은 ‘긴축에 의한 불경기와 물가 불안’이었다. 쓰루에 대한 해임안은 권중돈 의원 등 88인이 공동 제안했다. 이들은 ‘35억여 달러에 이르는 외자 도입으로 빚더미 위에 건설한 차관 업체의 부실 도산, 국민 담세력(세금 부담 능력)의 한계점을 초과한 조세행정, 화폐고의 팽창,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완전 실패, 양대 선거에서 막대한 정치자금 살포 등 인플레 요인으로 국민 경제는 파탄 일로로 치닫게 됐고, 천정부지로 급등하는 물가고는 국민의 생계를 도탄에 빠트리게 하는, 사상 유례 없는 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계획성 없는 안일한 정책에만 급급하고 무모한 경제정책만 세워온 것’이 해임 사유라고 했다.
여당 국회의원들에게는 세 명의 장관 모두에 대한 해임안에 반대표를 던지라는 당론이 하달됐다. 불신임에 관한 첫 표결은 10월 2일 열렸는데 대상은 오치성 내무장관이었다. 당 방침을 어기고 김성곤 등 소위 ‘공화당 4인방’이 당내 동조 세력을 선동, 오 장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쓰루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옆자리에 같이 있었다. 그 다음 표결 대상인 쓰루와 신직수 법무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은 부결됐다. 부결은 됐으나 각료 해임안에 포함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쓰루 부총리의 권위에 큰 흠집이 난 것은 분명했다.
얼마 뒤인 1971년 11월 쓰루의 혜화동 집 2층의 서재에 도둑이 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총리 사저는 통행금지 시간에도 동네 파출소에서 경계근무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정수씨는 “당시 통행금지 시간에 시내를 오갈 수 있는 집단은 중앙정보부뿐이었다”고 했다. 김정수 씨는 이 사건은 이후락 정보부장 등의 ‘정치자금 4인방’이 김학렬 부총리를 공격하기 위한 사건이었다고 했다. 이후락은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부터 정치자금 모금에서 큰 역할을 해냈고 집권 세력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1969년 10월 주일(駐日)대사로 나가 있는 사이 쓰루가 외자 도입 절차를 투명화하여 정치자금 4인방 체제가 무너졌다고 했다. 김정수 씨는 “1971년 선거를 위해 중앙정보부장으로 컴백한 이 부장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권력 구조의 변화였다. 그래서 쓰루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절도 사건을 벌였다는 게 쓰루와 그 주변 사람들의 분석이었다”고 했다. 이후 ‘쓰루의 집을 중정이 뒤졌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쓰루의 권위는 추락하게 됐다.
병세가 심해지고 여러 일로 충격을 받은 김학렬은 11월 대통령에게 ‘이제는 그만 쉬어야겠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병세를 알지 못했고 저간의 일들 때문에 쓰루가 칭병(稱病)하여 사임하려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계속 출근을 하던 그는 11월 중순 병세가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국회에서도 김학렬의 병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국회는 ‘타이밍을 맞춘 신병(身病)’이라고 빈정거렸다. 예산 심의가 이뤄지는 시기였는데 김학렬 부총리가 타이밍에 맞춰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여당은 쓰루의 출석 요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국회 예산 통과 법정기일을 하루 앞둔 12월 1일 밤까지도 야당인 신민당 강근호 의원은 ‘김학렬 장관이 앰뷸런스 타고 오지 않는 한 발언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입원중이던 쓰루는 12월 2일 국회에 출석해 예산과 관련해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예산안이 통과됐다. 이날이 그가 국회의 출석한 마지막 날이었다. 퇴임하기 한 달 전, 유명을 달리하기 석 달 전이었다.
12월 말 쓰루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발 물러나게 해달라”고 강권했다. 부총리를 계속하라고 권하던 박정희 대통령도 그의 완연한 병세에 더는 부총리 속행을 요구하지 못했다. 1972년 1월 4일 부총리가 태완선 건설부 장관으로 교체됐다. 석별(惜別)하는 자리에서 박정희는 “집에서 요양하면서 건강을 되찾아 다시 일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3월 21일 오전 10시 중앙청대회의실에서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회의를 주재하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 전 부총리 별세’라는 메모를 전했다. 무표정이던 박정희는 화장실에 가는 듯 잠시 자리를 떴다고 한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치고는 너무 긴 시간이 흘러,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이 회의실 뒤편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 나섰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그가 찾은 박정희는 소리 없는 통곡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