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간첩 조르게 이야기


스탈린의 불안

스탈린은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세계정세를 보고 그런 관점에서 전략을 구사하였다. 즉, 자본주의 국가들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안전과 國益(국익)을 도모하는 방식이었다. 1939년 8월 스탈린은 이념적으론 불구대천의 원수인 히틀러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제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열었다. 스탈린은 독일의 악몽인 兩面(양면)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해주었다. 소련과 싸울 필요가 없게 된 독일은 폴란드를 무너뜨린 뒤 프랑스와 영국을 칠 것이고, 제국주의 세력이 서로 싸우는 사이 소련은 군비증강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고 스탈린은 계산하였다. 스탈린은 1942년에 가면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히틀러는 1941년을 결전의 해로 잡았다.

소련도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兩面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41년 4월13일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帝政(제정) 러시아가 12년 뒤에 무너진 것을 기억하는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공포감을 가졌다. 일본 육군도 소련을 主敵(주적)으로 삼고 만주에 괴뢰 정권을 세운 뒤 여기에 막강한 關東軍(관동군)을 배치하였다. 소련도 약 50만 명의 병력을 극동에 깔아놓고, 관동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나치 독일이 1941년 6월22일 소련을 기습 침공하자 스탈린은 일본이 이 기회를 이용, 극동에서 소련의 배후를 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對日(대일)첩보 능력이 결정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소련군 정보기관 GRU는 독일 기자로 위장한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를 일본에 박아놓고 있었다. 그는 최고급 정보망을 구축하였다. 일본주재 독일 대사를 친구처럼 사귀었고, 고노에 총리의 측근을 포섭하였다. 조르게는 일본주재 독일 무관으로부터 독일의 소련 침공 날짜를 알아내 모스크바에 보고하였으나 스탈린은 이를 묵살하였다.

北進이냐 南進이냐

조르게가 세계사를 바꾸는 데 영향을 끼친 전략 첩보는 1941년 9월14일 보고한 것이다. 그는 일본의 국가지도부로 침투한 정보원(일본인)을 통하여 최고급 정보를 입수, 일본군의 향후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까지는 일본군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남방으로 향할 것이라고 보고한 것이다.
스탈린은 이 정보는 무시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모스크바를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외국에선 소련은 이미 끝장났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였다. 開戰(개전) 6개월 사이 200만 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 지휘부인 대본영에선 이 기회를 이용하여 宿敵(숙적) 소련을 칠 것인가 동남아로 나갈 것인가, 즉 北進(북진)이냐 南進(남진)이냐의 격론이 벌어졌다. 육군성, 해군, 작전과장은 “이 기회에 북방의 부담을 줄이고 南進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육군의 작전부장은 “다년간의 현안인 북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北進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대본영 陸海軍部(육해군부)는 獨蘇(독소)전쟁이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지침을 마련, 御殿(어전)회의를 통하여 천황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다. 만주의 병력을 증강,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면서 남방작전도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대본영은 남방작전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결론에 이르렀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점령작전을 위해서는 인도지나 반도의 남쪽을 확보하고 항공기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인도지나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 일종의 괴뢰로 세운 비시 정부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었다. 비시 정부는 독일의 압력을 받아 일본군의 進駐(진주)를 허용하였다. 1941년 7월 말 일본 제25군이 월남지역에 無血(무혈) 상륙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영국, 네덜란드는 일본의 資産(자산)동결 및 對日 석유 禁輸(금수)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일본의 석유재고량은 1년분 남짓이었다. 독일을 믿고 달렸던 일본은 벼랑으로 몰렸다. 일본은, 對美(대미) 협상을 통하여 難局(난국)을 타개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일본 고노에 총리는 미국측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지나 이외의 지역으로는 진출하지 않는다, 필리핀의 독립을 존중한다, 미국은 일본과 정상적인 무역관계를 회복시킨다는 3개항을 제의하였다.

일본은 9월6일 御殿회의를 통하여 “10월까지 우리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開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0월2일 미국은 일본에 회답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완전 撤兵(철병), 삼국동맹의 사실상 무효화 요구였다. 대본영은 1941년 10월 말까지 작전계획을 완성하였다. 중국에서 철병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엔 일본이 너무 나가 있었다. 일본 지도부는 “경제봉쇄를 당하여 미국에 굴복하느니 스스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難局(난국) 타개의 핵심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油田(유전)지대를 점령, 석유자원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은 그 본질이 석유전쟁이었다.

조르게의 정보는 40개 사단 가치?

12월에 들어서면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교에 도착, 멀리 크렘린 궁의 첨탑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스탈린이 이때 마지막으로 전선에 투입한 예비병력이 극동에서 불러들인 ‘시베리아 부대’였다. 스탈린은 조르게의 보고를 믿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배치하였던 50만 병력 중 40만 명을 빼내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 戰勢(전세)를 역전시켰다. 소련군은 酷寒(혹한)을 활용한 반격작전으로 전환, 독일군을 밀어냈다. 독일군의 常勝(상승) 신화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戰局(전국)의 주도권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조르게의 결정적 첩보는 40만 명의 병력만큼 가치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조르게는 1941년 10월1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은 소련에 잡힌 일본인 간첩과 교환하려 했으나 소련은 조르게(국적은 독일인)가 소련과 무관하다면서 처형되도록 방치하였다. 조르게를 영웅으로 인정한 것은 흐루시초프였다.
소련 정보기관은 조르게를 통한 對日전략 정보 수집에 주력하던 시기에 美 재무부에 박아놓은 고급 간첩 화이트를 통하여 美日교섭에도 개입, 일본이 미국과 전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 그것이 ‘눈 공작’이다.

開戰이냐, 평화냐

고노에 내각이 美日(미일) 교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辭職(사직)하고 일본 陸軍相 (육군상) 도조 히데키 대장이 1941년 10월18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天皇은 도조에게 “9월6일 御前(어전)회의 결정에 구애받지 말고 內外 정세를 재검토하여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정부와 대본영은 11월2일 “武力(무력)발동 시기를 12월 상순으로 정하고 마지막 對美(대미)교섭을 시도하며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제휴를 강화한다”고 결정하였다. 그 사흘 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3시 넘어 까지 진행된 御殿(어전)회의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계획을 통과시키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이 회의는 또 對美교섭 때 일본이 제시할 甲, 乙 안을 확정했다. 甲案(갑안)은 중국과 인도지나 반도 철군안을 제시한 뒤 조건을 붙여 시기를 늦추자는 내용이고, 乙案(을안)은 갑안을 제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꺼낼 안이었다. 내용은 중국 철군 문제를 일시적으로 동결시키고 美日이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잠정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미국이 두 안을 거부하면 개전하기로 했다.
11월7일부터 주미일본 대사와 코델 헐 국무장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외교 電文(전문)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헐 장관은 일본의 최종 카드가 乙案(을안)이란 사실을 알았으므로 甲案은 상대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측 乙案의 對案(대안)으로서 잠정협정안 작성에 나섰다. 일본군이 인도지나에서 부분적으로 철수하면 對日(대일)석유수출 금지 조치를 일부 해제한다는 내용이 들어가는 등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려는 모습이었다. 11월10일 노무라 대사를 만난 루스벨트 대통령도 잠정협정을 맺을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 국면에서 재무부의 소련 간첩 화이트가 등장한다.

소련 간첩이 작성한 문서가 對日제안의 原型

헐 국무장관이 對日(대일) 제안 내용을 작성하고 있을 때인 11월17일 화이트는 모겐소 재무장관에게 ‘일본과의 긴장을 제거하고, 독일의 패배를 확실히 하는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란 제목의 긴 메모를 전달하였다. 모겐소는 이를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장관에게 전달하였다.
이 메모에서 화이트는 중국으로부터 일본군 철수, 장개석 국민당 정권을 제외한 다른 중국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일본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메모는 국무부와 육군성 등이 협의, 對日 제안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기초 문서가 되었다. 헨리 스팀슨 육군 장관은 “너무 과격한 내용이라 일본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화이트는 자신의 강경한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親蘇的(친소적) 인사를 동원, 협조를 요청하는 등 열정적으로 소련의 이익을 위하여 뛰었다.
헐 장관은 타협적인 잠정 협정안과 강경한 포괄적 해결안 두 개를 준비하였는데, 後者(후자)에 화이트의 주장(즉, 모겐소의 주장)이 거의 반영되었다. 포괄적 해결안을 역사학자들은 ‘헐 노트’라고 부르는데 모겐소案이 그 原型(원형)이라고 본다.
11월26일 루스벨트는 잠정안을 버리고 강경한 포괄적 해결안, 즉 ‘헐 노트’를 일본에 건네도록 결정한다. 이런 급선회는 중국 상해로부터 들어온 정보 때문이었다. 육군장관 스팀슨은 11월25일 낮 <상해에 대규모 일본군 집결, 30~50척의 수송선에 타고 출항>이란 보고를 받았다. 다음 날 이 정보보고를 받은 루스벨트는 “일본이 철군 교섭을 하면서 원정군을 인도지나에 보내는 것은 배신행위다”고 격노, ‘헐 노트’를 일본 대사에게 수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날 저녁 헐 노트를 통보 받은 일본 특파 대사 쿠루수는 “일본 정부가 이 제안을 읽으면 교섭을 중단할 것이다”고 반응하였다.

진주만 공격

일본 대표들은 본국으로부터 11월29일까지는 어떤 경우에도 회담을 끝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고, 미국도 암호해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즉 11월29일 이후엔 일본이 미국을 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단, 진주만 공격은 예상하지 못하였다). 헐 장관은 11월27일 스팀슨 육군장관이 전화를 걸어오자 “나는 이 문제에서 손을 뗐다. 문제는 이제 당신과 녹스(해군장관)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말하였다.
‘헐 노트’를 읽은 도조 일본 수상은 “이제 남은 길은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전쟁밖에 없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도조는 ‘헐 노트’를 최후통첩으로 이해하였다. 27일 일본 대본영의 최고 지도기구인 정부연락회의는 對美교섭의 불성립을 확인하였다. 12월1일 일본은 御前(어전)회의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공격을 승인하였다. 다음 날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진주만을 향하여 접근 중이던 항공모함 중심의 기동부대에 12월8일(일본 시간)을 기하여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1년 12월7일 아침 8시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366대의 전투기는 진주만의 해군기지를 공습, 188대의 미군 전투기를 활주로에서 파괴하고, 네 척의 戰艦(전함)을 격침시키고 다른 네 척의 전함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11척의 다른 군함도 격침되거나 운항 불가능 상태가 되었다. 2330명의 미군이 戰死(전사)하였다. 그중 1177명은 격침된 전함 아리조나 호에 타고 있던 水兵(수병)들이었다.

소련의 색깔이 입혀진 ‘헐 노트’

진주만 공습을 전해들은 영국 수상 처칠은 “이보다 더한 행운이 대영제국을 찾아온 적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나는 침대에 들어서 구제받아 감사하는 자의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고 회고했다. 스탈린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소련 정보기관 NKVD의 미국과장이던 비탈리 파블로프는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는 물론 화이트를 만나 빌의 부탁을 전한 그 정보원이었다.
벤 스틸은 《브레턴우즈의 전투》에서 이렇게 요약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결정은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의 연쇄적 축적이 만든 결과였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개별적 사건이나, 어느 개별적 행동이 촉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장 근접한 요인은, 파블로프와 그의 가장 중요한 미국 내 접선자 해리 덱스터 화이트 사이에서 생긴 흥미로운 커넥션이었다.>
《헐 노트를 쓴 남자》란 책을 쓴 교토산업대학의 스도 신지(須藤眞志) 교수는 이렇게 평하였다.
<모겐소 안을 쓴 화이트는 유대인으로서 강렬한 反파시스트, 親蘇派(친소파)였다. 화이트에게 소련의 공작원이 접근하여 日美교섭에서 일본을 도발하는 제안을 미국이 하도록 했다. 獨蘇戰(독소전)을 전개하던 소련은 미국의 참전을 원했다. 헐 노트는 국무부가 만들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소련의 색깔이 입혀져 있었다.>
1941년 12월11일 히틀러는 일본 및 이탈리아와 맺은 3국협정에 따라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은 美蘇英(미소영)을 동시에 敵으로 돌리는 전략적 실책을 감행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이 일으킨 전쟁에 참전, 자유세계를 지키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으나 미국의 反戰(반전) 여론이 강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 공략만 하였거나 독일이 對美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참전을 결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독일의 對美 선전포고는 루스벨트의 고민을 한꺼번에 해결하였다. 거대한 미국의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이 연합군의 편에 서게 됨으로써 주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패망은 시간문제였다.
美日 간 태평양 전쟁의 개막으로 가장 큰 得을 본 것은 소련이다. 일본이 소련의 배후를 치는 걱정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의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아 독일군을 몰아내고, 동유럽을 공산화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 만주를 침공, 38도선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한반도 분단과 한국의 독립(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 약속)은 진주만 공격과 무관하지 않고, 그런 점에서 소련 간첩 화이트의 역할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참전을 불러 戰後(전후)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눈 공작’은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첩보작전이었을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간첩은 화이트처럼 자신의 소신에 따라 자발적으로 국가 정책을 갖다 바치는 자이다. 한국의 화이트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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