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6·25전쟁 당시 고(故) 백선엽 장군의 공적을 폄하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김원웅 광복회장 발언과 관련 “고인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분”이라며 정면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국방부는 25일 미래통합당 김도읍 의원실에 제출한 서면 답변서에서 “故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비롯한 다수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켰다. (고인은) 국군 최초 4성 장군으로 육군참모총장을 2회 역임하면서 군과 한미(韓美) 동맹의 발전에 공헌한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8월17일 KBS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6·25전쟁이 나자 백 장군은 육군 1사단에 안 나타났는데 그것만 가지고도 사형감”이라는 거짓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26일 김원웅 광복회장의 발언은 거짓과 허위라고 입장을 밝혔다. 미래통합당 하태경 의원실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백 장군은 6·25전쟁 발발 열흘 전인 1950년 6월14일 시흥 보병학교 고급지휘관 교육에 참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개전(開戰)초기 1사단장 대리는 최경록 대리였다는 것이다.
백 장군은 인민군이 남침한 6월25일 오전 육군본부에 출두하여 원대복귀를 확인한 뒤 사단장 대리인 최경록 대령과 함께 수색의 사단사령부로 복귀했다. 당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84호’에 따라 저항선을 임진강으로 설정하고 방어전투를 지시했고, 남침 이튿날인 6월26일 최후저항선인 통일천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조치했다는 것이 군사편찬연구소의 공식 확인내용이다.
김원웅 회장은 또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백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이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낸 것에 대해서도 “(북한군의) 핵심적인 전력은 미군이 전부 다 포(砲)로 쏴서 죽였고, (백 장군은) 그냥 진군을 한 것”이라고 폄하했는데, 역시 사실과 다르다.
다부동 전투 당시 백 장군은 공포에 질린 병사들을 향해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쏘라”며 선두에서 돌격했고,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다부동 전투는 수암산과 유학산 등 주요 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면서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하며 “다부동 전투로 인해 대구·부산 축선의 방어선을 견고히 할 수 있었다. (1사단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부산까지 밀려 내려오려는 북한군의 의도를 좌절시켰다”고 반박했다.
백 장군의 타계에 미국 백악관(NSC)과 국무부는 “한국은 백선엽 장군같은 영웅 덕분에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 “(백 장군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라며 이례적으로 애도 성명을 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도 고인의 영결식에 참석해 “백선엽 장군께서는 한국전쟁 지상 전투의 가장 절망적이고 암울한 순간에서 유엔군 전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군을 이끌었다”고 추도했다.
국방부는 김원웅 회장과 일부 여당 의원의 백 장군 현충원 파묘 주장에 대해서는 “백 장군은 무공훈장을 수여받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 해당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파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고인의 공적(功績)과 현행 법령을 고려한다면 현충원 안장은 타당하다”고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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